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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
위기철 지음 / 청년사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사실 대단한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소설도 아니고 심오한 사상이 담긴 소설도 아니다.
하지만 난 이 소설을 사랑한다. ^^
추상적인 말들이나 주인공의 머릿속에 맴도는 알듯모를듯한 말들로 가득한 소설들 보다는
하나하나의 인물들이 바로 옆에 있는듯 살아있고, 특히나 주인공에게 애착이 가는 이 소설이 좋다.
그냥 그런 이야기...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글쎄.
난 이 소설을 한 번씩 다시 읽고 나면 왠지 모를 따스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힘도 나고. ^^
주인공의 모습은, 물론 나와는 또 많이 다르지만, 일면 나를 보는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위기철씨의 아내가 그려주었다는 삽화도 상당히 맘에 들고. ^^
그냥 일상생활 속의 이야기인 탓에 '인상 깊은 구절'이라고 꼽을 것은 딱히 없다.
하지만 어제 다시 읽었을 때는 이 부분이 눈에 띄었다. 구절이라고 하기엔 좀 길지만.
- 쓰레기통에 버려진 시계는 몹시 슬펐어요.
그림책 원고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헌제는 고장난 시계가 눈물을 흘리며 엉엉 울고 있는 모습을 그렸지만, 이내 도화지를 구겨버렸다. '몹시 슬픈' 자는 결코 엉엉 울지 않으며, 오직 억울한 자만이 엉엉 우는 법이다. 억울함은 타인을 향한 감정이지만, 슬픔은 스스로를 향한 감정이니까.
아이는 아빠가 맡을 거예요. 가정법원에서 이혼심사를 받을 때 아이의 양육권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판사의 물음에 아내는 헌제의 말을 앞질러 그렇게 대답했다. 마치 헌제의 입에서 엉뚱한 대답이 튀어나올까 두렵기라도 한 것처럼. 물론 그가 유진이를 맡기로 사전에 협의가 되어 있기는 했다. 협의라기보다 아내가 그렇게 하자고 했고, 그가 동의했던 것이다. 아이의 양육권뿐만 아니었다. 아내는 이혼의 모든 수속과 절차를, 그런 일을 여러 차례나 겪어본 사람처럼 혼자 처리했다. 재산은 아이의 양육을 맡은 당신이 3분지 2를 갖고 나머지를 내가 갖는다, 집 안 가구 가운데 오디오세트와 비디오와 장식장과 전자레인지는 내가 갖고 나머지는 당신이 갖는다, 나는 모친의 면접교섭권을 행사하여 주말에 1박 2일 동안 유진이를 데려가 함께 자고 올 수 있다, 만일 당신이 새로 결혼한다면 유진이의 장래를 위해 만나는 터울을 조절할 수 있다....... 아내는 미리 적어두기라도 한 것처럼 세세한 사항까지 조목조목 따졌고, 그가 한 일이라고는 아내가 하자는 대로 순순히 동의해준 일뿐이었다. 이혼서류도 아내가 두 장을 작성하고, 그는 아내가 지적하는 자리에 도장만 꾹꾹 찍어주었다. 그때까지도 이혼이라는 문제가 그리 실감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어느 날 유진이를 데리고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아내는 그 사이에 가져가기로 한 짐들을 싣고 떠나버렸다. 청소까지 해놓고 갈 여유는 없었던 모양인지 가구를 들어낸 자리에는 먼지덩어리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가구가 놓여있던 장판에는 노란 얼룩이 묻어 있었다. 그 자국을 보자 비로소 아내가 떠났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그는 유진이를 안방에 앉혀놓고 빗자루로 수북이 쌓여 있는 먼지덩어리들을 쓰레받기에 쓸어 담았다. 그리고 베란다에서 화분을 들고 와 가구가 놓여 있던 자리에 놓았다. 텅 빈 자리를 보면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밤에 유진이를 재우고 난 다음에야 그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꺽꺽 울음을 터뜨렸다. 슬픔은 그런 것이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시계는 몹시 슬펐어요.
그는 새 도화지 위에 이번에는 고장난 시계가 상심하여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을 그렸지만, 그것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심과 슬픔도 다르다. 상심은 희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슬픔은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이 소설에 의하면, 다행히도(?) 난 단지 억울했던 것은 아닌 거 같다. -.-a
그래.. 어쩌면 우린 모두 고슴도치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