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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노벨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작기임에도 오에 겐자부로의 책은 처음 읽는다. 두꼐도 얇은 편이고 책의 제목과 표지가 을씨년스럽게 느껴져서 집어 들었을 뿐이다. 단순한 이유로 선택한 것과 달리 책의 내용은 심오하고, 무겁게 느껴진다. 표면적으로는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쓴 영화 소설의 형태를 띄고 있다. 그러나 좀 더 들여다 보면 젊은 시절 미하엘 콜하스 영화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젊은 시절의 '나' 와 고모리, 사쿠라의 과거 이야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여기에 포 시집의 애너벨 리와 '나' 가 썼던 문학작품들이 오마주 되어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봉기' 의 과정과 정신이 반복적으로 그려진다.
당시 일본에서는 어떠한 저항도 보이지 않았지만 이 책 자체는 전후 미국 점령군에 의해 저질러진 악행 -아동 포르노 사진집, 성적 노예가 되었던 불우한 일본 여성들, 전쟁 고아- 에 대한 비판과 고찰을 통해 '봉기' 를 보여주는 것 같다. 실제로 이 책 속의 사쿠라는 어린 시절 영화 촬영 도중 수면제를 먹고 잠든 상태로 아동 포르노를 찍혔고, 기억하지 못 하지만 무의식에 깊은 상처를 입어 끊임없이 악몽에 시달리고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태로 살아왔다. 아역배우로부터 시작하여 큰 인기도 얻었었고, 배우로써 연기력 또한 인정받는 국제적인 배우였지만 정작 무엇이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지 깨닫지 못 한 채 무언가 결여된 삶을 간신히 지탱해온 것이다. 이는 '자신은 점령군의 성적 노예가 아니었다' 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녀를 더욱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이미지화 하려는 방어기제가 작용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결국 그러한 힘을 계기로 더욱 적극적으로 미하엘 콜하스 영화 프로젝트 참여하게 되고 이는 그녀로 하여금 진실과 맞딱드리고 온전한 그녀만의 삶을 되찾게 만든다.
그녀가 스스로를 치유하는 과정은 30년이라는 세월이 걸릴만큼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그녀는 모든 경험을 본인의 인생으로 받아들이고 더욱 견고해진 내면을 갖게 된다. 비로소 진정한 주인공 -메이스케 어머니- 역할을 연기할 수 있게 된 그녀는 그 진정성을 바탕으로 많은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을 보여준다. 특히 무기력해진 '노인의 곤경' 에 빠진 '나'가 그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형식의 소설에 도전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러한 면에서 이 책은 봉기에 대한 소설이자 치유와 영화 혹은 문학에 대한 소설인 것이다. 즉, 사쿠라가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던 'It's only movies, but movies it is!' 라는 말을 'It's only literature, but literature it is!' -'그래봐야 문학, 그러나 문학' 이다!'-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독특한 점은 책의 후반부에서 '나' 는 kenzaburo라고 말한다. 실제 작가 연보를 읽어보면 책 속에 '나'의 아들 '히카리'는 실제로 장애를 가진 오에 켄자부로의 아들 이름과 같다. 또 '나' 의 수상작들로 등장하는 작품들 역시 오에 켄자부로가 수상했던 소설들이다. 오에의 '50주년 기념 소설' 답게 그를 있게 했던 작품들을 정리하고, 그의 삶을 허구의 이야기 속에 끼워 넣어 되새겨 보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역시 무언가를 계기로 구전, 대화, 영화 등이 결합된 새로운 형식의 소설에 도전하며 '노년의 곤경' 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한 건지도 모른다.
워낙 많은 대화문이 나오고 글 자체가 심오한 문학 작품이나 영화의 주제에 대해 다루고 있기 때문에 무거운 감이 있다. 문단 간 구분이 거의 없어서 약간 답답한 느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책을 끝까지 읽고 싶게 만드는 특별한 힘이 담겨 있다. 구체적이고 현실직이기 보다는 어딘가 몽환적이고 추상적인 느낌이 드는데도 책장을 덮고 나면 무언가 정리가 되는 느낌이랄까?! 읽어보지 않은 그의 작품들이 자주 등장해 난해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을 다룬다는 점에서 책과 나 사이의 거리감이 메워지는 것 같다. 실존 인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쿠라' 씨가 살아서 눈 앞에서 여유롭게 말하고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착각도 들고. 언젠가 오에 겐자부로와 비슷한 나이가 되어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노년이 된 겐자부로의 생각과 감정에 공감하고, 그 언젠가는 빛났을 나의 과거를 회상하며 묘한 기분에 빠져 들기도 할 것이다.
참 알 수 없는 묘한 매력이 가득한 소설이다.
`It`s only movies, but movies it is!` `It`s only literature, but literature it is!` - `그래봐야 문학, 그러나 문학`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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