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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 1 -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
마르잔 사트라피 지음, 김대중 옮김 / 새만화책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 봄엔가 KBS에서 프랑스 부르카착용반대 법안이 통과된 것을 계기로 프랑스내 이슬람 여성의 부르카 착용 문제를 다큐로 다룬 적이 있었는데, 그 때 KBS의 논조가 어땠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슬람을 공부한다는 여교수가 나와 프랑스의 저 법에 대해 문화적 상대주의와 종교의 자유를 거론하며 프랑스를 비난했던 장면이 있었다. 부르카 금지는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히잡이야말로 이슬람 여성의 정체를 상징하는 것인데, 어떻게 국가가 종교의 자유를 억압 있느냐면서, 뭐 그런 요지의 말을 했는데,
나는 그 장면에서 완전 열폭했다. 이슬람을 공부한다는 교수까지 문화적 상대주의를 들먹이며 종교의 자유를 외치다니.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은 종교의 자유보다 우선한다. 히잡이나 부르카는 이슬람 여성의 정체성이 아니고 이슬람 세계에서 종교를 앞 세워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여성의 자유를 얼마나 억압하고 부정하고 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물건이다.
페르세폴리스의 제 첫장은 이슬람혁명 때문에 모든 이슬람 여성들이 베일을 써야하는, 베일을 찬성하는 여성과 반대하는 여성의 투쟁이 잠깐 나온다. 이슬람 혁명(과연 과거로 돌아가자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반란을 혁명이라는 말로 지칭해야 하는지 의심스럽다) 이전 이슬람의 여성은 베일에서 자유로웠고 교육에서 남성과 비슷한 동등한 위치에 있었지만, 이슬람 혁명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겨우 미래로의 원스텝을 밟으려는 순간, 과거로의 회귀는 이슬람 여성에게 현재까지도 재앙이다. 이슬람 여성은 아직도 개개인의 독립적인 참정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심지어 사우디는 여성의 운전까지 제한하고 남편에게 폭행을 당해도 맞고 참아야 한다.
이슬람 세계에서 여성은 현재까지도 여성은 남성에 귀속되어있는데, 무슨 부르카가 종교의 자유를 상징하는 물건처럼 말하는지 모르겠다. 상대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는 포괄적 의미의 문화적 상대주의란 용어를 들먹이며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편에 서서 옹호하는 짓거리를 보면, 창피한 줄 알아야한다. 부르카를 입고 여성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어 있다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부르카는 종교적 상징일 뿐이기에. 하지만 오늘 이슬람 여성의 부르카는 그들 자신조차 투쟁이 되어야하는 상징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마르잔 사트라피의 이 흑백의 굵직한 음영의 컷을 보면서, 한때 그녀들에게도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권리가 있었음을 잊었다. 부르카는 이슬람 여성의 상징이 아니고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과거 이슬람으로 회귀하려고 애쓰는 남성 우월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시스템이고 그녀들의 표출할 수 있는 자유를, 재능을 덮을 수 있는 물건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