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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트 솔티
황모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11월
평점 :

우리가 작은 배에 담아 왔던 이국의 풍경이 부산의 역사 속에 녹아들었다. 뒤엉켜 함께 삭아가는 것을 구태여 분리해 원성분과 출신을 구분할 필요가 없어졌다. / p.90, <스위트 솔티>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 인간의 힘은 뒷담화라 그랬던가. 굳이 책을 인용할 것도 없이 인간은 다른 집단을 배척하며 힘을 키우기도 하고 비난하여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편을 나눈다. 이질성이 뚜렷한 타자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심지어 그런 일을 집단에서 종용하기도 하고. 이 좁은 한반도만 해도 남북으로 갈라져있고, 동서로 갈라져있다. 매우 인위적으로. 국가와 정치에게서 구석으로 내몰린 소외된 자들과 공동체에 속하지 못한 자들의 이야기. 만들어진 그들의 '타자성'에 대해 말하기 위한 여덟 편의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단편집은 <오메라시로 돌아가는 사람들>에서부터 출발한다. 만화가가 되기 위해 도쿄에 도착한 '나'가 느끼는 외로움은 마치 난민과도 같다. 부유하는 듯 살아가던 그는 치매에 걸린 이웃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할머니의 병 때문에 자식들은 할머니를 고향인 '오메라시'로 모시고자 하지만 그곳은 전쟁 당시 학살의 터였으며 할머니에게는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곳이다. '나'는 할머니를 책임져야 할 의무가 없지만 할머니의 기억 속 공포인 '오메라시'는 자신에게도 있음을 알게 된다.
역사의 비극과 생존자의 부채감은 곧 개개인의 불안과 이질성으로 축소되고 배척 끝에 고립된다. 심지어 모두가 마음속에 자신만의 '오메라시'(시대와 공동체가 떠넘긴 개인의 불안,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제외한 모든 이는 결국 타자이고, 그렇게 여길 때 '남의 일'이 될 수 있으니까. 묻지 않고 들여다보지 않는 일이 과연 진짜 배려와 다정인 걸까. 그것은 타자를 향한 무관심과 동일한 일이 아니었을까.
로봇 벨루가 벨카가 진짜 벨루가 무리에 속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나의 새로운 바다로>는 다른 이질성을 갖고 있는 자들도 공동체에 편입시킬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아예 같은 생물이 아닐 수도 있는 벨카를 벨루가들은 받아주었는데, 같은 종인 사람들은 왜 그러지 못하고 있었을까. 저런 생태계보다 인간이 나은게 뭐라고 인간은 바다를 오염시키고 벨루가를 사냥하고 있는걸까. 사실 뻔하다면 뻔한 감동이었는데 나한테는 너무 잘먹혀서 큰일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외국인이 아니어도 누구나 타자일 수 있다는 생각. 모두가 서로의 타자가 되어버리면 아무도 오메라시의 터널을 이야기하지 않을거란 생각. / p.34 <오메라시로 돌아가는 사람들>
<시대 지체자와 시대 공백>, <순애보 준코, 산업위안부 김순자>의 느낌은 비슷하다. 후자가 훨씬 충격적이고 더 세밀하게 피해자에게 초점이 맞춰진 느낌. 개인의 입맛대로 바뀌는 역사와 그저 많은 것들을 시대의 변화로 여기며 사유를 멈춘 채 흘러가는 일의 무서움. 목적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기란 얼마나 간단한지 선명하게 조명한다. <순애보 준코, 산업위안부 김순자>는 훨씬 충격적이다. 전범 국가와 기업이 범죄 회피를 위해 의도적으로 피해자를 손상시키고 역사적 사실을 오염시켜 왜곡하여 책임으로부터 달아난다. 국가의 침묵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피해자의 '자발성'을 내세운다는 게 너무나 끔찍한데, 그럴 수 있다는 사실조차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에 뒤통수를 두들겨 맞은 것 같다.
순애보 필터로 채색된 기억. 순자씨의 경험과 추억을, 살아남은 이유를, 진짜 이야기를 유괴한 거였다. / p.125 <순애보 준코, 산업위안부 김순자>
일부다처제 세상, 4~50대 남성의 nn번째 부인이 되기 위해 신부 수업을 받는 학교가 있다. 그곳에 노파의 몸으로 떨어진 수빈이 아이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설정의 <브라이덜 하이스쿨>. 수빈의 입에서 전달된 이야기는 결코 그대로 전승되지 않는다. 각자의 목소리와 저마다의 바람이 덧씌워지고 그렇게 만들어져 가는 이야기는 강력하다. 이것이 문학의 힘이 아닐까. 다른 남성의 인형을 목표로 하던 아이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고 결국 남자들이 그려낸 동화 밖으로 걸어 나가게끔 한다. 스스로의 발로.
모두가 자타의적으로 가지고 있던 어떠한 이질성, 그를 눈감은 채 어딘가에 소속되고자 더욱 두드러지는 자들을 타자로 내몰고 배제해 왔던 일들이 떠오른다. 나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외면된 사람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라고 '타자'로 바로 여기고 거리를 벌리고 있었기에 많은 비극들이 일어난 게 아닐까. 있는 그대로 타인을 바라보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포용을 가장한 회피이자 무관심이 아니었을까.
대놓고 살갑고 다감하지는 않지만 아주 작아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자들에게 스피커를 쥐어주는 그런 다정. SF로부터 현실을 꿰뚫는 메시지가 주는 충격에서는 작가로서의 어떠한 책임감마저 느껴진다. 이런 게 문학의 힘이고 소설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마침표로 매 단편은 끝났지만 독자에게 그것은 마침표가 아니었다. 그래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묻는 물음표와 끝나지 않은 이야기라는 뜻의 쉼표와도 같은 단편들. 황모과의 이야기는 SF가 아닌 현실이었다. 나는 이 모든 것과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 추천하고 싶은 단편은 첫 번째 단편인 <오메라시로 돌아가는 사람들> 9p 부터 <여행이 다시 당신을 찾아옵니다> 276p까지. 별점 다섯 개다. 열개가 최대치라면 열개 다 줄 거야...
우리 모두가 우연으로 이 세계에 떨구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타자성으로 인해 저마다 깊은 상처를 입었다. 우리는 모든 경계에 책임이 있고 우리에게는 재생이 필요하다. 황모과는 지금 경계에 귀 기울이고 책임에 대하여 쓰는 중이다. / p.294, 해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