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른다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96
김진완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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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교가 있던 자리를 지나다

 

 

배가 약간 부푼 우유를 들었다가

유통 일자를 보고 내려놓는다

생생하지 않은 게

생생하지 않은 걸

들었다 놓은 거다

 

난 지금 생이 조금은 더 아리고 쓰렸으면 하는 거지만,

유통기한에 다가갈수록 이 생은 더 뭉글거려서

쉰내 풍기는 살덩어리를 뒤집어쓰고 어기적어기적-

거리다 보았네

마늘 까던 손톱,

빗물에 젖은 찐 고구마,

목장갑에 닦인 감과 귤을

가랑이 사이에 품고 있던 육교가

사라진 걸 보았네

 

언젠가 어느 손이 날 들었다가 유통기한을 확인하고

-걱정 마라 괜찮다

등을 두드려준다면

그 손은 육교 아래서 종일 마늘을 까느라

손톱 밑이 욱신대던 그 손일 것!

 

아니라?

아니다.

그래도 심술 굵은 그 손은

-밥은 먹고 다니냐

물어봐준 적 있었다

나 그때

마음 아려서

슬픔 한 입 깨물고

목멘 적 있었다

 

 

지하철에서 이 시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울 뻔했다. 감수성은 이미 말라버린지 오래고, 시가 뭔지 알 턱이 없는 내가. 뭔가 한대 맞은 기분. 아. 정말 시인이 될 수 있다면, 아니 시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느낄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

 

우유 유통기한에 빗댄 것처럼, 흔한 청춘을 넘어선, 절정을 넘어선 모든 것들이 그렇듯 뭉글뭉글해지고 더욱 고약해지면서 어쨌든 어영부영 살아남았다. 나조차 생생하지 않지만, 우유 유통기한을 확인하면서도 매번 내 생각은 못했다. 세월을 더해갈수록 나아지고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더 어기적거리고 모르겠고 어렵기만 한 게 산다는 거 아닐까.

 

그런 내 등을 한번이라도 어루만져준 손은 사실 나보다 훨씬 생생하지 않은, 그 손이었다. 마늘을 까던 손, 고구마를 삶던 손, 목장갑을 끼고 있는. 지금은 없어진 육교 아래에서. 결국 그 손들도 사라진 육교처럼 곧 사라져가겠지.

 

때때로 소멸에 대한 생각을 하곤 한다. 아직 모르는 일이고, 멀게만 느껴졌는데 사실 죽음은 너무 흔하다. 우리네 삶도 식상하지만 너무 빨리 간다. 정신 차릴 틈도 없다. 삶은 어쩔 수 없이 누추하고 부끄럽지만, 하루를 살아내는 데는 점점 더 익숙해져서 그냥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가 싶다. 그러나 아무도 말해주지 않은, 가슴 한켠에 쌓인 쓸쓸함과 그리움에 대해서 시인은 참 투박하지만 아름답게 잘 그려냈다. 잊혀져가는 것과 또 피어나는 것들의 생동감까지 하나로 어울려진 이야기를 읽고 나니, 앞으로 살아갈 기운이 조금 더 생긴 거 같다. 어쨌든.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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