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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허호 옮김, 웅진 지식하우스, 2010.
일부러 금각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검색해보지 않고 소설을 읽었다. 어쩌면 금각의 아름다움을 살펴본 뒤 소설을 읽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사진으로 확인한 금각은 매우 아름다웠다.

『금각사』를 통한 초점은 한 곳을 향하고 있다. 왜 그는 금각에 불을 질렀는가. 평생에 걸쳐 그를 옭아매며 그를 괴롭히던 관념은 무엇인가.
우리는 소설의 첫 부분에서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태어난 장소의 특수성, 말더듬이라는 그의 도드라진 특징, 어린 그의 눈앞에서 펼쳐지던 어머니의 비행과 그를 묵인하던 아버지의 나약함, 패망이라는 쇼크로 흔들리는 일본 사회. 사춘기 소년의 뒤틀린 내부는 그릇된 방식으로 표출된다.
소설에서,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대상인 ‘금각’은 전인격적인 완성, 열반에 든 부처를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뒤틀린 말더듬이는 아름다움을 동경하는 순수한 마음을 다른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야 할지 모른다. 그는 그토록 동경해오던 ‘미’를 닮아가지 못한 채 오히려 그것을 부숴버림으로써 아름다워지지 못한 자아를, 패배한 자신을 위로하려 든다.

소설가 김영하가 언급한 것처럼,『금각사』의 1장은 글쓴이에게 좋은 교본이 된다. 이 장에서 서술되고 있는 많은 부분이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많은 부분에서 유추하게 돕는 동시에 주인공에 대한 이해를 돕게끔 서술되어 있다. 금각사의 1장은 이후에 연결될 장들의 ‘단단한’ 머릿돌인 셈이다.
그는 책임을 전가하려든다. 미조구치의 인격 형성과 미에 대한 일방적인 찬미, 피할 수 없었던 찬미에 대한 훼절을 쓰루카와와 가시와기는 함께 한다. 쓰루카와는 미조구치와 정반대로 매우 밝지만, 후에 그 또한 혹독한 내적 고통을 겪었음이 밝혀지는 인물이다. 반면에 가시와기는 자신의 어두운 일면을 이용하는 야비한 인물이다. 쓰루가와와 대립되는 인물인 가시와기는 미조구치의 뒤틀린 열정을 이해한다. 미조구치의 내면이 자신의 것과 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어둠을 분출시키는 가시와기와는 달리, 미조구치는 내면의 어둠을 그대로 쌓아둔다. 그것은 소설 초반에 나오는 말을 더듬는 습성과 관련 있다. 표출하지 못하기에 소통하지 못하는 미조구치는 그의 비틀린 내면을 마지막까지 성공적으로 숨기게 되는 것이다. 이 역설! 아름다움에 대한 순수한 동경과 터질 듯한 열망으로 내면이 복작거리며 끓어오르고 있음에도 그저 입술을 떨고 혀를 부들거리 열패자의 눈동자.
노사의 외면도, 부친의 친구인 호탕한 선사의 마지막 응시도 파리한 안색 너머 자리한 어두움을 알아보지 못한다. 이는 미조구치가 겪는 소통의 어려움이 비단 그의 것만은 아님을 나타낸다. 미시마 유키오는 몰이해 속에서 사그라진 순수가 어떻게 변질되었는지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불통(不通) 속에서 질식하는 소년을 통해.
이러한 몰이해는 인물들이 스스로를 위장하며 가속화된다. 주지승인 노사는 변장을 한 채 시내에서 여자를 만나고, 부정한 어머니는 눈물바람 끝에 밥시간을 가늠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끝끝내 돈을 받아내는 가시와기와 죽음 이후 진실한 내면을 드러낸 쓰루카와는 어떠한가. 미조구치는 금각에 불을 지름으로써 동경의 근원을 잘라버렸고, 자신의 삶 전체를 부정했으며,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이 다시는 자신의 마음속에 일지 않게끔 완전히 끊어버렸다. 이 대목에서 이 소설은 그야말로 일본적인 소설이 되었다. 미시마 유키오가 자위대의 궐기를 외치며 할복한 것은『금각사』를 통해 이미 예고된 셈이다. 아름다움 혹은 선(善)과 참에 대한 동경, 지닐 수 없을 때 차라리 부숴버리는 매정한 단호함, 세계 혹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더라도 이룩하고 싶은 결단 혹은 엄격함.

저 문장이 주인공의 속내를 잘 일러주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뒤틀려가는 한 인간의 내면을 서정적이면서도 민감하게 감지하는 작가의 시선은 미덥다. 이 소설이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명제에 대해 치열하게 고뇌한 흔적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미조구치의 내면을 서술하는 부분이 과다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또한 미조구치의 어린 시절이 아니라 중학생 무렵부터 서술함으로써 이미 비뚤어진 소년으로 소설을 시작하고 있는데, 그로 인해 비뚤어짐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탐구가 부실하게 이뤄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내 생각에 미조구치의 문제는 소설의 시작보다 좀 더 앞에 자리하는 것 같다. 어머니의 부정을 목격하게 되는 3장으로 그 부분이 다 해결되었다고 보기에는 서술 혹은 설명이 부족한 감이 있다. (*)
보다 많은 감상평들이 http://blog.naver.com/anssjaj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