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의 세계
위수정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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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게 뭐지? 하면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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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로 첫마디를 꺼낸 것 같다만, 좋은 의미에서 쓴 표현임을 미리 밝힌다. 여러모로 흥미롭게 읽었다. 위수정 씨의 소설이, 기존에 내가 읽었던 소설들과 사뭇 다른 느낌을 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새로운 표현이나 이야기를 만났다는 뜻은 아니다. 기이하거나 난해하다는 인상도 전혀 없었다. 그런 '다름'과는 또 다른 '다름'이다.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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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행히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 다른 이의 말을 빌리면 되니까. 평론가 백지은 씨가 쓴 해설의 첫 문단을 통째로 인용해 보자면 이렇다: "소설집의 해설이 소설 속 인물이나 사건의 모호함에 대한 명확한 의미를 알려주는 글은 아니고, 소설이 본래 명확함을 모호하게 처리하는 방식도 아니나, 어떤 소설은 읽고 나서 그 이야기에 대해 궁금한 것이 생겨나 다른 독자의 생각을 묻고 싶어지기도 하는 법이고 그런 때면 해설을 기대하게도 될 것이다. 『은의 세계』의 독자들은 어떨까. 위수정의 이야기는 굵직한 사건을 마련하지 않고 명료한 사실을 도입하지 않고 단순한 인과관계를 부각하지 않으므로 사건이나 사실의 맥락을 세상의 의미로 파악하는 독자라면 어떤 장면이나 상황에 대해 부연이나 해명을 기다리게 되는 경우가 없지 않을 것이다. '은의 세계'라는 제목부터, 아마도 주요 인물인 '명은(과 경은)'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라 짐작하지만 그것이 어떤 세계인지, 왜 그 세계를 제목으로 삼았는지 확연하지는 않아서, 누군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 제목이 타당하다는 분석을 내놓는다면 반가울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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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런 글을 만나면 의심해 봐야 한다. 평론가가 시작부터 '소설집의 해설은 어떠어떠하다' 식으로 운을 뗀다면, 높은 확률로 그 소설(혹은 평론) 자체가 문제적일 수 있다는걸. 나 역시 본론을 꺼내기 전에 평론가의 해설부터 운운하고 있지 않는가? 이어지는 글도 보자: "그런데 정말 위수정의 소설에는 반드시 해명되어야 할 것들이 있는 것일까? 말하는 이가 뭔가를 가리거나 숨기는가? 속마음이나 진실과 반대로 말하고 행동하는가? 또는 말로 표현되지 못하는 관념이나 심상이 유난히 많은가? 소설을 읽으면서 사건의 전모나 인물들 사이의 분위기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을 수 있다 해도 그것이 소설에 감춰진 것, 부정확한 것, 난해한 것이 많아서는 아니다. 위수정의 이야기는 모순되지도, 부조리하지도, 일그러지지도 않았다. 다만 어떤 서사를 구성하기 위해 알려져야 할, 혹은 알리고 싶은 정보가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의 감각이 조금 독특하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위수정의 소설은 인과관계가 명확한 화소들이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연결되는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확정적이지 않은 느낌이 지속될 수도 있겠으나, 매 장면들은 전혀 희미하지 않고 그 연쇄는 결코 헐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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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러니까 저 글의 핵심은 이거다: 서사를 이어가는 위수정 씨의 방식(혹은 감각)이 어딘지 조금 독특하다는 점. 그렇다고 그 방식이 난해하기는커녕 뚜렷하고 선명하다는 점. 이를 미리 염두에 두고 읽으면 서서히 소설들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나는 두 번째 단편 「안개는 두 명」을 따라가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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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비 내리는 날 동물원. '선주'와 '유리'는 우산을 쓴 채로 우리 주변을 돌아다닌다. 저 멀리 초등학교 저학년쯤 돼 보이는 애들과 아빠로 보이는 남자가 있다. 한 손에 공룡 모양 풍선을 든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그때 한 아이가 넘어지자 (아마도 아빠일) 남자 입에서 나지막이 좆같네, 욕이 새어 나오고 그걸 선주와 유리가 듣는다. 남자가 아이에게 가면서 떨어뜨린 공룡 모양 풍선을 두 사람은 훔친다. 그대로 택시를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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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반지하의 작업실. 이곳은 미디어 아트를 다루는 선주의 공간이고…… 곁에 있는 유리와는 레즈비언 바에서 만나 친해진 사이다. 아, 두 사람은 사실 레즈비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거기서 만난 인연이 지금까지도 이어졌는데, 가끔 서로의 몸을 더듬거나 키스하기도 한다. 당연히 이런저런 얘기도 공유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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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조만간 선주는 화영과 만나기로 했다. 화영과는 예전에 대만 레지던시 참여 작가로 알게 됐는데 — 화영은 회화 전공자다 — 알고 보니 선주와 중학교 동창 사이였단다. 비록 선주는 화영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지만…… 반면 화영은 선주를 알은체하며 무례하게 굴었다. 가령 이러한 말들로: "설치 하는 애들, 자기들이 뭘 하고 있는지는 알고나 하는 걸까? 꿈보다 해몽이 아주. 아, 네 얘기는 아니고.” 그래서 화영에게서 온 연락을 무시하려 했으나, 한동안 서로 소식도 왕래도 없었기에 약속을 잡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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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주말의 광화문. 재회한 화영의 모습은 과거와 몰라보게 달라져 있다. 임신 7개월 차 ― 예전에 그 대만 레지던스를 다녀온 뒤로 만난 남자와 사귄 화영은 아이를 배면서 결혼했고, 그림은 완전히 접었단다. 일말의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대신 화영은 다가올 선주의 전시 '안개는 조명'에 관심을 보인다. 그래서 선주가 전시의 구조와 기획에 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자…… 화영은 생뚱맞은 질문을 던진다. 알고 보니 화영이 전시 제목을 '안개는 두 명'으로 잘못 알아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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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 뒤로도 얼떨결에 화영을 작업실로 초대해버린 선주. 화영은 임신한 몸으로 담배를 피우며 말한다. "사실, 너한테 특별히 할 말 없어. 그냥 놀고 싶었어. 예전처럼." 이때 예고 없이 작업실로 유리가 찾아오면서…… 뜻밖의 삼자대면 상황이 펼쳐진다. 그리고 취한 화영(그 사이에 화영은 술을 찾았고, 맥주를 반쯤 마시더니 거기에 소주까지 섞어 마셨다)이 제안한 '거짓말 게임'에 모두 반강제로 참여한다. 규칙은 간단하다. 듣기에는 진실인 것 같지만 진실이 아닌 말만 하기. 예컨대 두 사람이 무슨 관계냐고 묻는 화영의 말에 유리가 '서로 마주 보며 자위하는 사이'라고 답하듯이.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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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그런데 거짓말을 하면 할수록 세 사람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른다. 게임을 빌미로 유리는 선주의 진심을 떠보고, 화영은 선주가 기억 못 하는 중학교 시절 일을 끄집어 낸다. 무엇이 거짓이고 진실이고 진심일까. 유리가 말한다: "저 언니 재밌어. 좀 미친 거 같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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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러게. 그러니까 줄거리 요약은 이쯤에서 관두고 내 감상평을 써야 할 차례인데.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해야 할까. (좋은 의미에서) 미친 거 같다. 이게 뭐지? 줄거리만 놔두고 내 감상평을 따로 쓰고 싶지 않을 정도로,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말해야 한다면…… 뚜렷한 사건이나 결정적 장면 없이 유유히 흘러가면서, 어느 순간 멈춰 서는 이야기에 매료됐달까. 그래서 이게 무슨 내용인데? 혹자는 묻겠지만 그 '요약할(될) 수 없음'이 역설적으로 이 소설의 매력 아닐까. 드러난 이야기보다 가려진 이야기가 더 많다. 그리고 독자들은, 드러난 이야기를 더듬으며 가려진 이야기를 가늠해 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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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래서 이처럼 끝까지 이야기가 가려진 단편들에 마음이 끌렸다. 전반부의 단편들이 거의 그랬고(특히 「무덤이 조금씩」이 기억에 남는다), 외려 후반부의 단편들은 진실을 드러내려 한 시도가 엿보여 아쉬웠다.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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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그렇다면 위에서 평론가 백지은 씨가 말한 '서사를 이어가는 방식의 독특함'과 '그 방식의 뚜렷함'은 무얼 뜻하는가. 이에 관해 나도 나름의 답을 해보자면: ① 위수정 씨의 소설은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밟는다. 보통 소설가들은 이야기에 '반전'을 주려는 목적으로 중반에 과거 회상을 끼워 넣거나 초반부터 미래 시점을 제시하는 식으로 시간을 꼬는 데 반해 위수정 씨의 소설은 대체로 시간 순서를 '그대로' 보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② 등장인물들도 독자들도 앞날을 모른다. 같은 시간 선상을 밟으므로 등장인물과 독자는 다가올 앞날을 함께 겪고 서로 동화된다. 그(등장인물)가 겪는 일이 나(독자)도 겪는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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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물론 모든 소설은 독자가 등장인물에 이입되도록 설계된다. 그러나 위수정 씨의 소설은 (어쩌면 이게 가장 특별한 점일 텐데) ③ '사건'을 쫓는 요즘 서사들과 달리 '감정'을 탐구하는 데 집중한다. 단순히 등장인물과 독자가 같은 사건을 목격하고 놀라워하는, 그 정도의 감상에 그치지 않고 그 장면을 '같은 눈'에서 바라보고 느낄 수 있도록. 예컨대 사건의 관점에서 보면 초반의 동물원 장면(내가 쓴 6번 글 뭉치)은 이후 전개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럼에도 독자는 함께 겪는다. 넘어진 아이와 남자의 욕지거리를 듣고, 공룡 풍선을 훔쳐 달아난다. 그 불안함, 거북함, 통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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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마지막으로 「안개는 두 명」에 나오는 '안개는 조명' 전시에 관한 설명을 인용한다. 이 전시 자체가 위수정 씨의 소설 세계를 인유하는 것 같아서: "두 개의 방에 각각 사진과 다채널 작업을 전시할 예정이야. 사진에서는 피사체가 잘 보이지 않아. 안개로 덮여 있거든, 사진 자체에. 희미하게 색감만 보이거나 아니면 주위의 배경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그 방에는 도시의 백색소음을 사운드로 깔 거야. 그게 일종의 힌트로 작용하는 건데……. 이어지는 다채널 작업은 사진에서 안개를 삭제하고 피사체만 선명하게 드러나는 방향으로. 하지만 극도로 클로즈업해서, 선명하지만 정작 그게 뭔지는 알 수 없도록 배치할 거야. 마치 안개 이후의 장면을 보는 듯하게. (중략) 모니터 앞에는 ‘보고 싶으면 누르세요’라고 쓰인, 작은 버튼이 달린 검은 상자가 있는데 관객들은 그 버튼을 누르게 되겠지. 자신이 뭘 보고 싶은 건지도 모르는 채로. 하여간, 버튼을 누르면 관객의 뒷모습이 눈앞의 모니터에 나오게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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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마지막의 마지막. 예술이 하는 궁극적인 기능은 우리로 하여금 감정과 감각을 일깨우도록 돕는 것 아닐까. 나는 그런 입장을 견지하고, 그러한 위수정 씨의 소설을 지지하며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다. 내가 쓴 요약만으론 부족하다. 당신도 직접 그 길을 따라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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