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마라구, 정영목 옮김, 해냄, 2002.

 

  이 소설을 읽기, 쉽지 않다. 문체가 주된 용의자이다. 서술문과 대화문을 굳이 구분하지 않는 작가 특유의 문체가 책의 여백을 메우고 있었는데, 여백이 없는 글에 압박을 느끼는 독자라면 읽어 내리기에 부담이 있겠다 싶었다.

 

  주제 사마라구는 소설에 대화문을 따로 두지 않고 간접화법에 의존하는데, 문단 또한 짧지 않다. 이러한 서술은 중반부부터 점차 나아지다가 막판에 가서 다시 거슬렸다. 이에는 사건의 진행 속도와도 관련되어 있을 것이고, 내포작가가 직접적으로 서술에 끼어드는 빈도와도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작품 해석의 폭을 넓혔다는 것을 우선 장점으로 꼽을 수 있겠다. 이 작품엔 누구의 이름도 나오지 않으며 모든 인물들은 독특한 지칭어를 지닌다. 처음 눈먼 남자, 의사의 아내, 색안경을 쓴 여자, 약국 남자 등. 이렇기 때문에 미국사람은 뉴욕에서 벌어진 일로, 스페인 사람은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일도, 중국 사람은 베이징 남부의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넓은 가능성은 위에서 살펴본 보편성을 제공하는 동시에, 인간성 내밀한 곳에 자리한 딜레마를 끌어냄으로써 소설의 주제를 독자와 매우 밀접한 것으로 끌어당긴다. 우리가 유지하는 사회와 우리가 구축한 문명은 이토록 간결한 가정(假定) 하나에 무너질만큼 빈약한 것이다. 그리고 이 가정은 매우 간이하고도 그럴 법하기에 독자에게 있어 소설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은 우리에게 긴급히 닥칠 수 있는 문제로 여겨진다.

 

  소설에서의 문제들이 사실은 우리가 현재 지닌 문제들의 변형된 문제들임을 깨달을 때, 소설과 현실은 더욱 밀착된다. 폭력의 문제, 억압의 문제, 진실과 거짓의 문제, 능력에 따른 권력의 문제, 우리 모두가 지닌 야만이라는 이름의 분명한 내부, 이것을 억누를 수단으로서의 법체계 혹은 양심이라는 형이상학적인 관념들(너무도 가벼운 이 관념들은 미세한 바람에도 무너질 뿐이다). 소설을 통해 사색하게 만드는데 있어 주제 사마라구는 탁월한 솜씨를 보인다. 하나의 가정을 통해 그는 인류의 상황을 환상적으로 보여주며, 인류가 지녔다고 스스로 자긍하는 환상들이 얼마나 부실한지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이 솜씨는 놀랍다. 그 가정들이 불러일으키는 사유의 크기와 변증되는 논의들의 높다랗게 이어진 계단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통해 사색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독자의 내면에 균열을 일으키는 냉엄한 열정에 나는 감탄하고 있다.

 

 『눈먼 자들의 도시』가 지닌 또 다른 장점은 독특한 상상력에 있다. 눈이 머는 전염병이 나돌고 체제가 붕괴되고 사람들이 버려지며 결국은 모든 문명의 틀이 삐걱거린다는 이 상상은 매우 흥미롭다. 이러한 광범위한 영역의 상상은 필연적으로 거대 담론을 일으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이 제시하고 있는 담론들을 묵상하는 과정이 무척 즐거웠다. 이야기인 소설은, 더욱이 좋은 소설은, 읽는 과정에서 흥미진진해야 하고 끝난 뒤에도 진하고 깊은 감흥을 남겨두어야 한다. 이 책이 그러했다. 이 소설은 권력의 문제, 국가 체제의 문제, 인간의 품위와 그것의 박탈에 대한 문제, 사랑과 그것을 빌미로 일어나곤 하는 의존에 대한 문제들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 책은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만들 만큼 흥미로운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프랑스의 관객들의 주의를 끌만큼 묵직한 주제를 지녔다. 주제 사라마구는 신과 사회와 인간을 짙은 베일 너머로 던져놓고 벌어지는 일들을 놀라운 솜씨로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인간성에 대한 작가의 깊은 이해와 성찰, 그것들이 풍족하게 담긴 서술을 이 작품의 장점으로 꼽고 싶다. 그 수많은 똥덩이들, 오물들. 눈먼 자들은 자신의 수치를 잊었고, 삶을 잊었고, 존엄을 잊었다. 단지 눈이 멀었을 뿐인데, 우리는 이만큼이나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다. 일찍이 허구의 세계를 이토록 생생하게 다룬 작가가 또 있었던가. 작가가 사건을 통해 드러내는 인간의 면모들이 생생함에 크게 일조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보여주는 통찰력과 구애받지 않는 과감한 서술이 매우 부러웠었다.

 

  첨언을 하자면, 이 책을 읽고, 공지영의『도가니』를 읽었다. 레벨 50인 캐릭터로 레벨 10짜리 퀘스트를 하는 기분이었다. (*)

 

  사진은 액박이 되기 때문에 싣지 않았습니다. 사진이 포함된 포스트는 http://blog.naver.com/anssjaj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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