#1.
“지식인과 지성인은 분명히 다른 개념이다.”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던가,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식인이 단순히 지식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을 칭하는 단어라면, 지성인은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에 걸맞은 인격을 가지고 지식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쉽게 감동하고 쉽게 흥분하던 그 신입생은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그 말에 수긍했다. 하긴 ‘대학생은 지성인’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쓰이던 시절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제 그 때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그 단어들을 사전에서 뒤적거려 본다(네이버 국어사전 참조).
지성인 [知性人]
[명사]
1 지성을 지닌 사람.
지성인의 면모를 갖추다
대학 교육을 받은 지성인이면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에티켓쯤 지니란다.≪이청준, 조율사≫
2 <철학>=호모 사피엔스.
지식인 [知識人]
[명사]
일정한 수준의 지식과 교양을 갖춘 사람. 또는 지식층에 속하는 사람.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 전문가가 좀처럼 지식인으로 발전하지를 못하고 언제까지나 전문가의 그것에 머물러 버리는 것이 한 특징이라고 그는 말한다.≪이청준, 조율사≫
지식이 인격과 단절될 때 그 지식인은 사이비요 위선자가 되고 만다.≪법정, 무소유≫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건대, 지성인과 지식인의 개념 사이에는 그처럼 심오한 간극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데도 10년 전의 대학 신입생이 그 간극을 쉽사리 인정했던 것은 그가 순진무구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시대가 아직 ‘쿨’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어쨌거나 이제 시대는 더 이상 지성인과 지식인의 차이를 언급하지 않는다. 단지 지식인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쿡쿡 찔러볼 뿐이다. 이 현상은 ‘지식인’의 개념 혹은 위상이 어떤 식으로든 변화했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르겠다.
책의 제목이 ‘섹시’해야 책이 어느 정도 팔린다는 건 이제 기정사실에 속한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다시, 지식인을 묻는다’ 따위의 제목보다는 ‘지식인의 죽음’이라고 선언하고 들어가는 것이 더 ‘섹시’하다(실제로 이 책/기획의 최초 제목은 ‘우리시대 지식인의 초상(肖像)’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지식인의 죽음’ 앞에 ‘민주화 20년’이라는 말이 붙어있다는 점이다. 민주화하면 생각나는 인물들이 있다. 물론 권력에 항거했던 ‘민중’들이 생각날 수도 있겠지만, 민중은 얼굴도 이름도 없다. 때문에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인물들은 ‘지식인’들이다.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저항적 지식인들. 그런데 민주화가 ‘된’ 지 20년이 지나, 정작 그것을 앞장서서 추구했던 지식인들이 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일까?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이라는 책에 대한 나의 리뷰는, 때문에 매우 근본적인 곳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지식인은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가라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2.
이 책에도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지식인 위기론’에 관련된 질문을 받은 ‘지식인들은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의로 답변을 시작했다’(71쪽). 그들(그러니까 경향신문사에서 지식인이라고 찾아갔던 이들)이 위기에 처했다고 평한 지식인상은 ‘인텔리겐치아형 지식인’이었다. 인텔리겐치아는 러시아어 intelligentsia에서 유래한 용어로 그 원래 뜻은 말 그대로 ‘지식인’이다. 하지만 인텔리겐치아는 단순히 지식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성향을 내포한 개념이었다. 사회에 비판적이고 혁명적 성향을 지닌 인물들을 인텔리겐치아라고 칭했던 것이다(두산백과사전 참조).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지식인들이 이런 개념으로서 지식인의 죽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뒤집어 생각하면 지식인의 삶 혹은 ‘살아있는 지식인’이 어떤 개념인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접근하고 있는 지식인의 ‘생명’은 사회순응이 아니라 사회비판에 있는 셈이다.
이 책에서 ‘지식인’이라는 단어를 제외하면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는 바로 ‘권력’이다. 목차만 찬찬히 뜯어봐도 그러하다. ‘정치권력과 지식인’, ‘경제권력과 지식인’, ‘문화권력과 지식인’…. 책의 전체 내용을 한 마디로 무리해서 요약하자면, 지식인과 권력, 이 두 단어를 사용하면 될 것 같다. ‘지식인은 권력에 종속되어 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자. 역사상 어느 시대 어느 장소이든 간에, 지식인이 권력에 종속되지 않았던 시대가 있던가? ‘펜은 칼보다 강하다’지만, 대부분의 펜은 칼에 맞서지 않았다. 오히려 칼의 첨병이 되어, 칼이 묻힌 피를 닦아주거나 이제는 자리를 잡은 칼이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되도록 잉크를 함부로 튀기고 다녔다. 그것은 어찌 보면 ‘펜’의 숙명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런데도 여전히 지식인에 관련된 문제제기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지식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그렇다면 권력에게 있다는 말인가?
사람이 죽는 사건이 발생하면 그 수사는 누가 그를 죽였는가라는 ‘책임론’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은 죽은 이가 타살‘당했는가’ 아니면 자살‘했는가’하는 지점이다. 자살과 타살의 판단이 선 이후에야 살인 사건의 범인을 찾기 시작한다. 그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그런데 유독 지식인의 죽음을 논할 때는 그 죽음이 타살인가 자살인가를 묻지 않는다. 지식인은 힘이 없으므로 타살당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인 것일까? 그러나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마감하면 또 다른 영생이 열릴 경우, 우리는 자살을 의심해야만 한다. 하지만 과연, 이것을 자살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시 권력으로 돌아가 보자. 정치권력/경제권력/문화권력에 ‘굴복’하거나 ‘종속’된 지식인이 권력을 ‘잃었는가?’ 내가 보기에 그들은 권력을 잃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력을 얻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식인임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지식인계에서 권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 자들 중 그 누구도 자신 스스로를 대중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노동’을 먹고 살기 위한 다른 ‘노동’과 동급으로 놓지도 않을 것이다. 여전히 그들은 ‘교수님’이며 ‘박사님’이고 ‘선생님’이다. 이제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지식인은 권력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지식인에게 종속되어 있다’라고. 배운 자가 아니면 권력을 얻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것이 경제적 권력이든 정치적 권력이든 문화적 권력이든 간에. 권력을 얻기 위해 혹은 권력을 유지/세습하기 위해 간판으로 걸 학위를 받아내고 자식을 유학보내고. 이런 현상이 지식인이 권력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인가? 천만에.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권력이 지식인에게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지식인’을 추구할 뿐이다.
#3.
지식인은 죽지 않았다. 지식인의 죽음이라니, 가당치도 않다. 그들은 더욱 강성하게 살아있다. ‘잡초와 같은 생명력’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인가? 민중? 맞다. 흔히들 잡초를 민중에 비유하고는 한다. 그러나 그 생명력은 민중의 것이 아니다. 그 끈질긴 생명력의 주인은 민중이 아니라 먹물들의 것이다. 그들은 시대의 변화를 제일 빨리 감지하고는 그것에 적응할 준비를 시작하고는 했다. 변화가 판을 치는 세상이라지만, 그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지식인들의 능력은 더 힘을 발휘하고, 그들의 ‘세습’은 더욱 견고해진다.
그런데도 지식인의 죽음이 언급되는 것은, 지식인들을 만족시켜줄 그 무엇이 약해진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그들을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는 그것. 존경심. 그렇다. 이제 그 누구도 지식인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젠 더 이상 ‘이상적 지식인’(그러니까 저 10년 전의 대학 신입생이 바라보았던 ‘지성인’)을 믿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당연한데도 지식인들은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도 관심 없는 지식인의 생사를 논하고 있을 수밖에. 그러므로 이처럼 웃긴 기획이 또 있을 수 있겠는가. 살아있는 자들이 자신의 죽음을 논하고 있다니. 마치 자신은 죽었다고 여겨지는 ‘지식인’이 아닌 것처럼.
그럼에도 이 기획은 웃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사람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먹물들이 더 ‘쿨’해질 징조가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 젊은 지식인들은 굳이 ‘존경’을 원하지 않는다. 그저 먹고 살 수만 있으면, 모든 것에 대한 변명이 가능해질 것만 같다. 그것만이 지식인의 전부가 아니라고 이야기하기엔, 되돌아올 답변이 너무나도 차갑고도 단순명료하다. ‘그럼 난 뭐 먹고 살라고?’ 그러니 한 때 ‘쿨가이’였던 푸코의 말도 이제 우리 젊은 지식인들에게는 너무나 무겁게 느껴진다.
“지식인의 역할은 다른 이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주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난 두 세기가 경과하는 동안 지식인들이 공식화해 왔던 모든 예측과 전망, 지령, 그리고 프로그램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지식인의 역할은 다른 이들의 정치적 의지를 만들어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지식인의 역할은, 그 혹은 그녀 자신의 영역에서 분석을 수행하면서, 자명해 보이는 원리들에 대해서 새롭게 질문하고, 행위와 사고의 방식 및 습성을 흔들어 놓으며, 상투적인 믿음을 일소하고, 규칙과 제도들을 새롭게 파악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지식인들이]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행할 것을 요구받는 곳에서, 정치적 의지의 형성에 참여하는 문제입니다.” (푸코 · 둣치오 뜨롬바도리, 『푸코의 맑스』, 이승철 옮김, 갈무리, 2004, 26쪽. )
그렇다고 해서 젊은 지식인들이 권력에 소탈한 도인들인가?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존경을 바라지 않지만 그들 또한 지식인이고 싶어 한다. 아니 지식인이라는 애매한 칭호가 결코 ‘직업’이 될 수 없음을 누구보다도 냉정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러니 ‘어떤 지식인도 지식인인 채로 대중이 되고자 하지는 않았다’라는 고병권의 지적(219쪽)은, 또 다른 의미에서 촌철살인인 셈이다.
#4.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 누구도 우리를 먹여살려주지는 않으니 이제 지식을 ‘파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일까? 어차피 먹물들의 자아비판인만큼, 솔직하게 '까놓고' 얘기해보자. 그래,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라고 하니 지식을 파는 행위를 무슨 버러지 보듯이 하지는 말자. 우린 ‘아마추어’가 아니니까. 이제 ‘존경’따위도 그다지 원하지 않는 것 같으니 그런 허영에 넘치는 것도 얘기하지 말자(아직까지 존경에 미련을 둔 촌스러운 사람이라면, 존경에 걸맞는 지식과 실천을 보여 달라. 무슨 긴 말이 필요한가).
어떤 물건을 팔았는데 그것이 만든 이가 광고한 것만큼의 품질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소비자에게 보상을 해줘야 한다. 품질만 보장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었다면 배상을 해줘야 한다. 아무리 신자유주의 시대라지만, 이런 상황에서 배상/보상을 하지 않을 자유를 외칠 정도는 아니니까.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상도(商道)를 지키지 않는 집단이 있다. 그게 바로 지식인이다. 대운하가 말도 안 된다고 자신의 권위에 기대어 주장하다가 순식간에 말을 바꾼다면, 자신이 앞서 기댔던 권위를 포기해야 한다. 모든 것을 민영화해야한다고 강력 주장하는 교수라면, 자신이 속해있는 ‘국립대’부터 민영화하고 ‘고객’인 학생 앞에서 머리 숙여야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직까지도 이 먹물들은 자신들이 시장논리와는 상관이 없는 ‘선비’인 줄 아는 모양이다.
네이버 지식in에서 한 네티즌이 잘못된 답변을 내놓았다고 그에게 보상을 요구할 수는 없다. 그의 답변은 ‘무료’였으니까. 하지만 대학 교수는 무보수 명예직종이 아니다. 하다못해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하더라도 그에게 지불되는 출연료의 일부에는 시청자가 납부하는 시청료가 들어가 있다. 그러니 이제 지식인들은, 그들이 결코 속한 적이 없는 ‘대중’들이 요구하는 ‘그 무엇’에 대해 쿨한 척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남보다 조금 더 배웠다는 이유로 생계를 보장 받는 사람이라면, 지식인이 아닌 척 쿨해서도 안될 것이다. 만약 자신의 변명대로 자신이 지식인이 아니라면, 그의 생계는 보장될 필요가 없다. 너무 먹고 사는 문제, 돈이 오고 가는 문제로만 ‘지식인의 죽음’을 논하고 있다고? 앞서서 얘기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고상한 지식인에 걸맞는 지식과 실천을 보여달라고. 무슨 긴 말이 필요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