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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평점 :
캐터 콜비츠의 인상 깊은 드로잉이 표지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책. 제목마저도 '이것이 인간인가'.
87년에 갑작스러운 자살(그러나 생각해보면 갑작스럽지 않은 자살은 어디에 있던가.)로 생을 마감한 프리모 레비의 회고록.
유대계였다는 이유로 그 또한 나치수용소에 갇혀야했고 상상하기도 힘든 현실을 살아가야 했다.
이 책은 그 수용소에서의 13개월에 대한 기록이다.
시대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나치스의 만행과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는 우리조차 영화나 많은 책을 통하여 익숙해져 있는 대학살.
하지만 이 책에서 분노의 어조를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자조와 차분함이 지배할 뿐.
그러므로 내 책은 죽음의 수용소라는 당혹스러운 주제로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이미 널리 알려진 잔학상에 관해 덧붙일 아무것도 없다. 이 책은 새로운 죄목을 찾아내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정신의 몇몇 측면에 대한 조용한 연구에 자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저렇게 끔찍한 상황을 당해본 적도 없으면서도 레비의 표현 하나하나에 한숨을 내쉬면서 가슴 속으로 전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곳에 오기 전 삶에 대한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흐릿했고 아득했다. 그래서 몹시 달콤하고 슬펐다. 각자의 유년 시절에 대한, 이미 끝나버린 모든 일들에 대한 기억처럼. 반면 수용소에 들어오는 순간 각자 전혀 다른 일련의 기억들이 시작되었다. 이것들은 날카롭고 가까웠다. 또한 매일 상처가 덧나듯 현재의 경험에 의해 계속 상기되었다.
오늘은 바람이 불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이상하게도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이, 어쩌면 아주 보잘 것 없을 수도 있는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절망의 문턱을 넘지 않도록 해주고 계속 살아가게 해준다. 비가 오지만 바람이 불지 않는다. 혹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 하지만 오늘 저녁 내가 추가로 죽을 배급받을 차례라는 것을 안다. 혹은 상황이 더 안 좋아서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보통 때와 다름 없이 배가 고프다. 그러면 정말로 바닥에 누워 있는 것 같을 때마다 종종 그렇듯 정말로 마음 속에 고통과 지루함밖에 느껴지지 않는데,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좋다, 나는 내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을 건드리거나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 수 있다. 그러면 비는 끝이 날 것이다.
승승장구하던 독일인들이 시작했던, 인간을 동물로 만들려는 작업은 패배한 독일인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우리 머리 위 수천 미터 상공의 회색 구름들사이에서 비행기들이 공중전으로 복잡한 기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무기력하고 힘없고 헐벗은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우리 시대의 인간들이 가장 정밀한 도구를 이용해 서로의 죽음을 구하고 있었다. 그들이 손가락만 한 번 움직이면 수용소 전체가 파괴되고 수천 명의 사람을 전멸시킬 수 있었다. 반면에 우리의 힘과 의지를 모두 다 합쳐도 우리들 중 한 사람의 생명을 단 1분도 연장할 수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요구가 많다. 죽은 사람들은 기다릴 수 있다.
마지막에 독일군이 철수를 시작하고 또 함께 유명한 '죽음의 행진'이 시작되면서, 수용소에 남겨진 병자와 부상자 포로들은
'인간을 동물로 만들려는 작업'을 스스로 완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진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주제 사라마구가 '눈 먼 자들의 도시'를 쓸 때, 이 책에서 영감을 얻었나 할 정도.
프리모 레비는 그 비참한 지옥 속에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로
'지칠 줄 몰랐던 인간에 대한 관심'과 '인간성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 두 가지를 들었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그렇게 지옥 같은 곳에서도 이곳의 참상을 '알려야겠다'라고 의지를 불태웠던 그가, 자살했다.
자살하기 몇 개월 전, 그는 이런 글을 썼다고 한다.
점점 젊은이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우리는 그것을 일종의 의무로, 동시에 위기로 본다.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위기, 귀 기울여지지 않을 위기. 사람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우리의 개인적인 경험들을 넘어서 혹은 그것과 상관 없이, 우리는 어떤 근본적인 뜻밖의 사건을 집단적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뜻밖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예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근본적인 것이다. (......) 과거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그러므로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눈을 뜨고 있는가. 이런 중요한 반성을 위해서라도 이 책은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책은 문학작품으로서도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게다가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꼼꼼한 번역과 깔끔한 편집까지 되어 있으니.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를 읽어봐야겠다. 요새 돌배개에서 맘에 드는 책을 많이 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