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라이프
가이 대븐포트 지음, 박상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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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제공

반고흐의 <양파가 있는 정물>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귀 절단 사건 이후에 그려진 이 그림에는 귀가 달린 올리브 오일병과 양초접시가 나온다. 라스파이의 의학책은 고흐의 빈민과의 연대를 보여주며 양파는 당시 회복기 환자를 위한 가장 저렴한 음식이다.

정물화의 각 정물이 상징하는 것을 이해하며 작품을 보면 우리는 작품을 더 깊이 감상하고 정물 이면의 미지의 세계를 신나게 탐험할 수 있다.

'예술과 문학에 나타난 정물 전반에 대해 다루며, 정물이라는 소재가 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곳까지, 가장 넓게 탐색'한 이 책을 전부 쉽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정물에 대한 다양한 사유를 할 수 있어 흥미롭게 읽었다. 연대순으로 특징이나 주제별로 엮어진 것이 아니라 역자의 말처럼 콜라주적인 에세이라 감상이 때론 여기저기 분산되고 흩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정물화가 가진 다양한 의미와 해석 때론, 이중의 의미나 말장난 같기도 하고 한없이 높기도, 천해보이기도 한 카멜레온 같은 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1장은 정물의 기원과 의미, 
2장은 두상으로 상징되는 인류와 예술, 문명의 순환, 
3장은 사과와 배를 통해 정물의 의미를 살피고 
4장은 니체와 데 키리코의 토리노에서 시작해 밀턴, 키츠, 셸리의 시 속에 드러난 정물을 살펴본다.

저자는 4천 년 전, 조상에 대한 숭배로 영혼이 먹을 수 있는 그림을 그려 넣은 고대 무덤 속의 음식 그림이 아마도 정물화의 기원일 것이라고 말한다. 정물화는 마치 짧은 시나 소네트처럼 화가들의 연습장이고 고백과 명상의 형식이다.  물론, 정물화를 천하게 여긴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 시에서 풍부하게 등장하는 정물화는 '문명의 장으로서의 식탁을 지켜왔다. 

🔖정물이 지속되는 한, 두상이 우리의 운명이다. (106p)
정물에는 책이나 악기, 돌, 잎들도 있지만 고전적인 흉상, 두상도 있다. 코넌 도일의 작품들, 포의 <어셔가의 몰락>의 정물, 두상, 흉상은 어떤 의미를 갖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사건의 맥락을 이해하게 한다. 

문명의 한 쌍, 사과와 배가 정물화에서 의미하는 것도 흥미롭다.
🔖사과는 토착화가 됐지만, 배는 아직 유럽의 산물로 남아 있다는 소로의 생각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과는- 상이고, 유혹이고, 보상인- 상반된 의미를 지닌 상징물로 사랑과 증오, 조화와 불협화음을 동시에 의미한다. 반면 배는 카리스마 자체다. 게다가 사과처럼 이중적인 의미를 가질 때도 배는 둘 다 좋은 의미다. 실제로 우리는 배 안에서 자연의 조화를 찾는다.(123p)

니체가 토리노에서 느낀 멜랑콜리와 노스탤지어가 이후 정물화의 의미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알려주며 책은 마무리된다.
🔖시대를 거듭하며 정물화의 운명은 혁신에서 진부함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낮익음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필연적으로 정물화는 예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스타일의 선구자로 또는 전형으로 스스로를 재생해 왔는데 말이다. (208p)


책을 다 읽고 예전에 읽은 책에서 본 그림이 떠올랐다.
제우스와 헤르메스는 어느 날 인간의 모습으로 어떤 마을에 내려와 하룻밤 쉬어 갈 수 있게 요청하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는다.  마지막 바우키스와 펠레몬의 집을 찾았고 이 노부부는 이 나그네들 집으로 안내하고 먹을 것을 대접한다.  식탁 위는 초라해 보이지만 가난한 이 부부는 자신들이 가진 최대한의 것들로 대접하는데 이에 감동한 제우스는 술병의 술이 떨어지지 않게 했으며 이 집을 제외한 모든 마을 사람들이 물에 잠기는 벌을 내린다.

🔖바우키스 할멈은 박하 이파리로 식탁을 닦고는 여기에다 알락달락한 딸기, 가을에 따서 겨우내 포도주에 절여두었던 버찌, 꽃상추, 순무, 치즈 한 덩어리, 뜨겁지 않은 재에다 구운 달갈을 질그릇 접시에 얹어 내놓았네. 무늬가 놓인 술병과 안에다 밀랍을 입힌 너도밤나무 술잔도 나왔네 (이윤기, 그리스.로마 신화)

가이 대븐포트의 <스틸라이프>를 읽고 다시 식탁 위 정물들을 바라본다.  책을 읽기 전엔, 단순한 먹거리로 보였지만 책을 읽은 후엔 정물이 담고 있는 노부부의 아낌없는 대접과 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다 이해하진 못 했지만, 정물을 보다 더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관점을 심어준 책이다.  질서 없이 놓인 정물이라도 나름의 이유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번역이 매끄럽고 친절한 각주와 독자를 배려한 편집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정물화 그 자체인 책의 물성이 아름답다.


*을유문화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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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교사들
안 세르 지음, 길경선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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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이것은빨간맛 빨간책 l

강렬하고 뜨겁고 몽환적이다.
예상을 철저하게 빗나간 내용!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살아난다
관음증,여성의 성, 페미니즘, 육아, 가족, 부부..
뜨거운 날씨만큼 내용도 뜨거운 책
읽고 나니 무수한 질문만 남는다.

이것은 fairy tale인가..
한 여름밤의 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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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 - 제28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희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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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제공

🔖모든 것은 안에서 시작되었다.
최초의 감정, 최초의 자아, 최초의 세계.
그중 오직 최초의 꿈만이 우리 세계의 바깥에 미래를 펼쳐놓았다.
이제 이곳에서 우리는 꿈의 미래를 안으로 끌어온다.
믿고 기도하여 결국 가장 좋은 것이 내게 온다. (1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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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성을 다하지 않으면 살기 힘든 현실과 열성을 다해도 살기 힘든 현실'에 살고 있는 사람들, '시간이 자신의 세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오직 '믿음'만이 유일한 구원인 사람들.

자신의 믿음을 되찾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들은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이 가장 갖기 힘든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게 분명'하다. '정작 희망과 믿음이 필요한 사람들은 책이 제시한 방법을 시도조차 하기 힘들다.' '간절함은 현실이 된다는 것'을 믿는 이들이 쉽게 이 세계관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인간의 의도가 섞이지 않은' 그저 공간으로서의 '탱크(subconscious tank:잠재의식 탱크)'가 만들어지게 됐다.

'신성한 구역'을 정해 구겨진 마음을 '다리'고 한 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는 암흑 속인 탱크 속에 들어갈 땐 마음은 오직 믿음으로 수렴된다. 텅 빈 암흑의 '탱크'에 들어가 자신이 바라는 미래를 위해 기도한다. 꿈과 미래를 자신의 언어로 발화하며 그 목소리를 듣는 것 그러면서 진짜가 되리라고 믿는 것이다. 그곳에 자신의 믿음을 실현시켜 줄 절대적 존재, 신(神)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믿음이 실현될 것이라고 믿는 '믿음'만 존재할 뿐.

탱크는 어떤 절대적 존재를 맹목적으로 믿는 사이비 종교집단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의 바깥에 있는 미래를 자기 안으로 끊임없이 끌어들이고자 하는 사람들의 처절한 믿음에 대한 이야기다.

🔖어떤 믿음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살기 위해 반드시 붙들어야 하는 문제였다. (106p)

가족이 자신의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길 바라는 둡둡, 그는 그 믿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과 '공통의 꿈'을 꾼다면 자신이 꿈꾸는 미래는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는다. 결국, 그가 꿈꾼 미래는 현실이 됐다. 무지개 깃발을 손에 든 둡둡의 아버지를 본 양우가 흐느껴 울던 마지막 장면은 내내 마음에 남아 있다. 양우의 눈앞에 보인 것인 그렇게도 둡둡이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던 미래다.

'믿음이라는 것은 자신도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고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 그리고 우리가 믿을 것을 '사랑' 뿐임을 알게 한다.

작가의 첫 작품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흡입력 있는 전개와 살아있는 캐릭터들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했다. 무엇을 '믿는다'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한 요즘, '믿음'이라는 것과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하느냐까지 다양한 물음을 던진 묵직한 소설이었다.

🔖도선은 확신했다. '그곳'에서 기도한 모든 것은 이루어진다. 바깥의 꿈과 미래를 믿는다면 그것들은 절대 도선을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그것은 반드시 올 것이다.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것의 모습을 하고 도선의 '안'으로 올 것이다. 도선은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14p)

🔖탱크에 갈 때마다 어떻게든 ㅇ 상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희망의 실체이다. (139p)

🔖결국 현실은 우리가 과거에 생각했던 미래랑 닮게 되니까요.(147p)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거기에서 죽었다고. 그렇지만 그게 탱크의 잘못이나 그 사람의 잘못은 아니었다고. 그것은 무언가를 강하게 믿고 희망을 가질 때 따라오는 절망의 문제였고. 세계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꼭 한 번은 맞다뜨리는 재해에 가까웠다고 그러니 언젠가 당신에게도 재해가 온다면 당황하지 말라고. 대신 잠깐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보라고. 그러면 한 번도 기다린 적 없던 미래가 평생을 기다린 모양을 하고 다가오는 날이 올 거라고. (261p)

#탱크 #김희재 #한겨레문학상 #소설
#한겨레출판 #북스타그램 #탱크단 #서평
#독서 #독서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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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
황모과 지음 / 래빗홀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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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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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9월 1일 토요일, 리히터 규모 7.9의 지진이 일본 관동지역에 발생한다.  엄청난 재산과 인명 피해를 입힌 당시 재난상황을 들여다보니, 인근 지역 수로 사업에 참여한 조선인 노동자 사망자 수는 제대로 집계가 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참담한 것은 이들 대다수가 혼란한 와중에 발현된 광기에 사로잡힌 일본인들에 의해 집단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SF 타임슬립 역사소설인 이 책은 아시아 홀로코스트로 불리는 그때의 역사 속으로 독자들을 인도하며 그날의 진실을 알린다.

2023년 아시아 홀로코스트 진상 규명 위원회는 당시 피해자의 행방을 밝히는 지원 사업을 벌였다.  조선인 유족회 대리인인 민호는 마달출의 행적을, 일본인 유족회 대리인 다카야는 미야와키 다츠시의 당시 사흘간의 행적을 밝히기 위해, "싱크로놀로지 시스템"을 이용해 1923년 당시로 파견된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민호가 당시 조선인들을 살리는 일에 개입해 죽임을 당할 때마다 그 당시 상황을 방관하고 지켜만 본 다카야는 무한 타임루프라는 저주에 걸린다.

🔖싱크로놀로지 채널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현장을 관찰하기 위해 설계된 시스템이다. 일어난 현상을 되돌릴 수는 없다. 과거의 현상 사이를 탐험할 수 있을 뿐 과거 자체에 변형을 가할 수는 없다. (19p)

달출, 평세, 태안 등 당시 조선인은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왔다.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력은 일본 서민들에게도, 서민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려던 일본 지도층들에게도 곡 필요했다.' 일본 노동자 임금의 1/10만 받고 처우는 최악이었지만 조선에서 배를 굶주리고 있는 자신의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더 악한 자에게 쏟아지는 폭력을 제어하지 못하는 무너진 공권력은 전쟁을 낳는다. (99p)

지진이 발생하면서 최악의 재난 상황이 되고 여기저기 약탈이 일어나자 일본인들은 그 모든 원망의 화살을 조선인들에게 돌리고 그들이 혼란한 틈을 타 약탈, 방화, 폭동을 일으킨다는 루머를 퍼뜨린다. 평소에도 조선인들에 대한 지독한 편견과 혐오를 가지고 있던 일본인이 많았다. 중요한 것은 이런 조작된 루머가 꽤나 조직적이고 준비된 성격을 띠었다는 것이다. 공권력조차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을 방치했다. 이것은 민.관 합작 제노사이드다.

말은 하지 못하지만 그 사람의 죽는 날을 볼 수 있는 비상한 능력을 가진 평세는 달출이 집단 사살되는 현장에 있는 그의 미래를 보고 그를 살리려 하지만 달출은 같은 조선인 노동자들은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쓰며 돌아다닌다.

🔖구호 순서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절도가 아닌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다. 그래야 이 사회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더라도 이유 없는 수모는 당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고향에서도 그랬다. 약한 사람들이 더 도덕적이어야 했다.(96p)

지진 후, 평세와 달출이 살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면서 곳곳에서 일어나는 조선인 학살 현장을 목격하고 그 와중에도 이들을 도운 일본인들(사요, 미야와키)을 지켜보면서 민호는 정의로운 일본인들을 규합하고 당시의 상황에 적극 개입하려 했다. 반면 다카야는 '비겁하게 자기 합리화에 머물며 퇴행했다. 결국, 다카야는 조선인들을 구하기 위해 수차례 죽음을 당하면서 자신을 타임 루프에 갇히게 한 민호를 살리고 나서야 비로소 무한 타임 루프를 빠져나오게 된다.

🔖여러 사건 중에서도 1923년에 일어난 학살에 민호는 줄곧 마음이 갔다. 평법한 사람이 평범한 사람을 죽였다. 약자가 약자를 착취하고 공권력이 이를 독려하며 끝내 덮어버린 사건. 전례 없이 공문서가 없는 사건이었다. 제국주의적 폭력이 모두의 일상으로 내려와 공공연해졌으나 악행은 처벌받지 않았다. (124p)

'약자에 대한 혐오가 조장되고 장려되는 한, 민중의 민중에 대한 학살은 언제든지 재현될 수 있다는 일'이다. 🔖'과거는 역동적이다. 언제고 고정되지 않고 계속 변모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258p)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들의 해방을 위해 움직인 '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우리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 이유이다.

코멘터리북에는 황모과 작가님의 취재 기록이 담겨있다. 정확하게 알지 못했던 이 사건을 소설과 코멘터리북을 통해 자세히 알게 됐다.

🔖당시의 진실을 찾아보려는 누군가와 현장을 잇는 일에 이 소설이 작은 다리가 되었으면 한다._황모과

올해는 #관동대지진조선인학살100주년 이다. 🇰🇷
#remember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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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테이아 - 매들린 밀러 짧은 소설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새의노래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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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현 작가는 <환승인간 > 에서 <선녀와 나무꾼>의 선녀를 언급하며 선녀는 하늘에 올라갈 때까지 왜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무꾼에게 자신의 진심을 말하지 않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선녀를 납치한 나무꾼은 지독한 스토커고 옥황상제는 선녀가 납치된 것이 선녀의 잘못이라고 가스라이팅을 지속적으로 했다는 것이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서, 선녀가 3년을 참고 하늘로 올라간 것을 작가는 차가운 복수심이라고 했다. 나무꾼에게 절대 드러내지 않는 그 마음을.

오비디우스 의 < 변신이야기 >에는 <퓌그말리온의 기도>라는 오르페우스의 노래가 나온다. 퀴프로스 섬에 사는 지상 최고의 조각가인 퓌그말리온은 섬에 있는 여자들이 타락했다며 여자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순결함을 상징하는 상아색 여인 조각상을 만들어 스스로 사랑에 빠진다.  조각상이 살아있는 여인이 되길 소원하는 마음이 아프로디테에게 전달되고 그 소원은 이루어진다는 내용이다.

나는 오비디우스가 쓴 <퓌그말리온의 기도>에서 갈라테이아라는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매들린 밀러가 지적한 것처럼 이 노래에서 갈라테이아는 그녀로만 지칭될 뿐이다. 그런데 내가 읽은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퓌그말리온이 갈라테이아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으로 나온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그럼 갈라테이라는 이름은 과연 어디에서 누가 붙인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갈라테이아는 원래 상아색 피부를 가진 바다의 요정의 이름이다.)

<갈라테이아>는 매들린 밀러가 <퓌그말리온의 기도>를 비틀어서 여성의 관점에서 다시 쓴 이야기다. 우리는 피그말리온이라는 말을 기대와 칭찬의 힘을 이야기할 때, 또는 자신이 창조한 예술작품과 사랑에 빠지는 일을 이야기할 때 쓰는 용어로 사용한다.  이러한 맥락으로 셰익스피어는 <겨울이야기>를 썼고 버나드 쇼는 <피그말리온>을 썼으며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마이 페어 레이디>가 창작됐다.  공통적으로 신분과 지성이 우월한 남성이 신분이 낮은 여성을 자신의 노력으로 목적에 맞게 바꾸는 이야기다.  (역시 마이 페어 레이디의 교수는 남성 우월주의자다.) 이들 여성들은 수동태의 주어로 존재한다.

사실, 이전까진 이 신화의 이면에 감춰진 남성의 폭력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나는 매들린 밀러의 <갈라테이아>를 읽으며 '피그말리온이야말로 여성의 자립심을 질색하고 혐오한 남성, 여성을 원하는 동시에 증오한 남성, 순결과 통제에 대한 환상을 피난처 삼은 남성'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퀴프로스 섬의 모든 여성들을 혐오하면서 동시에 순결하고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해 주길, 그래서 쉽게 '따먹을 수'있는 대상으로서의 여성이 되기만을 바랐던 피그말리온, 그는 사랑이라는 가면 아래 남성의 폭력성을 감춘 것이다. 

<갈라테이아>의 갈라테이아는 <선녀와 나무꾼>의 선녀처럼 자신의 본심을 피그말리온에게 드러내지 않는다. 오랜 준비 끝에 그녀는 피그말리온을 바다로 유인해 목을 끌어안으며 바닷속에 가라앉는다.  마치 원래 바다의 요정이었던 갈라테이아로 돌아간 것처럼.  이것이 갈라테이아의 복수다. 🌊

우윳빛 피부를 가진 갈라테이아, 하얀 선녀복을 입은 선녀..순결과 외적 미, 복종을 강요하는 남성들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것 같아 잠시 흰색이 슬퍼진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녀들의 결연한 의지로 느껴지기도 된다.

100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의 소설이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묵직하다. 겉표지, 내지가 모두 같은 종이로 만들었다는 이 책은, 상아빛 피부의 갈라테이아의 어깨를 토닥이는 마음으로 읽어주길 바란다는 출판사의 의도가 담겨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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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제공 #갈라테이아 #매들린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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