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자연과 함께 사는 삶을 꿈꾸긴 하지만, 자연과 더불어 사는 탸사 튜더의 삶에 공감하지 않는다(풋, 21세기에 19세기 삶이라니!). 게다가 그녀의 그림책도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라는 주제의 그림책을 모으지 않았더라면, 돈들여가며 굳이 그녀의 그림책을 사서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그림엔 임팩트도 없고 놀라울 정도의 재능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녀에게는, 말 그대로 글을 보조하는 단순 기능인 일러스트 재능만 타고 났다. 그녀의 일러스트는 글을 압도하지 못한다. 그녀의 그림은 글을 뛰어넘거나 반항할 수 있는 똥고집보다는 타고난 순종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그녀가 다른 일러스트보다도 더 많은 삶을 살았음에도 그림책의 대가가 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틀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던 19세기주의적인 순종주의에 있다. 그림책은 단순히 글과 그림이 그려져 있는 아이들을 위한 책이다, 라는 정의의 수준을 한단계 높인 사람은 모리스 센닥이었다. 아마 그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튜더와 같은 수준의 그림책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난 그녀를 뛰어난 작가라기보다는 평범한 작가라고 평가하고 싶다. 그녀의 자연주의 홈메이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녀를 기억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며, 자신의 일러스트도 그 책들의 부록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녀의 살림 방식 그대로 묻어난 일러스트를 보고 있으면 답답하게 느끼거나 고지식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뛰어난 그림책 대가가 될 수 없었던 이유가 그래서 19세기 삶을 고집했던 그녀의 일러스트는 젊었을 때 보여준 일러스트와 거의 다를 바가 없다. 한걸음도 나아가지 않았다. 그녀의 삶은 경탄을 자아낼지언정 그녀의 일러스트 삶은 실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연 일러스트레이터로서 그녀의 삶은 존경받을 수 있는 길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