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두 번 읽기를 권한다.
첫 번째는 빠른 전개와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에 몰입하게 된다. 문장들이 길지 않고 간결한데다가 글의 내용 자체도 '나' 라는 사람의 독백 위주이기 때문에 누구나 어려움없이 읽을 수 있다. 책에 빠져들어 끝을 향해 달리다 보면 급작스런 반전, 결말과 조우하게 된다. 그 순간 몰려오는 당혹감와 황망함이란. 끝내주는 가독성때문인지 마지막이라는 게 믿어지질 않는다. 뒤에 더 이야기가 있겠거니, 혹은 에필로그라도 있지 않을까 책장을 더 넘겨 보지만 에누리없이 바로, 그 지점이 끝이다.


그래서! 결국 한 번 더 읽기를 결심하게 된다.


두 번째는 '나' 의 세밀한 감정 묘사와 치밀하게 짜여진 구성에 놀라게 된다. '나' 는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더 큰 쾌락을 느끼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연쇄살인범이다. 부실한 초동 수사와 기술 덕분에 공소시효가 지나도록 잡히지 않은 자랑스런(?) 싸이코패스이다. 살인마로서의 냉혹함과 무심함, 그가 타고난 어두운 심연 외에도 인간이기에 가질 수 밖에 없는 -최소한의- 감정들이 묘사된다. 오로지 악만이 존재하는 듯한 그의 내면에도 고독감과 공포가 자리하고 있다. 살인에 있어 남다른 능력을 타고났지만 그 자체를 이해받을 수는 없기에 외로웠고 혼자만 간직해온 찬란한 살인의 기억들을 잃어가는 것이 두렵다. 그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으며 기억할 수 있는 현재 또한 짧아지면서 생이, 자신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 해진다. 시간 앞에서 느끼는 무기력함이 생생하게 전달되어 나의 마음 또한 무겁게 만든다. 그럼에도 삶과 타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의 시니컬하고 독특한 관점들이 유머러스하게 다가와 위트와 진지함이 잘 균형을 이룬다.

다시 책을 꼼꼼히 읽다보면 곳곳에 흐트러진 반전의 단서들을 찾는 재미가 더해진다. 결말을 보기에 급급해서 미처 읽지 못 했던 진실의 조각들을 발결할 때마다 작가의 세심함과 탄탄한 구성 능력에 감탄하게 된다. 알츠하이머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나' 가 말해주는 현재가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허구인지, 두 번의 뇌수술로 살인 충동을 억제한 그는 실.제.로.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인지, 새롭게 등장한 연쇄살인범은 어떠한 인물인지 더듬어 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무언가 작가에게 당했다는 생각이 든다. 좀 더디게 읽히게 써도 재밌었을 것 같은데. 이렇게 꼼꼼히 읽거나 두 번 읽지 않고 한 번에 쉽게 읽고 지나가버리면 놓치는 게 너무나 많다. 주인공 '나' 내뱉은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문득, 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무엇에 진 걸까. 그걸 모르겠다. 졌다는 느낌만 있다." - p. 143


이 책은 역설의 미학이 담겨있다. '나' 가 읊어대던 반야심경의 어느 구절 또한 결국엔 인생의 진리와 깨달음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공포 그 자체를 표현한 말이었다.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사람을 죽이던 '나' 가 이제는 자신의 딸 -자신이 마지막으로 목졸라 죽인 여자의 딸- 을 지키기 위해 연쇄살인범과 전쟁을 치르려 한다. 그것도 알츠하이머에 걸려 많은 것이 불분명해지는 상황 속에서. 이 모든 것이 아이러니이고, 해학적이다. 문화평론가 권희철님의 서평처럼 이 책은 가벼운 소설이 아닌 인생이 던진 악마적 농담 그 자체를 여과없이 보여주는 공포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공空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과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반야심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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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ummii 2016-01-15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두번 읽을게요!

bonosseol 2016-02-26 18:57   좋아요 0 | URL
정말 강추입니다 ^^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노벨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작기임에도 오에 겐자부로의 책은 처음 읽는다. 두꼐도 얇은 편이고 책의 제목과 표지가 을씨년스럽게 느껴져서 집어 들었을 뿐이다. 단순한 이유로 선택한 것과 달리 책의 내용은 심오하고, 무겁게 느껴진다. 표면적으로는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쓴  영화 소설의 형태를 띄고 있다. 그러나 좀 더 들여다 보면 젊은 시절 미하엘 콜하스 영화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젊은 시절의 '나' 와 고모리, 사쿠라의 과거 이야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여기에 포 시집의 애너벨 리와 '나' 가 썼던 문학작품들이 오마주 되어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봉기' 의 과정과 정신이 반복적으로 그려진다.

 

 당시 일본에서는 어떠한 저항도 보이지 않았지만 이 책 자체는 전후 미국 점령군에 의해 저질러진 악행 -아동 포르노 사진집, 성적 노예가 되었던 불우한 일본 여성들, 전쟁 고아- 에 대한 비판과 고찰을 통해 '봉기' 를 보여주는 것 같다. 실제로 이 책 속의 사쿠라는 어린 시절 영화 촬영 도중 수면제를 먹고 잠든 상태로 아동 포르노를 찍혔고, 기억하지 못 하지만 무의식에 깊은 상처를 입어 끊임없이 악몽에 시달리고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태로 살아왔다. 아역배우로부터 시작하여 큰 인기도 얻었었고, 배우로써 연기력 또한 인정받는 국제적인 배우였지만 정작 무엇이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지 깨닫지 못 한 채 무언가 결여된 삶을 간신히 지탱해온 것이다. 이는 '자신은 점령군의 성적 노예가 아니었다' 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녀를 더욱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이미지화 하려는 방어기제가 작용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결국 그러한 힘을 계기로 더욱 적극적으로 미하엘 콜하스 영화 프로젝트 참여하게 되고 이는 그녀로 하여금 진실과 맞딱드리고 온전한 그녀만의 삶을 되찾게 만든다.

 

그녀가 스스로를 치유하는 과정은 30년이라는 세월이 걸릴만큼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그녀는 모든 경험을 본인의 인생으로 받아들이고 더욱 견고해진 내면을 갖게 된다. 비로소 진정한 주인공 -메이스케 어머니- 역할을 연기할 수 있게 된 그녀는 그 진정성을 바탕으로 많은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을 보여준다. 특히 무기력해진 '노인의 곤경' 에 빠진 '나'가 그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형식의 소설에 도전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러한 면에서 이 책은 봉기에 대한 소설이자 치유와 영화 혹은 문학에 대한 소설인 것이다. 즉, 사쿠라가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던 'It's only movies, but movies it is!' 라는 말을 'It's only literature, but literature it is!' -'그래봐야 문학, 그러나 문학' 이다!'-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독특한 점은 책의 후반부에서 '나' 는 kenzaburo라고 말한다. 실제 작가 연보를 읽어보면 책 속에 '나'의 아들 '히카리'는 실제로 장애를 가진 오에 켄자부로의 아들 이름과 같다. 또 '나' 의 수상작들로 등장하는 작품들 역시 오에 켄자부로가 수상했던 소설들이다. 오에의 '50주년 기념 소설' 답게 그를 있게 했던 작품들을 정리하고, 그의 삶을 허구의 이야기 속에 끼워 넣어 되새겨 보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역시 무언가를 계기로 구전, 대화, 영화 등이 결합된 새로운 형식의 소설에 도전하며 '노년의 곤경' 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한 건지도 모른다.

 

워낙 많은 대화문이 나오고 글 자체가 심오한 문학 작품이나 영화의 주제에 대해 다루고 있기 때문에 무거운 감이 있다. 문단 간 구분이 거의 없어서 약간 답답한 느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책을 끝까지 읽고 싶게 만드는 특별한 힘이 담겨 있다. 구체적이고 현실직이기 보다는 어딘가 몽환적이고 추상적인 느낌이 드는데도 책장을 덮고 나면 무언가 정리가 되는 느낌이랄까?! 읽어보지 않은 그의 작품들이 자주 등장해 난해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을 다룬다는 점에서 책과 나 사이의 거리감이 메워지는 것 같다. 실존 인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쿠라' 씨가 살아서 눈 앞에서 여유롭게 말하고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착각도 들고. 언젠가 오에 겐자부로와 비슷한 나이가 되어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노년이 된 겐자부로의 생각과 감정에 공감하고, 그 언젠가는 빛났을 나의 과거를 회상하며 묘한 기분에 빠져 들기도 할 것이다. 

 

참 알 수 없는 묘한 매력이 가득한 소설이다.

`It`s only movies, but movies it is!`
`It`s only literature, but literature it is!` - `그래봐야 문학, 그러나 문학`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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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기 좋은 방
용윤선 지음 / 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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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제목이 모든 것을 이야기 해준다.
말 그대로 울기 좋은 방!
목차에 쓰여진 커피 이름들은 그녀 내면에 존재하는 이야기를 꺼내고 기억해내기 위한 매개체일 뿐. 실제로 커피에 대한 박학다식한 지식이 쓰여진 책은 아니다. 글을 읽다 보면 커피의 맛과 향이 궁금해지기도 하고 책 속에 무늬처럼 새겨진 커피잔 자국에서 까페에 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연필로 글자를 쓰면 서걱서걱 소리가 날 것 같은 독특한 재질의 종이에 정갈하게 쓰여진 글씨들 위로 커피 항이 배어있을 것 같아 코를 가까이 해보게 된다. 여러모로 빈티지한 감성이 충만한 책이다. 


삶에 지치고, 사람에게 상처받아 무엇에도 위로받지 못 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특히나 엉엉 소리내어 울고 싶은데 그것조차 여의치 않은 사람, 즉 한 방울의 눈물조차 마음대로 흘리지 못 하는 메마른 가슴의 소유자들에게 특효약이 될 것 같다. 그만큼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슬픔과 고독감이 짙게 배어있다. 책 속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그녀의 삶이란 오히려 평범하게 느껴진다. -딱히 불우한 가정 환경을 보낸 것 같지도 않고, 현재도 평범한 엄마이자 아내로서 잘 살고 있는 듯 보인다.- 단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하며, 홀로 있는 시간을 편안하게 느끼는 사람인 것 같다. 글을 읽으며 내가 상상하는 모습은 가족이 모두 모여 단란하게 쇠고기 스튜를 끓여 먹는 상황인데, 그녀는 언젠가 홀로 기차 여행을 하며 먹었던 그 스튜를 떠올리며 회한에 잠기는 듯 하다. 조금 쌩뚱맞은 전개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시인이 되었을지도 모를 영혼을 지닌 분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이해를 해보면서도... 늘 다소 우울한 감성을 지닌 채 살아가는 분인가 나름 걱정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어떤 분인진 알 수 없지만 여러 사람과의 모임을 꺼리고 굉장히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인연을 만드는 성격이신 듯하다. 그래서인지 인간 관계에서의 서투름이나 상처, 외로움을 더욱 섬세하게 표현하시는 것 같다. 책을 읽다 보면 나 혼자만 실수하고 아파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위로를 받게 된다. 모두가 다 사람들과 무난하게 잘 어울려 지내고 외향적인 성격은 아니라고, 그저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낯을 가리니까 처음이 서툰 것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게 된다. 무엇보다 누구나 이렇게 서글프고 외롭고, 혼자서 울고 싶은 밤들이 있다는 게 큰 위안이 된다. 

특히 가슴에 먹먹한 사연을 안고 무언가를 떠나 보내기 위해 혼자 여행을 떠나는 분들이 있다면 이 책을 꼭 들고 가라고 추천해주고 싶다. 그 여행에서 실컷 울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외롭지 않을 것이다. 


덧. 주의!!
 
삶이 기쁨으로 충만해 있는 사람에게는 절대 비추다. 이성적이고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사람들에게도 권하지 않겠다. 그 분들에게는 글에 공감하기가 다소 힘들 것이다. 마치 중2병에 걸린 소녀의 과잉 감정을 써내려간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 있다. 혹은 글에 너무 이입한 나머지 행복한 기분은 한 방에 날아가고 극도의 우울감만이 남겨질 수도 있다.

 
 

 

 
 
 

서툰 사람끼리 만나고 살 때 생기는 것이 오해인데, 그 사람과 나는 그런 오해도 없다.

왜냐하면 무엇을 해도 무슨 말을 해도 그러려니 한다.

그 사람도 나에게 그렇다.
믿음은 맹목적이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이해가 모두 되어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사람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면 그것은 마음이 시킨 일이지 그 사람이 시킨 일은 아니지 않은가.

다 까닭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안타까울 때도 있다.

다른 사람들이 내가 만들어놓은 그 사람과 다르게 이야기하면, 살아보니 다른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명백히 다른 이야기이기도 하다.

물질이 변하는가, 사람이 변하지....... 사람이 변하는가, 시간이 가고 있는 것뿐이다. -p.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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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둥빈둥 당당하게 니트족으로 사는 법
파(pha) 지음, 한호정 옮김 / 동아시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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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얼마 전 하반기 공개 채용이 끝났다. 주변에 울상이 된 친구나 후배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프다. 그 어느 때보다 가혹한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자신의 회사에 레고처럼 딱 들어맞는 사람을 찾고 있는 것처럼 채용되는 인원 자체가 적다. 채용을 원하는 사람은 많은데 불러주는 곳은 적으니 참 답답할 노릇이다.

참 우울한 마음으로 이 책을 집어들었다. 대체너는 어떠한 사람이기에 이 각박한 시기에 빈둥빈둥, 그것도 당당하게 니트족으로 살라고 권하는지 궁금해졌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돈이 많아 그냥 게으르게 살아도 되는건지, 그게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고 있는지 호기심이 일었다. 

일단 이 사람의  하루 일과를 살펴보면 생각보다 부지런하게 움직인다. 하루 종일 천장만 바라보며 누워있거나 컴퓨터, 혹은 만화책 같은 것으로 잉여롭게 보낼 거라고 생각했지만 꽤 규칙적인 생활 패턴을 유지하고 있다. 나름 알차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보내기 때문에 일을 할 시간이 도무지 나지 않는다는 말도 일면 수긍이 된다. 세상만사가 피곤한 이 사람에게는 이러한 일상적인 생활만으로도 이미 빠듯함이 느껴진달까. 심지어 도서관에 가서 책도 빌려 읽고, 블로그에 글도 올리고 나름 교양있고 생산적인 활동은 하고 있었다. 

 

게다가 어쩌면 양심적이라는 생각이 드는게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아예 부모님이 주신 돈이나 까먹으며 사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에 광고를 올리든 생계 유지를 위해 필요한 돈은 벌고 있었다. 대신에 차, 집, 연애, 결혼, 쇼핑, 여행 등과 같이 보편적인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들을 포기한 것뿐이다. 

 
마치 회사에 내 시간을 팔아서 돈을 받았지만, 그 돈으로 시간을 다시 사는 것을 반복하는 짓 같았다.

돈이나 지위나 명예나 보람 같은 그런 거창한 것 없어도, 일단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밥과 잘 곳과 지루함을 달래줄 수단, 그리고 친구만 있다면, 인생 그것으로 충분하다. 

 

 

 단지 일이라는 것 자체가 싫어, 노동을 하지 않으려고 무작정 놀기만하는 것도 아니다. 회사 생활이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던 것뿐 무언가를 만들거나 창조적인 작업을 하고자 한다. 이와 동시에 타인들과의 교류도 이어간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에 순탄한 니트족 생활을 알차게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단순히 무료한 생활을 반복할 경우 지루함을 이기지 못해 니트족 역시 자살할 가능성이 높다. 즐거운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있어야 정서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으므로 나름의 목표, 향상심은 반드시 필요하다. 활발하게 블로그에 포스팅을 하거나 재미를 위해 독학으로 배운 프로그래밍 -본인의 표현에 의하면 소설만 읽은 문과생에다가 컴맹이란다- 스킬을 이용하여 웹서비스를 공개해 그 쪽에 올린 광고로 얻는 월수익이 5천엔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7~8만엔을 번다니 이 사람의 생활을 영위하기에 딱히 부족한 금액은 아닌 듯 싶다. 

부모 집에서 니트족짓을 하고 있으면 가족들한테 잔소리를 듣게 되고, 일도 없는데 혼자 살면 외로워지기 십상이다. 쉐어하우스라면 주변 사람들과 적당히 떠들며 놀고, 가끔 찾아오는 손님을 상대해주고 하다 보면 그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금방 지나간다.

직장에 다니던 시절 모아두었던 돈은 2년 만에 바닥이 나고,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얻는 소소한 수입에 기대어 살고 있다. 금전적으로는 빠듯한 생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이 있으면 돈이 없어도 재미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어 지루하지 않다. 게다가 생활에 필요한 것들은 사지 않아도 대부분 인터넷으로 얻을 수 있다.  


그래도 돈이 부족하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인터넷에 도와달라고 올린단다. 예를 들어 감기에 걸려 아파서 누워있다던가, 대만에 이러이러한 일로 꼭 가고 싶은데 도와달라던가. 그러면 적은 액수라고 돈을 보내주는 기부자들이 있다는데 참 놀라운 일이다. 그의 글들을 보고 희망과 재미를 얻었기 때문에 기꺼이 보내주는 돈인건지, 인터넷 친구지만 정이 쌓였기 때문에 도와주고 싶은건지 의문스럽긴 하다. 지나치게 솔직한 도움 요청이 조금은 뻔뻔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니트족이 되려면 기본적으로 장착된 얼굴의 철판을 이렇게도 응용하는 순간이 오나보다. 

누구나 ‘재미있는 일을 하는 사람을 응원하고 싶다.’라거나 ‘병 때문에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고 싶다.’라는 마음은 모두 갖고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전면적으로 지원을 해줄 수는 없어도 500엔이나 1,000엔 정도는 내도 괜찮다고 생각할 것이다.

1,000엔으로 만화책을 사는 것보다 1,000엔을 니트족에게 주고 그 사람이 어떻게 쓰나 구경하는 것이 더 재미있을 수도 있다. 

나도 가난해서 500엔이나 1,000엔 정도밖에 줄 수 없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콘텐츠로서 재미있다고 느껴서이기도 하고, 내가 솔선수범해서 그렇게 돈을 보태줌으로써 가볍게 돈을 보내주는 행위가 정착되기를 바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부분에서 정말 이 사람이 뼛 속까지 니트족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선에서 안 되면 과감히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나의 경우 노동하지 않고 불쌍함을 내세워 구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라는 생각에 조금은 뻔뻔하게 느껴졌지만- 그에 대한 본인만의 명분도 뚜렷하다. 적어도 이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들 정도의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니트족 양산을 위한 제도적 방안까지 생각해 주시니 그야말로 니트족을 염원하거나 이미 니트족인 사람들의 추앙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아무 생각없이 빈둥거리는 니트족은 그냥 백수일 뿐 진정한 니트족이되려면 뚜렷한 사상과 치명적인(?) 매력이 필요한 것 같다.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한 사람을 위해 모두가 인터넷을 통해 소액의 돈을 기부하는 문화가 정착해서 순조롭게 굴러간다면, 그것은 보험회사라는 물주 없이 보험제도와 똑같은 효과를 실현하는 것이 아닐까?

그와 같이 모두가 자기보다 가난해서 어렵게 사는 사람들에게 수입 중 2% 정도를 준다면, 그것은 지금 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누진과세나 생활보험 같은 ‘소득의 재분배돈 많은 사람에게서 돈을 걷어 돈 없는 사람에게 주는 것’를 정부라는 몸통 없이 실현하는 것과 같은 것 아닐까?


그렇게 말을 해도 나 역시 돈이 있으면 좋겠다. 유감스럽게도 돈이 없으면 불행해지기 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까 돈을 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부담 느끼지 마시고 그냥 나에게 달라. 적당히 낭비할 테니까 니트족에게 돈을 주고 업보를 씻도록 하자.

바람직한 얹혀살기 생활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꼭 얹혀살기 스킬을 업그레이드 해야만 한다. 얹혀살기 스킬이란 ‘집안일을 척척 알아서 하는’ 또는 ‘얹혀살고 있어도 짐이 되지 않는’ 또는 ‘이 사람이 살고 있으면 어쩐지 즐거운’, 그런 스킬을 말하는 것이다. (......) 얹혀살 때에는 얹혀살도록 해주는 사람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집안일도 알아서 잘하고, 상대의 감정에도 신경을 써주면서 ‘이 사람을 집에 들이길 잘했다.’라고 생각이 들도록 노력하자.

열심히 일하지 못한 사람이나 열심히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소한의 생활은 보장받아야 한다. 사회와 국가는 바로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개인의 행동의 결과를 그 사람이 전부 떠안아야만 한다면, 사회나 국가 같은 공동체가 존재하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 사람은 삶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시 자신을 가장 잘 알고 있기에, 본인이 가장 행복한 방향으로 살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언제 어떻게 행복한지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았고 답을 모르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고 남들이 가장 많이 가는 길을 따라간 것 같다. 나 역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테다' 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다고 믿었지만 그것이 주변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정착된 의식인지는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기존의 틀에서 크게 벗어난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찌보면 가장 돈 안 되고 지루한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다음에 한 달 정도 일을 쉬고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것은 정년퇴직 후에나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늙어서 몸이 말을 안 듣게 된 다음에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한들 의미가 없는 것 아닐까.

매일 하나도 즐겁지 않은 상태에서 병에 걸릴 경우와 노후생활에 대비해 눈코 뜰 새 없이 준비해도 아무 소용없는 것 아닐까?
이런 인생은 싫다. 이런 상태로 살아봤자 죽은 것과 다름없다. 

회사에 다니다 그 회사가 망하면 갈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도 많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에 의존해서 사는 것이니까 그런 상태가 안정되어 있는가 아닌가는 정도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젊어서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돈벌고 그게 정답인줄 알았다. 보통 어른들이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하셨으니까. 그런데 막상 저 질문을 받고 나니 가슴 한 쪽이 먹먹해진다. 그렇게 불타는 젊은 시절을 보냈는데 늙어서 막상 몸이 내 맘대로 안 움직일 수도 있다는 상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도 어린 친구들에게 그 나이에 해볼 수 있는 것 다 해보라고 조언을 하면서, 정작 나는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것들을 나중에~ 라고 말하며 미루고 있었던 건 아닌지 후회스럽기도 하고 뭔가 생각이 복잡해지는 기분이다.


스스로 느끼기에 난 이 정도밖에 할 수 없는 것 같다. 체력도 없고, 책임감도 없고, 하던 일을 금방 포기하고 싶어진다. 누구랑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하고,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금방 피곤해진다. 약속도 잘 지키지 못하고, 일정이나 마감이 정해지기만 해도 고통을 느낀다. 아침에 잘 못 일어나고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탁해진다.

나는 오랫동안 다른 사람과 같이 있으면 피곤해지기 때문에, 회사나 학교에 다닐 때는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하고도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대인對人 에너지가 바닥이 나서 일이 끝난 다음이나 휴일에는 진짜로 만나고 싶은 사람하고 만날 기력이 바닥나 아쉬울 때가 많았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정말로 만나고 싶은 사람한테만 대인 에너지를 쓸 수 있어 너무 기쁘다.


냉정한 자기 평가를 거쳐 선택한 길이라는 생각에 절로 박수가 나온다. 전혀 그의 선택이 한심해 보이지 않는다. 그냥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런 길을 택한 것뿐이다. 어쩔 수 없이 사회생활이란 명목으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괴롭고 규칙적인 생활이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실제 조사 결과를 보더라도 아침형 인간, 저녁형 인간은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사회가 아침형 인간으로 살게끔 제도적으로 보이지 않는 힘을 행사하고 있을뿐! 이 사람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얻은 자기 성찰을 삶에 적용한 결과 보편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그 어느 누구보다 행복하고 정신적으로 건강한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자신의 삶에 대한 만족감과 당당함이 참 부럽다. 



도시에 있으면 ‘빈둥거리면서 사는 신통찮은 어른들이 엄청 많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면서 마음 든든해진다.

평일 낮에 택배를 받거나, 고양이를 돌봐주거나, 갑자기 비가 내릴 때 세탁물을 걷는다거나, 항상 집에 붙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여러모로 편리하다. 일이 바빠서 집안일을 돌보기 어려운 가정에 니트족을 파견하면 정말 좋지 않을까.



엉뚱해보이지만 일면 공감가는 부분들이 있다. 당연하다 생각해왔던 것들을 살짝 비틀어 생각해보는 그의 상상력은 꽤 재미있다. 그것이 허탈함에서 나온 웃음이든, 즐거움에서 나온 웃음이든 어쨌든 그의 글을 보고 웃게 된다. 확실히 책 제목처럼 단순히 빈둥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독서와 나름의 교류를 통해 내면 세계를 풍요롭게 만들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는 사람 특유의 유연한 사고가 느껴진다. 요컨대, 이 사람을 통해 글쓰기와 독서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낙오되는 인간은 줄어든다. 선택지가 많다는 것은 절대적인 선이며, 이 세상의 불행은 대부분 선택지가 적어서 초래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 사람들이 모범적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생활 방식과 어울리지 못하고 적응할 수 없어서, ‘내 탓인가?’ 또는 ‘내 노력이 부족했나?’ 하고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살든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자살하거나 사람을 죽이지만 않는다면.”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고 그 사람과 환경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일 뿐이다.


문득 돌이켜보면 나도 타인의 시선과 평가가 두려워 보편적인 삶의 양식을 고수한 게 아닌가 돌이켜 보게 된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끔 해준다는 것이다. 돈과 명예가 모두에게 우선하는 가치도 아니거니와 우리 인생을 그런 가치들에 치여 낭비하기에는 너무 짧다. 건강한 정신과 신체를 위해 노동은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지배하도록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좀 더 풍요로운 인생을 영위하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잊어서는 안 되겠다! 


만약에 자연스럽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면, 그것은 정신이 균형을 잃고 무너졌거나 몸이 피곤한 것이니까 그럴 때는 될 수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면 된다. 회복하고 나서 여유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뭔가 하고 싶어질 것이다. (......) 그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치료나 휴식이다. 회복하고 나서 스스로 내면을 잘 다스릴 수 있게 되면 자연스레 지루해져서 뭐든 의미 있는 일을 하려고 할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역시 노력하거나 애쓰거나 참아내는 것을 과도하게 칭찬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점이 이 사회를 답답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을 위해서 자기 인생을 희생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다. 일을 위해 인생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인생을 위해 일이 존재하는 것이니까. 너무 열심히 일을 하다 자기 인생을 깎아먹는 것은 본말전도이다.


굉장히 공격적인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책을 덮을 때쯤에는 조금은 말랑말랑해진 느낌이다. 생각보다 진지하게 삶과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있으며 현 사회가 가지고 있는 경제적, 제도적 모순에 대해서도 과감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니트족이 옳다 라는 주장이 아니라 삶을 영위하는데에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함을 인정해 달라는 주장이 담겨 있었다. 막상 일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에게 며칠 쉬라고 권해 보면 지루함에 치를 떠는 것처럼 이 사람은 어딘가에 구속되어 다소 강제적인 일을 하는 것이 싫은 것뿐이다. 일을 하지 않으니 게으른 사람이라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나와는 다른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지나치면 될 일인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니트족이 크게 폐를 끼치는 문제도 없는 것 같다.-게으른 백수와 나름의 뚜렷한 가치관과 목표를 가진 니트족은 애시당초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다. 무조건적으로 비판할 근거도 없거니와 오히려 이런 자유로운 사람들 덕분에 세상에 웃을 일이, 여유가 생겨나는 건지도 모른다. 물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의 생각이 터무니 없는 궤변에 불과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사람으로부터 꼭 받아들여야 할 생각은 바로 이것이다. 인생에 살아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점이다. 일은 우리가 더 나은,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수단일 뿐이지, 그것이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굳이 일을 하지 않은 인간은 무능력하고 무가치한 인간이라는 인식을 심어줘서 살아가는 일 자체를 무섭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는 반드시 지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애를 써서 억지로 상황을 바꾸려고 드는 것은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며, 자기가 그토록 힘을 쓰지 않아도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에 어떻게 하면 유리해질지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면 너무 당황하지 말고 뭔가 보일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한다. 추운 겨울은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끝나는 법이고, 상황은 어느 때나 반드시 계속 바뀌는 법이니까.


지금의 나에게는 이 말이 정말로 고맙게 다가온다. 내가 이전보다 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것도, 몸이 자꾸만 아픈 것도 앞길이 막막하고 뭔가 해서 바꿔야 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었다. 잠깐 숨을 고르며 기다려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 내가 해볼 수 있는 것들은 이미 다 해봤다면, 이제 기다리며 유리한 방향으로 갈 수 있는 방안을 차분히 생각해 보는게 낫겠다. 늘 빨리빨리를 외치는 한국인들, 좀 더 느긋한 삶의 자세를 익히고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다. 죽도록 개미처럼 일하는 한국인이 아닌 즐겁게 창의적으로 일하는 한국인이 더 많아진다면 사회가 더 유연해지지 않을까. 그래서 개개인이 느끼는 즐거움의 요소가 다르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한 사회가 되길 간절히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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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걸을수록 나는 더 작아진다 NFF (New Face of Fiction)
셰르스티 안네스다테르 스콤스볼 지음, 손화수 옮김 / 시공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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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레 집고 나면 일본 작가의 책인 탓에 조금은 색다른 시도를 해보고 싶었다. 얇은 두께감과 고운 색깔의 표지를 가진 책이 시선을 끌었다. 전체를 다 외우기 힘들 정도로 길고 색다른 노르웨이 작가의 이름- 세르스티 안네스다테르 스콤스볼- 도 독특하다. 미모의 노르웨이 작가인데다가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답고  유머러스한 책이라니 끌렸다.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이 책을 읽으며 연애의 과정을 철학, 역사, 정치 등 다양한 학문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었다. 거기에 유머러스함까지 갖추다니 정말 푹 빠져들었었다.- 이 정도의 위트가 넘치는 책이라면 좋겠다!!! 제목도 무언가 마음에 쏙 드는 느낌. '빨리 걸을수록 나는 더 작아진다' 바쁘게 살아가며 자신을 소모하는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인걸까? 정말 기대감에 차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책을 읽기 시작했건만, 이건 대반전이다. 나는 이 책이 전혀 재밌지 않다. 이 책의 가독성이 좋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말 그대로 어느 부분에서 빵터져야 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언어 영역 문제 풀이에 도전하는 마음으로 해학의 요소를 찾아내고자 했지만 불가능 했다. 나의 경우 첫 장을 넘기는 그 순간부터 슬프기 시작해서 끝까지 우울하고 먹먹했다. 그렇다고 눈물이 막 쏟아질 정도로 슬픈 것도 아니고 서글픔, 연민과 답답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리 불쌍한 마테아! 



마테아는 번개에 두 번 연속 맞을 정도로 선택받은 녀성이지만 존재감이 없다. 학창 시절에는 출석부에서 제대로 호명된 적도 없고, 어딜 가든 그녀는 누구의 시선도 끌지 못 한다. 마치 투명 인간처럼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존재를 인지하는 사람도 없다. 그녀에게는 평생 남편인 엡실론뿐이다. 친구도 없고, 장보기를 제외하고는 바깥 출입도 거의 하지 않는다. 신문을 가지러 나가는 순간에도 복도를 살피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당연히 누군가와 마주쳐 대화를 나누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고 인사 조차도 편하게 하지 못 한다. 그래서 소설의 배경은 대부분이 집 안이고 가끔 그녀가 들르는 슈퍼나 두 사람이 찾아가던 호수가 등장한다. 98%가 엡실론과 나눈 대화이고, 나머지는 필요에 의해 나눈 대화들, 혹은 혼잣말이다. 대화문과 일반문의 구분도 없이 문장들이 이어져 있어 더욱 답답한 느낌이 든다. 이 마저도 작가의 의도인가 싶을 정도로 글의 구조가 폐쇄적인 마테아의 생활과 너무 닮아 있다. 심지어 마테아가 이야기하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이고! 


엡실론은 종이 위에 그려놓은 두 개의 원을 차례차례 가리켰다. 커다란 원 속에 자리한 작은 동그라미. "이 커다란 원을 E라고 한다면, 이 작은 원은 M이 되겠지. 이 M은 항상 E를 동반해." "M은 E의 바깥쪽에 있는거 아니예요?" 엡실론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다시 종이 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건...... 그건 아니야. 난 그렇게 할 수 없어." -p. 152-153


그러면서도 마테아는 본인을 매우 유쾌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이라도 생각한다. 평생 세상과 타인과 접촉하지 않고 살아왔으면서 다른 이들이 본인처럼 유머러스한 사람을 몰라보는 것에 대해 억울해 한다니. 평생 자신의 고립된 상황을 외면하다가 죽음의 순간이 가까워지고 나서야 자신이 존재했다는 것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 할까봐 두려워 한다. 매일 신문의 부고란을 보면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어떻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신을 남길 것인가를 궁리한다. 타임캡슐을 만들어 집 근처 마당에 묻기도 하고 화성에서도 보일만큼 튀는 색깔의 모자를 쓰고 거리를 활보해 보기도 한다. 어쩌면 이것이 다른 독자들이 느낀 우울과 재미의 요소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점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 하고 엡실론의 노력마저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린 그녀가 너무나 가여웠지만. 단지 소통이 서투른 사람일 뿐인데 어릴 때부터 쌓여온 경험때문에 마음의 문을 굳게 잠그고 자신의 틀을 벗어나지 못 하는게 끝끝내 안타까웠다. 


나는 내 인생을 바나나에 비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바나나처럼 구부정할 뿐만 아니라, 암술과 수술이 없는 꽃의 소유자이며, 씨 없는 열매 아닌가. 따라서 붓다의 의견에 의하면 나라는 인간 자체는 바로 무의미함을 상징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p. 155


가끔은 무의미한 것들에게도 의미를 부여해야할 때가 있다. 그건 살다보면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습기로 축축한 모래를 토닥토닥 두드려 평평하게 만든 후, 그 위에 이들을 나란히 늘어놓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진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작은 돌멩이 다섯 개와 잔디풀 몇 개를 추가로 가져와 빈자리를 메웠다. 손을 털고 일어난 나는 모래 위에 새겨진 나의 마지막 말을 내려다보았다. "마테아".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p. 179


역시 책 표지에 쓰여진 서평에 속아서는 안 되는 것인가?! 나는 이렇게 가슴이 아픈데! 대체 어디가 유쾌하고 기분 좋게 만들어 준다는 말일까?? 마테아의 언어와 사고, 행동 모두 우스꽝스럽고 터무니없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심하게 사랑스럽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녀는 사랑스러운게 아니라 너무 안타깝고 불쌍해서 뭐라도 해주고 싶어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캐릭터다. 주변의 분위기나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그녀의 엉뚱함이 혹자에게는 재밌게 보일 수도 있지만 일면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러웠다. 그녀에게 크게 감정이입을 하고 동조해서 재미를 전혀 못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나 자신이 그렇게 외롭고 존재감이 없다면 슬프지 않을 사람은 없으니까. 그래도 마테아와 나 사이에 큰 차이점이 있다면 마지막 순간을 제외하고 그녀는 늘 당당하고 자신의 삶- 엡실론과 함께 살아가는 결혼생활- 에 만족해 왔다는 점이다. 주변에 무심할 정도의 긍정적인 자기애와 확신마저 없었다면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막장드라마 보다도 못 한 찌질한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비록 나에게는 서글픈 책이 되었지만 고립으로 인한 인간의 고독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세밀하게 표현한 작가의 능력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젊은 여작가가 할머니의 마음을 이토록 잘 표현할 수 있다니 놀랍다. 얼마나 다양한 경험을 해봤길래, 혹은 뛰어난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길래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 되어 글을 써내려갈 수 있는지 신기하다. 특히 죽음에 대해 그 누구보다 오랜 시간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 같다. 특별한 사건이나 인물이 등장하지 않고 한정된 장소에서 인물의 대화와 혼잣말로 소설을 이끌어 나간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지금은 내 심리 상태와 처지때문에 너무 마테아를 불행한 여자로만 봤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엡실론과 함께 했던 세월만큼은 누구보다 행복했을텐데. 슬프게만 보였던 이 이야기가 언젠가는 나에게도 익살스럽게 다가올 수 있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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