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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 혁명 5년
프란츠 파농 지음, 홍지화 옮김 / 인간사랑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파농의 저서 중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책.
경험으로부터 사유를 꾀하는 파농의 저작 중에서도 가장 '현실적'인 저작이 아닐까 한다.
실제로 알제리 혁명에 적극적으로 몸을 담고 있던 시절에 쓴 책이라 다른 저작들보다 훨씬 현장감이 느껴진다.
파농은 알제리가, 아니 알제리인들이 탈식민화의 혁명을 겪으면서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 서술하고 있다.
히잡, 라디오, 가족관계, 의학... 이 모든 것들이 탈식민화의 혁명과 함께 극적으로 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럽인들은 '여성해방'을 근거로 알제리 여성들의 히잡을 벗기려 노력한다. 하지만.
하지만 또한 유럽인은 알제리 여성에 대해 공격성을 구체화하고 폭력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히잡을 벗기는 것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강조하는 것이고, 저항을 깨는 것이며, 무모한 모험을 할 준비를 시키는 것이다. 얼굴을 감추는 것은 비밀을 은폐하고 신비와 숨겨진 것의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유럽인은 알제리 여성과의 관계를 막연하게 콤플렉스의 차원에서 보았다. 이 여인을 자기 손이 닿는 곳에 두고 잠정적인 소유의 대상으로 만들려는 의지.
알제리 남성에 의해 무기력하고 가치가 실추되며 더 나아가 인간성을 성실한 대상으로 불행하게 변형된 여성의 무한한 가능성이 묘사된다. 알제리 남성의 행동은 아주 단호하게 고발되고, 중세적이고 야만적인 삶과 동일시된다. 끝없는 지식과 더불어 여성에 대한 태도에 있어 가학적이고 흡혈귀 같은 알제리 남성에 대한 전형적인 비난이 시도되고 제대로 정착된다.
그러나 혁명이 진행되면서, 알제리 여성들이 '행동'에 참여하게 되고 그녀들은 히잡을 벗어던지게 된다.
히잡을 벗어던진 '여성'들은 제국주의의 의심을 덜 받을 수 있으므로.
그리하여 그녀들은 심지어 허리까지 드러낸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커진 눈을 똑똑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히잡을 벗은 알제리 여성이 이동 중에 부모님이나 가족의 지인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아버지는 금방 상황을 알아차린다. 아버지는 이 의견을 신뢰해야 할지 어떨지 당연히 망설인다. 그리고는 관계들이 얽힌다. ... 그래서 아버지는 해명을 요구하겠다고 결심한다.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는 멈춘다. 젊은 처녀의 단호한 시선에 아버지는 행동에 참여한 지 오래되었음을 알게 된다.
전략이 새어나가고 드러난 여성들도 마찬가지로 의심받게 되자,
히잡 착용 여부에 상관 없이 모든 알제리 여성이 의심받는다. 구별은 없다. 바로 이 기간 동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알제리 국민이 동시에 일체감과 국가적 사명감, 그리고 새로운 알제리 사회가 만들어지고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들은 다시 히잡을 쓴다. 이제는 전략적 은폐를 위하여. 이 과정에서 전통적 금기를 상징하던 히잡은 '완전히 사라진다'.
라디오와 의학 또한 식민주의를 상징하기에 알제리인들은 그것을 거부했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식민주의가 아니었지만.
그러나 라디오와 의학이 독립혁명 속에 자리를 잡자, 그것들은 혁명의 중요한 수단으로 변화하였다.
파농의 말대로 '라디오를 갖는 것은 장엄하게 전쟁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실제로 프랑스는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알제리에서의 라디오 판매를 엄격히 통제하고 라디오에 사용하는 건전지의 판매를 금지했다.)
이 모든 '수단'들은 알제리의 가족관계 또한 변화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인간관계가 탄생하였던 것이다.
(아마 이 부분이야말로 파농을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들에게 내놓을 수 있는 적절한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파농이 이야기하는 혁명은, 알제리 내에 거주하는 모든 백인들을 죽이거나 쫓아내는 것이었는가?
파농의 말과 알제리 혁명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었던 한 프랑스 백인의 증언을 비교해 보라.
알제리민족해방전선(FNL)이 보기에 구성 중인 시테 내에는 단지 알제리인들 밖에 없다. 그러므로 알제리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은 알제리인이다. 내일의 독립된 알제리인에서 다른 국적을 얻기 위해 알제리 국적을 포기하거나 가지는 것은 알제리인 각자에게 달린 일이 될 것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심문을 받았다. 경찰관은 나를 훈계하려 했다. "당신은 이 무리의 유일한 프랑스인이오..." 나는 다음과 같은 정부의 말을 떠올리면서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알제리는 프랑스이고, 알제리인은 프랑스인입니다. - 물론 당신은 프랑스 출신이죠! - 아니오, 저는 알제에서 태어났어요. - 아! 당신은 시골의 진짜 아랍인들을 알지 못하는군요. - 저는 오르레앙빌에서 8년간 살았어요. - 이봐요, 당신은 젊어요, 당신은 이런 일에 끼어들었지만 나중에 알게 될 겁니다."
그랬다. 프랑스 '백인'을 향해
"여러분들도 우리와 같은 알제리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알제리를 떠나고 싶다면 자유롭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프랑스 '아랍인'들은 이야기했지만, 프랑스 '백인'들은 달랐다.
그래서 혁명에 가담했다가 파리로 잠시 돌아갔던 백인 프랑스인은 이렇게 고백했던 것이다.
외출, 연극 관람 그리고 석 달 전부터 준비하는 바캉스 계획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나는 그들을 증오했고, 아들들을 알제리에 고문관으로 보내놓고 자신들의 작은 가게에만 매달리는 모든 프랑스인들을 통째로 경멸하기 시작했다. 나는 프랑스라는 나라에의 모든 소속감을 거부했다. 결국 내 민족은 이상 없는 부르주아가 아니라, 매일매일 산악지대와 고문실에서 고통받고 죽어가는 민족이었다.
프랑스에서의 체류는 결국 내게 아주 유익했다. 내가 이미 감지하고 있었던 것을 확인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프랑스인이 아니고 결코 프랑스인이었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하나의 민족에 속하는 데 있어 언어나 문화로는 충분치 않다. 다른 것이 필요하다. 이를 테면 공동생활, 공통의 경험과 추억, 공동 목적 등. 이 모든 것이 부족했다. 프랑스에서의 체류를 통해 나는 내가 알제리 공동체에 속해 있고 프랑스에서는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혁명 속의 알제리 거주 백인들은 알제리인이 되었고, '그들'은 여전히 철저히 프랑스인들이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알제리인으로서 해냈다. 나는 프랑스를 배반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알제리인이고 모든 알제리인과 마찬가지로 식민주의를 무찌르기 위해 싸웠고 앞으로도 계속 싸울 것이다. 의식 있는 알제리 시민으로서 나의 자리는 애국자들 옆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물론 이런 백인들은 소수였고, 앞서 언급되었던 혁명의 기운은 독립 이후까지 지속되지 않았다.
(또 한 번 물론, 파농은 알제리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파농이 서술한 알제리의 5년은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민간인을 몰아넣고 폭격을 퍼부어대는, 그러면서도 '폭력'이 어쩌고 이야기하는 저 가증스러운 이스라엘과 침묵하는 미국에게도.
알제리 민중의 폭력은 평화에 대한 증오도 인간적인 접촉의 거부도 전쟁만이 알제리에서 식민체제를 끝낼 수 있다는 확신도 아닙니다.
알제리 민중은 자신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해결책을 선택했고, 이 선택을 유지해갈 것입니다.
드골 장군은 "알제리 민중을 깨부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에게 "협상합시다. 현대사에 어울리는 해결책을 찾읍시다. 하지만 당신이 알제리 민중을 깨부수려 한다면 당신네 군대가 영광스러운 알제리 군인들의 벽에 부딪혀 깨지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라고 대답합니다.
파농의 이 연설은 그의 얼굴에 드리운 '폭력 옹호'라는 단순한 왜곡을 일시에 걷어낸다.
김규항의 말대로 ‘모든 폭력은 모두 다르며 폭력을 반대하는 일은 그 다름을 세심하게 따지는 일에서 출발한다.’
콜럼바인에서의 총기난사 사건을 두고, 이 조용한 마을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고 하던
미사일 제조 공장 간부의 말을, 나는 기억한다.
총기난사는 폭력이고, 어딘가 떨어져 폭발한 미사일은 폭력이 아니다.
미네르바의 혐의부정은 유죄의 '근거'가 되고 한 고위 공직자의 '강력한' 혐의부정은 무죄의 근거가 된다.
그렇다. 그 어느 때보다도 '세심함'이 필요한 시기다. 그것이 때로는 귀찮고 복잡한 일이 될지라도.
이전의 '인간사랑' 출판사의 책과는 다르게 촌스러운 양장으로 나오지도 않았고 책 사이즈도 아주 맘에 든다.
번역도 괜찮고 이 책의 역자는 세심한 역주를 달아놓았다. 파농을 읽으려면 오히려 이 책부터 시작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한다.
참고로 이 책은 1979년에 '몰락하는 식민주의'라는 제목을 달고 번역, 출판된 적이 있으며
82년에는 '혁명의 사회학'이라는 제목으로 같은 출판사에서 다시 나온 적이 있다.
하지만 원제는 '알제리 혁명 5년'이며, 2008년에 나온 '인간사랑' 출판사의 이 책에는 부록까지 달려 있어 더 맘에 든다.
뭐 30년이란 시간차가 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