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줄리언 반스,『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최세희 옮김, 다산책방, 2012.

 

  문학상이 책에 드리우는 아우라는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그것은 수상작을 매혹적으로 만드는 동시에 소설의 파악을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고양 원더스의 감독인 김성근은 직접 본 선수만을 판단하지 다른 이의 평은 듣지 않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같은 맥락으로 말을 이어보자면, 문학상 수상이라는 아우라는 소설 자체가 지닌 의미나 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요소가 되기도 한다(그렇기 때문에 더 자세히 봐야할 필요가 생긴다).

 

  이언 매큐언의『암스테르담』, 아룬다티 로이의『작은 것들의 신』 등을 통해 맨부커 상 수상작들은 내게 좋은 인상을 주었었다. 생각해 보니,『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사 년 전에『플로베르의 앵무새』를 읽은 뒤로 처음 읽는 반스의 작품이다.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읽은 뒤 남은 생각은 그것이 좋은 소설이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적은 독자를 대상으로 쓴 소설이라는 인상이며, 잘 쓴 작품이긴 하지만 내 취향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기억들을 떠올리며『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펴들었다.

 

  우선, 원제인『The sense of an ending』를 고친 결정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이 결정은 어리석었다. 원제가 지닌 의미심장함을 한국어판 제목은 5할도 지니지 못했다. 차라리 ‘종말의 예감’ 정도로 바꾸었으면 어땠을까. 이 제목이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서 이는 페이소스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말이 나온 김에, 단점부터 짚고 넘어가자. 이 소설은 지루하다. 독서에 있어 ‘지루함’의 면모는 다양하다. 담 너머로 책을 내던지고 싶을 정도의 지루함이 있고, 일부 대목이 늘어지기도 하며, 어떤 인물이 등장하는 대목마다 여지없이 따분하기도 하다. 각각의 다른 요인들로 인해 다양한 지루함이 드러나는 건데,『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지루함은 일부분에 한정되어 있다. 서술자인 토니 웹스터가 자신의 단조로우면서도 단선적인 자아를 드러내는 서술에서 지루함이 도드라지곤 한다.

 

  나이든 토니 웹스터는 자기 본위적인 인물로 자신의 과거사에 대해 불완전한 기억을 지닌 인물이다. 소설의 많은 부분이 토니의 회상을 통해 이뤄지는데, 이 부분은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면서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사건이 뒤죽박죽이 되거나 서술이 꼬여있진 않다(나는 한 명의 서술자를 세워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소설이 정교하지 못할 때 벌어지는 참사를 너무나 많이 봐왔다). 회상이 사건 발생 순서에 따라 순차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과 말끔하게 정리된 문장이 독자의 서술 이해를 잘 돕고 있다는 점은 엉뚱한 사고(私考) 단계로 흘러가버리는 토니의 습성을 참아내게끔 만든다.

지루해지는 대목들은 토니가 벌어지고 있는 주된 사건과 동떨어진 장황한 서술을 선보일 때 빚어지곤 했다. 글쎄, 두 번째 읽으면 그것들이 지닌 좀 더 분명한 의미를 파악하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처음 읽었을 때 그것들은 여지없이 지루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일견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던 서술들이, 치밀한 복선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게 이 소설이 지닌 최대의 장점이다. 충격적인 결말을 예비해놓은 줄리언 반스는 그 곳에 이르는 길목들에 수많은 단서들을 설치해놓았고, 그것을 엷은 모래로 덮어버렸다. 이 장점에 준하는 또 다른 장점이 이 대목에서 발현된다. 충격적인 결말로 치닫도록 독자의 호기심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는 소재들의 사용을 줄리언 반스는 탁월하게 해낸다. 서술자인 토니가 회상해내는 지난날의 과오들, 그가 보냈던 편지, 그에게 남겨진 에이드리언의 일기장과 포드 부인이 남겼다는 유산. 중대하지만 소소하게 보이도록 가공된 단서들은 책의 결말에 이르러 놀라운 복선으로 작용한다. 의미를 파악하지 못해 심드렁한 표정으로 읽어 넘기고 있던 단조로운 서술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놀라운 연결점들을 만들어내어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복선들은 결말에 이르러 놀라운 폭발을 일으킨다. 그것이 일으킨 불꽃이 성대했음을 굳이 부연할 필요는 없으리라. 셰익스피어가 말했듯이, 끝이 좋으면 모든 게 좋은 법이다.

 

  이 대목부터는 스포일링이 포함될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서술을 다시 한 번 읽으며, 나는 토니가 자신의 어리석음과 단순함 때문에 에이드리언이 맞은 파국을 피했다는 생각을 했다. 이 어리석음과 단순함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줄리언 반스가 구사한 서술을 가능케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어리석음이 돌연한 깨달음을 맞으며 파국은 가장자리로 밀려 나아간다.

 

  어쩌면 이것은 ‘예감’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논했던 역사와 문학과 동급생의 자살은 진중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흩어놓은 의미들을 집중시키는 작가의 솜씨는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어보길 바란다. 작품이 걸맞은 품격을 지닐 때, 상이 드리운 고고함이 한껏 빛날 수 있음을 당신이 직접 확인하기를 나는 바라고 있는 것이다. (*)

 

 

사진을 포함한 리뷰와 다양한 서평들을 http://blog.naver.com/anssjaj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도가니』, 공지영, 창비, 2009.

 

  아주 역겨운 소설이었다.

 

  공지영 씨의 장편은 처음 읽는데, 이번 이상문학상 수상작인「맨발로 글목을 돌다」와 자선대표작「진지한 남자」에서의 좋은 인상들이 모두 무너졌다.

 

  김승옥의「무진기행」에 대한 패러디로 소설의 앞과 뒤를 채운 것은, 그 중간에 창녀와 미친 여자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끼워 넣음으로써 소소한 재미를 주는 실력은 그녀의 책이 왜 잘 팔리는가에 대한 해답일지도 모르겠다. 좋은 건 그것뿐이었다.

 

  이 소설은 치밀함이 없다. 재판 과정에서 일어나는 몇몇 반전들이 있으나, 거기에 그칠 뿐이다. 내가 가장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대목은 인물의 얄팍함에 있다. 다채롭지 못한『도가니』의 인물들은 지극히 평면적이며 전형적이다. 장애인은 불쌍하고, 착취자는 악랄하며, 이를 돕는 자들은 뻔뻔하기 짝이 없다. 진실을 규명하는 자들은 연약하고 정의롭지만, 다른 인물들을 통해 순진하며 세상을 모른다는 핀잔을 듣는다. 너무나 빤한 인물 아닌가. 이 소설의 인물들이 당위를 지니려면 형사의 입을 통해 사건과 연관된 인물들의 처지와 입장이 우수수 뱉어져선 안 되었다. 나는 이것을 공지영의 편의주의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건이 풀려나가는 방식도 나이브하다.『도가니』에 등장한 판사는 판사대로, 변호사는 변호사대로의 서술과 설명들이 필요했다. 소를 채워 넣지 않고 찜통에 넣자, 물기에 젖은 인물들은 찜통 바닥에 찰싹 붙어버린 셈이 되었다.

 

  이 소설에는 시대상황에 편승하려는 작가의 엉큼한 야욕이 있다. 수구 세력들에게 핍박받는 민주화 세력, 어리석고 부패한 보수와 가난하지만 정의로운 진보의 틀이 겨우 공지영의 한계다(이 작품만으로는 충분히 그렇다). 공지영 씨 생각대로, 보수는 고루하고 진보는 멋들어지기만 한가? 나는 세상을 이렇게 쉽게 재단하는 방식이 공지영의 사회참여방식에 대해 비판하는 의견들과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 몇 개의 선으로 세상이 쉽게 분류 가능한 것이었다면, 분규와 다툼은 이미 오래 전에 종식되었을 것이다. 소설의 대립구도를 이렇게 단순하게 그려내어선 안 된다. 나는 공지영 씨가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의 정치색을 가감 없이 드러내었고, 그를 통해 또 다른 방식의 지지와 성원을 끌어내려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작가의 뒤이은 행보가 나의 의심이 지극히 쓸데없는 것임을 증명해주었으면 좋겠다(나꼼수와 연계된 그간의 행보를 보면 점점 안타까워질 뿐이다).

 

  이 소설에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작가의 편협성이 있다. 소망교회라는 프레임에 갇힌 대통령이 지탄받는 요즘, 공지영은 교회세력을 악의 축으로 소설에 등장시킨다. 그녀가 이러한 포지션에서 방어기제로 삼은 소재는 농아를 돕는 사람 또한 목사라는 것밖엔 없다. 이 소설을 읽은 사람들 대부분은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아쉽지는 않다. 다만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라면 한 종교집단을 공격대상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낼 만한 소설을 쓰는 것이 더욱 긴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이 소설에는 복합성이 없다. 인물들은 잘라놓은 종이인형처럼 단순하고 평면적이다. 판사는 보수 꼴통이 아닌, 꽉 막힌 인물로 그려지며 작가가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곁들인 소개에서 조금의 벗어남도 없이 딱 그만큼만 활동한다. 농아들과 그들을 돕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모두 나쁘고 썩었고 사악하다. 실제로 그럴지언정, 소설의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게 그려져선 안 된다. 나는 공지영을 떠올리면 80년대 쉽게 흥분하곤 하는 운동권 ‘여자 선배’들이 떠오르곤 한다(그녀들의 반대편에 있던 존재들이 진중권 선생 같은 사람들이다).

 

  이 소설은 모든 게 예정되어 있다. 강인호는 무진으로 발령받았지만, 그의 발령조차 아내의 예정에 따른 것이며, 연이은 사건의 폭로와 재판, 돈의 유혹에 넘어가는 피해자들과 강인호의 도주에까지 이 소설은 인물들이 상황과 사건을 바꿔나가는 힘이 없이 작가가 예정한 모든 것이 이뤄져 나간다. 슬픈 일이 있을 때 모두는 비통해하며, 억울한 농아들은 “우워워” 울부짖는다. 그 울부짖음이 가졌을 법한 고통과 원망은 공지영의 글을 통해 오히려 빈약해져버렸다.

 

  표지만큼 이 소설이 내 가슴에 울림을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이 상황이 슬프다. (*)

 

더 많은 리뷰들을 http://blog.naver.com/anssjaj을 통해 읽으실 수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김영하,『너의 목소리가 들려』, 문학동네, 2012.

 

  어떤 소설이 독후감 쓰기에 좋지 않을까. 기준점 잡기 어려운 소설의 독후감을 쓰기는 까다롭다. 규정짓기 어려울 때, 소설분석은 난관에 봉착한다. 재미없거나 일정한 관념들만 흘러가는 소설도 평하기가 쉽지 않다. 못 쓴 소설은 되레 쉽다. 흠을 잡으면서 이것저것을 따지다보면 분량이 어느 정도 채워지기 때문이다.

 

  김영하의 신작『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위의 기준 모두에 해당하지 않는다.

 

  일정한 결론으로부터 본론을 시작하도록 하자. 나는 이 소설이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장편소설의 서두에는 대개 소설 전체의 주제나 주요 사건과 긴밀히 엮이는 어떤 무엇이 있기 마련이다. 마술사는 소년을 공중에 올리고 토막 난 소년의 피에 젖은 신체는 무대에 마구 떨어진다. 잠시 후 마술사가 시체를 검은 막으로 감싸고 토막 났던 소년은 멀쩡하게 관객 앞에 몸을 드러낸다. 소년은 죽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어쩌면 마술사는 소년을 실제로 죽이고 되살려냈던 걸지도 모른다. 추락만이 당연한 귀결이었을 시점에 제이는 날아올랐다고 소년들은 증언한다. 제이는 죽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어쩌면 제이는 죽지 않고 정말로 빛을 타고 하늘 너머로 날아가 버렸던 걸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프롤로그는 제이의 죽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한 작가의 지침이다. 제이의 죽음이 어떤 진실을 가지고 있는가와 관계없이 김영하는 마술을, 트릭이 아닌 진정한 환상을 제공하는 영원한 꿈을 서술을 통해 풀어낸다.

 

  소설의 처음, 매끄럽게 열리는 한 겹의 막. 소녀는 화장실에서 아이를 낳고 살해당할 뻔한 아기는 우연히 길러진다. 아기의 등뼈에서 느껴지는 도드라진 뼈와 그것이 암시하는 상징물로 인해 독자의 호기심을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김영하는 아이를 들인 돼지엄마의 가슴에서 젖이 난다는 서술을 통해 메마르고 뻣뻣하기만 서울이라는 도시에 자리잡은 환상의 씨앗을 움트게 만든다. 그리고 이어지는 힌트. 제이라는 소년이 가졌다고 믿어지는 특별한 힘과 그를 통해 제이가 느끼는 고통들. 소년은 사물이 말하지 않는 것들을 듣는다. 예민한 아이는 귀가 아닌 가슴으로 듣는 듯하다. 하나의 물체와 또 다른 하나의 물체가 마주 섰을 때, 그 둘 사이에서 일정한 진동이 울려 둘이 같은 떨림을 갖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공명(共鳴)이라 부른다. 이러한 ‘같은 떨림’이 제이의 내부를 두들기도 있는 것이다. 소년은 술 상자 위에서 추락한다. 아주 오래전, 미쓰꼬시 백화점 옥상에서 마구 펄럭이는 딕셔내리의 페이지들을 느꼈던 어느 시인처럼 겨드랑이 언저리를 매만지며.

 

  이 감상문을 통해 제이의 삶 전체를 요약할 필요는 없으리라. 우리는 자신의 비참한 삶과 다른 존재들의 내면-불에 그슬려 결국은 천천히 쪼개지고 말-의 목소리를 듣던 소년이 자신을 어디로 내던져졌는지를 살펴야 한다. 질주하는 오토바이는 수평인 도로 위에 아슬아슬한 직각을 이루고 있다. 다른 도로로 옮겨갈 때마다 오토바이는 위태로이 기울어진다. 달리지 않으면 오토바이는 도로 위에 온전히 설 수 없다. 오토바이를 탄다는 건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 경계까지 내던지겠다는 선언이자, 온전히 설 수 없는 자아를 지닌 자의 내밀한 고백이기도 하다. 이런 시인들을 이끄는 제이는 그들의 내면이 어디로 질주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그는 듣는 자, 공명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마후라 뗀 오토바이의 굉음처럼 우렁차다. 도처에서 몰려든 그 소리들이 한강 다리를 지나 강남 도심에까지 차가운 밤공기를 떠르르 울리며 나아갈 때, 귀 막은 세상은 얼굴을 찌푸린다. 그리고 장발의 소년은, 너저분한 인생을 영위하는 막장 인생들을 폭주로 이끌어 그들 자신을 분출구로 쏘아 보내게 만든 제이는 경찰 저지선 너머에 펼쳐진 너른 하늘로 날아오른다.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에서 몰려온 청소년들에게 제이는 선망의 대상이자 강렬한 카리스마의 소유자로 여겨졌다. 나는 그 이유를 제이가 지녔던 그 능력, 공명하고 상대의 내면을 읽어내어 공명하는 힘에서 찾는다. 추락한 건, 혹은 날아올라 영영 사라지고 만 건 제이가 아니라 그들의 공명판이었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되울려줄 대상을 잃은 그들은 더 이상 대폭주를 계속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흩어지고 만다.

 

  이렇게 끝날 것 같던 소설은 또 다른 화자가 등장하면서 국면이 전환된다. 그리고 인물들이 지녔던 측면들이 새로이 부각된다. 마술적 요소가 첨가된 도시의 신화(神話)는 작가인 ‘나’를 통해 교묘하게 봉합된다. 김영하가 마지막에 이런 부분을 보강해 서사 구조를 탄탄하게 만들고 인물을 복합적으로 만들어내는 솜씨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자칫 밋밋한 세태 소설에 그칠 뻔한 이 소설이 마지막에 등장한 화자에 의해 구원받은 셈이다. 진 선생님이라는 인물이 보낸 편지는 무척 중요하다. 아이들의 뒤틀린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제이가 폭주족이 되기 직전까지의 공백이 이를 통해 보강되고 있다. 쉴 공간과 욕구들의 충족을 공급받은 제이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신을 도운 여인에게 보답하려 든다. 보답의 방식이 뒤틀려 있는 건 제이의 미숙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제이의 지난 경험이 소년의 내면을 어떻게 뒤틀리게 만들었는지를 알려준다. 잘라내어 버려야 할 가슴을 사이에 둔 채, 여인과 소년은 다시 한 번 이 소설의 주제를 되새기게 만든다. 마주 선 두 존재는 무엇을 통해 공명하는가.

 

  승태라는 인물이 충분히 활용되지 못한 점, 1부에서 3부까지의 화자인 동규가 지나치게 전지적인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 3부 마지막의 동규의 증오가 좀 더 많은 설득력을 지녀야 했다는 점을 나는『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단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한계선이 아닌, 일종의 납득지점이다. 작가가 구축해놓은 경계가 아닌, 독자가 재구성하며 받아들인 이야기의 어긋난 표면들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요령부득은 두 번째의 독서를 통해 더 큰 용납을 끌어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 글을 마치는 지금, 이야기의 조각들은 아직도 나의 내면을 가로지르고 있다. 우르르, 천둥 같은 떨림을 뿜으며 이야기들은 내 마음에 수많은 공명과 간섭을 일으킨다. 언젠가『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다시 집어 드는 날, 이 성난 엔진소리는 잦아들 것인가, 높아질 것인가.

 

  두 번째 독서를 통해 투영될 또 다른 목소리를, 나는 이미 기대하는지도 모른다. (*)

 

  사진을 포함한 리뷰는 http://blog.naver.com/anssjaj를 통해 읽으실 수 있습니다.

 

  tkwlsdmf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마라구, 정영목 옮김, 해냄, 2002.

 

  이 소설을 읽기, 쉽지 않다. 문체가 주된 용의자이다. 서술문과 대화문을 굳이 구분하지 않는 작가 특유의 문체가 책의 여백을 메우고 있었는데, 여백이 없는 글에 압박을 느끼는 독자라면 읽어 내리기에 부담이 있겠다 싶었다.

 

  주제 사마라구는 소설에 대화문을 따로 두지 않고 간접화법에 의존하는데, 문단 또한 짧지 않다. 이러한 서술은 중반부부터 점차 나아지다가 막판에 가서 다시 거슬렸다. 이에는 사건의 진행 속도와도 관련되어 있을 것이고, 내포작가가 직접적으로 서술에 끼어드는 빈도와도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작품 해석의 폭을 넓혔다는 것을 우선 장점으로 꼽을 수 있겠다. 이 작품엔 누구의 이름도 나오지 않으며 모든 인물들은 독특한 지칭어를 지닌다. 처음 눈먼 남자, 의사의 아내, 색안경을 쓴 여자, 약국 남자 등. 이렇기 때문에 미국사람은 뉴욕에서 벌어진 일로, 스페인 사람은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일도, 중국 사람은 베이징 남부의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넓은 가능성은 위에서 살펴본 보편성을 제공하는 동시에, 인간성 내밀한 곳에 자리한 딜레마를 끌어냄으로써 소설의 주제를 독자와 매우 밀접한 것으로 끌어당긴다. 우리가 유지하는 사회와 우리가 구축한 문명은 이토록 간결한 가정(假定) 하나에 무너질만큼 빈약한 것이다. 그리고 이 가정은 매우 간이하고도 그럴 법하기에 독자에게 있어 소설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은 우리에게 긴급히 닥칠 수 있는 문제로 여겨진다.

 

  소설에서의 문제들이 사실은 우리가 현재 지닌 문제들의 변형된 문제들임을 깨달을 때, 소설과 현실은 더욱 밀착된다. 폭력의 문제, 억압의 문제, 진실과 거짓의 문제, 능력에 따른 권력의 문제, 우리 모두가 지닌 야만이라는 이름의 분명한 내부, 이것을 억누를 수단으로서의 법체계 혹은 양심이라는 형이상학적인 관념들(너무도 가벼운 이 관념들은 미세한 바람에도 무너질 뿐이다). 소설을 통해 사색하게 만드는데 있어 주제 사마라구는 탁월한 솜씨를 보인다. 하나의 가정을 통해 그는 인류의 상황을 환상적으로 보여주며, 인류가 지녔다고 스스로 자긍하는 환상들이 얼마나 부실한지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이 솜씨는 놀랍다. 그 가정들이 불러일으키는 사유의 크기와 변증되는 논의들의 높다랗게 이어진 계단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통해 사색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독자의 내면에 균열을 일으키는 냉엄한 열정에 나는 감탄하고 있다.

 

 『눈먼 자들의 도시』가 지닌 또 다른 장점은 독특한 상상력에 있다. 눈이 머는 전염병이 나돌고 체제가 붕괴되고 사람들이 버려지며 결국은 모든 문명의 틀이 삐걱거린다는 이 상상은 매우 흥미롭다. 이러한 광범위한 영역의 상상은 필연적으로 거대 담론을 일으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이 제시하고 있는 담론들을 묵상하는 과정이 무척 즐거웠다. 이야기인 소설은, 더욱이 좋은 소설은, 읽는 과정에서 흥미진진해야 하고 끝난 뒤에도 진하고 깊은 감흥을 남겨두어야 한다. 이 책이 그러했다. 이 소설은 권력의 문제, 국가 체제의 문제, 인간의 품위와 그것의 박탈에 대한 문제, 사랑과 그것을 빌미로 일어나곤 하는 의존에 대한 문제들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 책은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만들 만큼 흥미로운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프랑스의 관객들의 주의를 끌만큼 묵직한 주제를 지녔다. 주제 사라마구는 신과 사회와 인간을 짙은 베일 너머로 던져놓고 벌어지는 일들을 놀라운 솜씨로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인간성에 대한 작가의 깊은 이해와 성찰, 그것들이 풍족하게 담긴 서술을 이 작품의 장점으로 꼽고 싶다. 그 수많은 똥덩이들, 오물들. 눈먼 자들은 자신의 수치를 잊었고, 삶을 잊었고, 존엄을 잊었다. 단지 눈이 멀었을 뿐인데, 우리는 이만큼이나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다. 일찍이 허구의 세계를 이토록 생생하게 다룬 작가가 또 있었던가. 작가가 사건을 통해 드러내는 인간의 면모들이 생생함에 크게 일조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보여주는 통찰력과 구애받지 않는 과감한 서술이 매우 부러웠었다.

 

  첨언을 하자면, 이 책을 읽고, 공지영의『도가니』를 읽었다. 레벨 50인 캐릭터로 레벨 10짜리 퀘스트를 하는 기분이었다. (*)

 

  사진은 액박이 되기 때문에 싣지 않았습니다. 사진이 포함된 포스트는 http://blog.naver.com/anssjaj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명예 민음사 모던 클래식 41
다니엘 켈만 지음, 임정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명예』, 다니엘 켈만, 임정희 옮김, 민음사, 2011.

 

  진정한 러시아 인형은 이런 방식을 지녔다. 이야기 속에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담았지만, 각 이야기들은 흡사하며 끊을 수 없는 연계를 지녔다. 각각 다른 기능을 지녔으면서도 서로를 포함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것.

 

  민음사 모던 클래식 특유의 깔끔한 디자인이 눈길을 잡아 끈다.

 

  책에 실린 홍보 문구대로, 다니엘 켈만은『명예』를 통해 자신의 글이 세계문학의 범주에 다다랐음을 알렸다. 소설『명예』의 구조는 매우 흥미롭고,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은 재치로 가득 차있다. 켈만은 즐길 만한 텍스트를 선보였다.

 

  텍스트의 세세한 윤곽들을 더듬어보도록 하자. 작품 전체가 가진 주제는 무엇인가. 소통의 부재? 자아 찾기? 자아를 찾는 과정은 소통의 전제 조건이기도 하고, 소통의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전체 소설 중에서「동양」과「수녀원장에게 답하다」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위선으로 위장한 작가가 전복을 꿈꾸는 이야기인「수녀원장에게 답하다」가 다루는 흥미로운 소재를 탐닉해보자. 사실『명예』의 부분을 이루는 각 단편들은「수녀원장에게 답하다」에서 다뤄진 작가의 정신세계를 일부 반영하고 있는 듯 보인다. 켈만은 작품이 쓰이는 과정과 작품이 구성되는 과정까지 작품 내에 투영시키고 있는데,『거대한 괴물』에서 폴 오스터가 다룬 방식과 비슷하지만, 명확한 차이점을 보인다.

 

  굉장히 빨리 읽힌다는 건 순한 문장들이 적절히 얽혔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책이 그렇다.

 

  어쩌면 이러한 ‘참여’는 문학적 리얼리티를 감소시키는 요인이 되는지도 모른다. 문학작품을 사회 전반을 그대로 투영하는 유리로 여기는 사람은 이를 매우 큰 오류로 볼 수도 있겠다.

 

  작가 켈만은 이야기를 통해 어떤 (거대한) 무엇을 건네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소설의 모태인 ‘이야기 들려주기’를 보다 거창한 해석의 틀을 거치지 않고 단순하면서도 소박하게 독자에게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켈만은 각 단편들에게 형식상의 독특함을 부여하는 데에 좀 더 주력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옴니버스 영화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방식에서 어떤 편에서의 주인공은 다른 편에서의 엑스트라로 스쳐 지날 뿐이다. 어쩌면 이러한 면모가 우리 삶의 특성을 좀 더 잘 대변할지도 모른다. 라우라 에스키벨이『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에서 서술한 것처럼 “존재하지 않는 게 진짜 진실”(198쪽)이다. 인생이 그러하다면 그것을 반영하는 문학은 모호한 진실을 띨 수밖에 없지 않을까.

 

   나는 특히「동양」이 지닌 메시지를 음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니컬한 위트가 가미된 견고한 이야기「동양」은 낯선 세계에 던져진 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녀는 이 세계에 맹렬히 부딪쳐 결국은 굴복했는가. 아니면 안착하였나. 그녀가 동양이라는 쓰레기 더미 속에서 홀로 죽어간 것이라면 이야기 말미에 느껴지는 일종의 평온함은 무엇이란 말인가.「동양」은 우리에게 추가적인 논의를 제공한다. 한편 이 작품은 불편함을 초래하기도 했는데, 이는 불합리성과 태만, 숨 막히는 관료주의 등을 동양적 특성으로 규정지은 서양인 작가의 편벽한 시선 때문이었다.

 

  숨막힐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매끄러운 뒤태.

 

 『명예』는 권투로 치자면 현란한 스텝을 자랑하는 아웃복서에 비할 만하다. 상대를 때려눕힐 강한 주먹은 지니고 있지 않지만, 멋들어진 움직임을 보이는 테크니션 말이다.

 

   이 대목에 이르러 남겨진 의문은 하나다. 왜 제목이『명예』일까 하는 것이다. 이는 명예에 대한, 혹은 자존감이나 자긍심에 대한 이야기인가. ‘명예’라는 단어는 이 단편들을 한데 꿸 만한 적절한 단어일까. 이 책을 끝까지 읽은 몇 명의 독자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까. (*)

 

더 많은 리뷰가 http://blog.naver.com/anssjaj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