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안경 - 위대한 철학자가 되어보는 체험형 철학입문
미요시 유키히코 지음, 송태욱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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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진이 이 글의 첫 서두가 될줄이야...)

 

예전에 내가 보고있는 사물에 관해서 내가 보는것이 "맞는 것인지" 꽤나 충격을 먹었던 일이 있었다.

 

왠만큼 인터넷 하는 사람들이면 모를 수 없는 사진이다. 이른바 '파검'이냐 '흰금' 또는 '흰검'이냐 논란을 불러일으킨 사진이다. 난 보자마자 파검이잖아?했었는데, 그 후에 주변 사람들 중  이건 '흰금' 또는 '흰검'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몇번을 봐도 파검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그렇게 보일 수 있냐고 물었었다. 그러자 되려 나에게  어떻게 저 드레스가 파란색 검은색이냐며 물어보았다. 하지만 둘 다 더이상 물음 외 대답은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서로 같은 사물을 보고 다른 색으로 보면서, 그렇게 보이게 된 "과정에 대한  설명" 은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파란색 검은색인걸 어떻게 설명을 하는가. 그냥 보기에 파란색이잖아? 라고밖에 말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은 이러한  "인식" 의 패러독스-자신의 눈을 자신의 눈으로 본다(하지만 불가능하다)-에서 시작한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똑같은 과정으로 상대방도 보고 있는 것인지, 내가 보는 저 파란색이 상대방이 인식하는 그 파란색과 같은 것인지, 이는 과학의 안경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리하여 "철학의 안경"을 쓰고 철학자의 시선으로 이러한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대해 차분하면서도 일목요연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패러독스와 그 다음장에서 설명하는 존재론의 패러독스-존재를 알기 위해서 존재가 아닌것, 즉 무를 알아야 한다(하지만 無라는 것도 결국 하나의 존재로서 존재한다, 언급한 순간 존재가 되는 것 )-을 설명한다.

 

이 두가지 패러독스는, 사실 여기서 쉽게 설명한 것이지만, 철학이 시작된 때로부터 지금까지도 패러독스로서 풀지 못하는 난제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한 패러독스를 단 2챕터로 설명되었다는 것은 가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그 뒤 철학에서는 이러한 두가지 난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사후의 말" - 존재론의 패러독스를 넘어서기 위한 無를 초경험적 존재로서의 神과 인식론의 패러독스를 넘어서기 위한 무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인식 의 종점으로서의 사후 의식-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러한 패러독스를 넘어서기 위해 "가정" 했던 "사후세계""신" 으로부터 종교가 발생하고, 그 종교에서 "도덕"이 발생했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점에서 흥미를 가질 수 있었다.

 

종교에서 도덕이 발생하였다는 점과, 또 일본에서는 종교가 크게 도덕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오히려 일본 고유 문화인 무사정신에서 "수치의 도덕"이 발생했다는 점에서도 한국 독자에게는 또 다른 시사점을 안겨주고 있다.

같은 동양권 문화에서 우리는 무사도보다는 문인정신이 가득했던 사회에서, 어떠한 논리로 도덕을 습득하고 체화했는지 (종교가 국내로 들어오기 전), 이는 또 다른 생각할거리로서, 한 번 탐구해봄직한 주제일 것이다.

 

또한 과학이 "신의 시점"에서 -이는 사후세계의 시점과도 같다- 세계의, 자연의 모든 것을 대상화 시켰다는 시각 또한 과학은 마치 종교와 대척점에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나에게 또 다른 깨우침을 주었다. 과학이란 신학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신의 정통 적자라는 표현에서 무릎을 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시야를 나에게 보여준 것이다.

 

 

책은 처음에 인식론의 패러독스, 존재론의 패러독스에서 나아가 죽음, 과학, 종교등을 넘나들며 여러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이야기들의 중심 축(Core)인 아이덴티티(Identity)로 이 모든 이야기들을 통합시킨다.

 

일상에서 "왜그렇지?" 라고  생각했지만, 섣불리 대답하기 어려웠던 부분을 이 책에서는 다양한 설명과, 그러한 대답할 수 없었던 철학의 난제들을 쉽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듯이 보여줌으로서 거부감 없이 철학의 중심 주제에 접근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틈틈이 나오는 니체, 하이데거, 칸트 ,파스칼, 키에르케고르  등등을 접하며 좀 더 심도있는 철학을 읽고 싶다면, 여기에 언급된 작품을 접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양한 철학자를 부담없도록 접할 수 있게 한 점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읽을 독자들도 나와 같은 "인식"을 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같은 감정을 공유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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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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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턴
첫 마디가 패턴으로 시작했다. 소설에서 패턴이란 용어가 쓰이다니, 소설은 오히려 패턴에서 벗어나야 하는 장르 아니던가

하지만 읽고나면 그 패턴은 우리가 생각한 그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패턴'은 여기선 '루틴(routine)'이라 불릴 수 있다,
나는 루틴을 벗어나고 싶었고, 여기서 그남자가 선택한건 루틴아닌 패턴이었다.
그래서 이 소설이 마음에 들었다.



이 소설은 불친절하다.
불친절하다는 뜻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 예고도 없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고 또한 화자도 남자에서 여자, 아주머니로 바뀐다.


하지만 이러한 불친절에도 오히려 더 흡입력이 있다는건 작가의 역량을 가늠해 볼 수 있는 하나의 발견이었다.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어제 밤 열한시에 읽어서 출근길에도 퇴근길에도 읽었다. 그리고 딱 집 앞에 선 순간 다 읽었는데 , 정말 그 읽고나서의 감정은 여러가지 복합적인, 오묘함이었다.
슬프기도 했고, 먹먹하기도 했고 또 원망감도 들었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음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기분상함.


이 소설에서 주요 테마였던 남자의 속죄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복수가 복수를 낳는 그 연결고리들을 어떻게 속죄로서 마감할 수 있을까. 이 부분이 궁금했는데, 생각지 못한 부분으로 유도함으로써 더 나를 집중하게 만들었다.


학교 폭력으로 인하여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 남자와, 살해당한 피해자(이자 가해자)의 어머니인 아주머니, 그리고 그런 남자를 사랑했던 여자. 세 인물들의 시점에서 입장에서 서술되는 이야기의 흐름은 지루하지 않게 그리고 각자의 입장을 이해할 수 밖에 없게끔 만들어서 어떠한 결말을 낼지 예측하기 어렵게 하였다.
그렇지만 이걸 여기선 패턴이라 부른다.

남자가 말하는 우주 알이 진짠지 거짓인지 나는 모른다. 사실 읽어도 이 소설이 어느부분까지가 진실을 다루려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소설은 독자가 생각하고 상상할 부분을 꽤 많이 열어놨기에 난 내가 생각한대로 믿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 소설에 본질적인 흥미를 가졌었던 이유는, 내가 전부터 의문시 해왔던 부분을 여기서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시간의 연속성, 왜 항상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한 부분으로만 흐르는지, 그것을 거스를 방법은 없는지.. 개인적으로 타임리프에 관심이 많았기에 (대부분 내가 리뷰를 꽤 열심히 쓴 장르도 보면 타임리프 종류가 많다) 우주 알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작가는 여자의 말을 빌려서 이 소설을 로맨스로 만들고, 남자의 말을 빌려서 이 소설을 sf같은 요소로 만들었으며, 아주머니의 말을 빌려 죄와 속죄 그 근원과 해결점을 찾는 드라마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고, 또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초승달은 해가 뜬 다음에 떠서, 해가 지고 나서 조금 있다 져. 그때 볼 수 있는 거지. 그믐달은 해가 지기 전에 사라져

​이부분에서 나는 왠지 그 남자가 그믐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여자보다 먼저 있었고, 그 여자보다 십분 먼저 떠나는 . 해가 지기 전에 먼저 지는 그믐달 같아서..


인간이란 그 미술관에서 가이드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단체관람객같아. 정해진 방향으로, 정해진 속도로 움직이며 눈앞에 있는 그림에 집중해야 하지, 그 그림을 볼 수 있는 때는 그 순간밖에 없으니까.

그것도 미술관을 경험하는 하나의 방식이야. 그런 방법으로도 미술관에 있는 많은 그림들을 볼 수 있어 어떤 사람은 짧은 코스를 걸으면서도 알차게 작품을 감상할테고, 어떤 사람은 여러 전시관을 돌면서도 별 생각없이 작품들을 지나치겠지. (..중략..)



우주알은 그 단체관람객 무리에서 벗어나 혼자 움직일 수 있는 자유티켓 같은 거였어. 우주 알이 몸에 들어오면 좋아하는 그림 앞에서 한참 머물러 있을수도 있고 이미 지나친 조각품을 찾아 길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어. (..중략..)

물론 내게도 원인이 결과에 앞서야 한다는 인과율은 성립해. 내게 인과율은 이런식으로 작동해. 나는 미술관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만, 미술관의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는거야. 그건 내가 바꿀 수 없어 (중략) 이 미술관에서 <모나리자>를 보려면 이탈리아 그림들을 함께 봐야해. 이탈리아 그리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프랑스와 스페인 회화 컬렉션을 거쳐야 하고.



너는 <모나리자>같은 존재였어. 이 미술관에서 꼭 보아야 하는 그림.



나는 복권과 경마로 부자가 될수도 있었어 하지만 그런다면 네 곁에 머물 수 없었지 그런 인생은 <모나리자>에서 매표소나 카페테리아만큼 멀리 떨어져 있거든



고마워, 너랑 지내는 동안 정말 행복했어. 우주알을 받아들인 보람이 있었어.


이부분을 보고 나는 감탄을 했다. 아 삶의 연속성, 시간의 연속성을 저렇게 비유할 수 있구나. 그리고 남자의 여자에 대한 고백을 이렇게, 슬프지만 또 가슴떨리게도 할 수 있구나.

삶을 사는것은 한 방향으로 작품을 보는 전시회와 같다.
대신 이전 작품으로 돌아갈 수 없는.


우주알은 그러한 흐름을 거스를 수 있는 유일한 티켓이었는데 그걸 너를 보기위해 썼다는 것.

그 여자를 보기 위해서.. 그는 그 자신이 존재를 숨기기 위해 노력했었던 그 모든것들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이름을 바꿨지만 그 여자가 알 만한 소재의 소설을 써서 그 여자의 출판사로 보냈고, 그래서 아주머니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고, 숨어서 그냥 살 수 도 있었지만 그는 위험한 길을 택했다.

난 그부분이 너무 슬펐다. 모나리자를 보고싶으면 이탈리아 그림을 함께 보듯이.. 그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노력을 자신의 재능을 항상 좌절당해야 했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그리고 그렇게 마주친 아주머니에게 죄의식을 가진채로 항상 같이 해야 한다는 그 상황이 스스로에게 얼마나 큰 또 하나의 징벌이었을까.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이것이 잔인한 진실이라는 것도.
이것이 그남자의 패터이었다는 것도.


그남자의 패턴은 자유티켓을 쥐었음에도 한 방향으로밖에 갈 수 없는 한 인간의 일방적보다 더 일방적인 것이었다.
얼마나 아이러니 한가, 어디든 어느 시간이든 갈 수 있는 자유티켓을 쥐고도 그 여자를 만나기 위해 그 누구보다 한 방향으로 가는 남자라니.

가끔 지난 과거를 돌아보면

나는 비록 우주알은 가지지못했지만 ..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전시회장에 있는 사람이라도, 어떤 작품을 더 주의깊게 볼 것인지 ., 이 작품 앞에 서 있는 시간을 내 인생의 어느만큼 할애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러한 선택의 기로에서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실패의 경험이 다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했던 것이 최악의 상황을 불러왔던 적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되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결국엔 그 최악의 상황을 맞았던 그 선택을..다시 할 수 밖에 없고 또 후회가 없을 것이란걸 나는 알기에.

다시 되돌아가서 똑같이 힘들고 슬프고 억울해도. 나는 결국에 또 그 선택을 할 것임을 알기에 남자의 마음에 더 감정이입이 되었었다.

남자의 방식대로 속죄를 했고 결국 아주머니는 평안을 얻었지만, 남은 여자는 방 세개에 러시안블루 고양이를 키우며, 정말 그 남자의 말대로 되감을 느끼며 오히려 슬픔을 느끼지 않았을까.

정말 그 여자 말대로 여자는 그저 그남자가 자기 옆에 있길 바랬는데.
.

마지막 장이 그남자와 그 여자의 이야기로 채워진 것이 아닌, 아주머니와 불편하지만 함께 하는 그 모습으로 채워졌다는 것 또한 가슴이 먹먹했다. 서로 다른 입장이기에 서로를 이해하지만 서로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셋이 공존하는 모습이 애처로와서였다.
그러한 그들이 마지막을 본 것도 패턴이었다.



이 소설에 내가 주석을 많이 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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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턴
첫 마디가 패턴으로 시작했다. 소설에서 패턴이란 용어가 쓰이다니, 소설은 오히려 패턴에서 벗어나야 하는 장르 아니던가

하지만 읽고나면 그 패턴은 우리가 생각한 그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패턴'은 여기선 '루틴(routine)'이라 불릴 수 있다,
나는 루틴을 벗어나고 싶었고, 여기서 그남자가 선택한건 루틴아닌 패턴이었다.
그래서 이 소설이 마음에 들었다.



이 소설은 불친절하다.
불친절하다는 뜻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 예고도 없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고 또한 화자도 남자에서 여자, 아주머니로 바뀐다.


하지만 이러한 불친절에도 오히려 더 흡입력이 있다는건 작가의 역량을 가늠해 볼 수 있는 하나의 발견이었다.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어제 밤 열한시에 읽어서 출근길에도 퇴근길에도 읽었다. 그리고 딱 집 앞에 선 순간 다 읽었는데 , 정말 그 읽고나서의 감정은 여러가지 복합적인, 오묘함이었다.
슬프기도 했고, 먹먹하기도 했고 또 원망감도 들었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음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기분상함.


이 소설에서 주요 테마였던 남자의 속죄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복수가 복수를 낳는 그 연결고리들을 어떻게 속죄로서 마감할 수 있을까. 이 부분이 궁금했는데, 생각지 못한 부분으로 유도함으로써 더 나를 집중하게 만들었다.


학교 폭력으로 인하여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 남자와, 살해당한 피해자(이자 가해자)의 어머니인 아주머니, 그리고 그런 남자를 사랑했던 여자. 세 인물들의 시점에서 입장에서 서술되는 이야기의 흐름은 지루하지 않게 그리고 각자의 입장을 이해할 수 밖에 없게끔 만들어서 어떠한 결말을 낼지 예측하기 어렵게 하였다.
그렇지만 이걸 여기선 패턴이라 부른다.

남자가 말하는 우주 알이 진짠지 거짓인지 나는 모른다. 사실 읽어도 이 소설이 어느부분까지가 진실을 다루려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소설은 독자가 생각하고 상상할 부분을 꽤 많이 열어놨기에 난 내가 생각한대로 믿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 소설에 본질적인 흥미를 가졌었던 이유는, 내가 전부터 의문시 해왔던 부분을 여기서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시간의 연속성, 왜 항상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한 부분으로만 흐르는지, 그것을 거스를 방법은 없는지.. 개인적으로 타임리프에 관심이 많았기에 (대부분 내가 리뷰를 꽤 열심히 쓴 장르도 보면 타임리프 종류가 많다) 우주 알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작가는 여자의 말을 빌려서 이 소설을 로맨스로 만들고, 남자의 말을 빌려서 이 소설을 sf같은 요소로 만들었으며, 아주머니의 말을 빌려 죄와 속죄 그 근원과 해결점을 찾는 드라마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고, 또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초승달은 해가 뜬 다음에 떠서, 해가 지고 나서 조금 있다 져. 그때 볼 수 있는 거지. 그믐달은 해가 지기 전에 사라져

​이부분에서 나는 왠지 그 남자가 그믐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여자보다 먼저 있었고, 그 여자보다 십분 먼저 떠나는 . 해가 지기 전에 먼저 지는 그믐달 같아서..


인간이란 그 미술관에서 가이드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단체관람객같아. 정해진 방향으로, 정해진 속도로 움직이며 눈앞에 있는 그림에 집중해야 하지, 그 그림을 볼 수 있는 때는 그 순간밖에 없으니까.

그것도 미술관을 경험하는 하나의 방식이야. 그런 방법으로도 미술관에 있는 많은 그림들을 볼 수 있어 어떤 사람은 짧은 코스를 걸으면서도 알차게 작품을 감상할테고, 어떤 사람은 여러 전시관을 돌면서도 별 생각없이 작품들을 지나치겠지. (..중략..)



우주알은 그 단체관람객 무리에서 벗어나 혼자 움직일 수 있는 자유티켓 같은 거였어. 우주 알이 몸에 들어오면 좋아하는 그림 앞에서 한참 머물러 있을수도 있고 이미 지나친 조각품을 찾아 길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어. (..중략..)

물론 내게도 원인이 결과에 앞서야 한다는 인과율은 성립해. 내게 인과율은 이런식으로 작동해. 나는 미술관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만, 미술관의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는거야. 그건 내가 바꿀 수 없어 (중략) 이 미술관에서 <모나리자>를 보려면 이탈리아 그림들을 함께 봐야해. 이탈리아 그리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프랑스와 스페인 회화 컬렉션을 거쳐야 하고.



너는 <모나리자>같은 존재였어. 이 미술관에서 꼭 보아야 하는 그림.



나는 복권과 경마로 부자가 될수도 있었어 하지만 그런다면 네 곁에 머물 수 없었지 그런 인생은 <모나리자>에서 매표소나 카페테리아만큼 멀리 떨어져 있거든



고마워, 너랑 지내는 동안 정말 행복했어. 우주알을 받아들인 보람이 있었어.


이부분을 보고 나는 감탄을 했다. 아 삶의 연속성, 시간의 연속성을 저렇게 비유할 수 있구나. 그리고 남자의 여자에 대한 고백을 이렇게, 슬프지만 또 가슴떨리게도 할 수 있구나.

삶을 사는것은 한 방향으로 작품을 보는 전시회와 같다.
대신 이전 작품으로 돌아갈 수 없는.


우주알은 그러한 흐름을 거스를 수 있는 유일한 티켓이었는데 그걸 너를 보기위해 썼다는 것.

그 여자를 보기 위해서.. 그는 그 자신이 존재를 숨기기 위해 노력했었던 그 모든것들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이름을 바꿨지만 그 여자가 알 만한 소재의 소설을 써서 그 여자의 출판사로 보냈고, 그래서 아주머니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고, 숨어서 그냥 살 수 도 있었지만 그는 위험한 길을 택했다.

난 그부분이 너무 슬펐다. 모나리자를 보고싶으면 이탈리아 그림을 함께 보듯이.. 그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노력을 자신의 재능을 항상 좌절당해야 했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그리고 그렇게 마주친 아주머니에게 죄의식을 가진채로 항상 같이 해야 한다는 그 상황이 스스로에게 얼마나 큰 또 하나의 징벌이었을까.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이것이 잔인한 진실이라는 것도.
이것이 그남자의 패터이었다는 것도.


그남자의 패턴은 자유티켓을 쥐었음에도 한 방향으로밖에 갈 수 없는 한 인간의 일방적보다 더 일방적인 것이었다.
얼마나 아이러니 한가, 어디든 어느 시간이든 갈 수 있는 자유티켓을 쥐고도 그 여자를 만나기 위해 그 누구보다 한 방향으로 가는 남자라니.

가끔 지난 과거를 돌아보면

나는 비록 우주알은 가지지못했지만 ..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전시회장에 있는 사람이라도, 어떤 작품을 더 주의깊게 볼 것인지 ., 이 작품 앞에 서 있는 시간을 내 인생의 어느만큼 할애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러한 선택의 기로에서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실패의 경험이 다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했던 것이 최악의 상황을 불러왔던 적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되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결국엔 그 최악의 상황을 맞았던 그 선택을..다시 할 수 밖에 없고 또 후회가 없을 것이란걸 나는 알기에.

다시 되돌아가서 똑같이 힘들고 슬프고 억울해도. 나는 결국에 또 그 선택을 할 것임을 알기에 남자의 마음에 더 감정이입이 되었었다.

남자의 방식대로 속죄를 했고 결국 아주머니는 평안을 얻었지만, 남은 여자는 방 세개에 러시안블루 고양이를 키우며, 정말 그 남자의 말대로 되감을 느끼며 오히려 슬픔을 느끼지 않았을까.

정말 그 여자 말대로 여자는 그저 그남자가 자기 옆에 있길 바랬는데.
.

마지막 장이 그남자와 그 여자의 이야기로 채워진 것이 아닌, 아주머니와 불편하지만 함께 하는 그 모습으로 채워졌다는 것 또한 가슴이 먹먹했다. 서로 다른 입장이기에 서로를 이해하지만 서로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셋이 공존하는 모습이 애처로와서였다.
그러한 그들이 마지막을 본 것도 패턴이었다.



이 소설에 내가 주석을 많이 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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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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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예전부터 서점에 놓여있는 것을 몇 번 보았다.

꽤 많은 사람들이 그 주변을 서성거렸다. 하지만 나는 그 옆을 지나쳐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일부러였던 것 같다. 눈길은 항상 갔는데 의도적으로 눈길을 피했다.
제목이 마음에 안들었다.

한국이 싫어서


마음에 안들어.

저렇게 솔직해도 되는거야??

요즘 젊은 애들이 한국 싫다고 입이 닳도록 말하는걸 그대로 옮겨놓다니

너무 시대흐름에 편승하는거 아냐???


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눈길을 피했고, 매번 지나쳐갔다.

근데 어쨋든 나는 그 시대에서 살고 있었고 나도 그 시대의 젊은 애들이었다.
​가끔 외국으로 연수가는 친구들과 떠나기 전 만날때, 아니면 페이스북으로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친구들을 보며 묘한 감정이 들고는 했다.

부럽긴 한데, 정확히 무엇이 부러운지를 모르겠다.

현재 상황을 벗어나는 느낌이 부러운거였을까
앞으로 비단길만 놓여있는것도 아닌데
난 뭐가 부러웠던 걸까


여기서 주인공 계나는 3년차 금융회사에 다니던, 그래도 서울 소재 사립대학교를 나온, 하지만 금수저는 없어서 자립하는 평범한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한국이 싫어서` 단지 그 이유만으로 3년동안 모은 돈 2000만원을 가지고 호주로 떠난다.

내가 여기서 못살겠다고 생각하는건.....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 무슨 멸종되어야 할 동물같아. 추위도 너무 잘 타고, 뭘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것도 개뿔 없고, 그런 주제에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로워요. 직장은 통근 거리가 중요하다느니, 사는 곳 주변에 문화시설이 많았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일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느니 막 그런걸 따져

아프리카 초원 다큐멘터리에 만날 나와서 사자한테 잡아먹히는 동물 있잖아, 톰슨 가젤. 걔네들 보면 사자가 올 때 꼭 이상한데서 뛰다가 잡히는 애 하나씩 있다? 내가 걔같애. 남들 하는대로 하지 않고 여기는 그늘이 졌네, 저기는 풀이 질기네 어쩌네 하면서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있다가 표적이 되는거지.

하지만 내가 그런 가젤이라고 해서 사자가 오는데 가만히 서 있을 순 없잖아.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은 쳐봐야지. 그래서 내가 한국을 뜨게 된거야.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우는게 멋있다는 건 나도 아는데....그래서, 뭐 어떻게 해? 다른 동료 톰슨가젤들이랑 연대해서 사자랑 맞짱이라도 떠?

​이부분을 보고 안웃을 수가 없었다. 아니, 내 생활을 옮겨놓으셨어요? ㅋㅋㅋ 나도 보면 뭔가, 묘하게 튀어나와있는걸 나도 느끼는데,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네...ㅋㅋ
​나만 그런게 아니었구나, 어느새 정신차리고 보면 애들은 저만치 달려가고 있어 나는 뛰기 싫은데, 왜 굳이 뛰어야 하는거지? 뭐야 이상황, 무슨 설명이라도 해주고 뛰라고 말해 라고 외치고 싶은적이 한두번이 아닌데 그걸 이렇게 톰슨가젤에 잘 비유하다니, 역시 문장력 하나는 끝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서 일할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거 같아. 내가 어떤 조직의 부속품이 되어서 그 톱니바퀴가 되었다고 해도, 이 톱니바퀴가 어디에 끼어 있고 이 원이 어떻게 굴러가고 이 큰 수레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그런걸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난 내가 무슨 일을 왜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회사는 뭐하는 회사인지 모르겠고 온통 혼란스러웠달까. 아니 아예 알려고 하지도 않았지 중고생과 다름없었던 거 같아

(중략)

낮에 그 교육을 받으러 회사에 가자면 진짜 어디서 차라도 한 대 인도로 돌진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어. 차에 치여서 팔이나 다리라도 부러지면 좀 쉴 거 아냐

​아... 한국에서의 생활....뭐....누구나 느끼는게 아닐까. 누구나? 라고 말하기엔 너무 광범위한가. 그럼 적어도 나는 이라고 고쳐야겠다. 적어도 나는 느껴본 거니까.


여기서 계나는 지명이란 남자친구가 있는데 남자친구는 계나가 떠나던 때 기자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계나를 붙잡고 싶어했지만, 자신의 상황이 불안하기에 섣불리 단호히 잡을 수 없었던 지명

그가 그녀에게 말한 이야기는 호주가 생각보다 힘든 곳이다. 우리나라 행복지수 순위가 얼마나 높은지 아냐 이런류의 대화를 하며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노력을 한다

아니 난 우리나라 행복지수 순위가 몇 위고 하는 문제는 관심 없어. 내가 행복해지고 싶다고. 그런데 난 여기서는 행복해 질 수 없어.

이렇게 단호히 말하고 떠나는 그녀는 처음에 호주에 어학원에 있다가, 회계학 자격증을 따기 위해 대학원을 가게 된다.​ 그러면서 틈틈이 돈을 벌기위해 초밥집 , 음식점에서 일도 하고 좀 더 돈을 모으면서 셰어 하우스 부운영자까지 하게 된다.

그러면서 호주에서 그녀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많은 경험을 하게 되는데, 어떻게 보면 금융회사 다니며 지옥철을 눈물흘리며 다녔던 그때랑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다를게 없는 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호주에서의 생활을 서술할때는 한국에서의 태도와 매우 다르다는걸 느낄 수 있다.

그 이유는 뒤에 계속 보다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해 봤어. 나는 먹는거에 관심 이 많아서 맛있는 음식이랑 과자를 좋아하지. 또 술도 좋아해, 그러니까 식재료랑 술값이 싼 곳에서 사는게 좋아 그리고 공기가 따뜻하고 햇볕이 잘 드는 동네가 좋아. 또 주변 사람들이 많이 웃고 표정이 밝은 걸 보면 기분이 좋아져. 매일 화내거나 불안해 하는 얼굴들을 보면서 살고 싶지 않아.
그런데 그게 전부야 그 외에는 딱히 이걸 꼭 하고싶다든 가 그런건 없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아는건 `무엇을` 이 아니라 `어떻게` 쪽이야 ​일단 난 매일매일 웃으면서 살고 싶어.

(중략)

그록 나는 당당하게 살고 싶어. 물건 팔면서 아니면 손님 대하면서 얼마든지 고개 숙일 수 있지. 하지ㅏㄴ 그 이상으로 내 자존심이랄까 존엄성이랄까 그런것까지 팔고 싶지는 않아. 난 내가 누구를 부리게 되거나 접대를 받는 처지가 되어도 그 사람 자존심은 배려해줄거야. 자존시 지켜주면서도 일 엄격하게 시킬 수 있어 또 여유가 생기면 사회를 위해 작더라도 뭔가 봉사를 하고싶어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자주 접하는 얼굴들이 화내거나 불안해하는 얼굴, 그리고 피곤해하는 얼굴이 아니었을까. 모두가 너무 피곤하니 예민해지고 그러다 보니 상처를 서로 준다. 그게 일상화되면 거기에 상처받는 사람이 바보가 된다. 그정도는 무뎌져야 하잖아?라고 생각하는 사회분위기가 계나한텐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존엄성, 자존심 이야기- 이것도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지켜지기 힘든 하나의 것이 아니었나 싶다. 여성으로서 직장인으로서 존엄성? 자존심? 이런건 사실 가져봐야 불필요한 것들 1순위가 아닌가. 오히려 갖고 있으면 상처만 더 받고 정만 더 맞고, 모난 돌이 되어버리고.. 여기서 보면 호주에서는 상사가 밑에 사람에게 일은 시키되, 그 시키는것을 요구하고 그에 대한 결과물이 돌아오면 끝인 것이 많은데, 우리나라는 아무래도 그 이상의 무엇을 항상 해야만 한다. 그렇게 3년을 버티다가 나간 계나는 , 아무래도 거기에서 많은 것을 느낀 것 같다.

​국외자라는게 참 서럽구나, 그런 생각을 했고 나는 이곳에서는 평생 국외자게쑥나, 그런 체념도 했지. 그런데 난 한국에서도 국외자였어.

나더러 왜 조국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하던데, 조국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거든. 솔직히 나라는 존재에 무관심했잖아? 나라가 나를 먹여주고 입혀주고 지켜줬다고 하는데 나도 법지키고 교육받고 세금내고 할건 다 했어

내 고국은 자기 자신을 사랑했지. 대한민국이라는 그 나라 자체를 . 그래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 줄 구성원을 아꼈지, 김연아라든가 삼성전자라든가, 그리고 못난 사람들한테는 주로 `나라망신`이라는 딱지를 붙여줬어.​

그녀에게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너무나 견고해져버렸다. 그녀는 확실히 어느 나라도 선택하지 않는 제 3자가 되었다, 우리에게도 저 구절은 어느정도 느낄 점이 있는 부분이 아닐까. 이 책이 인기있고 지지를 많이 얻는건 이 책의 기본 주제에 다들 공감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밥을 먹는동안 나는 행복도 돈과 같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
행복에도 `자산성 행복`과 `현금 흐름성 행복`이 있는거야.

어떤 행복은 뭔가를 성취하는데서 오는거야. 그러면 그걸 성취했다는 기억이 계속 남아서 오랫동안 조금 행복하게 만들어 줘. 그게 자산성 행복이야. 어떤 사람은 그런 행복 자산의 이자가 되게 높아. 지명이가 그런 예야. `내가 난관을 뚫고 기자가 되었다` 는 기억에서 매일 행복감이 조금씩 흘러나와. 그래서 늦게까지 일하고 몸이 녹초가 되어도 남들보다 잘 버틸 수 있는거야.

어떤 사람은 정반대지. 이런 사람들은 행복의 금리가 낮아서, 행복 자산에서 이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아. 이런 사람은 현금 흐름성 행복을 많이 창출해야 돼. 그게 엘리야. 걔는 정말 순간순간을 살았지.

(중략)

나는 지명이도 엘리도 아니야. 나한테는 자산성 행복도 중요하고 현금흐름성 행복도 중요해 그런데 나는 한국에서 나한테 필요한 만큼 현금흐름성 행복을 창출하기가 어려웠어 나도 본능적으로 알았던 거지. 나는 이 나라 사람들 평균 수준의 행복 흐름 으로는 살기 어렵다, 매일 한끼만 먹고 살라는거나 마찬가지다 하는걸

(중략)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 이렇지 않나. 자기 행복을 아끼다 못해 어디 깊은 곳에 꽁꽁 싸놓지 그리고 자기 행복이 아닌 남의 불행을 원동력 삼아 하루하루를 버티는거야. 집 사느라 빚 잔뜩지고 현금이 없어서 절절 매는거랑 똑같지 뭐.​



​어떤 책보다 이렇게 행복을 잘 설명해줄 수 없다.

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되돌아보았다.

분명 나는 현금흐름성 행복이 강한 사람이다. 나는 과정에서 행복하지 않으면 결과가 무엇이든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제일 싫어하는 말이 `참고 견디면 나중에 행복해진다` 이다. 미래의 행복을, 언제 올지도 모를 그 날을 위해 현재 행복을 다 포기하라는 말이 제일 싫다
하지만 한국은 이러한 현금 자산성 행복보다는 자산성 행복을 더 당연하게 생각하고, 여기에 끼워맞추라고 강요한다. 현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미래를 생각 안하는 생각없는 사람으로 낙인찍는다.

그런게 싫어서 떠난게 아닐까 계나는.


그녀는 한국에 돌아와 잠시 지명과의 미래를 생각해보다 다시 호주로 떠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되뇌인다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거야. 라고


​정말 한 두세시간 집중해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남 얘기가 아닌거같아서
마지막에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충만한 채로 호주에 도착하는 ​모습이 부러웠다.


나도 나 자신에게 그렇게 명확하게 말하는 날이 왔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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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만 해도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비겁하게도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그런 이상한 오만으로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렸지만."

"순결한 꿈은 오로지 이 일을 즐기며 할 수 있는 재능있는 이들의 것이었다.
그리고 영광도 그들의 것이 되어야만 했다.
영화는, 예술은 범인의 노력이 아니라 타고난 자들의 노력 속에서만 그 진짜 얼굴을 드러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재능이 없는 이들이 꿈이라는 허울을 잡기 시작하는 순간, 그 허울은 천천히 삶을 좀먹어간다."

"시나리오를 쓸 때는 하루 웃었다 하루 울었다 했다. 하루는 글이 잘써진다고, 이만하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다가 다음날에는 전날 쓴 글을 버리고 다시는 글을 쓸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꾸준히 써야 한다고들 말했다. 적어도 오 년을 꾸준히 썼지만 글이 늘지 않았다. 평생을 써도 아무 의미 없는 장면들만 만들어내리라는 공포가 근육을 굳게 했다."

나는, 책을 곱게 펴서 내 얼굴위에 얹었다. 보는 순간 흐르는 눈물을 참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예술의 진짜 얼굴을 보고싶었다. 나도.
하지만 볼 수 없었고, 꿈도 꾸지 못했다. 범인의 노력으로 될 수 없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더욱 더 비참한 건, 예술의 진짜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처음엔 아쉬웠는데, 조금 지나니 예술의 진짜 얼굴을 볼 자격이 있는 천재적인 사람에 대해서, 그냥 덤덤히 인정하게 되는 것이었다.
스스로에게 말했다. 정말 이젠 이게 아닌거구나..

예술의 열매는 누구에게나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쇼코의 미소에서 작가를 본다.
작가의 말에서 스스로 힘들었다고 작가는 고백했다. 그 시간동안 그도 아마 이런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이 소설로 젊은작가상을 수상하기까지 , 그 인내의 시간동안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의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나아가고, 절박하게 매달리고.. 그 과정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 이 글귀에 숨겨놓은것이 아닐까. 자기 마음을.

"미스터 김이 너에 대해서 얼마나 자랑을 했는지 몰라. 네가 만든 영화가 상영된 영화제에 다녀왔던 이야기도 쓰셨어"

신기하게도, 미스터김(주인공의 할아버지)와 쇼코, 주인공은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했다. 거짓말로 서로의 사정을 숨겼고, 서로의 아픔을 묻어버렸지만, 오히려 더 진실한 마음이 드러났다. 곳곳에서
솔직하지 못함에도 더 진실해서 슬펐던 , 그래서 서늘하지만 끝은 미묘하게 슬픈 쇼코의 미소였다.

"선배는 말할 때 감정이 배어나오는 나약한 습관을 고치고 싶다고 말했었다. 마음이 약해질 때 목소리가 떨리는 버릇, 사람들과 잘 섞이지 못하는 성격, 느리게 걷고 느리게 먹고 느리게 읽는 기질, 둔한 운동신경,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백 가지 의미를 찾아내 되새김질하는 예민함 같은 것들을 선배는 부끄러워했다. 그런 약점들을 이겨내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선배가 생각했던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선배가 스스로 약점이라고 여겼던 것들을 사랑했고, 무엇보다도 그것들 덕분에 자주 웃었다."

"잘 가요, 선배. 나는 언젠가 횡단보도 앞에 서서 어떻게든 눈물을 참으려던 선배의 얼굴을 떠올렸고, 선배를 보내고 나 또한 그 얼굴로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대한 무미건조한 인간이 되기를 바랐던 마음도."

미진선배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그 시간을 보내게 되면서, 선배가 러시아 유학시절 룸메이트였던 율라를 만나고 선배 이야기를 하면서, 소은은 어느샌가 선배와 같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학생운동 노래패의 전통을 중요시 한다는 명목 아래 "우리때는 후배가 마음에 안 들면 세워놓고 빠따로 두들겨 팼어. 그게 다 교육이었지" 라고 소은에게 충고하는 변리사 선배의 말에 "지랄" 이라는 대사로 미진 선배는 소은에게 첫 인상을 남기게 된다.

노래패의 학생운동의 전통을 끊었다고 비난받는 선배, 하지만 그러한 선배도 그 당시엔 스물 다섯의 어린 여자아이에 불과했고, 그 비난을 감당하기엔 여렸다. 그리고 소은은 그런 선배가 좋았다. 진심을 다 담아 전하지 못해 뒤늦게 러시아 땅을 밟게 되었지만.

"이십대 초반에 엄마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든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만난 인연들처럼 솔직하고 정직하게 대할 수 있는 얼굴들이 아직도 엄마의 인생에 많이 남아있으리라고 막연하게 기대했다. 하지만 어떤 인연도 잃어버린 인연을 대체해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났다.
어느 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첫 장조차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생의 한 시점에서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그 빗장 바깥에서 서로에게 절대로 상처를 입히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 같이 계를 하고 부부동반 여행을 가고 등산을 했다. 스무살 때로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그때는 뭘 모르지 않았냐고 이야기 하면서."

"엄마가 이모를 부담스러워 했다는 사실은 이모를 아프게 했지만 그만큼이나 엄마 역시 오래도록 아프게 했다. 지금도 엄마는 엄마가 어떻게 순애 이모를 저버릴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한다.
자신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큰 고통을 겪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가 왜 그리도 어려웠는지 엄마는 생각한다.
크게 싸우고 헤어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주 조금씩 멀어져서 더이상 볼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더 오래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후자다."

상대방의 어둠이 너무 짙어지면 그 어둠을 나눠갖지 못하는 이상, 부담감 혹은 비슷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 최대한 상대에게 많은걸 베풀고 싶고 도와주고 싶지만 한계가 있음을 느낄 때 , 스스로에게도 이는 상처가 되어버린다. 결국 그 관계는 시들해지고, 멀어지고 소원해진다.

그리고 마음에 아주 오래오래 남아서 그 때 내가 좀 더 손을 내밀었으면 달라졌을까 그때 무작정 뒤돌아버린 나는 나쁜 사람이었던건가 자책하고, 그러다가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합리화를 하고 , 그런 모습에 다시 실망을 하고, 그렇게 인생의 오랜 시간동안 생각하면서 천천히 그 인생의 일정부분을 상대에게 떼어줄 수밖에 없는. 그런 인연이 있다.

어렸을때 그토록 빛나던 언니가, 사회의 흐름에 적응, 혹은 부적응하면서 그리고 원치않는 고통을 얻게 되면서 점차 바래지고, 예전의 모습이 사라지고, 같이 한 장소에 있기조차 버거워진 모습으로 마주하게 되면서 이를 외면했던 엄마의 이야기.

아직 이 글 속의 엄마의 나이까지 되보지 못했기에, 이런 인연을 겪어보지도, 알지도 못하지만.. 소설을읽다보면 어느샌가 열여섯 시절의 순애언니가 아무것도 모르는 말간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느낌이 들어부끄러움이 느껴진다. 나도 모르게 나 자신도 마음의 빗장을 걸어잠그고, 전혀 상처받지 않을 상대들과 함께 하며 어디엔가 있을 순애언니를 무의식적으로 밀어낸것은 아닐까.


쇼코의 미소 뿐만 아니라 이 책 안에 있는 다른 단편들도 보면, 화자가 모두 여자로서,(생각해보니 장강명 외에 자신의 본래 성이 아닌 반대의 성별을 주인공으로 쓴 사람은 본 적 없는것 같다) 섬세하게 심리의 변화를 그리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잘 풀어내고 있다.

기본적으로 같이 사는 가족과의 관계에서부터 , 선배, 이모, 교환학생으로 알게 된 일본 여자아이, 나이로비 출신의 남자, 엄마, 할머니, 손녀 등..

다양한 이야기와 다양한 슬픔이 담겨있지만 공통적인 점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빚어내는 아픈 순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시니컬하거나, 객관적이라기 보다, 좀 더 따뜻하고 조금은 처연한 ,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파는 아닌 , 현대적이면서도 과거의 한국소설을 조금씩 담아놓은 느낌이었다.

요즘들어 허무주의이거나 시니컬하거나, 결국엔 답이 없다는 점을 열린 결말로 내놓은 현대소설이 많은데, 그 중 이 소설은 그런 열린결말을 허무함이 아니라 좀 더 애틋함을 담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모든 관계에 있어서 중요함을 알게되는 시점은 왜 그 관계가 끝나고 나서일까.

그 과정을 잘 담아내고 있는 이 소설은 두고두고, 다시 보게 될 것 같다.
아직도 그 주인공들의 마음의 잔물결이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아서 파동으로 일렁이는 듯하다.
오랜만에 마음의 매듭을 맺은것 같다.







ps-작가의 말도 감동이었다.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쪽에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작가가 되고 싶다. 그 길에서 나 또한 두려움없이, 온전한 나 자신이 되었으면 좋겠다.


.

나도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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