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폴라 일지
김금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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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에서 내 시간은 여행도 취재도 연구도 아니라 ‘사는 것’이었다. 관계를 만들고 대화를 나누고 호의, 기쁨, 감동과 경이, 긴장, 때론 불안과 불쾌 같은 순간순간의 감정을 지닌 채 하루하루 일상을 만들어나가는 것. / p.276


읽으면서 계속 남극의 풍경을 상상했다. 새하얀 유빙과 그를 바라보는 새까맣고 동그란 펭귄의 등 같은 것을 생각했다. 세상의 끝에서 그 까만 눈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것을 눈에 담고 있을까. 


'남극'하면 어쩔 수 없이 인간이기에 생겨나는 부채감을 안고 책을 폈다. 미디어에서 많이 보는 것처럼 무거움과 무서움이 있겠거니, 그 안에서 기후를 위한 어떠한 교훈을 남겼겠지 하는 생각과는 다르게 작가는 남극에서의 일상을 적어내려갔다. 남극에서 마주한 거대한 자연과 그곳 사람들의 사랑스러움 같은 것들. 인류가 남극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맞지만, 작가는 그보다 무정하며 담담히 존재하는 자연의 경이로움, 인간도 그곳에서는 한낱 종種의 일종일 뿐이라는 그런 겸손함을 적어내려갔다.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거만하게 내가 너를 살리니 죽이니 할 수 있을까. 하다못해 높은 산 꼭대기에 올라 아래를 바라보기만 해도 사람은 너무 작다는 게 느껴지는데 지구 전체에 생명력을 흘려보내는 남극에 서 있으면 나라는 개인은 과연 어떻게 느껴질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

각자의 속도로 살아가는 남극의 생물들과 그 모든 것을 재촉하지 않고 그저 존재하는 남극 땅은 일종의 희망과 같다. 『지구는 괜찮아, 우리가 문제지』라는 책 제목이 계속 떠올랐다. 자연의 거대함, 끊임없이 태동하는 생명력. 나는 남극을 너무 약하게 보고 있었다. 자연과 인류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는 일이 필요했고, 나는 이 책으로 힌트를 얻었다. 인간은 많은 것들의 도움으로 생을 이어간다. 인간종 뿐이 아니라 많은 종들과 공생하기에 삶을 영위해나갈 수 있다. 공존과 우정이 만들어내는 연대 의식이 있다면 우리가 이렇게 쉽게 많은 것을 파괴할 수 있을까. 차가운 땅에서 작가가 가져온 희망이자 미래의 방향은 바로 이것이었다.


'인간'보다 대륙 자체의 '자연성'이 앞섰고 그 안에서 인간은 모두 다를 것 없는 '종'이었다. / p.252


+ 펭귄 일러스트가 진짜 가슴 터지게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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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셋 2025
김혜수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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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그곳에 가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거라 말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것이 다. / 첫 문장, <여름방학>


'셋셋' 시리즈는 신진 작가들을 발굴하고 소개하려는 목적 하에 한겨레출판과 한겨레교육이 진행하고 있다. 책을 고르다 보면 아는 작가의 작품, 익숙한 맛에 이끌리는 인력(引力)이 강하게 작용하게 되므로 의도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쉽지가 않다. 그런 사람들을 위한 맞춤형 단편집. 진짜 처음 만나는 작가들의 이름이 사람을 설레게 한다. 『셋셋 2025』에는 새로이 문학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어떤 주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지 알 수 있게끔 하는 '한국 문학의 최전선'에 위치한 신인의 작품 6편이 모여 있다.




'구원이란 정말 특별한 것일까'. 많은 소설이 구원을 묻는다. 딱히 이 단편들만 묻는 질문도 아니고 오래전부터 내려온 질문이지만 사회가 심란한 근래에 조금 더 눈에 띄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한국은 특정 개인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공포를 느꼈다. 그 공포에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큰 비극이 발생했다. 연속적으로 발생한 사건으로 인해 한국 사회가 ptsd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불안함에 잠을 자지도 못하고 자다가도 공포에 깨는 사람들에게는 일상의 유지와 평범한 하루, 그리고 바로 옆에서 나와 같이 해주는 사람들이 구원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소설은 작은 위안이자 숨통이 트이는 안전지대가 된다.



이지연의 <아이리시 커피> 속 희수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를 덮친 괴한으로부터 아르바이트생 소미가 살해당하는 것을 바로 옆에서 목격한다. 희수는 죽음을 적극적으로 막지도 못했고 경찰과 구급차를 부르지도 못했다. 방관했다는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희수의 손을 잡아준 것은 소미의 어머니다. 피해자가 피해자에게 내미는 손길, 그 연대가 있었기에 희수는 현실을 다시 마주할 수 있고 서로의 얼굴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서희의 <지영>에서 말하듯 구원이란 그런 것이다. 이해와 공감이면 충분한 것이다. 거창하게 말하거나 교회에 나가 신실하고 열정적으로 신에게 구하지 않더라도 사람의 손에서 전해질 수 있다.


"사람들이 그 문장을 어떻게 완성하는 줄 알아? 고양이 밥을 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간다, 부모님이나 아이를 생각해서 살아간다, 보통은 그런 식이야. 그러니까 사람들은 살아가는 일을 생각할 때면 관계를 떠올려. 너한테는 그런 관계가 되어줄 만한 누군가가 있니?"/ p.61, <지영>



소설가들의 눈을 통과하여 선정된 단편집에 아쉬움을 말하는 것에는 다소 용기가 필요하지만, 솔직히 아쉬움이 남는다. 이런 게 요즘 한국 신인 문학의 트렌드라면 어쩔 수 없지만 너무 부드럽게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크게 인상적으로 기억나는 작품이 적다. 현실은 냉혹하고 우리는 일상을 버텨야 하고,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은 평범함에 건네는 위안이 내게는 너무나 밍숭맹숭하게 느껴졌으므로. 


그러나 이 소설은 분명 시의적절하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문학으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도록, 독자의 마음을 다독이는 글의 기능에 충실하기 위해 벼려낸 이야기임에는 확실하다. 구원은 공감에 있고 공감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이끌어낸다. 신을 찾지 않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충분히 구원할 수 있다. 당연한 말도 상기시켜야 할 필요가 있는 때가 있고 그건 지금이다.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우리가 다같이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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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독서 - 한 권의 책이 리더의 말과 글이 되기까지
신동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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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과 인연을 맺은 사람이 대통령이라면 그 영향은 한 사람에게 그치지 않는다. 


p.22


"대통령의 부주의한 꿈이 나라를 얼마나 어렵게 만드는지,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홍보 사진에 있던 글이 심금을 울린다. 



모든 사람들이 책을 읽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도자라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윤석열 대통령실은 취임 이후 10개월 동안 단 한 권의 책도 구입하지 않았다] 는 기사의 문장을 첨부하고 부연 설명은 하지 않겠다. 김용현이 가장 좋아하는 책이 히틀러 자서전이라는 얘기에 왜 사람들이 경악했겠는가.


지도자가 읽은 책은 단순한 개인의 사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정 전반의 방향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전 대통령들의 독서 목록을 보며 그들이 꿈꾸었던 나라의 골조를 미리 엿볼 수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제3의 물결>을 읽으며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꿈을 꾸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소유의 종말>을 읽으며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을 꿈꾸었다. 꾸준히 책을 추천하는 문재인 전 대통령 역시 읽어나간 책과 그의 연설문들에서 그가 꿈꾸는 세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고, 그에 대한 공감을 국민에게서 충분히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윤석열 씨의 나라를 짐작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이 상식 밖인 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다. 그에게는 구체적인 국정 운영의 방향이 없었고, 한 번도 대한민국의 미래를 그려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존재하지도 않는 독서 이력보다 유튜브 시청 내역을 보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이럴 거면 재작년에 왜 김건희 씨가 도서전에 와서 그 난리를 치고 갔는지 모르겠다) 



이 책은 정식 출간도 되기 전에 2쇄 중쇄를 했다. 단지 대통령이 읽은 책을 소개하고 그 책이 그의 철학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그 영향이 정책에 어떻게 스며들었는지를 보여줄 뿐인데 국민들은 그의 책장에 관심이 많다. 많을 수밖에 없다. 그의 이력은 개인을 넘어 나라의 현실이므로. 그의 과거가 오늘의 정책이 되어 미래를 그려내므로. 


'책 안 읽는' 대통령이 위에 선지 2년 반이 지났다. 전 정권만 해도 대통령이 추천해 주는 책을 구경하고 추천사를 읽었었는데, 2년 사이에 그 재미를 잊어버렸다. 사람들은 다시 책 읽는 대통령을 원한다. 그에게 미래를 사유할 힘과 확실한 국정 철학이 있기를 바란다. 



+ 김대중 대통령의 글을 읽으며 이런 사람이 대통령하는구나 생각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인간 싫어, 인간 때문에 다 망했네' 이러고 있는데 그는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세계를 재조립해보고 구상해본다고 했다. 대통령 그릇이 확실히 따로 있는게 틀림없는거 같다.




사실 우리에게는 서로가 있었다. 그렇지 않다고 조작되었을 뿐이다. 희망은 충분하다. 지금도 가정에서, 거리에서, 회사에서 더 많은 사람이 친절을 베풀고 서로를 돕고 있다. 폭넓게 전염되고 있다. "인간의 선함을 옹호한다는 것은 조롱의 폭풍을 뚫고 나가야 함을 의미"(브레흐만)하고, "적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시인이나 성인, 또는 변절자들의 특권"(에코)이었지만 이제는 모두의 것이 되었다. 우리는 우정과 친절, 협력과 연민을 용감하게 드러내야 한다. / p.59


매국은 언제나 애국이라는 가면을 쓴다. 국가의 이익, 국민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라는 주장 뒤에 자신들의 이익을 감춘다. 따라서 민족 전체를 폄훼하고 상황을 스스로 악화시키는 것은 매국의 고유한 패턴이다. 국민을 그저 '혜택받는 대상'으로 타락시키기 위해 오래도록 사용한 수법이다. 자신들만의 대의인 매국을 위해 개인은 희생돼야 마땅하다. / p.168


<소년이 온다>에서 김진수를 기억하는 '나'도 그랬다. 그는 양심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라 자각한다. 시신들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시민들과 함께 공수부대의 총구 앞에서 섰을 때, 그는 자신 안에서 깨끗한 무엇을 발견하고 놀란다. 바로 양심이었을 것이다. 우리도 한 번쯤 겪어봄 직한 느낌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거대한 혈관의 일부가 된 것 같은 생생함에 닿았을 때 우리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지금 죽어도 후회없을 것 같은  경지에 다다른다. 그것은 양심이 가져다주는, 숭고한 심장의 맥박이다. / p.192


돌아보면 한국의 진보는 도덕적인 이들과 함께할 때 훨씬 적극적이었고, 훨씬 너그러웠다. 억압과 패배, 절망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 시민들도 박수를 쳤다. 한국 보수의 귀가 빨개진 까닭도 그것 때문이다. 그래서 권위주의는 한국의 진보에게 비도덕의 탈을 씌우려고 안달했던 것이다. 다시 태도가 절실하다. 도덕적 지도자의 등장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 p.210


*하니포터 9기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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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방은 빛을 쫓지 않는다 - 대낮의 인간은 잘 모르는 한밤의 생태학
팀 블랙번 지음, 한시아 옮김 / 김영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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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활동하든 밤에 활동하든, 나방의 다양성과 아름다움은 나비를 능가한다. 어쩌면 여러분은 나방을 나비로 착각해 감상했을지도 모른다! / p.11


상식이 약간 뒤틀린다. '나방은 빛을 쫓지 않는다' 란다. 이상하다. 여름밤에 창문을 열어두면 내 방충망에 붙어서 파뤼투나잇 하던 그것들은 나방이 아니었나. 그렇게 일렁이는 궁금증과 '내가 경험해 봤는데 아닌데' 하는 묘한 오기로 책을 펼쳤다.


사오정이 "나방~~" 이러면서 입에서 나방을 쏟아내는 만화를 안다고 말하면 나 상당히 늙은이인가...? 하여튼 예의상으로라도 귀엽다고 말할 수 없는 사오정이 입에서 하고 많은 벌레들 중 나방을 쏟아내는 건 어떤 상징일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나비가 아니었던 것은, 근면 성실을 의미하는 꿀벌이 아니었던 것은, 보기만 해도 징그럽고 꺼리게 되는 나방으로 설정한 이유는 사오정의 외적인 모습과 같이 나방 역시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벌레가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나방을 만지고 눈을 비비면 실명된다는 괴담까지 있었을 정도로. 그렇게 잘 모르면서, 오히려 어설프게 알았기 때문에 더더욱 대중적인 편견에 갇혀 나방을 두려워했다. (물론 지금도 무섭지만...이 책 읽기 전보다는 쪼금 용감해진 것 같음;ㅅ;)



나방도 벌만큼이나 귀중할 것이다. 단지 대개 어둠 속에서 조용하고 묵묵히 자신들의 일을 할 뿐이다. / p.13


나방 자체를 모르는 사람은 없는데 진짜 '나방'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드물다. 나비의 종류는 동요를 만들어서 부를 정도인데 나방의 종류를 그렇게 읊어본 적이 있나. 한국을 기준으로 여기에 서식하는 나비는 겨우 280여 종인데, 나방은 2400여 종에 달한다. 전 세계로 눈을 넓히면 나방만 14만 종이다. 그만큼 다양한 종류의 나방이 셀 수 없이 많다. 자 이제 지구의 주인은 누구지?ㅠ



나방덫에 걸린 나방들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나방이라는 지엽적인 주제에서 맴돌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태계란 원래 물고 물리며 순환하는 구조이므로 나방의 이야기에서 자연스레 그를 둘러싼 자연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자연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평범하지만 잊으며 살고 있던 전제를 나방으로부터 출발하여 다시금 끌어올린다. 작은 사각형의 나방덫에서 지구에 쌓아 올려진 시간과 여러 사건들, 놀라우리만큼 맞아떨어진 강력한 우연의 합이 얽힌 실타래를 풀어나가는데 여기서 이 날개를 가진 곤충은 단순한 '나방'에서 거대한 생태계의 축적물이 된다.



그러나 다양한 나방들의 수가 감소하고 있다. 벌레는 무섭지만 수가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보다 더 무서운 일이다. 그들조차 살 수 없는 환경이 되어간다는 이야기이므로. 사유는 짐작이 가고, 나는 너무 작은 개인이며 해결은 막막해 보인다.


생물들의 원래 서식지를 보존하는 것이 가장 베스트겠지만, 안 될 경우 '이주'를 시키는 방법도 있다. '도움 이주'라는 개념을 책에서 배웠는데, 멸종위기종의 보존을 위해 개체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다는 것이다. 정말 이기적인 인간이 할 법한 오만한 생각이다. 책에서 말한 대로 정말 '비극적 모순'(403)이 아닐 수 없다. 생태계를 다 파악하지도 못했으면서 다른 종의 이주 필요성만 높이고, 그로 인해 벌어진 문제를 통제할 수 없을 경우가 생겼을 때 마땅한 대안도 없다. 뻔한 말이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쳐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오히려 도시의 치명적인 빛에 이끌려 적절하지 못한 서식지에 갇혀버린 개체일 수도 있다. / p.278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밀려들어오는 죄책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오늘 나방을 잡지 않더라도, 살충제로 죽이는 대신 도시의 다른 불빛으로 놓아주더라도 나는 인간으로 살기 위해 이 자리에 버티고 서 있는 것 만으로 생태계에 실질적인 위협이 된다. 문명 속에서 사는 모든 것들은 이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방에 대해 알면 알수록, 생태계를 파고들어 갈수록 그 대상 자체보다 인류와 자연의 관계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그들과 공존하기 위해, 적어도 지구를 지배하는 것이 인간은 아니라는 생각 아래에서 그 작은 존재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하는 일을 훌륭히 해내는 책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세상 한구석을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일과 완전히 격리할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웃의 행동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잘 알지만, 우리가 모두 이웃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곤 한다. / p.422



+ 나방 얼굴도 이렇게 크게 사진으로 볼 수 있고 참 편한 세상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방과 눈을 마주치면 손 끝 부터 전기가 흐르는 것 같다. 우리 아직은 서먹해요.


++ <물고기는 알고 있다> 저자가 이 책을 추천한게 어쩐지 웃기면서도 납득이 된다. 둘이 뭔가 결이 비슷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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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트 솔티
황모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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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작은 배에 담아 왔던 이국의 풍경이 부산의 역사 속에 녹아들었다. 뒤엉켜 함께 삭아가는 것을 구태여 분리해 원성분과 출신을 구분할 필요가 없어졌다. / p.90, <스위트 솔티>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 인간의 힘은 뒷담화라 그랬던가. 굳이 책을 인용할 것도 없이 인간은 다른 집단을 배척하며 힘을 키우기도 하고 비난하여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편을 나눈다. 이질성이 뚜렷한 타자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심지어 그런 일을 집단에서 종용하기도 하고. 이 좁은 한반도만 해도 남북으로 갈라져있고, 동서로 갈라져있다. 매우 인위적으로. 국가와 정치에게서 구석으로 내몰린 소외된 자들과 공동체에 속하지 못한 자들의 이야기. 만들어진 그들의 '타자성'에 대해 말하기 위한 여덟 편의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단편집은 <오메라시로 돌아가는 사람들>에서부터 출발한다. 만화가가 되기 위해 도쿄에 도착한 '나'가 느끼는 외로움은 마치 난민과도 같다. 부유하는 듯 살아가던 그는 치매에 걸린 이웃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할머니의 병 때문에 자식들은 할머니를 고향인 '오메라시'로 모시고자 하지만 그곳은 전쟁 당시 학살의 터였으며 할머니에게는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곳이다. '나'는 할머니를 책임져야 할 의무가 없지만 할머니의 기억 속 공포인 '오메라시'는 자신에게도 있음을 알게 된다.


역사의 비극과 생존자의 부채감은 곧 개개인의 불안과 이질성으로 축소되고 배척 끝에 고립된다. 심지어 모두가 마음속에 자신만의 '오메라시'(시대와 공동체가 떠넘긴 개인의 불안,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제외한 모든 이는 결국 타자이고, 그렇게 여길 때 '남의 일'이 될 수 있으니까. 묻지 않고 들여다보지 않는 일이 과연 진짜 배려와 다정인 걸까. 그것은 타자를 향한 무관심과 동일한 일이 아니었을까.


로봇 벨루가 벨카가 진짜 벨루가 무리에 속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나의 새로운 바다로>는 다른 이질성을 갖고 있는 자들도 공동체에 편입시킬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아예 같은 생물이 아닐 수도 있는 벨카를 벨루가들은 받아주었는데, 같은 종인 사람들은 왜 그러지 못하고 있었을까. 저런 생태계보다 인간이 나은게  뭐라고 인간은 바다를 오염시키고 벨루가를 사냥하고 있는걸까. 사실 뻔하다면 뻔한 감동이었는데 나한테는 너무 잘먹혀서 큰일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외국인이 아니어도 누구나 타자일 수 있다는 생각. 모두가 서로의 타자가 되어버리면 아무도 오메라시의 터널을 이야기하지 않을거란 생각. / p.34 <오메라시로 돌아가는 사람들>



<시대 지체자와 시대 공백>, <순애보 준코, 산업위안부 김순자>의 느낌은 비슷하다. 후자가 훨씬 충격적이고 더 세밀하게 피해자에게 초점이 맞춰진 느낌. 개인의 입맛대로 바뀌는 역사와 그저 많은 것들을 시대의 변화로 여기며 사유를 멈춘 채 흘러가는 일의 무서움. 목적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기란 얼마나 간단한지 선명하게 조명한다. <순애보 준코, 산업위안부 김순자>는 훨씬 충격적이다. 전범 국가와 기업이 범죄 회피를 위해 의도적으로 피해자를 손상시키고 역사적 사실을 오염시켜 왜곡하여 책임으로부터 달아난다. 국가의 침묵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피해자의 '자발성'을 내세운다는 게 너무나 끔찍한데, 그럴 수 있다는 사실조차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에 뒤통수를 두들겨 맞은 것 같다. 


순애보 필터로 채색된 기억. 순자씨의 경험과 추억을, 살아남은 이유를, 진짜 이야기를 유괴한 거였다. / p.125 <순애보 준코, 산업위안부 김순자>


일부다처제 세상, 4~50대 남성의 nn번째 부인이 되기 위해 신부 수업을 받는 학교가 있다. 그곳에 노파의 몸으로 떨어진 수빈이 아이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설정의 <브라이덜 하이스쿨>. 수빈의 입에서 전달된 이야기는 결코 그대로 전승되지 않는다. 각자의 목소리와 저마다의 바람이 덧씌워지고 그렇게 만들어져 가는 이야기는 강력하다. 이것이 문학의 힘이 아닐까. 다른 남성의 인형을 목표로 하던 아이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고 결국 남자들이 그려낸 동화 밖으로 걸어 나가게끔 한다. 스스로의 발로. 




모두가 자타의적으로 가지고 있던 어떠한 이질성, 그를 눈감은 채 어딘가에 소속되고자 더욱 두드러지는 자들을 타자로 내몰고 배제해 왔던 일들이 떠오른다. 나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외면된 사람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라고 '타자'로 바로 여기고 거리를 벌리고 있었기에 많은 비극들이 일어난 게 아닐까. 있는 그대로 타인을 바라보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포용을 가장한 회피이자 무관심이 아니었을까.


대놓고 살갑고 다감하지는 않지만 아주 작아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자들에게 스피커를 쥐어주는 그런 다정. SF로부터 현실을 꿰뚫는 메시지가 주는 충격에서는 작가로서의 어떠한 책임감마저 느껴진다. 이런 게 문학의 힘이고 소설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마침표로 매 단편은 끝났지만 독자에게 그것은 마침표가 아니었다. 그래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묻는 물음표와 끝나지 않은 이야기라는 뜻의 쉼표와도 같은 단편들. 황모과의 이야기는 SF가 아닌 현실이었다. 나는 이 모든 것과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 추천하고 싶은 단편은 첫 번째 단편인 <오메라시로 돌아가는 사람들> 9p 부터 <여행이 다시 당신을 찾아옵니다> 276p까지. 별점 다섯 개다. 열개가 최대치라면 열개 다 줄 거야...



우리 모두가 우연으로 이 세계에 떨구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타자성으로 인해 저마다 깊은 상처를 입었다. 우리는 모든 경계에 책임이 있고 우리에게는 재생이 필요하다. 황모과는 지금 경계에 귀 기울이고 책임에 대하여 쓰는 중이다. / p.294,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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