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 알스버그의 <압둘가사지의 정원>을 처음 본 순간, 그림의 장면마다 독자를 압도하는 정적과 흑백의 표현력, 그리고 그 속에나타난 감정의 응축 (예를 들어, 아이가 마법사 압둘 가사지의 정원에 들어서기 위해 막 문을 들어서는 장면에서 소년의 불안한 심리를 암시하는 듯한 긴 나무터널과 터널 끝에 보여주는 빛)은 그림책의 단순한 독자였던 나를 단숨에 그림책의 또 다른 세계로 인도해 주었다.  

난 아직도 <압둘가사지의 정원>을 처음 본 순간에 느꼈던 충격과 소용돌이 치는 감정의 흥분을 잊지 못한다. 아마 그를 통해 예술적인 그림책이 무엇인지 혹은 그림책의 지적 유희가 무엇인지 처음 인지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미친듯이 여기저기 들쑤서 가면서 알스버그의 작품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지금은 다른 분야의 책을 읽느냐고 혹은 아이들이 크면서 상대적으로 그림책 분야에 대한 관심이 덜하긴 하지만, 어떤 경우의 그림책 작가는 작품 활동을 영구히 접을 때까지 관심을 갖고 수집하는 작가들이 있다. 내 경우는 알스버그가 평생 관심 작가군에 속하는데, 그가 그림책을 예술적 경지에 끌어올렸다는 것 뿐만 아니라 그가 짧은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는 퍼즐과 같은 지적 유희의 결말 때문이다. 적어도 한 사람 혹은 몇 사람의 그림책 작가에 대한 수집은 일상적인 지루함 대신 짜릿한 흥분을 선사한다.  



올초에 문지에서 크리스 알스버그의 신작 <해리스버딕의 미스터리>가 출간되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림이 14장박에 수록되어 있다는 것은 몰랐다. 마노아님의 리뷰 보고 그제서야 문지판에는 14장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미 <해리스 버딕의 미스터리>를 포트폴리오 편집판으로 가지고 있던 탓에,  문지에서 알스버그의 <해리스 버딕> 나왔다고 할 때 그런가보다하고 시큰둥했다.   

이 책은 책소개에서도 잘 나와 있듯이 알스버그가 서문에서 피터 웬더스(한때 어린이책 퍼블리셔었지만 1984년경에는 은퇴한) 네 집에 초대를 받아 갔다가 피터 웬더스의 집에서 해리스 버딕이 그린 14장의 드로잉들을 보고 웬더스와 함께 해리스 버딕의 드로잉을 알스버그가 다시 그려, 제목과 제목에 대한 약간의 설명을 곁들어 독자가 다층적인 이야기를 다시 쓸 수 있도록 재출간한 것이다. 이 책이 출간되고 알스버그 앞으로 버딕의 이야기를 새롭게 쓴 수 백통의 글들이 날아 들어오던 어느 날, 알스버그 앞을 편지가 배달된다. 그리고 알스버그는 <해리스 버딕의 미스터리>를 포트폴리오 편집판으로 새롭게 내 놓는다. 그가 <해리스 버딕의 미스터리>를 포트폴리오 판으로 출간한 이유를 서문에 쓰는데.....

지난 12년 동안 나는 아이들과 어른이 쓴 해리스 버딕 이야기를 수 백통을 받았다. 이러한 성과는 미스터 버딕의 글과 그림이 얼마나 영감적인지 보여주고 있다. 학과 선생님들과 영감이 가득한 작가들은 미스터 버딕의 그림을 보면서 더 많은 상상력을 표출했다. 마지막으로 이 포트폴리오 판 편집을 낸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피터 웬더스와 나는 <해리 버딕의 미스터리>가 출간되면, 미스터 버딕의 정보를 발켜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어떠한 실마리도 없이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며, 1994년 나는 북캘리포니아에서 사는 Mr. Daniel Hirsch라는 사람의 편지를 받았다. 그는 자신을 고서적 거래인이라고 소개하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1963년에 그는 메인주 Banor지역에서 개인이 수집한 책을 팔겠다는 오퍼를 받았다. 그가 거래 받은 책은 황폐한 빅토리아식 대저택에 있었다. 그 집의 노부인은 죽으며 자신의 대저택과 집안에 있는 것들을 동물해방단체에 기부를 했던 것이다.  

그는 그녀가 모은 책들의 라이브러리에 깊은 인상을 받아 전부를 구입했으면 Through the looking glass라는 캐릭터의 초상이 새겨 장식된 나무틀의 거울도 포함되어 있었다.   

2년전에 여전히 Mr. Hirsch의 소유인 이 거울을 자신의 서점 벽에 걸어두었다가 떨어져 깨졌다. 유리 조각들을 치우는 과정에서 그는 주목할 만한 것을 발견했는데, 거울과 거울 사이의 나무판대기 사이에서 숨겨졌던, 여기 포트폴리오 판에 수록된 "Young mgician"의 드로잉이었다. 

이 드로잉은 버딕의 다른 그림들과 크기면에서, 테그닉면에서 동일작이었다.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사인은 없었으며 하단에 타이틀과 설명이 있었다. 이 드로잉의 제목은 또 다른 이야기인 Missing In Venice"와 같았다. 나는 이 드로잉이 버딕의 작품임을 확신한다. 


  

포트폴리오 표지

 

문지에 실리지 않는 그림, 고서적상에 의해 발견된 그림을 알스벅가 포트폴리오판으로 내면서 다시 그렸다.

 
 

표현력이 기 막힐 정도로 멋지다. 알스버그가 빛을 묘사한 장면을 볼 때마다 느낄 수 있는 숨 막힐 듯한 정적과 고요함은 더 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다. 저 소녀가 받는 자연광과 밑의 인공적인 조명의 빛 중 어느 것이 더 그의 묘사력이나 표현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진이 아니고 실제로 보면 정말이지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그의 빛의 표현력은 놀랍다. 특히나 인공적인 조명의 빛의 표현은 이 작가를 따라갈 그림책 작가가 있을까? 저 빛에 빨려들어갈 듯 압도된 느낌이다. 

사실 이 작가는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없다. 거의 팔리지 않는 작가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그림책이 아이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수준의 작품도 아닌데다,  상당히 난해하고 정적인 이미지는 동적이며 귀엽고 앙증맞은 유아 수준의 다른 그림책들에 비해 아이들에게 딱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의 그림책이 고학년(심지어 고등학생들도) 수준에 맞지만, 그림책은 아이들 것이라는 속 좁은 편견이 사회에 전반적으로 퍼져 있기 때문에 그의 수준 높은 그림책을 접할 수 있는 아이들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일게다. 

알스버그만큼 아이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작가가 몇 이나 될까? 그의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무화과>나 <압둘가사지의 정원>을  읽고 반전의 즐거움을 느낄 수 없다면 그 아이가 가질 수 있는 독서체험은 고속도로스타일의 독서 일 수 밖에 없다. 빠르고 급히 서두르는 읽기의 의무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천천히 그리고 호기심을 가지고 그의 작품을 읽어나가면, 그가 제시한 반전에 빙그레 웃지 않을 수 없고 반전의 결말에 대한 호기심으로 며칠을 고민할 것이다.   

그의 예술적 경지의 그림과 지적 유희에 한번 도전해 보시라. 당신이 성인일지라도.  

덧; 예전에 글 잘 쓰는 나귀님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무화과>에 대한 리뷰를 쓴 적이 있다. 그게 아마 2005년 5월경으로 기억되는데, 사실 그 때만 해도 나는 알라딘 서재가 있는 줄, 까막게 모르고 있었다. 그림책 카테고리에 들어와 관심가는 책의 리뷰 읽고 구입하던 시기였지만, 그 때 이 책의 리뷰를 어찌나 재밌게 읽었는지 지금도 확실하게 기억한다. 분명 나귀라고 써 있고 그의 리뷰에는 처가댁에서 얻어 못지 못한 무화과에 대한 글이 장문으로 실려있었고, 그때 그 장문의 리뷰를 읽으면서 얼마나 키득거렸는지, 난 아직도 이 무화과의 리뷰중에서 나귀님의 리뷰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실 무화과하면 나귀님이 먼저 떠 오른다. 그것도 얻어 먹지 못한 무화과를. 나귀님의 리뷰에 따르면 하루키가 알스버그를 좋아해서 알스버그 일본판은 하루키가 다 번역했다는 일화가 있다는.  밑의 책은 하루키가 번역한 알스버그의 일본책들. 더 찾으려다가 귀찮아서.... 하루키가 르귄, 카버, 팀 오브라이언, 챈들러등등 번역한 게 창작품보다 더 많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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