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이름으로 죽은 여인들 동양문화산책 6
전여강 지음, 이재정 옮김 / 예문서원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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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미주를 제외하고 200페이지 정도 되는 앏은 책이지만 상당히 흥미로운 책이다.
중국 명, 청대에 '자살'한 여성들을 다루고 있다. 물론 말이 자살이지, 살인에 가깝지만.
어느 정도 알려진대로(알려졌나?;) 적지 않은 명, 청대의 여성들은 자살을 요구 받기도 했다.
남편이 죽었을 때 따라 죽는 경우는 물론이고, 얼굴도 보지 않은 약혼자가 결혼 전 죽었을 경우도
자살을 하고는 했던 것이다. 이럴 경우 이 죽음을 '자살'이라고 볼 수 있을까?
 
표지에 나와있는 저 그림은 '탑대'의식의 일부로 탑을 쌓아 그 위에서 공개적으로 자살했던 그림이다.
날짜와 장소를 널리 알리고 수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의식을 치뤘던 것이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열녀'들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는데
과연 이 여성들의 의지는 어떻게 형성됐던 것일까.
 
저자는 이 책에서 두 가지 재미있는 부분을 지적한다.
첫째, 과거에 실패한 절망한 남성 유학자들이 자살을 부추겼다는 것.
그들은 자신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여성들의 고통을 보며 위로하고 즐겼다는 것이다.
둘째, 여성들 또한 자살에 대해 감성적 자발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당시 유행하던 불교와 민간신앙은 귀신이 되어 상대를 벌하려는 경향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여성들이 더욱 쉽게(?) 자살을 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상당히 흥미로운 관점임에도 불구하고 이 관점을 효과적으로 증명하고 있지는 못한 것이 좀 아쉽다.
그는 중국 지방지를 통해 과거 지원자의 수와 여성 자살자의 수의 변화를 보여주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려고 한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그 두 가지 수치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이건 좀 오버하는 거지만;; 여성 자살자 수의 그래프 변화 추이가
당시 닭고기 소비량의 변화와 일치하다면 이것이 서로 연관있다고 볼 수 있는가 하는 거다.
물론 저자의 가설은 심증적으로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것이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설득력을 가지려면 단순한 동시적 수치 증가 이외에
다른 것들이 제시되어야 할 것 같다.
저자의 근거에서 한 가지만 지적하자면,
저자가 말하고 있듯이 당시 문맹률이 엄청 높았고 특히 여성의 경우 더 심했을텐데
문인들이 열녀를 칭송하는 글을 마구 지어냈다고 해서
그것이 얼마나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그들의 의도가 자살을 칭송하고 권장한 것은 맞지만
그것이 두 개의 그래프를 제시하여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심증'은 있다, 언제나. 그러나...
결국 저자는 Sommer가 지적하는 것처럼, 자살에 대한 원인을 밝히려고 했으나
효과적으로 밝혀내지는 못한 것 같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저자의 격정적인 문체다.
그는 여성이 말도 안되는 이유로 자살을 해야만 했던 것, 그리고 그것을 추앙하고 칭송했던 것에
심한 분노를 느끼고 있는 듯 하다.
물론 내 생각도 저자와 같다. 하지만 그것을 글로 풀어 내면서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선
때론 자신의 감정을 숨기거나 가장하는 것도 하나의 기술이 아닐까.
학문의 시작이 '감정적 요인'인 것이 나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러한 시작이 연구를 지속적으로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위대한'과 같은 가치판단이 들어간 표현을 남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
차라리 그 표현을 독자의 머리 속에 스스로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 더 효과적이진 않을까.
 
이런 아쉬운 점이 있지만,
단식으로 자살한 자들의 의도(자신의 시도를 말려주기를 호소하는 자살 방법)나
'할고'와 같은 자해효도;;에 대한 분석 등은 상당히 흥미롭다.
허벅지나 신체 일부를 베어내어 병을 앓는 부모에게 먹이는 행위.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그러나 그 행위들은 신사층들에게는 무지랭이 백성들이 하는 행위였을 뿐이다. (재밌지 않은가!)
읽는 속도는 더뎠지만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고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들을 나 자신에게 다시 투영할 수 있었던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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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눈물 -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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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인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에서도 나타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독서기이다.
그럼에도 이 짧은 에세이가 의미가 있는 것은 이 책이 '번역서'이기 때문이리라.
조선인임을 결코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한국어로 책을 쓸 수 없는 재일조선인.
 
에세이스트클럽상 수상 인사말에서 나는 자신을 '언어의 감옥'에 갇힌 수인(囚人)으로 표현했다. "나는 우리 민족에 대한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반대한다. 그 연장선에 위치하고 있는 재일교포들에 대한 일본의 차별정책을 반대한다. 식민지배의 죄과를 부인하면서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 우익의 사상을 반대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일본어로 사고하고 일본어로 표현하고 있다. 일본어를 거치지 않는다면 나의 사고며 표현 행위마저도 모두 불가능하다. 또 이런 이유로 나의 글쓰기는 주로 일본인들의 눈에만 띌 뿐이다. 요컨대 '나'라는 존재는 일본어라는 '언어의 감옥'에 갇힌 수인인 것이다.
 
비록 조선말을 하지 못하지만 자신이 조선인임을 항상 자각하고 있었고
(또는 자각할 수 밖에 없었고) '조국'이라는 말에 남다른 감정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형제들.
때문에 그의 형들은 모두 '조국'으로 유학을 갔으나,
조국은 그들을 잡아들여 고문하고 십수년간 유폐시켰다.
 
어쨌거나 이 책은 독서기인만큼 많은 책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 내가 읽은 책이라고는
'삼국지'와 루쉰의 '고향' 달랑 두 편 뿐이다.
물론 개인차일 수도 있지만 내 독서량이 지극히 부족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인상 깊었던 구절.
 
어른의 눈물을 아는 자가 아이의 눈물을 안다. 아이의 눈물을 이해하는 자가 어른의 눈물까지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읽었던 프랑츠 파농의 책 중 한 구절 또한 내 머리 속에 깊이 남게 될 것 같다.
 
하나의 다리(橋)를 건설하는 일이, 만일 그곳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이들의 의식을 풍요롭게 하지 못할 양이면, 차라리 그 다리는 만들지 않는 편이 낫다. 시민들은 예전처럼 헤엄을 쳐서 건너든가 아니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 된다. 다리는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오른 것이어서는 안 된다. [다리는] 사회 전체에 절대로 데우스엑스마키나Deus ex machina식으로 만들어져서는 안된다. 그런 방식이 아니라 시민들의 피와 땀, 두뇌 속에서 태어나야만 한다. (...중략...) 시민들은 다리를 개인의 소유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때야 비로소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분량이 많지 않은 책이었지만, 깔끔하고도 정성이 깃들여있는 번역과 함께 즐겁게 읽었던 책이었다. 물론 책도 이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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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자의 고독 - 모더니티총서 2 문학동네 인문 라이브러리 7
노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김수정 옮김 / 문학동네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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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음'의 나락^^;;으로 몰아 넣었던 책.

이 책을 처음 접했던 것이 대학교 4학년이 되기 전 겨울인 걸로 기억한다.

그때 생일 선물로 이 책을 받았는데(뭐.. 달라고 한거지만;;ㅋ), 가장 소중한 책 중 하나다.

앞에 얘기했던 것 처럼 내가 '죽음'이라는 테마에 더 심취할 수 있도록 해준 책이고

그렇기 때문에 어제처럼 한번 펼쳐들면 멈추지 못하고 끝까지 다 읽을 수 밖에 없는 책이다.

 

이 책은 총 3파트, '죽어가는 자의 고독', '노화와 죽음', 그리고 해설로 이루어져 있다.

총 150페이지가 안되는 아주 적은 분량에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죽어가는 자의 고독'은 80페이지.

짧은 글 속에서 집필 당시 80이 넘었던 이 老大家의 역량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엘리아스는 필립 아리에스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한다.

과거를 무조건 미화시키고 현재를 격렬히 비판하는 듯한 아리에스의 이분법을 비판하고

아리에스의 비판에 포함되지 않는 '변화의 이유'를 설명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결국 현대의 죽음은 길들여진듯이 보이고 그 폭력성도 제어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현대의 이성은 죽음 혹은 죽어가는 자들을 일반적인 삶으로부터 효과적으로 격리시키기 시작했고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죽음 앞에서 할 말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관용어구를 구태의연하고 가식적이라고 느끼면서도

막상 죽음 앞에서 할 말은 잃어버린다.

죽음이라는 '짐'을 모두 외면해왔고 또 그 짐을 이제 파편화된 개인 혼자서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도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죽음을 끝내 숨기려고만 하고

죽어가는 자들에게 대한 정서적인 배려보다는 장기(臟器)에 대한 위생적 조치만이 존재하는 현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에 대한 고민은 '삶'에 대한 고민일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매우 근본적이고도 큰 부분을 애써 외면하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과연 잘 사는 것일까?...

 

이 응축된 저술을 읽는 내내(그리고 읽을 때마다) 대가는 바로 이런 것이구나라는

감동(?)을 떨쳐버리기 힘들고, 그가 제시하는 많은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의 대표저작이자 이 책의 기본 바탕이 되는 '문명화 과정'에 대한

시니컬한 비판도 가능하다. (왜 문명에 '단계'가 있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내게 너무나도 큰 책일 수 밖에 없다.

때문에 이번 주 있을 학회 첫 텍스트로 내가 추천했던 것이기도 하고.

사회학, 인문학이 나가야할 전략적 방향을 보여준 책이랄까.

늙은 대학자의 인간에 대한 진한 애정이 느껴지는 명저다.

 

어제 다시 읽으면서도 이 책을 처음 접했던 그때의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오는 듯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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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아 아, 사람아!
다이허우잉 지음, 신영복 옮김 / 다섯수레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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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의 소설을 제외하고는 처음 읽은 현대 중국 소설이 아닐까 싶다.
(하긴.. 루쉰을 '현대'라고 하기엔 좀 그런가?;;)
이 책을 건네받은 것이 작년 가을쯤이었던 걸로 아는데 이제야 다 읽었으니 내 게으름도 참...;
그렇게 띄엄띄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 책을 펼때마다 전의 내용을 기억해내야하는
그런 어려움은 겪지 않은 신기한 소설이다.
물론 기본적인 플롯이 매우 간단한 이유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거 같다.
 
이 책의 인상 깊은 점은, 하나의 시선으로 사건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10명이 넘는 등장인물들의
시선을 넘나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인물들의 시선을 돌아다니면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휴머니즘.
(물론 그 속에 인간과 인간의 사랑이 들어있고.)
하긴.. 이 작가가 살았던 시대는 휴머니즘이 우파적 부르조아 사상이라고 비난을 받던 시기였으니.
아니다. 그 휴머니즘은 종종 선택을 강요하는 요즘에도 소심함, 우유부단함으로 비난 받는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소심함이나 우유부단함일까?...
 
그러나 이 작가의 말 속에도 나름대로의 한계가 있다.
그 휴머니즘이 왜 국가를 위한 것, 민족을 위한 것이 되어야하는 것인가?라는.
어렸을 적에 TV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 적이 있다. 최불암씨의 대사였던 걸로 기억.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거라'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 좋은 말인 것 같지만 지금 내 생각은 좀 다르다.
그것보다는 사람을 위한 사회, 그것이 먼저가 아닐까.
그리고 그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노력하고 살아가고 사랑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여 주인공인  손 유에의 편지 중 한 구절이 마음 속에 남았다.
 
...우리는 낙관하고 있어요. 젠후는 항상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인생이란 얻는 것과 잃는 것 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얻는 것을 좋아하고 잃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잃는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잃지 않으면 얻을 수도 없는 법이다. 나는 이 견해에 쌍수를 들어 찬성입니다. 얻어도 거만해지지 않고 잃어도 우울해지지 않는 경지에 달한다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우리들은 다만 득실을 따지는 기분에 스스로가 좌우되지 않도록 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혹은 사랑을 잃었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타인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를 가진 적도 없고 그녀 또한 나를 가진 적이 없다.
'나의 것, 나의 사람'이라는 착각 때문에 나는 더 집착하게 되었고
그만큼 스스로 나를 더 해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선물로 주었던 '무소유' 앞장에 적었던 나의 메모를 서서히 잊어가고 있던 것은 아니었던가.
 
'소유가 아닌 우리의 '共存'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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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
위기철 지음 / 청년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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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사실 대단한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소설도 아니고 심오한 사상이 담긴 소설도 아니다.

하지만 난 이 소설을 사랑한다. ^^

추상적인 말들이나 주인공의 머릿속에 맴도는 알듯모를듯한 말들로 가득한 소설들 보다는

하나하나의 인물들이 바로 옆에 있는듯 살아있고, 특히나 주인공에게 애착이 가는 이 소설이 좋다.

그냥 그런 이야기...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글쎄.

난 이 소설을 한 번씩 다시 읽고 나면 왠지 모를 따스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힘도 나고. ^^

주인공의 모습은, 물론 나와는 또 많이 다르지만, 일면 나를 보는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위기철씨의 아내가 그려주었다는 삽화도 상당히 맘에 들고. ^^

 

그냥 일상생활 속의 이야기인 탓에 '인상 깊은 구절'이라고 꼽을 것은 딱히 없다.

하지만 어제 다시 읽었을 때는 이 부분이 눈에 띄었다. 구절이라고 하기엔 좀 길지만.

 

 - 쓰레기통에 버려진 시계는 몹시 슬펐어요.

 그림책 원고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헌제는 고장난 시계가 눈물을 흘리며 엉엉 울고 있는 모습을 그렸지만, 이내 도화지를 구겨버렸다. '몹시 슬픈' 자는 결코 엉엉 울지 않으며, 오직 억울한 자만이 엉엉 우는 법이다. 억울함은 타인을 향한 감정이지만, 슬픔은 스스로를 향한 감정이니까.

 

 아이는 아빠가 맡을 거예요. 가정법원에서 이혼심사를 받을 때 아이의 양육권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판사의 물음에 아내는 헌제의 말을 앞질러 그렇게 대답했다. 마치 헌제의 입에서 엉뚱한 대답이 튀어나올까 두렵기라도 한 것처럼. 물론 그가 유진이를 맡기로 사전에 협의가 되어 있기는 했다. 협의라기보다 아내가 그렇게 하자고 했고, 그가 동의했던 것이다. 아이의 양육권뿐만 아니었다. 아내는 이혼의 모든 수속과 절차를, 그런 일을 여러 차례나 겪어본 사람처럼 혼자 처리했다. 재산은 아이의 양육을 맡은 당신이 3분지 2를 갖고 나머지를 내가 갖는다, 집 안 가구 가운데 오디오세트와 비디오와 장식장과 전자레인지는 내가 갖고 나머지는 당신이 갖는다, 나는 모친의 면접교섭권을 행사하여 주말에 1박 2일 동안 유진이를 데려가 함께 자고 올 수 있다, 만일 당신이 새로 결혼한다면 유진이의 장래를 위해 만나는 터울을 조절할 수 있다....... 아내는 미리 적어두기라도 한 것처럼 세세한 사항까지 조목조목 따졌고, 그가 한 일이라고는 아내가 하자는 대로 순순히 동의해준 일뿐이었다. 이혼서류도 아내가 두 장을 작성하고, 그는 아내가 지적하는 자리에 도장만 꾹꾹 찍어주었다. 그때까지도 이혼이라는 문제가 그리 실감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어느 날 유진이를 데리고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아내는 그 사이에 가져가기로 한 짐들을 싣고 떠나버렸다. 청소까지 해놓고 갈 여유는 없었던 모양인지 가구를 들어낸 자리에는 먼지덩어리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가구가 놓여있던 장판에는 노란 얼룩이 묻어 있었다. 그 자국을 보자 비로소 아내가 떠났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그는 유진이를 안방에 앉혀놓고 빗자루로 수북이 쌓여 있는 먼지덩어리들을 쓰레받기에 쓸어 담았다. 그리고 베란다에서 화분을 들고 와 가구가 놓여 있던 자리에 놓았다. 텅 빈 자리를 보면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밤에 유진이를 재우고 난 다음에야 그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꺽꺽 울음을 터뜨렸다. 슬픔은 그런 것이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시계는 몹시 슬펐어요.

 그는 새 도화지 위에 이번에는 고장난 시계가 상심하여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을 그렸지만, 그것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심과 슬픔도 다르다. 상심은 희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슬픔은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이 소설에 의하면, 다행히도(?) 난 단지 억울했던 것은 아닌 거 같다. -.-a

 

그래.. 어쩌면 우린 모두 고슴도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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