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 하워드 진의 자전적 역사 에세이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서문은 벌써 몇 번이나 읽었고, 본문도 몇 번을 뒤적거렸는데도 정독을 하지 못했었다. 그야말로 불가사의.

논문도 끝났겠다, 단단히 마음을 먹고 책을 집어들었다.

 

당신의 인생에서 '한 권의 책'을 꼽게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내게 바로 그 순간이 왔다. 바로 어제.

 

몇 번이나 읽었던 이 책의 서문은 여전히 내 가슴을 뛰게 만들었고,

 

  나는 매학기 첫 강의마다 내 학생들에게 그들이 나의 관점을 듣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다른 이들의 관점도 공정하게 다루도록 애쓰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나와 의견을 달리 하라고 격려해 주었다.

  나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객관성을 가장하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고 말하곤 했다. 몇몇은 이 은유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는데, 어떤 학생들은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그 의미를 자세히 분석해 보기까지 했다. 다른 학생들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바로 알아챘다. 이미 사태가 치명적인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고, 여기서 중립적이라 함은 그 방향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결국 내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나는 희망을 고집한다.

  이건 물론 느낌일 뿐이다. 하지만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느낌을 존중하지만 그럼에도 이유를 원한다.......나는 이유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해왔다. 나는 증거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의 증거제시, 즉 그의 삶에 대한 회고에 나는 현재 대한민국의 현실이 과거 미국의 그것과 너무나 닮아있음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학생들이 기성 당국에 도전하기 시작하면, 포위공격을 당하는 행정관료들은 종종 "누군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보곤 하는데, 이는 젊은이들은 스스로 생각하거나 행동할 능력이 없다는 속뜻을 담고 있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패배'에 대한 언급도 잊지 않는다.

 

  고통을 받고 있는 어떤 집단이 스스로에게 의지해야만 함을 알게 된다는 것은, 그러한 교훈이 단기적인 의미에서는 쓰라린 패배를 동반한다손 치더라도, 미래의 투쟁을 위해서는 자신을 강하게 하는 것이다.

 

작은 변화를 무시하는가? 하지만 당신 스스로 자문해보라. 당신을 '만들게' 된 계기들은 무엇이었는가를.

 

  이런 일련의 관계를 보면서 나는 사람들 사이의 연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관해 생각했다-책을 읽고, 한 사람을 만나고, 한 순간의 경험을 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삶이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아무리 작은 행동이라도 간단히 무시하거나 제쳐두어서는 안된다.

 

길거리를 점령하니 불법시위라고? 왜 '불법'을 저지르냐고? 왜 '' 불법을 저지르냐고는 묻지 않는가?

(요새 나를 제일 꼭지 돌게 만드는 소리다.)

그러니까, 당신이 말하는 것이 이런 것인가? 합법적인 방법으로 이야기하라고?

웃기지 마라. 60년대의 미국에서 (합법적인) 백인전용 좌석에 앉은 흑인(그러니까 당신이 말하는 그 불법행위자)을

경찰이 두들겨 패고 쓰러진 그를 향해 전기봉으로 계속 지지는 것이 '합법'이었다.

흑인들은 그 고상한 폭력적 '합법'에 저항하기 위해 비폭력적 '불법'으로 백인전용 좌석에 앉았다.

 

시민불복종은 그것이 사회 안정을 위협하고 무정부 상태를 낳는다는 일각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결코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큰 위험은 시민의 복종, 즉 개인의 양심을 정부의 권위에 굴복시키는 것이라고 나는 역설했다. 그러한 복종은 전체주의 국가들에서 본 것처럼 공포를 낳고,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이른바 민주적 정부의 자의적 결정 아래 국민 대중이 전쟁을 받아들이는 결과를 낳는 것이었다.......

  이러한 세계에서 법의 지배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고 나는 말했다.......

......기술적인 의미에서는 법을 위반한 것일지라도, 시민불복종은 대단히 민주적인 행위이며 시민들이 "불만의 원인을 시정하도록 정부에 청원"할 수 있다는 권리장전의 조항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억해야할 것은 그것이 단지 50년 전의 일이란 것이다.

 

  우리가 희망을 잃지 않으려면, 바로 이러한 장기적인 변화를 반드시 응시해야 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비관주의는 자기충족적인 예언이 된다. 그것은 우리의 행동의지를 무력하게 만듦으로써 자기 자신을 재생산한다.

 

그 누구도 변하지 않을 거라 믿었던 것들이 50년 사이에, 변했다. 자, 합법과 불법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직도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가?

 

하워드 진은 '역사학자'다.

'역사학자'인 하워드 진은 나를 끝까지 그의 팬으로 만들고 있었다.

 

처음부터 나는 강의에 나 자신의 역사를 부어넣었다. 나는 다른 시각들을 공정하게 다루려 애썼지만, '객관성' 이상의 것을 원했다.

 

"개인 사업으로서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너무도 많은 역사가 사회적 양심이 없이 씌어진다고 생각한 거지요. 또 역사가의 어딘가에 사회적 양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역사를 서술할 때는 따로 떼어둡니다. 역사 서술이란 전문적 직무로 행해지기 때문이지요. 이 일은 뭔가를 출간하기 위해, 대학에서 자리를 얻기 위해, 종신재직권을 얻기 위해, 승진하기 위해, 명성을 높이기 위해 이루어집니다. 역사 서술은 판매되어 이윤을 내는 책으로 출판사가 출간합니다.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가치관이 무엇인지, 어떤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자신들이 배경이 무엇인지에 관해 말해야 하며, 자신들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알게 하여 역사를 읽는 젊은이들과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사료에만 의지하지 않고 많은 사료를 찾아보도록 미리 알려줘야 합니다. 따라서 객관적인 건 불가능하며 만약 가능하더라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시각과 가치관을 반영하는 역사, 다시 말해 객관적이지 않은 역사가 필요합니다.

 

제 말은 이런 겁니다. 콜럼버스를 예로 들어봅시다. 누구든 틀거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하버드의 역사학자 새무얼 엘리엇 모리슨이 자신의 콜럼버스 전기에서 실제로 행한 방식은 이렇습니다. 콜럼버스는 대량학살을 저지르긴 했지만 불가사의한 뱃사람이었다, 그는 서반구에서 이 섬들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비범하고도 특별한 일을 했다, 이렇지요. 여기서 뭘 강조하고 있습니까? 그는 대량학살을 저지르긴 했지만... 훌륭한 뱃사람이었다. 저라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그는 훌륭한 뱃사람이었지만, 사람들을 극도로 끔찍하고 잔인하게 다뤘다, 이렇게요. 이런 식으로 똑같은 사실을 갖고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으로 말하는 거지요.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우리는 자기의 편견을 보여주는 겁니다. 저는 우리의 편견을 역사에 대한 인도적 관점이라는 방향으로 두는 게 좋다고 믿습니다.

 

지난 번에 절대 자서전 따위는 쓰지 않겠다고 툴툴댔던 내가, 이 한 편의 자전적 역사 에세이에 감동을 받을 줄은 몰랐다.

그건 저자의 솔직함 때문이기도 하고, 그의 '실천' 때문이기도 하다. 또 여유와 위트를 잊지 않는 그의 '인간다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는 나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었고, 나는 다른 사람에게도 이 증거를 제시하고 싶다. 그는 이미 나의 '스승'이다.

 

나에게도 포기할 권리 따위는 '없다'.

 

  혁명적 변화는 한 차례의 격변적 순간(그런 순간들을 조심하라!)으로서가 아니라 끝없는 놀람의 연속, 보다 좋은 사회를 향한 지그재그꼴의 움직임으로 오는 것이다.

  변화의 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거대한 영웅적 행동에 착수할 필요는 없다. 작은 행동이라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반복한다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얼마 전 타계한 선생을 다시 한 번 추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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