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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와 나 - 2012년 제3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영하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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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영하 외 7인, 문학사상, 2012.

 

  2012 이상문학상을 김영하가 받았다는 소식은 두 가지 생각을 안겨주었었다. 받을 만한 작가가 받았다는 것과 어차피 받을 작가가 받았다는 것. 한국문학계의 빤한 병폐인 ‘저희끼리 문학상 돌려먹기’가 다시금 발현된 걸까? 직접 읽는 것 말고는 의문을 풀 적당한 길이 없었다.

 

  이상문학상 표지가 바뀌었다. 산뜻하다는 평과 가벼워졌다는 평이 많았다.

 

  수상작의 가장 빼어난 점은 위트와 속도감일 것이다. 누구인지 확실히 추정되진 않지만, 나는 김영하가「옥수수와 나」를 쓰면서 일정한 스타일을 누군가에게서 참고했다는 인상을 받았다(흠을 잡자는 게 아니다). 나는 유려한 서술로 이뤄진 소설들을 비교적 높이 평가하지만, 김영하의 수상작도 그 많은 대화문에도 불구하고 그리 나쁘다고 생각진 않았다. 김윤식 선생의 말대로 배제된 묘사가 이 단편의 주요 특징 중 하난데, 나는 이것이 속도감과 더불어 글 지평을 넓히기 위한 작가 김영하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한국문학의 외연이 넓어지려면 이처럼 계속적으로 변화를 위한 선택들이 과감히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서두에 시작한 기묘한 농담을 뒤에 마무리 짓는 방식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장점은 매끄러움에 있다. 이 소설은 끈끈하고, 덩이져 있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이야기를 어떻게 가공해 독자에게 전달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해답으로 보인다.

 

  속은 굉장히 깔끔하다. 이전 수상집보다 훨씬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하지만 여러 좋은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나는「옥수수와 나」를 수상작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의미의 결(結)이랄까, 농담으로 시작해 농담으로 끝나는 소품을 감상한 기분이었다. 이 작품과 맥이 닿는다고 생각한 작품이 김언수의「캐비닛」이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마지막 문장을 읽은 다음엔 굉장히 애매한 기분을 느꼈었다(나쁜 건 아니지만, 좋은 것도 아닌). 뉴욕, 작가, 전처이자 편집자, 그녀와 잔 것으로 사료되는 출판사 사장, 철학과 카페와 그들 사이에 얽힌 여자들, 질펀한 정사와 튤립(?)을 피운 채 써대는 무지막지한 소설들.

확실히 이 소설은 한국문학보다는 미국문학을 닮아 있다(나는 J.D. 셀린저와 레이먼드 카버가 떠올렸다). 좋은 소설을 유쾌하게 읽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옥수수와 나」가 준 감흥은 짧고 엷었다. 이 소설은 쓴다는 것에 대한 소설일까? 아니면 어지럽게 얽힌 애정관계에 대한 단상일까? 어쩌면 선택에 대한 소설일지도 모른다(설마). 나는 이것들이 조금씩 녹아들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것들을 넘어 어떤 무언가를 확실히 전달해주었다는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기억에 남을 만한 소설을 보여준 함정임 작가.

 

  함정임의 소설을 읽는 경험은 나쁘지 않았다.「저녁식사가 끝난 뒤」는 차분하게 쌓이는 가벼운 눈발 같은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 새 벌써……’의 느낌을 주는 그런 눈 말이다. 다만, 잃은 아이와 아들에 관련된 서술은 왜 등장하는지 모르겠고, P선생의 경우처럼 이니셜을 쓰는 것도 딱히 이유가 없다 싶었으며, 마지막 부분에 이르기까지 소설이 너무 잔잔하면서도 감상적으로 흐르는 게 아닌가 싶었다(「옥수수와 나」뒤에 읽으니 더욱 그런 기분이 들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에 저녁식사에 모인 사람들의 행동들의 이유가 밝혀지면서 형성되는 감흥과 깨닫게 되는 구성의 매끈함이 이 작품이 우수작으로 선정된 이유를 말해주고 있었다.

 

점점 김경욱을 선택하지 않게 만든다. 다름 아닌 그의 작품이.

 

  「위험한 독서」이후, 김경욱은 내게 기대감을 품게 만드는 작가였다.「스프레이」에서는 왠지 모르게 편혜영의 냄새가 났다. 불안한 인간의 예기치 않은 실수와 그 와중에 쌓이게 되는 일종의 편벽들이 피아노 줄 위에서 위태로이 맺혀 있다, 자신을 두들길 망치를 기다리며.

 

  나는 김경욱의 이번 소설이 스프레이처럼 내 짐작 너머를 향해 멋지게 분사될 거라 생각했지만,「스프레이」는 넓게 퍼져나가며 점차 엷어져 겨우 자취만 남기고 말았다. 작품에서 사용된 소재들은 상징적 의미로 연결되지 않고 조각나 있었는데, 이러한 미미한 부분에서부터 작품을 끌어올리는 동력들이 상실되진 않았나 싶었다. 서술자가 구두를 판매한다는 점도 작품 내에서 큰 의미를 지니지 못했고, 아버지와의 불화가 단편적으로 그려진 게 ‘나’의 심리를 좀 더 다층적으로 형성할 기회를 잃게 만들었으며, 고양이와 여자와 남자의 관계와 벌어진 사건이 흐릿하게 처리된 점도 불만스럽다.

 

왜 여기 계세요? 하성란의 작품은 김경욱과 함께 우수작의 수준에 편차를 만들고 있다.

 

  『A』이후로 내게 신뢰를 잃은 하성란의 작품「오후, 가로지르다」는 연이어 실망을 안겨주었다. 윤후명은 심사평에서 하성란을 언급하면서 다른 작품보다 우위에 두었던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심사를 맡을 때마다 윤후명은 한국소설의 질 저하를 개탄하던데, 그러지 말고 직접 쓰셨으면 한다). 서영은이 지적한대로「오후, 가로지르다」에서 쓰인 큐티클이라는 소재는 흥미로웠다. 하지만 소설의 서사가 뒤죽박죽인데다가 현대를 사는 인간의 고립감 이외의 어떠한 주제의식을 구현하려 했는지 애매하다. 207쪽 ↓5줄의 문장은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이런 구색 갖추기 용 작품선정이 문학상의 위상을 떨어뜨린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다음 수상작가는 김숨이다. 지난 세기 작가들의 결과물들을 이어간다는 점에서 그녀는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한다. 미안해요, 김숨 작가만 얼굴 사진을 안 찍었네요.

 

  이제 김숨의 작품으로 넘어가보자. 나는 김숨의 작품「국수」가 김영하의 가장 강력한 경쟁작이었다고 생각한다. 분위기와 톤, 속도에 있어 수상작과 반대양상을 띠고 있는「국수」는 체화된 경험이 숙성되어 녹아든 작품이다. 작가 개인이 이러한 경험을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을 주는 건 매우 중요하다. 그만큼 독자가 소설 내의 서사를 피부 가까이 느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나는 밀가루 반죽을 치대느라 손목이 시큰거린다는 기분을 느낄 정도로 이 소설에 빠져들었다. 245쪽 ↓1줄에서 밀가루 반죽하기를 아이 만들기로 가볍게 치환시키는 대목에서 좋은 솜씨가 느껴졌고, 251쪽 ↑4줄에서 두 여인 사이에서 동질감을 끌어내며 이 둘을 하나로 엮어내는 서술은 무척 좋았다. 253쪽에서 의붓어머니의 어머니를 등장시키는, 두 여자 사이에 한 어미를 등장시키는 방식은 김숨이라는 작가의 묵직한 내공을 느끼게 만드는 지점이었다.「막차」에서도 그랬지만, 김숨이 다루고 있는 인물들의 나이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겪고 있는 사건과 이에 대한 인물들의 이해가 예스럽다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현대 젊은 작가인 김숨에게 묘한 특이성을 부여하고, 다소 연배가 높은 심사위원들에게는 익숙한 느낌을 준다. 김숨이 이후의 문학상들에서 후보에만 머물진 않을 거라고 짐작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이다. 나는 이 작품이 김영하를 제치고 2012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단 하나의 문제, 느긋한 속도를 지녔을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속도의 느지막함도 전체적인 소설의 톤과 어울리기에 작가의 선택으로 보아야한다. 작가는 이러한 속도를 선택함으로써 서사가 지닌 묵직함을 흩지 않으려 들었던 것이다.

 

  2012 이상문학상을 통해 처음 만나게 된 조해진 작가.

 

  조해진은 왜 주인공의 이름을 밝혀야 했을까(그저 제목으로 암시만 주는 게 훨씬 나은 방법이었다). 잔혹한 과거로부터 매인 여자의 단면을 그리는「유리」는 공들여 끼워 맞췄다는 인상을 준다. 일정한 감수성을 유지하면서도 이를 새로운 방식으로 형성하려 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특히나 회상 속에서 울부짖는 자신을 돌로 깨려는 여인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소설 속의 여인이 떠나온 유리로 만들어졌다는 세상은 납득가지 않았다. 부서지고 아파했던 여자를 제외한 모든 세상은 유리를 부수는 수단이었지 않은가? 그녀를 이해 못하고 돌보지 않은 부모나 그녀를 괴롭히고 성폭행한 대상들은 유리로 만들어진 사람들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녀’ 자신은 유리로 만들어졌을지언정, 그녀를 둘러싼 ‘세상’은 유리가 아니었던 것이다(그렇다고 그녀가 부서지는 다른 유리 사람을 보았다는 서술도 없다). 나는 이러한 소설적 환상이 작가의 허영감 혹은 그릇된 작화 습관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작품집을 비롯해 최제훈은 자신의 사진을 모두 이걸로 쓴다. 자랑스러운 듯! 잘 나온 사진이에요.

 

  최제훈은 기대를 갖게 만드는 작가였지만, 이번에는 그저 그랬다. 기 드 모파상과 오스카 와일드를 연상시키는 서사의 덩어리가 거슬렸다(언제나 그랬듯이, 가져왔으면 넘어서야 한다). 또한 ‘나’의 역할이 ‘노인’의 청자에 머문다는 것도 불만스럽다. ‘노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해도 되지만, 그를 통해 ‘나’는 그를 통해 변화하고 또 다른 선택을 해야 하지 않을까. 오스카 와일드를 가져와도 되지만, 그를 통해 더 나은 서사를 독자에게 보여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교차식으로 배열한 소설의 형식과 ‘나’로 시작되는 각 문단들을 일부러 헛갈리게 만드는 수법들은 여전히 최제훈스러웠지만, 이야기를 커팅하는 그의 방식이 아니라 그가 선택한 원석이 나는 불만스러웠다.

 

  얼마 전에 소설집을 낸 조현 작가. 이번 작품으로 경향이 바뀐 건지, 등단작이 도드라졌던 건지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마지막으로 조현이다. 최제훈과 마찬가지로 좋은 인상을 준 데뷔작을 선보였던 조현은 전혀 새로운 경로를 선보임으로서 최제훈과는 다른 진로를 선보였다(문학상 작품집을 통해 이러한 교차적 양상을 엿본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그는 미래를 보는 신들린 소녀와 네 소년의 엇갈린 운명, 뒤바뀐 삶, 엇바꾼 죽음 등을 다루었는데, 나는 조현의 작풍(作風)이 움츠러든 게 아닌가 생각했다(문화사와 접목된 SF에서 삶과 신령의 세계로 전이되었다면 내밀화되었다 싶으니까). 이 작품에서는 회상에 대한 서술을 지적하고 싶다. 옛일이 내용의 대부분을 이루는 이 소설은 그로 인해 서술이 나아가고 있다 혹은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못했다. 최제훈처럼 교차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조현은 그저 과거 서술에 머물렀는데, 결정된 사실을 들려주는 방식에 대한 호기심은 몇 쪽 지나지 않아 사그라지고 말았다. 이야기의 근원적인 덩어리도 내 흥미를 충족시키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요즘 무녀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건 세상이 어수선한 탓인가). 나는 조현이 선보였던 데뷔작의 작풍이 이어지길 바란다. 그 작품이 좋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 문단에 부족한 경향을 조현이 성공적으로 채워줄 것으로 내다보았기 때문이었다.

 

  이상문학상을 살펴보면서 예년과는 또 달라진 우리 문학의 얼굴을 다시 확인하였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는 법이 아니겠는가. 김영하 대신 김숨이 받았어야 한다는 의견은 작풍에 대한 선호도에 따라 달라지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김영하가 선보인 소설적 기법이 조금씩 높아져 가는 것이 지금의 경향인 것은 분명하다. 점차 빨라지고 있지 않은가, 소설뿐만 아니라 우리 삶 전체가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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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라
토니 모리슨 지음, 김애주 옮김 / 들녘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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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라』, 토니 모리슨, 김애주 옮김, 들녘, 2005.

 

  표지를 통해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는 책들은 보통 서사구조가 복잡한 편이다. 술라도 그러하다. 노란색 표지가 무척이나 깔끔하다. 책을 읽기 전에 이 표지를 본  나는 왜인지 모르게 물어 던져진 모세를 떠올렸었다.

 

  2009년 6월에 읽고, 이번에 두 번째로 읽는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진정한 독서는 재독을 통해 이뤄진다는 말을 했다. 이 말에 십분 동의한다. 특히나 포크너 스타일의 작품들은 재독하지 않으면 그것에 담긴 진가를 충분히 맛보기 어렵다.

 

  이 소설『술라』를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건너뛰기와 눙침, 암시와 복선이 복잡하게 깔린『술라』는 강렬한 인물인 ‘술라’를 통해 인간 내부의 악, 악의 밑바닥에 고인 어떠한 바람, 동경을 담아내고 있다. 제 손으로 어머니를 불태워 죽이는 술라와 마약에 찌든 아들을 죽인 술라의 할머니 에바. 회전하는 운명의 틀, 그 속에서 이는 먹먹한 비명. 후반에 새로운 해석의 틀을 제공됨으로써 서술의 복잡성은 한층 더해진다. 술라를 바라보는 입장에 있던 넬은 과연 죄가 없는가? 넬을 향한 에바의 단죄는 과연 정상적인 정신 상태에서 유발된 것인가?

 

  각 장(Chapter)은 숫자가 아닌 연도로 나온다.

 

  이 소설은 아웃라인의 중요성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재고할 만하다. 생각건대, 토니 모리슨은 인물들에 대한 매우 길고도 상세한 구성안을 작성했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인물들 간의 갖춰진 구성 요소 안에서 주제를 일깨울 만한 대립요소들을 들추어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는『술라』를 통해 소설 작법의 한 요소를 -짐작을 통해- 배운 셈이다.

 

  어디선가 지적했던 것 같은데, 토니 모리슨은 코맥 매카시와 더불어 진정한 윌리엄 포크너의 계승자라 할 만하다(떠드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니, 어디에서 그랬는지 기억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사건의 개요를 온전히 파악하고 장악한 뒤에 사건의 순서와 인물의 등장 시점들을 올이 풀려나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그러나 미묘한 복잡성을 은연히 살려나가면서 서술을 강화시켜나가는 방식은, 이를 통해 독자의 궁금증을 서서히 유발시키고 나아가 독자의 혼란을 서술의 소화와 더불어 찬찬히 잦아들게 만드는 방식으로는 토니 모리슨을 따라갈 작가는 몇 없는 것 같다.

 

  1937년을 여는 저 첫 문장은 대단히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자.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방법으로 여러 가지 논점들을 추려냈다 하더라도, 이러한 기술들을 실질적으로 적용시키고 능숙하게 사용하기에는 무수한 노력이 배인 시간들이 필요할 것이다. 이 책은 복잡하다. 남부의 흑인 사회와 아프리카 토속 종교의 향이 물씬 풍기는 독특한 기독신앙체계, 척박한 삶 속에서 자연스레 지게 된 흑인 여성들의 냉담함과 단호함, 시대적 상황 등을 확실하게 이해하지 않은 채 이 책을 읽을 순 없을 것이다(서사 확보부터 어려움을 느낄 게 분명하다). 나는 이 책『술라』가 이러한 까다로움을 모두 해소하면서까지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술라라는 매우 강렬하고 독특한 악인의 세계를 맛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어야 하리라. 왜 그녀는 어머니에게 불을 질렀을까. 무엇이 그녀의 내부에 존재하던 따뜻한 감성을 질식시켰나. 그녀의 돌 같은 냉소 너머에 깃든 건 무엇이었을까.

한 가지,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은 터널을 부수면서 물에 휩쓸려 죽는 메달리온 사람들에 대한 지점이었다. 이 부분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걸까. 크고 작음과 상관없이 악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징계 받아야 할 일이라는 관점을 작가는 드러낸 걸까. 어쩌면 백인들의 변덕에 의해 정해진 오랜 자리를 다시 백인들에 의해 빼앗기게 된 상황에 흑인들이 느낀 분노를 하나의 처절한 몰락으로 드러낸 걸까. 왜 그들은 샤드렉의 종소리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는가. 그들이 소설 초반에 느꼈던 감정이 정 반대의 양상을 띠게 된 것에 대한 근거가 부족하게 설명되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쩌면 이러한 이해부족의 너비가 아프로-아메리칸에 대한 내 몰이해의 정도이리라.

 

  어쩌면, 거기에『술라』를 세 번째로 읽어야 할 이유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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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고양이 눈 - 2011년 제44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최제훈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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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고양이 눈』, 최제훈, 자음과모음, 2011.

 

  2007년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최제훈은『퀴르발 남작의 성』을 통해 접한 작가였다. 소설집을 읽은 이후, 그의 장편을 고대하던 차에 올해 초에『일곱 개의 고양이 눈』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구입했다(이 글은 2011년 3월에 작성되었다).

 

  이 책의 표지는 매우 흥미롭다. 남자는 소설 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마술사 혹은 마술 그 자체로 보이고, 그의 안경은 무한대로 이어지는 파이를 나타내며, 그의 입은 고양이의 것을 연상시킨다. 파이 주변으로 스멀대는 송충이도 책에 등장한다.

 

  최제훈의 미덕은 독자를 이야기에 빨아들이는 방법에 있다. 그는 훌륭한 어휘를 구사하진 않지만, 어떻게 하면 독자를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허덕이게 할지를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이 대목이 최제훈이라는 작가에 대한 동의와 연결되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그는 미묘한 층위에 변위를 적용시켜놓고는 독자에게 차츰차츰 혼돈을 부여한다. 그 변위의 지점들을 차근차근 따라가지 않고는 최제훈 소설의 미덕을 충분히 맛보기 어렵다.

 

  보다시피 각 중편의 시작지점에는 QR코드가 있다. 사용해본 사람에 의하면 음악이 들린다고 한다. 몽환적인 음악이 아닐까?

 

  이 소설은 한국 문학은 물론이고 외국 작품 중에서도 딱히 비교할 작품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매우 독특하다. 어쩌면 일본의 호러 문학이나 환상 문학에서 이 작품에 비할 작품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과문한 탓에 나는 다른 예를 찾지 못했다.

 

  자기 복제라는 측면에서 이 작품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복제하는 패러디 작품이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의 매우 주요한 경향은 환성성과 꿈을 소재로 한 끝없는 혼돈이다.『일곱 개의 고양이 눈』은 모든 것은 불분명하다는 근거 위에 쓰인 듯하다. 어쩌면 최제훈은 책이라는 사물이 지닌 한계를 깨뜨리기 위한 도전으로 이 책을 집필한 게 아닐까.「여섯 번째 꿈」,「복수의 공식」,「π」,「일곱 개의 고양이 눈」로 이뤄진『일곱 개의 고양이 눈』의 얼개는 느슨하다. 이 느슨한 연대는 자기 복제와 언어유희라는 사슬로 연결되어 있다. 앞에서 나온 문장들이나 내용들은 뒤의 단편들에서 은근하게 다시 튀어나오고 이야기는 서로 뒤섞이며 처음에 어떤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는지 종잡을 수 없게 된다. 이 헤맴은 불쾌함을 동반한 게 아니다. 불안과 공포를 안고 서사의 숲에서 헤매는 이 즐거운 상황은 도리어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싶지 않게 만들어버리기까지 한다.

 

  책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짤막한 글. 나는 이 글이 책 전체 내용을 관통하는 좋은 제사로 기능했다고 보진 않는다.

 

  이 소설의 장점은 ‘문학이 아니면 안 되는 방식으로의 흥미 충족’에 있다. <메멘토>나 <인쎕션>에서 벌어지는 서사들은 문학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지만, 영화로 변용이 가능하거나 더 뛰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일어나는 ‘유희’들은 문학이 아니면, 문자 텍스트가 아니면 제 몫을 충분히 기능하기 어렵다. 최제훈이 쓴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이 전통적인 글쓰기를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순 없다. ‘감동’이나 ‘책장을 덮은 뒤에 느끼는 훌륭한 뒷맛’을 주지도 않는다. 그는 기이한 방식으로 서사를 이끌어내고 이를 뒤틀며 자기복제를 통해 자신이 낳은 작품을 기괴한 모양으로, 독자의 머릿속에 구축된 서사들을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비틀어버린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이 되레 문학답다. 최제훈은 기존 문학의 파괴를 통해 문학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셈이다.

 

  초반에 연쇄살인으로 독자의 관심을 끌고자 한 것은 뒤의 자기 복제의 근거를 만들어놓기 위한 일종의 밑 작업이다. 따라서 그것을 살인사건과 밀신 트릭, 그로테스크로 끌어들이려는 작가의 의도는 명징하다. 이는 호러와 추리 영역에 깊은 애정을 드리웠던 작가의 기호를 드러내는 것임과 동시에 말초신경의 자극을 통해 독자를 장악하려는 계략인 셈이다(최제훈이「퀴르발 남작의 성」으로 등단했음을 떠올려보자).

 

  앞에서 언급했듯이, 나는 이 작품이 지닌 가장 빼어난 미덕이 능숙한 변주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많은 변주들은 이야기를 무르게 만들어 저마다의 색을 지닌 채 미묘하게 뒤섞이게 만들어버린다. 책을 덮은 뒤에도 자연스럽게 변주가 흘러나와버리는 셈이다. 네 개의 중편을 떠올리며, 우리는 온전히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에 자연스레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이는 마치 하나의 적혈구 세포가 단 한 번도 똑같은 혈관을 순환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헐거운 이야기 속을 우리의 회상은 정처 없이 떠돈다!

우리가 이 사건을 끝까지 이해할 수 없다는 지점에 이르러『일곱 개의 고양이 눈』은 오묘해진다. 이야기를 쓰게 만들고 나중에 원고를 챙겨 달아난 여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완성된 이야기를 펴낸이는 여자인가? 그 책의 행방은 어찌 되었는가? 처음 연쇄 살인을 당한 자들은 서로 죽인 것인가? 악마는 누구이며, 그들은 누구의 초대를 받았는가. 작가는 혼란을 위한 부스러기들을 취합하였을 뿐, 그것을 통해 어떤 그림을 드러내는 일은 부차적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건 인정할 수 있고, 그런 의도는 작품 내에 훌륭하게 투영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 전반이 드러내는 서사의 완결성을 중시하는 독자들은 이 책에 대해 박한 평을 할 것이다.

 

  이 책 읽엉, 두 번 읽엉.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로 생가고디는 세 편에 비해 마지막「일곱 개의 고양이 눈」의 의도는 비겨적 분명해 보인다. 책이 어떻게 쓰이는가에 대한 작가 나름의 설명이 아닐까. 책에 홀려본 독자라면 한 번은 가졌을 법한 경험이리라(연속극도 다음 방영분의 예고편을 찔끔 남기는 방법으로 시청자들의 충성을 끌어내고 있다).

 

  그의 다음 장편이 기대된다. 다음 장편은 이 책의 또 다른 변주일까? 그도 아니라면……? 독자와 최제훈 자신을 매혹시켰던 혼돈이라는 제재는 그때까지도 그를 붙들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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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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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 김난주 옮김, 민음사, 2001.

 

  결국 남자는 탈출했을까. 아베 코보가 소설 맨 뒤에 실종신고최고장과 판결문을 덧붙인 것은, 그리고 판결문의 날짜를 10월로 한 것은 대단히 교묘했다. 그렇게 기술함으로서 아베 코보는 독자에게 남자가 영영 실종 상태에 머물렀다는 마침을 남기면서도, 그가 서술되지 않은 영역에서 끝내 탈출했을지 모른다는 상상을 남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책 맨 뒤에 수록된 실종 신고 최고장과 판결문. 소설의 결말을 갈음하는 또 하나의 방식.

 

  나는『모래의 여자』를 읽으며 카프카를 떠올렸다. 한 남자가 낯선 곳에 와서 매우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역사적인 상황에 대한 교묘한 비유, 각각의 소재들이 지니는 메타포 등은 카프카를 근원으로 하는 또 다른 갈래라는 문학적 지위를 이 소설이 충분히 획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하지만 이 소설이 카프카에게 빚을 지고 있고, 그의 세계관과 흡사한 연원을 가진 건 분명해 보인다).

 

  작품 자체로 좀 더 들어가 보자. 결국, 이 작품은 전후 일본 사회에 대한 풍자이자, 전쟁을 일으킨 일본에 대한 고찰의 결과이기도 하다. 모래구덩이 속에 살면서 감시상태에서 모래를 파고, 여자 혹은 음식 그리고 물 따위의 배급을 받고, 그저 연명하는 삶은 전쟁 중의 일본, 나아가서는 인류의 생존 그 자체에 대한 강한 풍자이다. 구덩이는 스스로의 운신을 제약하지만, 외부의 침략을 막아내기도 한다. 이 구덩이에서 토치카를 연상해내야 작가가 드러내고자 했던 의도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게 된다.

 

 『모래의 여자』에서 구덩이 밖의 사람들과 감시망루는『1984』에서의 삼엄함을 떠올리게 한다. 이와 같은 감시체제가 전체주의와 군국주의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나는 소설이 가려진 진실을 찌르는 힘을 지녔음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사물의 이면을 꿰뚫어 진실을 끌어내는 작가의 힘을 통해, 문학은 스스로 몸을 드리움으로 우리의 세계를 비추어 자신을 향유하는 자들에게 세계를, 꿈을, 감흥을, 무엇보다도 새로운 시각을 준다. 그렇다. 이 지점에서 문학은 위대해지는 것이다.

 

표지 그림이 인상적이다. 니콜라스 드 스타엘이 그린 <누워 있는 여자>라고 한다.

 

 『모래의 여자』에서 천연덕스러운 마을 사람들의 언행은 양념처럼 등장하지만, 그들 또한『1984』의 ‘당’ 이상으로 매우 잔인하다. 그들은 전체 공동체를 위해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간청하는 ‘그’에게 여자와의 성행위를 해보라고 희롱할 정도로 잔혹하다. 그 잔혹함이 뭉툭하게 드러났을 때, 그 전에 느꼈던 천연덕스러움은 의뭉스러움과 능글거림으로 변질되어 간다. 시스템을 유지하는 자들, 감시하고, 배급하는 자들, 전체주의적인 자들의 행태를 아베 코보는 위에 기술한 메타포들을 통해 꼬집어나간다.

 

  사이렌과 배급은 전체주의 국가인 일본의 피라미드적인 사회 구조를 꼬집은 것이고, 이장의 능글맞은 모습과 소설 막바지에 성행위를 충동질한 마을 주민의 모습은 대의를 위한 태평양전쟁이라는 허울 아래에 놓인 진짜 인본인의 불관용을 비꼰 것으로 보인다. 억지스러운 상황에서 말도 안 되는 전쟁을 치른 그들은 ‘나’의 말대로 “결국 무너지고 말 것들을 필사적으로 지탱하려는” 사람들일 뿐이다. 이것은 작가 아베 코보가 그들이 치른 ‘천황의 성전’에 대한 입장이기도 하다.

 

  서술자의 위치에 대해 언급하며 글을 맺고 싶다. 읽는 내내 불편했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이뤄지는 이 글에서 때로 1인칭 시점이 마구 튀어나온다. 그러다가 갑자기 전지적 시점에서 남자의 상황을 군담소설처럼 마구 질타하는 매우 직접적인 서술이 나온다. 이 모든 것들은 실로 모래 마냥 마구 쏟아진다. 그리고 소용돌이를 이루며 소설 속에 마구 녹아든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소설의 이해가 매우 달라질 수도 있겠다. 나는 이를 통해 작가의 소설쓰기의 근원이 고전소설에 치우친 건 아니었나하고 짐작했다. 서술자의 자유로운 위치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글쓰기의 특징이지만, 역시나 고소설의 방식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저 내키는 대로 쓴 것일지도 모르지만.

 

  문장의 시제가 통일성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인상을 준다. 과거와 현재가 들락날락거린다.

 

  독후감을 쓰면서 내린 결론은 작가의 소설 공부의 근간이 고소설에 머무르지 않았나 하는 것인데, 이러한 분석은 문학적으로 일관성 있게 작가의 위치가 드나든 게 아니라는 것에서 원인을 둔다. 그러나 이 같은 서술자의 위치 혼동 혹은 위치 이탈이 독서를 망칠 정도의 요소가 아닌 것 또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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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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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허호 옮김, 웅진 지식하우스, 2010.

 

 

  일부러 금각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검색해보지 않고 소설을 읽었다. 어쩌면 금각의 아름다움을 살펴본 뒤 소설을 읽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사진으로 확인한 금각은 매우 아름다웠다.

 

 

 『금각사』를 통한 초점은 한 곳을 향하고 있다. 왜 그는 금각에 불을 질렀는가. 평생에 걸쳐 그를 옭아매며 그를 괴롭히던 관념은 무엇인가.

 

  우리는 소설의 첫 부분에서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태어난 장소의 특수성, 말더듬이라는 그의 도드라진 특징, 어린 그의 눈앞에서 펼쳐지던 어머니의 비행과 그를 묵인하던 아버지의 나약함, 패망이라는 쇼크로 흔들리는 일본 사회. 사춘기 소년의 뒤틀린 내부는 그릇된 방식으로 표출된다.

 

  소설에서,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대상인 ‘금각’은 전인격적인 완성, 열반에 든 부처를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뒤틀린 말더듬이는 아름다움을 동경하는 순수한 마음을 다른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야 할지 모른다. 그는 그토록 동경해오던 ‘미’를 닮아가지 못한 채 오히려 그것을 부숴버림으로써 아름다워지지 못한 자아를, 패배한 자신을 위로하려 든다.

 

  소설가 김영하가 언급한 것처럼,『금각사』의 1장은 글쓴이에게 좋은 교본이 된다. 이 장에서 서술되고 있는 많은 부분이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많은 부분에서 유추하게 돕는 동시에 주인공에 대한 이해를 돕게끔 서술되어 있다. 금각사의 1장은 이후에 연결될 장들의 ‘단단한’ 머릿돌인 셈이다.

 

  그는 책임을 전가하려든다. 미조구치의 인격 형성과 미에 대한 일방적인 찬미, 피할 수 없었던 찬미에 대한 훼절을 쓰루카와와 가시와기는 함께 한다. 쓰루카와는 미조구치와 정반대로 매우 밝지만, 후에 그 또한 혹독한 내적 고통을 겪었음이 밝혀지는 인물이다. 반면에 가시와기는 자신의 어두운 일면을 이용하는 야비한 인물이다. 쓰루가와와 대립되는 인물인 가시와기는 미조구치의 뒤틀린 열정을 이해한다. 미조구치의 내면이 자신의 것과 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어둠을 분출시키는 가시와기와는 달리, 미조구치는 내면의 어둠을 그대로 쌓아둔다. 그것은 소설 초반에 나오는 말을 더듬는 습성과 관련 있다. 표출하지 못하기에 소통하지 못하는 미조구치는 그의 비틀린 내면을 마지막까지 성공적으로 숨기게 되는 것이다. 이 역설! 아름다움에 대한 순수한 동경과 터질 듯한 열망으로 내면이 복작거리며 끓어오르고 있음에도 그저 입술을 떨고 혀를 부들거리 열패자의 눈동자.

 

  노사의 외면도, 부친의 친구인 호탕한 선사의 마지막 응시도 파리한 안색 너머 자리한 어두움을 알아보지 못한다. 이는 미조구치가 겪는 소통의 어려움이 비단 그의 것만은 아님을 나타낸다. 미시마 유키오는 몰이해 속에서 사그라진 순수가 어떻게 변질되었는지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불통(不通) 속에서 질식하는 소년을 통해.

 

  이러한 몰이해는 인물들이 스스로를 위장하며 가속화된다. 주지승인 노사는 변장을 한 채 시내에서 여자를 만나고, 부정한 어머니는 눈물바람 끝에 밥시간을 가늠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끝끝내 돈을 받아내는 가시와기와 죽음 이후 진실한 내면을 드러낸 쓰루카와는 어떠한가. 미조구치는 금각에 불을 지름으로써 동경의 근원을 잘라버렸고, 자신의 삶 전체를 부정했으며,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이 다시는 자신의 마음속에 일지 않게끔 완전히 끊어버렸다. 이 대목에서 이 소설은 그야말로 일본적인 소설이 되었다. 미시마 유키오가 자위대의 궐기를 외치며 할복한 것은『금각사』를 통해 이미 예고된 셈이다. 아름다움 혹은 선(善)과 참에 대한 동경, 지닐 수 없을 때 차라리 부숴버리는 매정한 단호함, 세계 혹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더라도 이룩하고 싶은 결단 혹은 엄격함.

 

  저 문장이 주인공의 속내를 잘 일러주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뒤틀려가는 한 인간의 내면을 서정적이면서도 민감하게 감지하는 작가의 시선은 미덥다. 이 소설이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명제에 대해 치열하게 고뇌한 흔적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미조구치의 내면을 서술하는 부분이 과다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또한 미조구치의 어린 시절이 아니라 중학생 무렵부터 서술함으로써 이미 비뚤어진 소년으로 소설을 시작하고 있는데, 그로 인해 비뚤어짐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탐구가 부실하게 이뤄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내 생각에 미조구치의 문제는 소설의 시작보다 좀 더 앞에 자리하는 것 같다. 어머니의 부정을 목격하게 되는 3장으로 그 부분이 다 해결되었다고 보기에는 서술 혹은 설명이 부족한 감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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