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파농 : 혁명가와 페미니즘
T. 데니언 샤플리-화이팅 지음, 우제원 옮김 / 인간사랑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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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은 3분의 1 정도 읽다가 나중에 읽기로;; 했고, 프란츠 파농은 이 책으로 마무리.

프란츠 파농의 저작은 아니고,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파농을 다룬 책이다.

미국 페미니스트들이 파농을 강하게 비판했던 모양. 그래서 저자는 이 현상에 대한 고찰을 시도한다.

 

파농의 저작, 특히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 동성애자들에 대한 혐오가 명백히 드러난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대로 '파농의 암시적인 동성애 혐오증이 여성 혐오증으로 번역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알제리 혁명 5년'에 대해서도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적인 견해가 이어진다.

모니끄 가당을 비롯한 많은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점은 여성들이 혁명 즉 민족이념의 덫에 걸려들었다는 것이다.

여성의 혁명 참여가 반드시 여성의 권리를 가져오지 않았고 해방 전쟁 이후 여성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런 진보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파농은 '민족의식의 함정'에 비판적이었다.

그가 꿈꾼 것은 민족의식을 '통하여' 초국가주의나 사회민주주의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가 말하듯이, '여성들이 자유 알제리를 위해 싸우고, 죽고, 또 헌신했다는 사실은 정당하게 기록돼야 한다'.

파농은 그 사실을 기록한 것이고 그 사실 속에서 초국가주의와 사회민주주의로 나가는 빛을 본 것이었다.

 

파농이 가장 심하게 공격을 받는 부분은 바로 마요뜨 카페시아를 맹렬히 공격했던 부분이다.

(이것을 이유로 파농을 공격했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좀 민망했다. -_-;;)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파농은 카페시아의 작품 '나는 마르띠니끄인이다'와 '하얀 흑인 여자'를 분석했는데,

이 자전적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마르띠니끄 여성이 가진 피부색에 대한 환상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직설적으로 서술했다.

이 부분을 이유로 파농이 '여성 혐오주의자'로 낙인찍혔던 것이다.

 

그냥 생각해봐도 이 비난은 참 웃기다. 내가 박근혜를 비난하면 여성 혐오주의자가 되는 것인가? 푸훗.

박근혜나 나경원을 '여자'로 칭할 때, 그 맥락이 중요하다. 내가 이들을 비난하는 지점은 그들이 '여성'이라는 점과는 상관이 없다.

이 여성들이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억압받는 존재로서의 여성을 말한다면, 그들이 과연 '여성'일까?

어쨌거나 데니언 샤플리-화이팅은 이에 대해 흥미로운 사실을 제시한다.

 

  1949년 마요뜨 카페시아는 '나는 마르띠니끄인이다'(1948)로 앙띠유 위대한 문학상을 수상한 네 번째 앙띠유인이자 첫 번째 흑인 여성이었다. 2만 프랑의 상금을 지급하는 이 연례 수상식은 1946년 파리에서 소설, 역사소설, 수필과 시의 발전을 위해 설립됐다. 흥미롭게도, 카페시아의 작품이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심사위원단은 열 세 명의 프랑스 남성들로만 구성됐다.

  위 자전적 소설은 흑인 정신운동의 작품들 가운데 걸작으로 보기 어렵고, 문학잡지 '현대 아프리카'에서 문학 비평이나 책 서평을 위한 지면에 그럴 듯하게 다뤄지지조차 않았다. 다욱이 카페시아가 원작자인가 하는 진위의 문제마저 최근 면밀하게 검토되고 있다.

 

  흑인 남성 작가들에 의해 흑인 여성 작가들이 주변부로 밀려났다는 사실은 놀랄 만한 사안도 아니고, 심지어 남성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는 동시에 여성의 경험을 여성들이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침묵하게 만드는 끈질긴 시도들이 공공연하게 알려졌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이런 진술을 카페시아를 옹호하기 위해 성급하게 일반화할 필요는 없다.

 

진실로 벨 훅스가 그녀의 글 '페미니스트의 도전 : 우리는 모든 여성을 자매라고 불러야 하는가?'에서 밝히듯이, "우리에 대한 억압과 속박을 제도화하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은 중요하겠지만, 이와 더불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 우리의 정치학이 무엇인지 또한 매우 중요하다."

 

이런 몇 가지 이유로 파농을 공격하는 것은 저자의 표현대로 비생산적인 비판일 뿐이다.

 

  오늘날 파농은 "네가 한다 해도 비난받고 하지 않더라도 비난받는다"(damned if you do, damned if you don't)라는 식의 취약한 비판에 걸려들었다. 알제리 여성에 관한 글을 쓰면서 그는 여성의 침묵과 남성의 특권, 그리고 복화술을 재각인 시켰다는 이유로 비난 받는다. 1959년 만약 그가 여성에 대해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이 알제리 혁명에 관해 썼더라면 그는 성차별주의자로 몰려 마찬가지의 공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여성을 주제로 다뤘기 때문에 오늘날 파농은 성차별주의자로서 보수주의적 하위 텍스트를 통해 신화작업을 했다고 비난받는 것이다.

 

벨 훅스의 지적대로 '일반적으로 여성 패널들이 남성 학자에 대한 페미니즘적 접근을 논할 때, 전제는 오직 그의 성차별주의만을 캐묻는데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또 다른 인종주의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벨 훅스의 말을 들어보자.

 

  백인 남성 작가들이 이같은 비난을 듣는 일은 거의 없다. 문학 연구 가운데 인종주의는 자주 이같은 반응으로 나타난다. 자신들의 도서목록에서 초서(Chuacer), 세익스피어나 조이스(Joyce)를 배제한다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이들 작가들의 작품이 성차별주의와 인종주의를 반영한다 할지라도) 백인 여성들은 쉽게 이같은 기준을 흑인 남성의 저작에 대한 자신들의 무지를 변호하기 위해 사용한다. ... 학자 세계에서 비평 이론이나 탈식민주의 담론의 여성들 가운데 유행은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저작을 쓴 백인 남성 사상가들[예를 들자면, 데리다, 푸코, 제임슨, 사이드(Said)]의 성차별주의나 인종주의를 최대한 많이 관과하는 것이다.

 

뭐... 이 부분의 번역은 딱히 맘에 들지 않지만, 여튼 그 뜻에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

이는 어쩌면 '흑인 남성은 가부장적'이라는 더 큰 인종주의의 울타리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이 책의 말미에 포스트모던 페미니스트들이 모계 공동체의 유토피아를 창조하려는 욕망 때문에

파농과 같은 억압과 해방의 진보적인 남성 이론가들을 창조적으로 이용하기보다는

단지 그들의 남성성을 이유로 마치 악마를 다루듯이 삭제하거나 쫓아내고 말았다고 평한다.

 

  진실로, 포스트모던 페미니스트들의 의식이 가난한 노동자 계급 여성들의 경험을 향한 이론적이고 실재적인 움직임에 대해 닫혀있는 한, 페미니즘의 적절성이 여성 대중들의 의식에 "분명하지 않게" 남아 있는 한, 그리고 포스트모던 페미니스트들의 의식이 학계의 재조직과 사회적, 정치적 변형보다 학계의 정통성과 동화에만 맞춰있는 한, 학계의 포스트모던 페미니즘들은 역시 닫힌 책에 불과하다.

 

저자의 마지막 강조점은, 마치 몇 년 전의 김규항과 최보은의 페미니즘 논쟁을 보는 것처럼 매우 민감한 부분이다.

페미니스트들을 '등 따시고 배부른 여성 유한 계급'의 딴따라짓 정도로 취급하여 공격하는 마초사회주의자는 분명 문제가 있다.

하지만 왜 사회주의자와 페미니스트, 이 두 진보주의자들은 항상 대립구도 안에서만 존재해야 하는가?

계급주의와 여성주의는 이분법적으로 서로를 바라봐야할 것이 아니다.

노동자 계급 안에도 남성과 여성의 '계급'이 존재하듯이, 이 둘은 상호보완적인 존재가 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비난을 위해 상대의 약점을 이용할 것이 아니라, 자기발전을 위해 상대의 장점을 이용해야하지 않을까?

 

페미니스트들과 토론을 하게 될 때면, 나는 버릇처럼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말을 시작한다.

나는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절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노동자가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것이 자기기만이듯이,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도 자기기만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주변의 시선 때문에 자신의 남성성을 숨기고 여성을 '배려'해준다는 식의 페미니스트가 되느니,

차라리 남성으로서의 나를 드러내고 진심으로 여성을 '알아보려는' 태도가 낫다고 본다.

 

딴 것 볼 것도 없이, '나도 집에 처가 있고 딸이 있는 사람이오'라는 식의 말을 지껄였던 이명박을 보라.

집에 처가 있고 딸이 있으면... 뭐 어쩌라고? 나와서는 '안마시술소'를 들먹거리며 '인생의 지혜'를 운운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계급의식'이다.

나의 '계급'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인지하고 우리의 '계급'을 위해 택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계급은 성차 또한 반영되어야 한다. 모든 노동자가 남성이 아니듯이, 모든 여성이 피억압자는 아니다.

자기기만적인 계급의식은 욕망을 잠시 채워줄 수는 있겠으나, 결국은 자기파멸의 말로를 맞을 수 밖에 없다.

또 '단순한' 계급의식은 불필요한 내부분열을 만들어낼 뿐이다.

 

강남의 고급주택과 불타는 용산의 한 허름한 옥상 사이에서, 내가 어디에 더 가까운가라는 '뻔한 질문'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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