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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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터 콜비츠의 인상 깊은 드로잉이 표지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책. 제목마저도 '이것이 인간인가'.

 

87년에 갑작스러운 자살(그러나 생각해보면 갑작스럽지 않은 자살은 어디에 있던가.)로 생을 마감한 프리모 레비의 회고록.

유대계였다는 이유로 그 또한 나치수용소에 갇혀야했고 상상하기도 힘든 현실을 살아가야 했다.

이 책은 그 수용소에서의 13개월에 대한 기록이다.

 

시대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나치스의 만행과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는 우리조차 영화나 많은 책을 통하여 익숙해져 있는 대학살.

하지만 이 책에서 분노의 어조를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자조와 차분함이 지배할 뿐.

 

그러므로 내 책은 죽음의 수용소라는 당혹스러운 주제로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이미 널리 알려진 잔학상에 관해 덧붙일 아무것도 없다. 이 책은 새로운 죄목을 찾아내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정신의 몇몇 측면에 대한 조용한 연구에 자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저렇게 끔찍한 상황을 당해본 적도 없으면서도 레비의 표현 하나하나에 한숨을 내쉬면서 가슴 속으로 전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곳에 오기 전 삶에 대한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흐릿했고 아득했다. 그래서 몹시 달콤하고 슬펐다. 각자의 유년 시절에 대한, 이미 끝나버린 모든 일들에 대한 기억처럼. 반면 수용소에 들어오는 순간 각자 전혀 다른 일련의 기억들이 시작되었다. 이것들은 날카롭고 가까웠다. 또한 매일 상처가 덧나듯 현재의 경험에 의해 계속 상기되었다.

 

오늘은 바람이 불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이상하게도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이, 어쩌면 아주 보잘 것 없을 수도 있는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절망의 문턱을 넘지 않도록 해주고 계속 살아가게 해준다. 비가 오지만 바람이 불지 않는다. 혹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 하지만 오늘 저녁 내가 추가로 죽을 배급받을 차례라는 것을 안다. 혹은 상황이 더 안 좋아서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보통 때와 다름 없이 배가 고프다. 그러면 정말로 바닥에 누워 있는 것 같을 때마다 종종 그렇듯 정말로 마음 속에 고통과 지루함밖에 느껴지지 않는데,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좋다, 나는 내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을 건드리거나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 수 있다. 그러면 비는 끝이 날 것이다.

 

승승장구하던 독일인들이 시작했던, 인간을 동물로 만들려는 작업은 패배한 독일인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우리 머리 위 수천 미터 상공의 회색 구름들사이에서 비행기들이 공중전으로 복잡한 기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무기력하고 힘없고 헐벗은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우리 시대의 인간들이 가장 정밀한 도구를 이용해 서로의 죽음을 구하고 있었다. 그들이 손가락만 한 번 움직이면 수용소 전체가 파괴되고 수천 명의 사람을 전멸시킬 수 있었다. 반면에 우리의 힘과 의지를 모두 다 합쳐도 우리들 중 한 사람의 생명을 단 1분도 연장할 수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요구가 많다. 죽은 사람들은 기다릴 수 있다.

 

마지막에 독일군이 철수를 시작하고 또 함께 유명한 '죽음의 행진'이 시작되면서, 수용소에 남겨진 병자와 부상자 포로들은

'인간을 동물로 만들려는 작업'을 스스로 완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진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주제 사라마구가 '눈 먼 자들의 도시'를 쓸 때, 이 책에서 영감을 얻었나 할 정도.

 

프리모 레비는 그 비참한 지옥 속에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로

'지칠 줄 몰랐던 인간에 대한 관심'과 '인간성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 두 가지를 들었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그렇게 지옥 같은 곳에서도 이곳의 참상을 '알려야겠다'라고 의지를 불태웠던 그가, 자살했다.

자살하기 몇 개월 전, 그는 이런 글을 썼다고 한다.

 

점점 젊은이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우리는 그것을 일종의 의무로, 동시에 위기로 본다.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위기, 귀 기울여지지 않을 위기. 사람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우리의 개인적인 경험들을 넘어서 혹은 그것과 상관 없이, 우리는 어떤 근본적인 뜻밖의 사건을 집단적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뜻밖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예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근본적인 것이다. (......) 과거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그러므로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눈을 뜨고 있는가. 이런 중요한 반성을 위해서라도 이 책은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책은 문학작품으로서도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게다가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꼼꼼한 번역과 깔끔한 편집까지 되어 있으니.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를 읽어봐야겠다. 요새 돌배개에서 맘에 드는 책을 많이 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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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 하워드 진의 자전적 역사 에세이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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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서문은 벌써 몇 번이나 읽었고, 본문도 몇 번을 뒤적거렸는데도 정독을 하지 못했었다. 그야말로 불가사의.

논문도 끝났겠다, 단단히 마음을 먹고 책을 집어들었다.

 

당신의 인생에서 '한 권의 책'을 꼽게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내게 바로 그 순간이 왔다. 바로 어제.

 

몇 번이나 읽었던 이 책의 서문은 여전히 내 가슴을 뛰게 만들었고,

 

  나는 매학기 첫 강의마다 내 학생들에게 그들이 나의 관점을 듣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다른 이들의 관점도 공정하게 다루도록 애쓰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나와 의견을 달리 하라고 격려해 주었다.

  나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객관성을 가장하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고 말하곤 했다. 몇몇은 이 은유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는데, 어떤 학생들은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그 의미를 자세히 분석해 보기까지 했다. 다른 학생들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바로 알아챘다. 이미 사태가 치명적인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고, 여기서 중립적이라 함은 그 방향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결국 내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나는 희망을 고집한다.

  이건 물론 느낌일 뿐이다. 하지만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느낌을 존중하지만 그럼에도 이유를 원한다.......나는 이유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해왔다. 나는 증거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의 증거제시, 즉 그의 삶에 대한 회고에 나는 현재 대한민국의 현실이 과거 미국의 그것과 너무나 닮아있음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학생들이 기성 당국에 도전하기 시작하면, 포위공격을 당하는 행정관료들은 종종 "누군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보곤 하는데, 이는 젊은이들은 스스로 생각하거나 행동할 능력이 없다는 속뜻을 담고 있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패배'에 대한 언급도 잊지 않는다.

 

  고통을 받고 있는 어떤 집단이 스스로에게 의지해야만 함을 알게 된다는 것은, 그러한 교훈이 단기적인 의미에서는 쓰라린 패배를 동반한다손 치더라도, 미래의 투쟁을 위해서는 자신을 강하게 하는 것이다.

 

작은 변화를 무시하는가? 하지만 당신 스스로 자문해보라. 당신을 '만들게' 된 계기들은 무엇이었는가를.

 

  이런 일련의 관계를 보면서 나는 사람들 사이의 연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관해 생각했다-책을 읽고, 한 사람을 만나고, 한 순간의 경험을 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삶이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아무리 작은 행동이라도 간단히 무시하거나 제쳐두어서는 안된다.

 

길거리를 점령하니 불법시위라고? 왜 '불법'을 저지르냐고? 왜 '' 불법을 저지르냐고는 묻지 않는가?

(요새 나를 제일 꼭지 돌게 만드는 소리다.)

그러니까, 당신이 말하는 것이 이런 것인가? 합법적인 방법으로 이야기하라고?

웃기지 마라. 60년대의 미국에서 (합법적인) 백인전용 좌석에 앉은 흑인(그러니까 당신이 말하는 그 불법행위자)을

경찰이 두들겨 패고 쓰러진 그를 향해 전기봉으로 계속 지지는 것이 '합법'이었다.

흑인들은 그 고상한 폭력적 '합법'에 저항하기 위해 비폭력적 '불법'으로 백인전용 좌석에 앉았다.

 

시민불복종은 그것이 사회 안정을 위협하고 무정부 상태를 낳는다는 일각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결코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큰 위험은 시민의 복종, 즉 개인의 양심을 정부의 권위에 굴복시키는 것이라고 나는 역설했다. 그러한 복종은 전체주의 국가들에서 본 것처럼 공포를 낳고,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이른바 민주적 정부의 자의적 결정 아래 국민 대중이 전쟁을 받아들이는 결과를 낳는 것이었다.......

  이러한 세계에서 법의 지배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고 나는 말했다.......

......기술적인 의미에서는 법을 위반한 것일지라도, 시민불복종은 대단히 민주적인 행위이며 시민들이 "불만의 원인을 시정하도록 정부에 청원"할 수 있다는 권리장전의 조항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억해야할 것은 그것이 단지 50년 전의 일이란 것이다.

 

  우리가 희망을 잃지 않으려면, 바로 이러한 장기적인 변화를 반드시 응시해야 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비관주의는 자기충족적인 예언이 된다. 그것은 우리의 행동의지를 무력하게 만듦으로써 자기 자신을 재생산한다.

 

그 누구도 변하지 않을 거라 믿었던 것들이 50년 사이에, 변했다. 자, 합법과 불법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직도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가?

 

하워드 진은 '역사학자'다.

'역사학자'인 하워드 진은 나를 끝까지 그의 팬으로 만들고 있었다.

 

처음부터 나는 강의에 나 자신의 역사를 부어넣었다. 나는 다른 시각들을 공정하게 다루려 애썼지만, '객관성' 이상의 것을 원했다.

 

"개인 사업으로서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너무도 많은 역사가 사회적 양심이 없이 씌어진다고 생각한 거지요. 또 역사가의 어딘가에 사회적 양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역사를 서술할 때는 따로 떼어둡니다. 역사 서술이란 전문적 직무로 행해지기 때문이지요. 이 일은 뭔가를 출간하기 위해, 대학에서 자리를 얻기 위해, 종신재직권을 얻기 위해, 승진하기 위해, 명성을 높이기 위해 이루어집니다. 역사 서술은 판매되어 이윤을 내는 책으로 출판사가 출간합니다.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가치관이 무엇인지, 어떤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자신들이 배경이 무엇인지에 관해 말해야 하며, 자신들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알게 하여 역사를 읽는 젊은이들과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사료에만 의지하지 않고 많은 사료를 찾아보도록 미리 알려줘야 합니다. 따라서 객관적인 건 불가능하며 만약 가능하더라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시각과 가치관을 반영하는 역사, 다시 말해 객관적이지 않은 역사가 필요합니다.

 

제 말은 이런 겁니다. 콜럼버스를 예로 들어봅시다. 누구든 틀거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하버드의 역사학자 새무얼 엘리엇 모리슨이 자신의 콜럼버스 전기에서 실제로 행한 방식은 이렇습니다. 콜럼버스는 대량학살을 저지르긴 했지만 불가사의한 뱃사람이었다, 그는 서반구에서 이 섬들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비범하고도 특별한 일을 했다, 이렇지요. 여기서 뭘 강조하고 있습니까? 그는 대량학살을 저지르긴 했지만... 훌륭한 뱃사람이었다. 저라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그는 훌륭한 뱃사람이었지만, 사람들을 극도로 끔찍하고 잔인하게 다뤘다, 이렇게요. 이런 식으로 똑같은 사실을 갖고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으로 말하는 거지요.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우리는 자기의 편견을 보여주는 겁니다. 저는 우리의 편견을 역사에 대한 인도적 관점이라는 방향으로 두는 게 좋다고 믿습니다.

 

지난 번에 절대 자서전 따위는 쓰지 않겠다고 툴툴댔던 내가, 이 한 편의 자전적 역사 에세이에 감동을 받을 줄은 몰랐다.

그건 저자의 솔직함 때문이기도 하고, 그의 '실천' 때문이기도 하다. 또 여유와 위트를 잊지 않는 그의 '인간다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는 나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었고, 나는 다른 사람에게도 이 증거를 제시하고 싶다. 그는 이미 나의 '스승'이다.

 

나에게도 포기할 권리 따위는 '없다'.

 

  혁명적 변화는 한 차례의 격변적 순간(그런 순간들을 조심하라!)으로서가 아니라 끝없는 놀람의 연속, 보다 좋은 사회를 향한 지그재그꼴의 움직임으로 오는 것이다.

  변화의 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거대한 영웅적 행동에 착수할 필요는 없다. 작은 행동이라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반복한다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얼마 전 타계한 선생을 다시 한 번 추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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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eft 1848-2000 - 미완의 기획, 유럽 좌파의 역사
제프 일리 지음, 유강은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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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가 말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누가 말했는지 굳이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건 간에, 유명한 어구가 하나 있다. 젊었을 적에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는 자는 바보이며, 나이가 들어서도 공산주의자로 남아있는다면 그는 더 바보라는 말. 내가 이 말을 처음 접한 것이 아마 중학교 1학년 즈음이었을 것이다. 「먼나라 이웃나라」 시리즈로 유명한 이원복이 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다룬 만화책에서 보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고 그 동안 이원복이 보여 왔던 나름의 사상적 행로(?)를 살펴보면, 그가 그 만화책에 굳이 그 말을 인용했던 의도가 짐작이 간다.

 

  그때와는 또 달리, 지금 한국사회에서 ‘좌파’라는 말은 이제 마녀사냥을 위한 ‘페인트’의 역할조차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전히 ‘빨갱이’라는 말이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사용되는 현실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옹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좌파이든 좌파를 공격하는 극우이든 간에, 이제 좌파라는 말은 너무나도 유행이 지나버린 말이 되어버렸다. 좌파하면 두려움에 떨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사상 논쟁 지겹지도 않냐’라는 말이 쿨하게 다가오는 시절이 되었다. 또 다른 이들은 쿨하지는 않더라도 하나의 ‘추억’으로 상기하기도 한다. 그 중 일부는 경험이 부재한 추억 혹은 낭만인 경우도 있다(나를 포함해서). 좌파만이 아니다. ‘계급’이라는 단어조차 이제는 먼지가 풀풀 날리는 단어가 된 것이 현실이다.

 

#2.

  저자의 서문을 읽는 순간, 왠지 모를 슬픔이 느껴졌다. 1984년 봄, ‘광부파업을 둘러싼 대중의 잔인한 분위기’에 아찔함을 느끼면서 ‘세상이 바뀌었음’을 느꼈다는 말이 특히 그러했다. 그러면서도 슬픔만으로 끝나지 않는, 어떠한 비장감도 느껴졌다.

 

  그렇지만 단언컨대 이 책은 묘비명이 아니며 지난 과거를 그리워하는 향수의 몸짓도 아니다. 이 책은 몇 가지 중요한 이야기들이 잘못 전달될 때일수록 역사가 중요하다는 확신의 소산이다. 망각에 맞선 기억의 투쟁이라는 말은 요즘 글쟁이들의 상투적인 표현이 되어버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의 힘이 약해지지는 않는다. 1900년대 동안 새로운 기억상실증들로 인해 몇 가지 없어서는 안 될 역사가 지워져버렸다. 모름지기 좌파의 역사는 인간의 잠재력을 제한하고 왜곡하며, 공격하고 억압하고, 때로는 심지어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하는 불평등의 체제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리고 이 역사는 분명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때문에 이 책은, 저자가 서구 유럽의 좌파에게 바치는 ‘비판적’ 헌사다. 여기서 ‘비판적’이라는 말을 굳이 앞세운 것은, 그가 곳곳에서 낭만적인 시선을 과감히 거두어버리고 쓴 소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곳곳에서 다양성을 보장하지 못한 기존 좌파들의 한계를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다. 특히 젠더의 문제에 민감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지점은 오늘까지 유요한 문제이다. ‘이 사람, 젠더 문제에 너무 민감한 거 아냐?’라는 생각이 단 몇 초라도 들었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구태의연한 말을 되뇔 필요가 있다. ‘세상의 반은 여자다’. 그리고 그 여자의 수는 ‘노동자’의 수보다 많다. 저자의 지적대로, ‘어떤 식으로든 여성들은 기다릴 것을 요구받았다’.


  이 문제는 비단 젠더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노동계급운동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이 ‘자신감’이 혁명의 원동력인 것은 분명하지만, 혁명 세력 내 소수(여기서의 소수는 단순히 숫자를 의미하지 않는다)의 침묵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현대자동차 공장 식당의 아주머니들이 그러했고, 이주노동자들이 그러하고, 정말 숫자로는 다수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러하다. ‘귀족 노동자’라는 원색적인 비난을 옹호할 생각은 절대 없다. 그러나 모든 노동자가 ‘같은’ 노동자인가? 때문에 ‘노동운동은 한편으로는 노동계급 전체의 이해와 권위, 집단적 힘에 호소하면서도 실제로는 훨씬 더 협소하고 배타적이었다’는 저자의 지적이 뼈아프다.


  그러나 제프 일리가 제시한 좌파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혁명에 대해 자신감, 아니 신념을 가진 이들을 ‘교조주의자’로 본다면, 신념이 없는 사람들은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좌파의 초기, 농민을 어떤 계급으로 인지할 것인가라는 부분만 살펴봐도 이 문제가 간단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동정적인 시선’이 없다는 가정 하에, 당시 농민 계급은 분명 반혁명적인 계급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특권계급’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전략적으로 볼 때도 그들은 ‘다수’였다. 노동자만이 대중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공식에 맞추자면 그들은 몰락해야만 하는 계급이지만, 절대 목적인 혁명을 위해 그들의 몰락을 지켜보는 것(혹은 부추기는 것)이 타당할 것인가? 100년 전에 던져졌어야할 질문 같지만, 안타깝게도 2009년의 한국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항상 고되고 착취당하는 농민이 과연 ‘진보 세력’으로 묶여질 수 있는가? 굳이 농민까지 갈 것도 없다. 보수적인 노동자를 ‘동지’로 볼 수 있을 것인가? 반대로 보수적인 노동자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 과연 타당한 행위인가?


  이런 문제는 ‘계급’이 어떠한 단순명료한 실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오늘날 더욱 심화되는 경향이 있다.

 

노동자들이 조직화된 정치에 무관심해 보였더라도, 이것은 노동자들에게 올바른 삶에 대한 생각이 없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그런 생각이 종종 ‘개인적인’ 욕망의 경제에 갇혀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생각을 어떤 식으로 자유롭게 해방시킬 것인지가 좌파의 문화정치가 직면한 문제였다.

 

특히 여성, 인종, 성적소수자 등의 문제에 비하여 생산수단의 유무로 판단되는 ‘계급’의 문제는 그 불명확성과 비가시성 때문에 더욱 복잡해진다. 명확히 드러나는 인종이나 국적에 비해 계급은 ‘실재하지만 테두리 선이 없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3.

  좌파가 당면한 구체적 문제에 다다르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행동상의 타협은 위험하지 않지만 강령상의 타협은 위험하다’라는 말은 명확한 원칙이기는 하나 적용하기에는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 부르주아 혹은 자유주의자들과의 연합을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가는 여전히 모호한 영역에 머물러 있다.

 

한편으로 사회주의자들은 인상적인 성장을 이룩했음에도 야당으로 고정되어 계속 외부에 존재해야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정부에 오를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연합을 통해서만, 즉 혁명의 목표를 수정하거나 유예하는 제한된 강령을 공언함으로써만 가능했다.

 

  이 책의 중간 부분, 그러니까 독일과 이탈리아의 두 사례가 바로 그 증거다. 아주 조금의 성과라도 얻어낼 수 있다면 강령은 차후에 다가올 미래로 넘겨둘 수 있다는 생각은 독일의 사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반면 원칙만을 부르짖으며 그 원칙을 실제로 행사할 수 있는 의회나 행정상의 문제를 도외시하면 이탈리아의 사례로 귀결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여성의 참정권 등 젠더에 관련된 사항들도 사실 생각해보면 ‘전략적’으로 접근된 경우라고 봐야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취해야할 태도는 어떠한 것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문제로 들어가기 전에 분명히 정리를 하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노무현 정권 말기, ‘진보와 개혁’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가. 제프 일리는 아주 당연한 것처럼 ‘혁명과 개혁이라는 서로 대립하는 견해’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한국에서는 아직까지도 독일과 이탈리아의 사례를 적용할 만큼 명확한 비교잣대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름의 주관이 있던 ‘자유주의자’ 노무현이 ‘빨갱이’가 되는 사회가 아니던가. 게다가 스스로 그 빌미를 풍성하게 제공하기도 하였다. 앞서 말한 ‘추억과 낭만’ 때문인 걸까?

 

  굉장히 슬픈 일인데, 우리가 상상력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요. 더 나은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 믿음 같은 것이 적어요. 그래서 만날 '우리 현실에서 이것만 해도 어딘데'라는 생각이 지배해요. 개혁이라는 것이 진보의 기초적인 부분과 겹치기도 하지만, 개혁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진보를 가로막기 위해 사회를 좀더 합리화하는 데 있죠. 상상력이 없으니 그 부분을 놓치게 되는 거죠. 개혁이 갖는 소박하고 진보적인 경향에 너무 감사하는 거예요. '이것만 해도 어딘데'하면서. 그것은 어리석은 게 아니라 착한 거라고 봅니다. 그런데 그 착함 때문에 된통 작살이 나는 거죠. 누가 어떤 놈이 밟았는지도 모르는 채 삶이 너무 고달파지는 거예요. 그래서 "에이, 이제 진보고 개혁이고 뭐고 싫고 무슨 사회, 이념도 다 싫다. 먹고사는 문제가 제일이야. 이명박이 제일이야"하는 식으로 가는거죠. 이명박은 디지털 시대를 토목 건설로 해결하려는 몽상가인데 어떻게 된 게 이 사람이 가장 현실주의자가 되어버렸죠. 이것은 대단한 역사적 반동인데, 정말 슬픈 일입니다.

  개혁이 실패했다고들 하는데 사실은 그야말로 대성공을 한 셈이죠. 개혁의 목적은 진보를 가로막는 것이니까요.

 

- 김규항, 지승호와의 인터뷰 중, 『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 시대의 창, 2007.

 

  그것은 참여정부 최대 과오 중의 하나였고, 그 과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인하여 개선의 가능성이 더욱 줄어들었다. 그를 비판하는 것이(특히나 좌파의 입장에서는) 그의 자살로 인하여 더욱 부담이 가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민이 그를 죽였다’는 노사모 출신 배우의 말은, 그 격앙된 상태를 감안하더라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도 좀 격앙된 태도로 본문에 인용된 알퐁스 메르앵의 말(246쪽)을 고쳐서 받아치고 싶은 심정이다.

 

“개혁 세력들은 자신들의 근거 없는 자존심을 위하여 ‘가항력적’인 파도에 휩쓸려버렸고, 수구우파들이 우리를 쏘게 내버려두질 않았다. 그들 스스로 우리를 쏘고 싶어 한 것이다.”

 

 지금 사상으로는 도저히 규정이 불가능한 괴물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비판해야하는 기준을 흐려야 할 이유는 없다. 아니, 오히려 이런 상황이기에 더욱 그래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대통령 스스로가 ‘좌파 신자유주의’와 같은 웃기지도 않은 유행어를 날리지도 않을 것이며, 또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실패 이후 민주노동당에게 대연정을 위한 손을 내미는 슬랩스틱 에드립을 보이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유행어와 슬랩스틱 에드립은, 결과적으로 희극이 아닌 비극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블로그를 하다가 발견한 다음과 같은 답글을 보라.

 

*** (답글) 2009/07/26 21:27

우리같은 국민들은 미디어법 이런거 구체적으로 잘 모릅니다. 단지 수구골통이라는 조중동, 수구진보라는 한겨레, 경향...독과점 지상파 3사. 이들 언론이 이념을 떠나 진정 국민들 편에 서서 언론의 진정한 역할을 보여줄때 이념 따지지 않고 손뼉치고 이들을 믿어 줄겁니다. 

 

글쎄. ‘언론의 진정한 역할’은 무엇이고 ‘국민’은 또 누구인가. ‘이념을 떠나 진정 국민들 편에 서’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자신이 누구보다도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사람이 실체가 없는 몽상을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념이 없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잘 모른다면서도 이념하면 도리질부터 치는 이 현상의 타개는, ‘커밍아웃’과 ‘충돌’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추신.

  ‘미완의 기획’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 『더 레프트』는, 저자가 ‘이 책은 단연코 묘비명이 아니다’라고 강조함에도 ‘실패의 역사’라는 머릿속의 이미지를 지우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공산주의는 소련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교조주의와 그 교조주의를 악용하고 일국사회주의라는 논리로 교묘히 포장한 스탈린에 의하여 타락할 대로 타락했다가 결국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사회민주주의 진영은 역사적 굴곡 속에서 연대와 의회를 강조하다가 결국은 ‘자본주의의 몰락’이라는 말 자체를 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이루어낸 ‘개혁적’ 성격의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마셜플랜에 의지하는 노동당’이라는 기괴한 이미지는 결국 부시의 푸들이 되어버린 노동당 당수까지 배출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협력’과 ‘연대’의 범위가 어디까지여야 하는가라는 어려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이 질문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을 던지기 이전에, ‘언어의 정치’에 대해 심각하게 성찰을 할 필요가 있다.


  조지 레이코프는 ‘프레임’이라는 것을 이야기 한다. 그의 책 제목도 그러하듯이, 논리는 간단하다. 난데없이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고 외치는 순간 게임이 끝난다는 것이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어쨌거나 한 번은 코끼리를 생각해야만 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말라는 외침에 동조하든 저항하든 선점을 당한 주제에서는 결국 그 ‘프레임’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 논리로 미국의 진보세력이 왜 항상 보수세력에게 패배하는가를 분석하였다. 미국의 보수세력이 항상 논제를 선점하고 나면, 진보세력은 그것에 대한 ‘안티’ 그 이상을 넘어설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한국의 진보는 어떠한가? 진보, 노동운동, 직접행동, 저항, 불복종. 이런 단어들이 한국사회에서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이미 선점당한 것들뿐이다. 붉은 머리띠, 붉은 깃발, 마스크, 죽창, 쇠파이프, 새총, 마초, 술, 담배……. 이런 것들이 100% 가공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 조작된 이 이미지들이 결국 고착되어 또 다른 실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자극적인 이미지만이 아니다. 계급, 투쟁, 프롤레타리아, 부르주아, 타파, 진보, 개혁, 좌파, 공산주의, 사회주의, 복지……. 이런 추상적인 단어조차 이젠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왜곡되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극단적인 조건반사를 일으키고 있는 형편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생각해보면 그렇다. 좌파들이 극우 집권세력들의 노골적인 왜곡과 중상모략을 너무 가볍게 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노무현은 빨갱이’라는 말에도 그냥 코웃음을 치고 넘어가고, ‘계급’이라는 놓칠 수 없는 단어에다가 많은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거부감을 일으키는 ‘투쟁’이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고민 없이 붙여 사용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자유주의자를 보고 빨갱이라고 칭하는 현실이 어이없는 것은 백 번 이해하는 바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선점’하도록 그냥 둬서는 안 될 일이었다. 입 아프고 지치는 일이더라도 그것을 꾸준히 설명하고 변명하고 반론해야 했던 것은 아니던가. 이것도 또 다른 의미의 투쟁은 아니었던가. 더 나아가 그토록 비난하던 교조주의를 나 자신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것은 아니던가. 우리는 상징을, 놓쳐서는 안된다.

 

정말로 천재적인 솜씨였다. 사람들이 돌무더기로 바리케이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군사적인 면에서 보자면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보면 바로 그 일을 해야 했다. 프랑스 역사에서 바리케이트의 이미지는 1830년과 1848년, 파리코뮌 등 민중봉기의 모든 영웅적인 순간과 연결되어 있다. 바리케이트는 상징이며, 왕과 반동의 군대에 대항하는 빈민과 노동자들의 방어선이다.


 


- 문제제기

  세계1차대전 전후에 보였던 전환들(사회주의 -> 애국적 민족주의로 인한 국제적 사회주의 연합의 붕괴 -> 전쟁 말기~전후 대중들의 사회주의적 요구)을 어떻게 볼 것인가? 사실 이 부분은 나를 조금은 절망하게 만든 부분이었다. 전쟁 초기 불었던 애국주의 열풍이 엘리트만의 것인가? 오히려 엘리트들은 대중들의 눈치를 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전쟁 말기의 ‘사회주의적 요구’는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배가 고파야 움직이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그 인지상정이 ‘강령’이 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연대’의 근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 사족

아마도, 내 평생 읽게 될 책 중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두꺼운 책이었다(적어도 단권으로 치자면). 전체 페이지는 1000페이지가 넘고, 참고문헌 정리만 해도 100페이지를 육박한다. 그만큼 이 저서는 역사학자 제프 일리의 '학문적 열정'을 넘어서는 저작이다. 그에게는 지식인이 아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소명의식이 느껴진다. 자신의 감정을 함부로 표출하지 않고 있는데도, 열정과 애정이 확실히 느껴지는 책이기 때문에 이 책은 굉장히 재미있는 책이며 또 소장가치가 있는 책이다. 마치 사전을 보는 것처럼, 서재에 꽂아두고 틈틈히 찾아봐도 좋을 책(꽂아두면 뽀다구도 난다ㅋㅋ). 페이지가 부담은 되지만 사실 글자 크기가 그리 작은 편은 아니라 페이지 넘기는 재미도 있다.

 

책이 두꺼우니 리뷰도 엄청 길어지는구나. 허허..


- 1968년 당시를 묘사한 혁명적 공산주의 청년조직의 앙리 웨버의 말.


  때문에 좌파의 이념과 정책은 여전히 일상의 영역으로 파고들지 못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경쟁’이 대표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일상성에 비하면, 정말 좌절할 수준이다. 제프 일리가 설명하는 1910~20년대의 상황이 낯설지 않은 것이 나만의 느낌일까.

 

  그러나 영화관과 댄스홀의 야단법석에서부터 관람스포츠, 스타시스템, 광고 및 패션 등에 이르는 새롭게 단장한 ‘문화산업’의 장치는 1920년대에 민중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서 놀라울 정도의 성공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사회주의자들이 미처 채워주지 않은 일상생활이라는 인간적 공간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 낯설지 않은 상황은 더욱 심각한 걱정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노동운동의 하부구조가 파시즘에 의해 분쇄되자 이러한 사적인 오락의 영역이 파시스트 국가의 가장 성공적인 개입 장소가 되었다. 파시즘은 반민주적인 억압의 도구이자 테러의 체제였을 뿐만 아니라 (분명 둘 다이긴 했지만) 좌파가 스스로 무시해버린 심리적 욕구와 유토피아적 갈망을 동력으로 삼았다.

 

  벌써 4년 정도 지난 일이지만, 조금은 급진적(적어도 한국에서는)인 좌파 소그룹의 회의에서 좌절감만 얻어 나왔던 일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언어와 일상의 정치가 실존할 뿐만 아니라 막대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상황에서, ‘타협’ 혹은 ‘수정주의’라는 비난이 얼마나 타당한지 잘 모르겠다. 물론 주요 강령을 망각한 타협과 변화는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강령’ 그 자체에 올인하는 것 또한 또 다른 변질을 양산해낼 가능성이 크다. 비록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사회라고 부르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복지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롤모델로 꼽히는 스웨덴의 예를 보라.

 

  1928년부터 당 의장을 지내면서 1932년부터 총리로 재직한 페르 알빈 한손이 1928년에 고안해낸 ‘국민의 집People's Home'이라는 아이디어는 위계와 특권의 제거에 상호성의 윤리를 의미했다.

 

"모름지기 좋은 집이란 평등과 배려, 협력과 도움으로 유지되는 곳이다. 이것을 거대한 국민과 시민의 집에 적용하면, 오늘날 특권층과 소외계층, 지배하는 자와 예속된 자, 부자와 빈자, 배부른 자와 배곯는 자, 약탈자와 피해자로 시민을 가르는 사회 ‧ 경제적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아이디어는 사회정의의 이상을 노동계급의 우위라는 분열적인 생산주의적 수사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또 대다수 스웨덴인들이 가진 농촌과의 연계를 환기시켰다.

 

  얼마 전, 내가 가입되어 있는 모 당의 지역 모임을 알리는 메일을 받았다. 그리고 그 메일 내용 때문에 당 게시판에는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당원 모임을 즐겁고 부드럽게 하자는 측면에서 ‘카드게임’을 할 예정이라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카드게임을 하는 것은 취소되었지만, 그리고 나 자신도 카드게임은 좀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시도에 대해서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싶다. 당원 가족들이 함께하는 야유회 등도 열리고, 매 달마다 지역 당원들의 모임이 있다. 사실 내 성격상 그런 모임에 참여하는 것이 딱히 내키지는 않지만, 계속 관심을 가져볼 생각이다. 일상에서의 정치를 이야기하면서도 나 자신부터 일상에서 정치를 배제시키고 있고, 그 배제를 통해 다시 정치를 다루는 언어들을 기존의 프레임 속에서 꺼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가봐야 아는 사람 몇 안 되는 학교 동창 모임은 하나도 어색해하지 않으면서(뭐, 그닥 좋아하지 않기는 한다), 왜 지향점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는 당원 모임은 부담스러워 해야 하는 걸까? 언어의 족쇄를 푸는 것뿐만 아니라, 그 족쇄를 다르게 채워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쉽지 않은 일인 줄은 안다. 그러나 불가능하지 않다. 여기 실례를 하나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세상에 나타난 것이 언제 어디서부터였는지 분명히 알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발전론은 예외입니다. 세계 규모로 경제발전 이데올로기가 나타났던 그 순간이 수많은 학자에 의해 지적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트루먼이 1949년 1월 20일의 취임 연설에서 “미국에는 새로운 정책이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미개발의 나라들에 대해 기술적 ‧ 경제적 원조를 행하고, 투자를 하여 발전시킨다는 그런 새로운 정책이었습니다.
  지금 이 정책은 너무나 당연시되고 있기 때문에 그 순간이 획기적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내기는 상당히 어렵습니다만, 당시의 경제학 논문을 보면 트루먼이 썼던 ‘미개발 국가(under-development country)’라는 용어가 그 이전에는 쓰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발표된 학술논문이 모두 실려있는 잡지 기사색인이란 게 있습니다만, 1949년의 연설 이전 것을 보면 ‘미개발 국가’라는 항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근대화’라는 항목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1949년 1월 이후에는 그것이 점점 늘어납니다. 그리고 어느 사이 경제학이나 사회학의 전문용어로 정착이 됐습니다.
  ‘발전(development)’이라는 언어 자체가 트루먼의 연설에 의해 바뀌고, 다시 만들어진 말입니다. 무엇이 바뀌었냐 하면, 하나는 ‘발전’이 처음으로 국가정책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이전의 국가정책에서는 ‘발전’이라는 말이 사용된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미국정부의 정책 속에서 미국 국내의 상업을 진작시키려고 한 정책은 많이 있었습니다만 나라 전체를 ‘발전시킨다’라는 식의 표현은 없었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미국의 국가정책이 되었고 그리고 얼마 뒤 유엔의 정책이 되었습니다.
  또하나 중요한 것은 발전을 한다고 할까, 발전을 당하는 나라가 미국이 아니라 다른 나라라는 점입니다. 경제발전 정책의 대상은 미합중국이 아니라 세계의 상대적으로 가난한 나라들입니다. 식민지에서 막 해방된 나라이거나, 혹은 아직 식민지 상태에 놓여있는 나라가 대상입니다. 지금은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이 어느만큼 획기적인 일이었는지를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나라 A는 국가정책으로 나라 B를 발전시킨다(develop), 그것이 나라의 발전(development)이다"라고 하는 것, 이것이 왜 '고쳐 만들어진 말'인가 하면 기본적으로 일본어의 '발전'이나 '성장'도 그렇습니다만, 영어의 'develop(발전한다)'는 본래는 자동사입니다. 타동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언어로서 정당치 않게 들립니다. 국가 A가 국가 B의 '발전'을 정책으로 삼고 있는데 그 표현은 자동사라니, 이것은 큰 모순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문법상의 문제가 아니라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더글러스 러미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김종철/이반 옮김, 녹색평론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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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삶 그르니에 선집 4
장 그르니에 지음, 김용기 옮김 / 민음사 / 200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 이런 아포리즘류의 글은 그다지 읽지 않는 편이다. 어떤 아포리즘이나 그러하듯이 짧은 문장으로 '선언'을 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선언이기에 빛나는 지점도 있기 마련. 어쨌거나 장 그르니에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제목대로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이런 단순한(?) 주제로 글을 끌어갈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재주.

 

시베리아 횡단 여행자나 원양 항해자도 결국은 정착한다. 그는 더 이상 여행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여행>의 패로독스이다. 즉 <존재>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의도된 <변화>, <존재>를 상정했을 때에만 실재하는 그 <변화>가 이제는 <존재> 그 자체로 탈바꿈하기에 이른다. 상업적인 목적으로 여행하는 자는 자신의 습관에 집착한다. 그는 이전의 그 호텔 그 방에 다시 머무르려 하고 그 음식점의 그 테이블에서 식사하려 한다. 이렇게 해서 방랑자는, 자기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정착민이 된다. 말하자면 여행하지 않기 위해 여행하는 것이다.

 

어찌 됐든 왜곡 없이는 정보도 없는 것이다.

 

내가 서 있는 학문의 영역에서도 참고할 말들을 찾을 수 있었다.

 

  게다가 그렇게 하는 자는 자기만의 그 무엇을 쓰지 못한다. 그는 두 권의 참고 서적을 목발처럼 의지하지 않고서는 걸어 나아가지 못하는것이다. 애초에 자기의 본능을 따랐더라면 달릴 수도 있었을 텐데. 자신의 힘을 믿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그는 자기보다 먼저 있었던 자들의 이름을 인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긴다.

 

또 내가 무척이나 동의했던 부분, 침묵에 대한 단상. 나도 평소에 그렇게 생각했던 부분을 명확하게 요약하고 있다.

 

  동등한 관계에서도 무언가를 나타내기 위해 침묵을 이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 관계가 우호적인 감정에 근거해 있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하다. 만약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면, 가령 당신에게 체질적으로 호감을 갖지 않은 어떤 사람과 함께 산책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이보다 더한 고역이 어디 있겠는가. 함께 걷는 내내 그가 말이 없거나 아니면 당신이 말이 없거나……. 그렇지만 다정한 침묵에는, 그것이 동의이든 공감이든 혹은 사랑이든 어떤 공모의 감정이 깔려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동감이 갔던 것은 장 그르니에가 인용한 시구다. ㅋㅋㅋ

 

너는 술 마시는 죄를 범하였구나, 하고 그들은 말하지만

결단코 아니로다, 나는 참으면 죄가 되는 것밖에는 마신 적이 없노라

 

취하지 않고 산 자, 세상을 산 게 아니로다

 

그럼. 그렇구 말구.

 

내게도 언젠가 '아포리즘'을 쓸 수 있는 '현명'과 '통찰'이 생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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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하는 에디터 - 고경태 기자의 색깔 있는 편집 노하우
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한겨레21'과 '한겨레 신문 esc'를 거쳐 지금은 '씨네21' 편집장으로 있는 고경태의 편집 노하우.

편집이 참 매력있는 작업이긴한테, 또 이게 나름 3D 업종의 하나. 나로서는 적성에 맞는듯 하면서도 안맞는 직업 같다.

(뭐, 능력은 두째 치고. -_-)

 

어쨌거나 '한겨레21'을 10년 넘게 편집하면서 있었던 에피소드나 나름의 원칙, 기술들을 쉽게 들려주고 있다.

이 내용들은 비단 잡지 편집에만 적용되는 것들이 아니라, 일반적인 글쓰기에도 충분히 고려해야할 것들이다.

핵심은, '최대한 짧고 명료하게. 그러면서도 진부하거나 반복되지 않도록'.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저자가 노동운동 선전일꾼들과 만났을 때 그가 했던 말들.

 

  나는 마지막 결론을 이렇게 마무리지었다. "메마른 투쟁가여, 새로운 단어를 갖자." 위의 다섯 가지를 실천하려면 참신한 단어장부터 갖춰야 한다. 투쟁, 진군, 사수, 분쇄...., 이런 진부한 표현들에 갇히지 않을 때 상상력이 나온다. 흔히 노동자를 세상을 바꾸는 존재라고 한다. 그 세상을 바꾸는 존재가 자신은 얼마나 바꾸었나. 좀 세련되게, 그리고 전복적으로 바꿀 생각은 없단 말인가.

 

적어도 전선을 흐리지 않는 범위에서는 '재미'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재미가 없으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라고.

재미를 무조건 가볍다는 이유로 몰아내버리려는 엄숙함이, 왠지 싸워야할 대상과 너무나 비슷하지 않은가?

빵꾸똥꾸가 예의범절에 어긋난다고 지적해주시는 도덕적인 국회의원님과 마찬가지로.

 

어쨌거나 한 2시간이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 꼭 에디터가 아니더라도 즐겁게 볼 수 있는 책이다.

 

추가 : '~한다는 것'의 '것', '~하고 있는데', '~할 수 있는데' 따위의 표현을 되도록 안쓰는게 좋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생각해보니 그닥 필요한 표현은 아닌 듯 하지만, 이걸 안쓰고 문장 만들기가 참 어렵다. 완벽하게 버리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좀 신경써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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