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알라딘 머그컵 받을려고 주문한 책자들 사이에 끼워온 북스피어의 찌라시 신문을 흝어보는데, 찌라시신문 맨 아랫단광고에 로버트 하인라인의 <달을 판 사나이>가 출간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수년전부터 이 단편의 명성을 알고 있었기에 읽어보고 싶었지만 구할 수 없었던 단편이고, 영어책은 판매중이지만 영어독해가 sf 소설을 읽을 수 있는 실력이 아닌지라..... 읽기를 포기하고 있었던 책이었다. 출간된 사실을 확인하고 인터넷에 들어가 몇몇 블로그를 검색해 보니 불새라는 일인 출판사에서 출간해서, 책의 교정이나 번역이 완벽한 상태는 아닌 듯 하다. 불만스런 독자의 그르렁거리는 리뷰에 눈에 확 들어온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싶다. 명성을 듣고 몇년을 기다린 단편인데.. 약간의 번역상 오류나 오탈쯤은 쿨하게 넘길 수 있다. 출간해 준 것만해도 감지덕지 하다.  

 

내가 꾸준히 관심갖고 읽은 sf 작가들은 로버트 하인라인, 레이 브래드버리, 아서 클라크와 어슐러 르귄등 몇몇 작가들이다. 나에게 sf소설의 매력은 현실에 대한 체제 전복이다. 그게 사회구조든, 권력이든, 과학 기술이든, 이야기자체의 전복이든 간에, 작가 자신들이 살았던 현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소설적 배경이 아닌 그들이 만들어낸 혹은 꿈꾸는 사회구조에 대한 그들의 진보적인 탐구와 결합된 판타지 사회인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미래사회를 만들고 그 속에서 갈등을 이야기한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하지 않았던 시절에 그들은 여전사를 만들어 내고, 인종차별이 당연한 시대에 인종차별의 부당함을 말하고 새로운 사고를 가진 권력지형을 기득권의 권력으로 대체하고 고도의 테크놀로지를 향유한다. 50,60년대에 쓰여진 그들의 sf소설들을 읽으면서 새삼 느낀 것은 그들이 만들어 낸 미래사회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현실화 되었다는 것이다.

 

기존의 사회적 구조나 체계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한 권의 sf소설만으로, 혹은 한 작가의 판타지가 미래에 어느 정도 진보라는 이름으로 실현된 21세기의 현실. 우리는 과거의  sf 소설가 판타지 속을 현실화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린 시절, 나는 도서관에 가면 공상과학및 공상과학 소설이 꽂힌 서가로 곧바로 달려가곤 했다. 나는 로버트 하이라인의이 지은 공상과학소설 <로켓 추진선 갈flf레오> 에 푹 빠졌다. 10대 소년들이 사막에서 로켓을 만든 다음 달을 향해 출발하는 내용이었다......

 

기술과 모험이 혼합된 공상과학 소설은 사춘기 소년들에게 자연스런 매력을 가진다. 레이크 사이드의 초기 시절, 주말 아침이면 나는 침대에 누워 에이스 더블에 출간한 장르소설들을 탐독했다. 그리고 곧 더 세련된 작가들의 작품을 읽게 되었다. 아서 클라고와 아이작 아시모프 그리고 뛰어난 문장가이자 개인적으로 가장 선호하던 잭 밴스가 그들이었다. 나는 특히 하인라인의 수준 높은 공상과학 소설을 좋아했다. ...

 

집을 떠난 지 25년 후 나는 책한권을 찾기 위해 옛날 방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전부 사라진 게 아닌가! 엄마는 다 팔았버렸다고 말했다..... 엄마를 용서하기가 어려웠지만 오래된 사진 한장이 분위기를 살렸다. 사진을 확대해 옛날에 소장했던 책들의 책등에 쓰인 제목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책들을 추적해 거의 한권도 빠짐없이 다시 갖췄다. 공상과학소설은 제2의 우주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했고 가장 엉뚱한 아이디어의 실현가능성 및 그 방안에 골몰하게 했다.....

 

하지만 다른 개념들, 예컨대 화상회의나 통신위성은 미래의 모습에 대한 시사회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어느 경우든 그 페이퍼백 도서들은 기술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p326~326

 

 

애플의 스티븐 위즈니악같은 인물이었던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폴 앨런은 50,60년대의 sf소설이 어떻게 현재의 테크놀로지로 구현했는지 짦게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 기술뿐만 아니라 권력의 이동이나 사회적 기득권의  변화도 어느 정도는 예언했다고 할 수 있다. 

 

며칠 전에 레이 브래드버리의 <일러스트레이트드맨>의 역지사지를 읽다가 우연히 이 작품 출간 연도를 살펴본 적이 있다. 1951년. 하인라인의 <달을 판 사나이>도 51년 출간되었기에 신기한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했는데, 단편 역지사지 속에 담겨진 인종차별의 부당함을 짦은 글로 표현해 낸 레이 브래드버리의 시대적 통찰력에 놀라웠다. 역사적 진보란, 한사람의 성찰과 그의 성찰에 동조하면서 적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천천히 사회적 변화를 이루어 내는 것. 그게 진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인라인은 마초시대였던 그 시대에도 여성과 남성을 거의 동일시 했으니 뭐 말할 것도 없고.

 

여하튼, 로버트 하인라인의 작품은 과학자들 이론과학자든 실험과학자들이건 간에 많은 영향을 끼친 듯하다. 종종 과학책을 읽다보면 그의 작품 속 글귀가 인용된 것을 많이 볼 수 있고, 반면에 미국 스릴러 작가들의 책을 읽다보면 하인라인과 같은 동시대 작가인 레이 브래드버리에 대한 존경심과 경외감을 볼 수 있다. 특히나 50,60년대의 소년시대를 보낸 작가들, 그들의 존경심과 경외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들의 브래드버리에 대한 열광은 자신들의 소년적 감성과 닮은 브래드버리의 시적인 감수성때문일까. 그시대를 공유하지 않은 나로선 알 수 없지만 레이 브래드버리 작품에 베이스로 깔린 허무감 위로 세워진 미래사회에 대한 불안감과 환상이 그들에게 미지의 들뜬 기분을 순진한 소년들에게 선사한 것때문이 아닐까.  반면에 하인라인의 작품은 남성적이고 너무 진보적이어서 인문적 감수성에는 레이 브래드버리보단 덜 한 것 같다. 그들 문화에 살아본 적도 체험한 적도 없어 이런 나의 추측이 틀린수 있지만, 하인라인과 브래드버리의 소설들을 읽어본 나로선  그들의 뚜렷한 작품적 경향으로 봐선 어느 정도 편이 갈린 게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들뿐만 아니라 sf소설가들이 새로운 지평의 시대를 여는 게 기여한 것은 분명하고 우리는 그들의 반쯤 열린 판타지속에 살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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