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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인간 관계는 명확하게 딱 정의 내리기가 어렵다. 좋았다가나빠질 수도 있는 것이고, 반대로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동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탓에 늘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역설적이지만 나는 그런 모호함이 참 싫고 힘들다. 너와 나 사이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해 상처받기 일쑤고, 어중간한 관계는 내가 먼저 물러서는 까닭에 오해도 쉽게 받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인간 관계에 서툰 내 잘못이지만 어쩔 수 없이 누가 봐도 분명한 관계를 선호하는 것이다. 그래서 늘 고독하다고 느끼고, 어디에 가든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로 규정하게 되나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출발이 순조롭지 못 했다. 레오와 에미가 이메일을 통해 인연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자못 흥미로웠다. 하지만 남녀 사이에 우정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인지 자꾸만 썸을 타는 분위기로 나아가는 것이 어쩐지 불편했다. 레오는 싱글남이지만 질척거리는 구여친이 있었고, 에미는 유부녀였기 때문이다. 다소 위험할 수 있는 관계인지라 에미에게 자꾸만 빠져드는 레오는 선을 그으려 하지만 그 때마다 에미의 태도가 몹시 거슬렸다. 끊임없이 떡밥을 던지며 레오라는 물고기를 낚시하는 여자처럼 보였다. 본인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레오와의 관계는 가족의 틀에서 벗어나 한 여자로서의 에미로 존재하게 만들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참으로 뻔뻔해보였다.
그렇다. 나는 생각보다 보수적인 사람이었고, 가진 자가 더 가지려고 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에 분노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인기 없는 여자의 질투어린 시선이라고 혀를 차는 사람도 있겠지만은, 단언컨대 나도 뭇 남성들에게 사랑받는 여자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다! 일명 불륜, 가볍게는 문어발식 경영 자체가 싫은 것이다. 왜 곁에 있는 이에게 만족하지 못 하고 다른 이에게 기웃거리는 것인지, 게다가 자기가 쥔 것은 버리기 싫으면서 상대방은 꽉 붙잡아두려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생각은 어디에서 근거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여러 사람이 상처 받고 괴로워 하는 것은 개의치 않는 것인지. 몹시 편협한 생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소위 보험 두기를 좋아하는 -여자들의 모습이 자꾸만 에미에게 겹쳐져서, 전혀 레오와 에미의 대화가 위트있고 흥미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저는 오랫동안 그 누구와도, 당신과 그랬던 것처럼 격렬하게 감정을 나눠본 적이 없어요. (......) '현실의 삶' 에서는 무난하게 버텨나가려면 끊임없이 자기 감정과 타협을 해야 해요. (......) 끊임없이 자신의 감정을 주위 사람들에게 맞추고,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량을 베풀고, 일상에서 오만 가지 자질구레한 역할을 떠맡고, 구조 전체를 위태롭게 하지 않으려면 균형을 잘 답아 평형을 유지해야 해요. 저 또한 그 구조의 일부니까요. 그런데 레오, 당신을 대할 때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꾸밈없이 드러내는 게 조금도 망설여지지 않아요. (......) 실제 에미가 현실에서 어떤 사람이든 간에 메일에서의 에미는 굳이 착하게 굴려 애쓰지 않고 평소에 억눌러왔던 약점들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거예요. 자기가 변덕 보따리든 모순덩어리든, 그걸 받아줄만한 사람에게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러내도 괜찮다는 걸 알기 때문이죠. -p. 169~170
에미의 이 진솔한 고백을 읽고난 뒤 조금씩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 여자는 단순히 자신의 여성적인 매력을 확인하기 위해 레오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꾸밈없이 드러냈을 때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라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우정, 사랑 같은 특정한 감정으로 정의내릴 수 없는 더 고차원적인 교감을 나누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소울메이트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항상 연인이나 부부의 형태는 아니니까 말이다. 물론 이 둘의 결말은 어느 정도 예견 가능한 것이었으나 처음 책을 읽을 때만큼의 반감이나 분노는 없었다. 레오는 이미 에미에게 온 마음을 빼앗긴 상태였고, 에미는 배우자와 자녀들 간의 행복한 결혼 생활로 인해 자신도 사랑에 빠질 수 있는 한 여자라는 것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을 뿐이니까. 언젠가는 그녀 자신도 레오를 사랑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매우 현명한 방법으로 결말을 짓는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달려와 놓고선 두 사람 사이의 어떤 끝이 구체화될 때 갑작스런 문장으로 독자의 심장을 쿵 하고 내려앉게 만든다. 나는 정말 어안이 벙벙해서 마지막 장을 읽고 또 읽었으며 내가 잠에 취해 몽롱한 상태인 것인지 수차례 확인해야했다. 너무 뻔한 결말을 애타게 바라던 것은 정작 나였구나, 어느새 레오와 에미에게 깊이 빠져있었던 것이다. 그 깊이만큼의 황망함과 참담함을 느껴야 했던 것이리라. 이러한 끝맺음만으로도 훌륭하지만 서로가 주고 받는 이메일만으로 스토리를 전개해 나가고 그 안에 감정까지 전달한다는 것은 참 매력적이고 대단한 일이다. 정말 독특하고 흡입력 있는 소설인지라 레오와 에미의 후속작이 궁금하면서도 외면하고 싶기도 하다. 이 환상을 깨고 싶지 않은 마음과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나아갔을까 하는 궁금함이 공존한다. 한 편으로는 탁구공처럼 통통 튀는 이들의 이메일 대화가 그립고 또 한 번 사랑의 열병을 알으며 가슴앓이를 시켜줄 것이 기대가 된다. '일곱번째 파도' 라는 작품이 후속작이라는데, 언제쯤 집어 올릴지 모르겠다. 아직은 이 충격의 여운을 좀 더 느끼고 싶다.
가깝다는 것은 거리를 줄이는 게 아니라 거리를 극복하는 거예요. 긴장이라는 것은 완전함에 하자가 있어서 생기는 게 아니라 완전함을 유지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데서 생기는 거예요. -p.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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