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일본소설이나 미스터리를 열심히 찾아 읽었는데 요즘은 그다지 일본소설 혹은 미스터리에 끌리지 않는다. 캐릭터들에게 매력을 못 느끼기 시작하더니(미스터리의 생명은 뚜렷한 등장인물의 볼매적인캐릭터라 생각하는데, 사건만 있고 캐릭터가 없어진 것 같아 흥미가 반감됨 )작년인가 재작년에 피에르 르메트르의 <알렉스>를 읽고 나서부터 유럽추리소설쪽으로 많이 기운다.

 

르메트로 전에 유럽 추리 소설을 대표하는 헤닝 만켈이나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의 미스터리물 몇권 읽었지만, 사건보다 이상하게 전체적으로 황량하고 메마른 느낌이 들어 통 매력을 못 느꼈다가, (특히나 개인적으로 추리소설인 줄 알고 읽었던 만켈의 이탈리아 구두는 최악의 작품이었음) <알렉스>이후 유럽 미스터리물을 슬슬 찾아 읽다보니 한때 화제가 되었던 요 네스뵈의 <스노우 맨>을 최근에야 읽었다.

 

이 작가가 만들어 낸 해리 홀레형사는 르메트르가 창조한 카미유 베르호벤처럼 기이한 인물은 아니지만 형사 캐릭터로선 확실히 불질러 놓았다라고 할 수 있다. 재밌게 읽긴 했다만 여자의 간통에 중점을 둔 것 같아 읽는 내내 찜찜하긴 했다. 간통으로 인한 뻐꾸기 자식에 대한 통렬한 비판까진 뭐 그런가보다 하는데, 수컷의 자유분방한 성적 본능은? 면죄부인가! 북유럽에도 이런 마초작가가 있구나 싶은 게 신기했고 이 작품에 대해 노르웨이에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궁금해진 것도 사실.

 

그리고 작가가 반전의 반전을 거듭 노력했지만, 중간 너머 어느 정도는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왠만큼 미스터리를 읽다보면 등장인물이 왜 그자리에 묘사되는가를 알 수 있는데, 이 작가는 너무 뻔히 범인의 핵심을 보이더라. 그런 점에서 볼 때 <알렉스>의 작가 르메트리가 한 수 위라고 말하고 싶다. 작품의 구성도 그렇고 캐릭터의 묘사도 그렇고.. 해리 홀레의 다른 시리즈는 좀 더 범인을 꽁꽁 숨겨 둘 수 있을려나 싶다. 이왕 코난 도일이나 아가사 크리스티같은 고전 추리 작가들의 who did it를 표방했다면, 고전추리 작가들의 수법은 넘어서야 하지 않나.

 

몇가지 아쉬운 건 있지만, 근데 이 작가의 작품 속 문화적 코드는 나랑 맞다. 너무 잘 맞아서 싱긋 웃음이 나올 정도다. 물론 컨츄리 음악적 코드는 안 맞지만 영화코드는 70,80년대 코드라 잘 들어 맞았다.

 

"어쨌거나 그 70년대 영화는 맘에 들었어. 그 도청에 관한 영화 있잖아.....".

"<컨버세이션>. 코폴라의 걸작이지."

"그 영화 그게 과소평가됐다는 데는 나도 동의해."

"그건 과소평가 되지 않았어." 해리가 한숨을 쉬었다. 그냥 잊혔지. 아카데미 영화제 작품상 후보였다고."  p199


우와.. 드디어 <컨버세이션>을 언급하는 작품을 만나다니. 이 엔딩장면이 끝내주는 영화를 말이다. 이십년도 넘은 이십대초반에 비디오로 빌려다 본, 정말 놀랍도록 지루한 이 영화를 잊지 못하는 것은 이 영화의 엔딩 장면 때문이다.

 

도청전문가인 진 핵크만은 도청 의뢰를 받으면, 도청하려는 인물의 집에 도청기를 감쪽같이 설치하고, 그의 도청기술은 그 누구도 자신이 도청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실력을 가진 최고의 도청전문가이다. 그런 그가 결국에 도청을 당하는데, 자신이 도청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자신의 집에 설치된 도청기구를 찾는데 결국 그는 도청기구를 찾지 못한다는,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그 누군가에게 똑같이 당한 결말인데, 그가 도청기구를 찾으려고 자신의 집을 다 뜯어내고 뜯겨진 한 가운데서 망연한 모습으로 끝나는 결말 장면은, 이 지루한 영화를 단번에 최고의 영화로 만들어내는 힘을 가졌을 정도다. 심지어 이십년이 지난 나 또한 허탈해하고 망연한 표정의 진 해크만 표정을 잊지 못할 정도의 영화이다.

 

요 네스뵈의 말처럼 이 영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졌다.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이나 <대부>가 여전히 사람들에게 화자되고 있는 반면에, 철절히 잊혀진 영화가 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감시사회가 된 2000년대인데도 말이다. 핸드폰마다 위치설정이 되어 있어 내가 어디 갔는지 다 기록되고 핸드폰이나 도청기 하나만 설치하면 모든 대화내용이 녹음되는 이 시대에 이런 영화가 완전히 잊혀져가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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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케 2014-02-08 11:20   좋아요 0 | URL
해리 홀레는 해리 보슈를 향한 네스뵈의 오마쥬라고 혼자 생각합니다. ㅎ
스노우맨 다음 국내 출간작인 <레오파드> 안보셨으면 권해드려요.
해리는 망가지고 타락해야 더 멋있어지는 캐릭인데 이 작품에서 아주 그냥...ㅎ

기억의집 2014-02-11 09:08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저도 해리보슈 시리즈 몇 권은 읽었는데.. 생각해보니 비슷하네요. 요네스뵈의 문화적 코드는 거의 미국적 문화와 싱크로율 90%이상 이더군요. 캐릭터에 대한 묘사나 사건 해결 방법도...인두라손이나 만켈과 또 다른 느낌이 들었어요. 인두라손이나 만켈의 미스터리가 미국적이긴 해도 씁쓸함과 어둠이 지배했는데 이 작품은 그런게 없더라구요. 그러지 않아도 레오파도 이번주에 만나는 지인이 빌려주신다 해서 기대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