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절반 읻다 시인선 15
프리드리히 횔덜린 지음, 박술 옮김 / 읻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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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을 읽었다. 경이로운 찬가가 가득했고 자연을 노래하고, 가끔 너무나 독일인스러운 시를 쓴다는 감상을 태연히 하며 옮긴이 해제를 보는데 ‘오늘날까지도 횔덜린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것은 ‘미쳐버린 시인’이라는 수식어다.(p.327)’을 읽고 너무 놀랐기 때문이다. 심지어 수록 시의 절반 이상이 심한 광기에 빠진 이후에 쓰여졌다니. 다시 앞 장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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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광인의 글을 예술 작품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미학적 문제를 놓고 가장 큰 논란과 관심의 대상이 된 것 역시 이 시기의 작품들이다. 휠덜린은 전성기에 이미 정형시의 리듬과 구조와 고전적 상징 세계를 완벽하게 장악했던 만큼, 그러한 정형성이 차례로 해체되고, 파편화되며, 심연을 향해 과감히 기울어지고, 끝내 침묵과 교묘하게 섞여드는 언어로 화하는 과정은 유럽 현대시의 발전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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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더라도 그의 글이 그저 광인의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 이유는 내내 신을 노래하고 자연을 풍성하게 그려내고 있는 황금빛 시이기 때문이다. 마치 신의 계시와도 같은 시들에서는 비난보다는 찬미가, 절망보다는 희망이, 어둠보다는 빛이 느껴졌으므로. 배경을 알고 읽으니 자연스레 흐르는 계절에 따라 다채로운 옷을 입는 자연을 좁은 방의 창 밖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뒷통수가 보이는 듯 했다. 불멸의 자연과 필멸의 인간을 보면서 나는 이상하게도 내 마음의 시간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무할 수도 있지만 그래서 소중한 시간을 나를 갉아먹는 생각으로 보내고 있지 않나 하고.

 

다만 단어 하나하나를 따져보자면 쉽지 않은 시인 것은 틀림이 없다. 나도 뒤에 주석을 여러번 오가며 읽었는데, 그리스 신화라던가 여러 배경 지식을 알고 있다면 좀 더 수월히 이해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나는 중간부터 조오금 귀찮았던 탓에 시는 감성과 필이지 하면서 그냥 흐르듯 읽었지만… 신기하게도 이걸 읽었는데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고 싶어짐. 비단 이 시집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안 읽으면 유럽 운문들을 읽기 어려운 것 같아… 이젠 이것도 하나의 바이블인듯.





근심과 분노를 이기는 불멸의 기쁨이,

황금의 날이, 실은 매일의 끝에 있음을.


「디오티마를 잃은 메논의 비가」

 


좋지 않구나,

필멸의 생각들로

영혼을 버리는 것은. 허나

말을 나눔은 좋구나, 가슴에 

담아둔 것을 말하는 일, 사랑의

날들에 대해, 예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많이 듣는 일도 좋구나.


「추억」


 

미약한 것에도

크나큰 시작이 찾아올 수 있나니.


「그리스」


 

평야의 잎사귀들이 멀리 스러지면,

흰색은 골짜기로 떨어지네,

그럼에도 한낮은 높은 햇빛으로 반짝이고,

도시의 성문으로 축제의 빛은 쏟아지네.


이는 자연의 고요이니, 들판의 침묵은

사람의 정신과 같네, 드높이 드러나는

분별들, 이는 자연이 높은 상像으로

드러나기 위함이네, 봄의 부드러움 없이.


「겨울」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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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성별 - 가족은 어떻게 불평등을 재생산하는가 Philos Feminism 7
셀린 베시에르.시빌 골라크 지음, 이민경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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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적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 개념들, 즉 가구나 세대 같은 개념은 여남 간 부의 불평등을 알아내는 데 방해가 된다. 이 개념들은 여성의 빈곤을 드러내는 데에서 성별적 요인이 보이지 않게 하고, 여성들이 겪는 참상을 드러나지 않게 한다.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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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사람이 쓴 책이지만 핵심은 전세계가 공유한다.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가족. 결혼, 이혼, 상속 등 모든 사건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가난해진다는 것. 한국도 다르지 않다. 법적 제도와 관습으로도 남성에게 훨씬 유리하게 짜여져 있다. 반드시 장남, 장남이 없다면 딸이 있더라도 장손자에게 넘어갔던 제사주재자 (*2023년에 '아들에게 제사 주재 우선권이 있다'는 판례가 파기 되었다.), 성년 남자에게만 종중원 자격을 주고 여성에게는 부여하지 않았었던 관습법 등 여성은 각종 지위와 상속에 있어 훨씬 불리하다. 

이런 재산 분배의 과정에서만 불평등한가? 집안 어른이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에서 사진을 드는 것은 아들이다. 더 연장자인 딸이 있더라도, 아들이 초등학생이라도 아들이 들어야 한다. 아들이 안된다면 다른 사촌이 든다 (와중에 외손자는 안됨). 장례식만 그런가, 병원에서도 법원에서도 엄마와 딸이 있으면 아들 찾는다. 우리 집은 제사를 지내는 집이라 이 부분도 할말이 많다. 솔직히 뒤에서 궂은 일은 딸이 다 하는데 명분과 감투는 아들이 챙겨가는 관습이 치가 떨리게 싫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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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자본의 성별은 단호하게 남성이라 말할 수 있다.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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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쌓여 첫문단이 길어졌지만 이 책이 말하는 바 역시 비슷하다. 가족 내 불평등을 수치로 증명해낸다. 단순 경험담이 아니라 치밀한 연구와 수치로 여성의 빈곤을 밝혀낸다. ‘가족인데 무슨 성차별이야’라는 말로 빠져나갈 수 없다. 가업은 장남이 잇고 결혼하면 보통 남성 쪽으로 편입되며 이혼하면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더 가난해진다.’(p.54)

‘우리 집에 돈이 얼마나 있다고 상속이 중요한가 일을 해서 모으는 게 중요하지‘라고 생각한다면 첫째로 여성은 일할 기회와 노동 가치가 남성과 같지 않으며, 둘째로 현재는 노동 수익률보다 상속에 의한 자본 수익률이 훨씬 높은데 와중에 남성만큼 받지도 못한다는 것은 자본 축적에 있어 스타트라인이 다르다는 것을 증명한다.


여성은 불평등을 알고 있다. 오랜기간 지속해 왔다 하여 모르는 것이 아니다. 이 책에 나오는 필롱 가족의 딸들 역시 인식하고 있고 불만을 가지고 있다. 다만 화를 내고 싶지 않아서, 나만 참으면 되는 일이므로 넘어가고 있었을 뿐이다. 다른 여성들도 참고 살고 있으니까. 그러나 참아왔던 작은 일들이 모여 전체적인 여성의 빈곤을 낳는다. 개인의 희생은 침묵 속 불만으로 끝나고 그렇게 넘어갔던 많은 일들이 관습이 되어 제도적으로 얽매고 있다.

저자는 ‘사법의 개입이 불평등을 거의 해결해주지 않는다(p.307)’고 한다. 동의한다. 사법은 불평등의 해결책이 아니다. 그러나 기울어진 운동장을 견고히 해주는 받침이 된다. 차별의 당연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가 된다. 계급 불평등의 해결 · 성별을 뒤집는 일은 말로만 해서 오지 않는다. 위치에 대한 인지가 첫 걸음이며 다양한 법과 제도적 지원이 받쳐주어야 한다. 상대의 저항을 누를 수 있는 어느 정도의 강제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각종 차별로 가득한 사회 속 오아시스처럼 느껴진 가족 내에서 시작되는 불평등을 다시금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 책이다. 성별간 부의 불평등에 관련된 이야기는 있었으나 이 성별을 가져와 가족 안으로 집어넣어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부분에서부터 조명한 책은 없었다.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이자 인간이 가장 처음 속하는 집단인 가족에서부터 시작하는 차별을 알아야 큰 맥락을 볼 수 있다. 이 책이 그런 의미에서 널리 읽혔으면 좋겠다.




+서민들은 상속을 받고 부자들은 생전 증여를 받는다는 차이도 재미있는 점이었음. 미디어에 나오는 재벌들이 너무 당연하게 회사나 자본을 물려받아서 감각이 무뎌졌다고 생각하는데, 회사의 경영진이 가족 본위로 꾸려진다는 것은 능력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진짜 이상한 점이 아닌가.


++ 와중에 양육비 안주려고 애쓰는 남편은 국적불문…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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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자 씨, 지금 무슨 생각하세요? - 노년의 심리를 이해하는 112개 키워드
사토 신이치 지음, 우윤식 옮김 / 한겨레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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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좋았다'고 과거를 회상하는 고령자 씨가 있다면, 추억을 바꾸어 기억함으로써 심리적인 안정을 얻으려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지켜봐 주자.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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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일하던 곳이 종각에 있었다. 퇴근길에 탑골공원이 있었는데 그 곳에 있던 많은 고령자들이 생각이 난다. 앉아서 사람 구경을 하시는 분들, 옛날 노래가 나오는 카세트 테이프를 파는 노점 옆에 앉아 음악을 들으시거나 바닥에 누워계신다거나. 제각기의 행동은 달랐지만 표정이 없었다는 점은 모두 동일했다. 사람들이 참 많았는데 그렇게 무기질적인 공간도 없었다. 그 곳을 지나다닐 때마다 나는 눈이라도 마주칠까, 누가 말을 걸까 불편한 마음으로 빠른 걸음을 걸었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와중 그 곳만은 시간이 멈춘 듯 했다. 늘어가는 키오스크와 그들의 존재를 배제하는 노시니어존의 등장이 아마 그 사람들을 집안이나 공원으로 내몰았을 것이다. 비단 세태만을 탓할 일도 아니다. 나도 뉴스를 보면서,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밖을 걸어다니면서 그들을 향해 작지만 분명 형태를 갖춘 분노와 답답함을 느껴본 적이 있다.


노인들은 왜 고집이 셀까

갑작스러운 상황에 빠르게 대처하지도 못하면서 왜 운전대를 놓지 못할까

사기꾼에게 왜 저렇게 잘 속을까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사람들을 밀치면서 다니는 이유는 뭘까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신체 능력과 인지 기능의 저하. 그리고 대다수의 일이 '자기 효능감'과 '부모로서 의지가 되어주고 싶은 마음'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이 슬펐다. 고령자들도 몇 년 전에는 분명 당당한 사회 구성원이자 든든한 부모였을텐데, 그렇게 살다보니 훌쩍 나이가 들고 세상을 따라가기 힘이 부치고 자식에게 기대어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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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육아가 끝난 고령자 씨는 자신이 가족과 사회에 힘이 되고 있다는 실감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부모로서 자식들의 일에 신경을 쓰고 행복을 바라는 마음은 변함없습니다. 그런 부모의 마음을 악용하는 것이 바로 보이스 피싱 사기입니다. '돈을 내 주는 것 말고는 도울 수 있는 게 없다', '힘들어하는 우리 아이를 구하고 싶다'는 부모의 마음을 이용하는 범죄입니다.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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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고령자들에 대한 이해와 안타까움이 모든 사건사고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이해를 기반으로 많은 법적 정비나 돌봄 시스템, 사회적 제도 등이 구체적으로 받쳐주어야 한다. 고령자들이 혼자서도 외롭지 않고 충분히 긍정적인 마음과 자존감 · 자기 효능감을 느낄 수 있도록.

돌봄이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다. 고령자와 함께 사는 일은 피할 수 없고, 노년으로 가는 길은 필연이다. 고령자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은 후의 내가 제대로 이해받고 필요한 돌봄을 받는 길이므로 타인의 일이 아니다. 세대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한국 사회에서 두루 읽힌다면 좋겠다.


고령자들의 내일이 더 활기차기를, 이 사회가 미숙한 아이들을 배려하듯 조금만이라도 고령자들의 마음을 생각해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냥 나이가 들어가는 부모님을 이해하고 싶어서 가볍게 들었는데 이 책 읽고 훌쩍거리는 거 나뿐일듯... 

++ 종각에 다녔었을 때 마침 미스트롯을 했었다. 그 방송 이후 많은 분들이 송가인의 노래를 부르며 활기차게 얘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게 참 생기 넘치고 즐거워보였다. 그저 새로이 집중하고 애정을 쏟을 존재가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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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자기 평가가 높은 사람이었더라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나이가 들면서 신체 능력과 인지 기능은 쇠퇴하기 마련이며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도 늘어납니다. 자신의 유능감과 할 수 없어진 일에 대한 실망감의 간극이 클수록 스트레스를 느끼기 쉽습니다. (p.124)


▪︎그러나 상대방을 배려하는 친밀한 사이일수록 권력관계에 불균형이 있으면 이를 고통스럽게 느끼는 법입니다. 가족만이 늙은 부모의 모든 것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에는 처음부터 무리가 있습니다. (p.192)


▪︎일본에서도 이 사고방식에 근거해 돌봄이란 '자립 지원'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립할 수 없으니까 돌봄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누구든지 안심하고 도움을 받는 것이 가능한 사회,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진정 이상적인 사회가 아닐까요?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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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도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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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어린 원도가 보는 앞에서 자살한 '죽은 아버지'

그 아버지가 사라지고 엄마와 살고 있는 '산 아버지' 그리고 바깥의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손을 뻗느라 정작 아들에게는 소홀했던 '엄마'와 엄마가 데려온 예의바르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장민석'. 이 넷은 원도의 삶 전반을 쥐고 흔든다.


이야기는 불친절하다. 사건과 서사는 부족하고 읽는 내내 날 것으로 쏟아지는 원도의 어두운 감정은 마치 폭력과도 같다. 원도는 내내 증오하고 미워한다. 꼬인 삶의 실타래를 따라가다 분노를 발견하고, 삶의 동력과도 마찬가지였던 질투와 열등감 그 기저에는 사랑받고 싶다는 열망이 끓고 있다. '엄마 아니면 그 무엇도 아니'므로, 그는 언제나 채워져 본적이 없다. 만족스러운 적이 없었다. 항상 결핍되었다.

시커멓게 비워진 구멍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지도 못한채 타인의 시선과 인정을 게걸스레 먹어치우고도 부족하여 원도에게 많은 것을 원하게 했다. 결국 그 탐욕이 원도의 상황을 벼랑으로 몰아갔음에도 그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모든 일은 남의 탓 같고, 내 앞에서 죽어버린 아버지 탓 같고, 내게는 그러지 않았으면서 장민석의 등교길을 배웅하며 웃어주던 어머니 탓 같고, 응당 내 것이었어야 했을 부모의 사랑을 가져가버린 장민석의 탓 같고.


'이런 인물이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은가.'


원도가 소설 내내 하고 있는 질문은 죽기 위해 과오를 돌이켜보는 질문이 아니다.

왜 죽지 않았는가, 왜 살고 있는가, 이 질문을 하는 나는 무엇인가, 받는 너는 무엇인가, 숨 쉴 틈도 없이 질문이 몰아친다. 결국 모든 게 삶의 의미를 찾는 여정이다. 죽기 위해 답을 찾는가, 살기 위해 묻는가.

원도의 질문들에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발이 꼬여 넘어지는 기분이었지만 그렇게 침잠하다 보면 선명해진다. 이 질문이 향하는 곳은 원도가 아니라 나라는 것을. 나는, 그리고 당신은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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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는가.

이것은 원도의 질문이 아니다.

왜 죽지 않았는가.

이것 역시 아니다.

그것을 묻는 당신은 누구인가.

이것이다.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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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
은유 지음 / 읻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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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시는 번역하기 어렵죠. 시는 어쨌든 언어를 극한으로 밀어붙이고, 특별히 이해받고 싶어 하지 않는 경험을 만드는 장르니까 더 어렵죠. 근데 우리가 소통을 할 때 오해를 감수하고 말하는 것처럼 시 번역도 그냥 사람이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일 중에 하나 아닌가 싶어요. 그걸로 누군가랑 이어질 수 있다면, 그걸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랑 만날 수 있다면... 저는 번역을 할 때 그 독자들한테 애정을 보내는 느낌이에요. (p.47)


시 번역가들과의 인터뷰를 은유 작가님의 목소리로 엮어낸 산문.


번역가들의 인터뷰가 그리 특별할까 가볍게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어느 장르든 그렇겠지만 특히 시 번역은 녹록치 않은 일일 것이다. 모국어로 된 시를 오롯이 즐기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들은 외국어로 단어를 다시 바꾸고 재조립하여 시인의 이야기가 훼손되지 않도록, 타국의 사람들에게도 그 세계가 전달되기를 바라며 시간과 정성을 쏟아낸다. 시를 사랑하니까. 순수한 것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묵묵히 하고 싶은 것을, 사랑하는 것을 마주 보며 걸어가는 사람들의 언어에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잔잔한 파동이 있다.


번역가들의 인터뷰를 통해 이 분들이 현재 집중하고 있는 키워드, 그 개인을 넘어 세계적으로 관심이 몰리는 주제가 '소수자들의 목소리'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순 퀴어의 이야기가 아니라 장애인, 트랜스, 여성 등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의 작은 목소리를 반영한 글. 그리고 그들을 폄하하지 않는 글.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도 이런 부분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기. 번역가들의 세심하면서도 날카롭게 문장을 벼리는 작업은 평소에도 대단하다 생각했지만, 안톤 허의 인터뷰를 보며 번역가들이 그 이상의 많은 일을 혼자 하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작품 번역권 알아보기, 출판사와의 컨택, 영미권 출판사 섭외 등 그냥 걸어다니는 1인 기업처럼 적극적으로 외부의 일도 해야한다는 점이 놀라우면서도 이들을 지원하고 보조할 시스템이 마련되기 힘든걸까 생각했다.


페미니즘에 대한 안톤 허의 거침없는 인터뷰와(진짜 멋있음), 공동체를 강조하는 소제의 따뜻한 인터뷰(진짜 사랑스러움)는 특히 인상깊게 읽은 부분이다.


■ "자본주의는 우리가 희소성의 원칙에 얽매이길 바라고 공동체를 이루는 대신 경쟁하길 바란다."

"번역된 책이 재번역되고 재출간되려면 수십 년이 걸린다. 기후변화로 인해 지구적 재앙이 일어나기 전에 한국 시를 더 많이 읽을 수 있도록 <초과>를 만들었다."

"다른 번역가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걸 상기시켜 주고 싶었다."

"하나만 있을 때는 그 하나가 전체를 대표하게 된다." 등등. (p.106)


인터뷰 집이라고만 보기에는 작가님 특유의 분위기가 많이 녹아있다.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하는 것에 집중하며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시 읽는 법』에서도 그랬지만, 그런 사람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나는 이게 좋았어, 너도 좋아한다면 좋을 것 같은데. 절로 눈을 반짝이며 상대에게 설명하는 사람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 책도 사람과의 대화, 인터뷰 자체를 즐기는 모습이 보여 참 사랑스럽다. 게다가 중간에 삽입되어 있는 번역가들의 사진을 찍은 사람에게도 그런 것이 느껴진다. 흑백 사진 속에서 환히 웃는 번역가들의 모습이 너무 자연스럽고 반짝거린다. 사진은 사진가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반영된다던데, 찍는 분 역시 분명 그런 마음을 담아 셔터를 눌렀기 때문에 사진 속에서도 온기가 느껴지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순수한 것을 사랑하고 귀히 여기는 사람들의 마음이 보여서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까지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다.


■ 시인은 언어가 장난감인 어른이라는 것. (p.221)


+안톤 허와 은유 작가가 둘 다 애정하는 이성복 시인의 『무한화서』와 『남해금산』은 꼭 읽어봐야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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