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연못 - A Little P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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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연못 속에 날아든 폭탄, 그 이유없는 상처를 위로한다.
 
 
<작은 연못>은 전쟁영화라기 보다는 연극적이기도 하며, 어떤 제의를 펼치는 추모 행사처럼 보인다. 그때 노근리 생존자들과 무차별적 폭격과 총격을 받아 희생된, 아니 살해된 피해자들에게 바치는 영화적 제사라고 여겨진다. 정은용의 소설 <그대,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바탕으로 하며, 또 그때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이 함께 하여 만들어졌다. 영화 속의 소년 '짱이'의 모델이 된 할아버지와 같은 당시 노근리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날을 재생하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소재를 스펙터클하게 터치하여 상업영화의 이익을 챙기려는 의도도 없다. 전쟁의 진실보다는 눈물의 크기만 그려내지도 않고, 죽음 전의 서스펜스를 자아내어 관객을 유도하지도 않는다. 영화 속의 노근리 주민들의 풍경을 담아내는 감독의 시선은 딱 그 '재연'과 진심어린 '위로'에 목적이 있을 뿐이다.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지만 그날, 노근리 사람들은 참으로 걱정없고 한가했음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인상적이다. 카메라는 마을 회관 앞에서 장기를 두는 노인들에 머물러 오가는 사람들을 스케치한다. 그리고 곧 놀음하는 남편을 혼쭐 내주려고 집을 나가는 아낙을 쫓아 길 위를 따라 올라오는 마을 사람들의 소박한 인상들을 기억하려 든다. 저 멀리서 전쟁 중이고 폭탄이 터져도 그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 삶을 믿고 살고 있던 순박한 이들이다. 마을 입구의 신성한 돌에게 의지하는 그들의 모습과 그 마을을 허락없이 침투하는 미군과 남쪽 군인들의 모습은 지극히 대조적인 것이다. 그리고 어김없이 어느 한쪽도 믿을 것이 벌어지는 전쟁의 횡포 속에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들의 죽음은 어이없고 황당하게 닥쳤다. 감독은 전쟁 속의 마을을 평화롭게 그려낸 반면 그 밖으로 나온 뒤 폭격 씬은 실로 전쟁 영화의 '그것'처럼 찍어내었다. 순박한 사람들이 살아가던 잔잔한 연못에 난대없이 폭탄이 들이 닥친 것이다. 그렇게 죽은 이들은 왜 죽는 건지 이유도 모르고 떠나야했다. 감독은 어쩌면 그들이 목숨을 잃어가면서도 알 수 없었던 그 황당한 이유를 조근조근 들려주고, 다시 길을 떠날 수 있도록 굿을 펼치고 있다. 그의 목소리는 애니메이션으로 처리된 고래 모자의 움직임을 보여 주는 장면으로 대체된다. 상처를 잊고 그렇게 유유히 먼 바다로 떠나기를. 그 장면의 감동이 다소 밋밋하게 이어지던 영화에 따뜻한 것을 퍼트린다.      
 
여기서 여러 얼굴을 알린 배우들이 한 두 번씩 얼굴을 드러내며 마을 주민과 합류한 피난민의 얼굴로 나타난다. 이들이 주는 효과는 다소 연극적이다. 무대 위의 연극을 위해 잠시 배역을 맡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이 부분이 독특하다. 어떤 영화 속에서 배역을 맡으면 배우들은 본 캐릭터에 빠져들어 연기 연구를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영화 속에서 배우들은 '나는 그날 노근리에 있었다'는 설정과 자기 암시만으로 연기에 임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행동은 다소 연극적이며 그 안에서 '연기의 의도'가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본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오르는 '필름구매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들과도 겹친다. 많은 전쟁영화들이 어떤 식으로든 전쟁에 참여한 이들의 시점으로 전쟁을 이야기하였다. 물론 그 영화들이 전쟁에 대해 일갈하는 태도는 모두 바람직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 <작은 연못>이 보여주는 지점의 전쟁에 대한 시선은 그보다 더 스산하고 그 잔털같은 결들이 그 진심을 읽게 만든다. 영화의 필름 구매자 이름이 오를 때, 이미 사망자가 된 이들의 이름을 삽입하는 것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느낌이 있다. 그 이름들은 당시 노근리 주민들의 이름처럼 착시 효과를 가지기도 하고, 유명 배우들이 노근리에 살다가 무참하게 죽임을 당한 무명의 주민들을 연기한 것처럼 영화를 만들고, 보는 이가 모두 그 속에 속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을 불러내어 씻김굿을 하는 듯하다. 그리고 마지막 아이들의 합창 공연을 보기 위해 죽은 자, 살아남은 자들이 뒤섞여 앉아 있는 장면은 영화의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by 명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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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과 경찰아저씨의 700일 전쟁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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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한 청춘의 시간, 언젠가 기억할 행복했던 순간들
 
 
포스터만 봐도 웃기는 영화일 게 분명했지만, 일단 이치하라 하야토가 나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작품이었다. 안 웃겨도 막 웃어줄 테다. 뭐, 이런 심정으로 상영 극장을 물색하는데, 거기서 좌절. 상영관이 별로 없어서 간신히 보게 되었다. 하지만 넓은 극장 안에 나를 포함한 두 명의 관객 뿐이어서 이 재미있고 귀여운 영화를 막막한 정적 속에서 보게 되었다.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영화 속의 아이들은 외곽 마을에서 무료하게 살고 있는 말썽꾸러기 고등학생들이다. 이치하라 하야토가 연기하는 마마차리라는 아이를 필두로 늘상 장난 치고 살 궁리 뿐이다. 어느날 열혈 경찰이 이 마을에 오게 되고 마마차리 일당은 그를 전쟁 상대로 낙점한다. 하지만 아이들의 공격과 아저씨의 야비한(?) 지적 게임으로 언제나 팽팽한 긴장감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장난은 그리 과하지 않고 귀여운 정도이다. 누구나 어린 시절에 비슷하게 해보았을 법한 그런 장난들이다. 결코 누구를 해치거나 피해를 입히는 그런 악당스러운 장난들은 아니기 때문에 귀엽기만 하다. 그렇게나 재미없고 무료한 시간은 아이들이 스스로 빚어내는 활력으로 생동감을 얻게 된다. 그리고 사건 사고 없는 무료한 시골 마을에서 경찰 아저씨 또한 심심하지 않을 수 있고. 더디게만 느껴지던 청춘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이들과 경찰 아저씨의  '쌍방합의'에 가까운 전쟁이 매일매일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도 비슷한 수준의 장난들이 반복적으로 벌어질 뿐 강하게 다가오는 것이 없어서 다소 심심해진다. 장난꾸러기들의 이야기지만 이러한 청춘의 이야기 속에서 성(性)의 문제는 심각하게 다가온다. 표면적으로는 장난으로 대체했을 뿐이지만 아이들의 삶에 끼어드는 것은 바로 이성, 섹스에 대한 환상들이다. 성의 문제를 노골적으로, 입체적으로 그려지지는 않지만 이 영화 역시 청춘과 마스터베이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영화 속에서 어린 사내 아이들이 저희도 모르게 가장 순수하게 표출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욕망에 대한 것이다. 이 장난꾸러기들이 어느 날 비로소 연애를 하고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되면 이 시절은 자연히 마감히 될 것이다. 그리고 빈번하게 벌어지는 장난꾸러기 군단의 장난 에피소드 나열 속에서도 빛나는 장면들은 분명히 있다. 바로 아이들이 불꽃놀이를 위해서 자전거를 타고 밤 길을 달리는 장면이다. 그냥 그 한 장면 만으로도 영화가 아주 껍데기만 쓴 영화는 아니라고 본다.  

by 명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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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나온 남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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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덜 자란 남자들의 그 측은한 소동!

영화 속 로드무비의 화법을 통해 발견하는 성장의 비밀은 아이들에게서만 확인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익히 잘 알고 있듯이 인간은 언제까지나 덜 자란 상태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신체적 진화는 어느 수준에서 그치지만, 정신적 진화는 죽는 순간까지도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이대로 무의미한 삶인가, 싶을 때 언제든지 사건은 벌어지고 진심으로 삶의 이치를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이 영화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느 덧 다 알아버리고, 다 알아서 더 알 것이 없는 그런 관계와 생활만 남았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을 때, 사건이 터진다. 바로 주인공 성희의 아내가 사라진 것이다. 혼자 살고 싶다는 선언을 성희가 먼저 했지만, 사실 아내는 그가 그런 생각을 품기도 전에 실행에 옮기고 떠난 것이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성희는 이제 괘씸한 아내의 행적을 쫓는다.


그러면서 영화는 성희와 후배 동민이 고물 자동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으로 로드무비의 자세로 고쳐 앉는다. 하지만 로드무비로서의 색깔을 갖추고는 있지만 그 결이 메워지는 과정에 균열이 일고, 흐름은 차단된다. 자연스럽지가 않아 보인다. 남편 성희가 아내를 찾아가는 과정에 만나는 아내의 옛 친구들과의 만남은 독특한 캐릭터, 상황으로 연출하려는 의도만 보일 뿐이다. 그 속에 담아야할 캐릭터의 순수성과 그것들이 전달하는 감동의 힘이 맥없이 사그라진다. 관객들은 로드무비를 통해 그 속에서 주인공들을 그저 지나치는 이들에게서 마저도 무언가 삶의 풍경을 잡아내고자 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 영화 속의 그들에게는 그러한 진심이 없어보인다. 다만 마지막의 이유있는 반전으로 가기 위해 거처가는 이동 경로일 뿐이다. 이들과의 관계에서 마저도 주인공들은 성장을 해야만 한다. 이 길에서 만나는 인물들 중 유일한 힘을 발휘하는 이는 바로 이문식이 연기하는 유곽이라는 인물 뿐이다. 캐릭터의 관계들이 주는 짜임이 여기서 조금 매듭을 묶을 수가 있다. 그리고 성희와 동민의 관계 또한 풀리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아내의 전 애인이자 성희 자신의 절친한 후배 동민과의 관계에 뭔가 균열이 있었을 법도 한데 이들은 시종일관 쌍둥이 브라더스 마냥 다정하기만 하다. 차라리 이 사내들이 사랑했던 한 여인의 인생에 대한 비밀을 알고 거기서 발견하는 감동이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녀의 가출 이유로서, 혹은 반전으로서 술술 풀어놓는 마지막의 나레이션과 몽타쥬들은 그저 감동을 조장하는 급조적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by 명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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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어스맨 - A Serious Ma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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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근심이 가고 나면 또 다른 근심이 찾아온다. 
  

<시리어스 맨>은 한 줄로 마음에 새겨지는 격언처럼 느껴지는 작품이다. 코엔 브라더스의 다른 영화처럼 늘 정체를 숨긴 채 코미디로 위장하여 다가오지만, 결국엔 뒤통수를 울리는 일갈을 하고 만다. 그런 점에서 이 형제 감독의 전작과 비슷한 스타일의 연출 방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영화이기는 하다. 그러나 코엔 브라더스가 여러 작품들에 녹여온 삶에 대한 운명론적 시선이 그리 뻔하지 않은 울림을 준다. 이번에는 마피아도 아니고,  탈출한 죄수도 아니고, 카지노를 노리는 사기꾼도 아닌, 그저 평범한 일상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주인공이 나온다. 너무 안락해서 지루해 미칠 듯한 그 느릿한 균열 속에서 삶의 파국은 서서히 진전되며 우리 곁으로 다가 온다는 것을 전해준다. 오프닝은 그들의 90년작 <밀러스 크로싱>과 닮아있다. 하나의 모자가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끼며 비주체적인 행위를 보여준다. 그러나 모자는 이리저리 굴러나오면서도 꽤 나름 주체적이고 아리송한 삶의 장난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결국 한 인간의 삶도 이 거대한 구조적 세계 속에서는 결국 하나의 부속품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시리어스 맨>을 보고 나면 비슷한 감흥이 일어나며 나 자신이 서 있는 이 거대한 세계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도, 결코, 이 세계를 가늠할 수 없다.

 

<밀러스 크로싱>의 모자는 <시리어스 맨>에서 유대 랍비의 존재로 대체된다. 사람들은 인생의 큰 고비를 맞이할 때 신이건, 가족이건, 애인이건,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한다. 그럴 때 나의 짐을 함께 들 수 있는 누군가, 내가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고스란히 내가 혼자 해결해야 한다면 그만큼 절실한 외로움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신은 너무나 바빠서 결코 우리의 시름을 들어줄리 만무하고, 게다가 그들의 대체자인 랍비 조차 바쁘다. 영화 <시리어스 맨>의 주인공 래리는 중년의 남성으로 외각 도시에서 살며 중산층으로서 적절한 삶을 영위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새로운 사랑과 이혼에 대한 발언을 기점으로 그의 삶은 도미노처럼 무너지며 사건들이 밀려온다. 그러나 그 도미노가 역진행으로 다시 다른 방향으로 터닝을 하기도 한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래리는 몸이 안 좋아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다. 신체 부위 중 어디가 본격적으로 아파서 병원을 찾은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검진'을 하고 있던 그를 떠올려 본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자신에게 닥칠 불길한 기운에 대해 의심하고 겁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건강이 되었건, 금전적인 것이 되었건. 자신을 위협하는 것은 알고 보면 자신 주변에서 시작 되는 법이다. 그러니 어느 정도 예측은 가능하다. 그런데 그의 건강 검진으로 시작된 '검진'에 대한 의혹은 처음 아내가 던진 폭탄 발언으로 시작된다. 그녀는 래리를 안하무인 격으로 새로운 애인과 살게 될테니 집을 옮겨달라고 한다. 그리고 이혼장 요구. 성실하고 진지한 래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저명한 랍비들의 조언을 들으며 시간을 버는 일 뿐이다. 하지만 신은 있나보다. 같은 시간에 차 사고가 나서 아내의 애인은 죽고, 래리는 다치기만 했다. 이것도 다행이라면 다행(래리 역의 배우 마이클 스터버그가 아들에게 이 소식을 들은 뒤 짓는 표정이 압권이다). 곧 아내의 애인은 유령이 되어 <허드서커 대리인>속의 죽은 사장처럼 래리 앞에 등장하고 나름 그의 위치를 설정해주는 코치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래리를 위기에 빠트리는 인물들이 다른 한편에선 또 기회를 열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래리의 또 다른 위기는 그가 교수직을 유지하는데 걸림돌이 될 듯한 한국 학생의 등장이다. 자신이 이해 못하고 낮은 성적을 받은 학생은 성적 정정을 요구하며 돈봉투(아 이런!)를 두고 나간다. 그런데 성실한 교수 래리는 그것으로 인해 여러 가지 모색을 벌일 수 있었다. 관객들은 그가 소박하게 C-를 그리는 순간 실망이 아닌, 자그마한 미소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벌이는 내심의 타협이 비열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바로 그 소심함으로서 삶을 우회하는 지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세상에나! 미국 같은데서 진짜 탈무드, 랍비같은 인생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담?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래리의 근심 거리들이 꿈에 까지 비추어지는 장면들이다. 그가 꿈에서 동생을 배에 태워 캐나다로 보내고 싶어하는 장면. 그가 현재의 근심을 얼마나 힘겨워하는지, 그것을 꼭 떼어내 버리고 싶어하는지 절실히 느껴지고 공감하게 되는 부분이다. 우리의 삶을 누르는 절실한 그것은 무엇일까? 그러나 아무리 아둥바둥 거려도 소용이 없다. 다 시간과 때가 기다려 해결을 해주는 법. 래리의 아들은 또 아들 나름대로 친구에게 진 빚을 못 갚아 걱정이다. 매일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러나 인생은 하나의 위기가 가고 나면 또 다른 위기가 오는 법임을 코엔 형제는 재치와 지혜로움을 발휘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결코 삶의 시련은 하나의 마무리로 그것이 끝이 아니다. 솔직히, 위기가 하나로 끝나면 재미 없는 인생이다. 그리고 갈수록 장나스럽고 지혜로워지는 코엔 브라더스의 원숙함과 이들의 콤비 카터 버웰의 영화음악 마저 경지에 올라선 듯 느껴진다. 이들은 가끔 평범한 영화를 내놓지만 한번씩 이렇게 높은 시선에 서있는 생각하는 영화들을 만들어낸다.   

 


by 명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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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어스맨 - A Serious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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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근심이 가고 나면 또 다른 근심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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