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만 해도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비겁하게도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그런 이상한 오만으로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렸지만."

"순결한 꿈은 오로지 이 일을 즐기며 할 수 있는 재능있는 이들의 것이었다.
그리고 영광도 그들의 것이 되어야만 했다.
영화는, 예술은 범인의 노력이 아니라 타고난 자들의 노력 속에서만 그 진짜 얼굴을 드러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재능이 없는 이들이 꿈이라는 허울을 잡기 시작하는 순간, 그 허울은 천천히 삶을 좀먹어간다."

"시나리오를 쓸 때는 하루 웃었다 하루 울었다 했다. 하루는 글이 잘써진다고, 이만하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다가 다음날에는 전날 쓴 글을 버리고 다시는 글을 쓸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꾸준히 써야 한다고들 말했다. 적어도 오 년을 꾸준히 썼지만 글이 늘지 않았다. 평생을 써도 아무 의미 없는 장면들만 만들어내리라는 공포가 근육을 굳게 했다."

나는, 책을 곱게 펴서 내 얼굴위에 얹었다. 보는 순간 흐르는 눈물을 참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예술의 진짜 얼굴을 보고싶었다. 나도.
하지만 볼 수 없었고, 꿈도 꾸지 못했다. 범인의 노력으로 될 수 없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더욱 더 비참한 건, 예술의 진짜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처음엔 아쉬웠는데, 조금 지나니 예술의 진짜 얼굴을 볼 자격이 있는 천재적인 사람에 대해서, 그냥 덤덤히 인정하게 되는 것이었다.
스스로에게 말했다. 정말 이젠 이게 아닌거구나..

예술의 열매는 누구에게나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쇼코의 미소에서 작가를 본다.
작가의 말에서 스스로 힘들었다고 작가는 고백했다. 그 시간동안 그도 아마 이런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이 소설로 젊은작가상을 수상하기까지 , 그 인내의 시간동안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의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나아가고, 절박하게 매달리고.. 그 과정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 이 글귀에 숨겨놓은것이 아닐까. 자기 마음을.

"미스터 김이 너에 대해서 얼마나 자랑을 했는지 몰라. 네가 만든 영화가 상영된 영화제에 다녀왔던 이야기도 쓰셨어"

신기하게도, 미스터김(주인공의 할아버지)와 쇼코, 주인공은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했다. 거짓말로 서로의 사정을 숨겼고, 서로의 아픔을 묻어버렸지만, 오히려 더 진실한 마음이 드러났다. 곳곳에서
솔직하지 못함에도 더 진실해서 슬펐던 , 그래서 서늘하지만 끝은 미묘하게 슬픈 쇼코의 미소였다.

"선배는 말할 때 감정이 배어나오는 나약한 습관을 고치고 싶다고 말했었다. 마음이 약해질 때 목소리가 떨리는 버릇, 사람들과 잘 섞이지 못하는 성격, 느리게 걷고 느리게 먹고 느리게 읽는 기질, 둔한 운동신경,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백 가지 의미를 찾아내 되새김질하는 예민함 같은 것들을 선배는 부끄러워했다. 그런 약점들을 이겨내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선배가 생각했던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선배가 스스로 약점이라고 여겼던 것들을 사랑했고, 무엇보다도 그것들 덕분에 자주 웃었다."

"잘 가요, 선배. 나는 언젠가 횡단보도 앞에 서서 어떻게든 눈물을 참으려던 선배의 얼굴을 떠올렸고, 선배를 보내고 나 또한 그 얼굴로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대한 무미건조한 인간이 되기를 바랐던 마음도."

미진선배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그 시간을 보내게 되면서, 선배가 러시아 유학시절 룸메이트였던 율라를 만나고 선배 이야기를 하면서, 소은은 어느샌가 선배와 같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학생운동 노래패의 전통을 중요시 한다는 명목 아래 "우리때는 후배가 마음에 안 들면 세워놓고 빠따로 두들겨 팼어. 그게 다 교육이었지" 라고 소은에게 충고하는 변리사 선배의 말에 "지랄" 이라는 대사로 미진 선배는 소은에게 첫 인상을 남기게 된다.

노래패의 학생운동의 전통을 끊었다고 비난받는 선배, 하지만 그러한 선배도 그 당시엔 스물 다섯의 어린 여자아이에 불과했고, 그 비난을 감당하기엔 여렸다. 그리고 소은은 그런 선배가 좋았다. 진심을 다 담아 전하지 못해 뒤늦게 러시아 땅을 밟게 되었지만.

"이십대 초반에 엄마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든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만난 인연들처럼 솔직하고 정직하게 대할 수 있는 얼굴들이 아직도 엄마의 인생에 많이 남아있으리라고 막연하게 기대했다. 하지만 어떤 인연도 잃어버린 인연을 대체해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났다.
어느 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첫 장조차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생의 한 시점에서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그 빗장 바깥에서 서로에게 절대로 상처를 입히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 같이 계를 하고 부부동반 여행을 가고 등산을 했다. 스무살 때로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그때는 뭘 모르지 않았냐고 이야기 하면서."

"엄마가 이모를 부담스러워 했다는 사실은 이모를 아프게 했지만 그만큼이나 엄마 역시 오래도록 아프게 했다. 지금도 엄마는 엄마가 어떻게 순애 이모를 저버릴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한다.
자신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큰 고통을 겪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가 왜 그리도 어려웠는지 엄마는 생각한다.
크게 싸우고 헤어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주 조금씩 멀어져서 더이상 볼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더 오래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후자다."

상대방의 어둠이 너무 짙어지면 그 어둠을 나눠갖지 못하는 이상, 부담감 혹은 비슷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 최대한 상대에게 많은걸 베풀고 싶고 도와주고 싶지만 한계가 있음을 느낄 때 , 스스로에게도 이는 상처가 되어버린다. 결국 그 관계는 시들해지고, 멀어지고 소원해진다.

그리고 마음에 아주 오래오래 남아서 그 때 내가 좀 더 손을 내밀었으면 달라졌을까 그때 무작정 뒤돌아버린 나는 나쁜 사람이었던건가 자책하고, 그러다가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합리화를 하고 , 그런 모습에 다시 실망을 하고, 그렇게 인생의 오랜 시간동안 생각하면서 천천히 그 인생의 일정부분을 상대에게 떼어줄 수밖에 없는. 그런 인연이 있다.

어렸을때 그토록 빛나던 언니가, 사회의 흐름에 적응, 혹은 부적응하면서 그리고 원치않는 고통을 얻게 되면서 점차 바래지고, 예전의 모습이 사라지고, 같이 한 장소에 있기조차 버거워진 모습으로 마주하게 되면서 이를 외면했던 엄마의 이야기.

아직 이 글 속의 엄마의 나이까지 되보지 못했기에, 이런 인연을 겪어보지도, 알지도 못하지만.. 소설을읽다보면 어느샌가 열여섯 시절의 순애언니가 아무것도 모르는 말간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느낌이 들어부끄러움이 느껴진다. 나도 모르게 나 자신도 마음의 빗장을 걸어잠그고, 전혀 상처받지 않을 상대들과 함께 하며 어디엔가 있을 순애언니를 무의식적으로 밀어낸것은 아닐까.


쇼코의 미소 뿐만 아니라 이 책 안에 있는 다른 단편들도 보면, 화자가 모두 여자로서,(생각해보니 장강명 외에 자신의 본래 성이 아닌 반대의 성별을 주인공으로 쓴 사람은 본 적 없는것 같다) 섬세하게 심리의 변화를 그리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잘 풀어내고 있다.

기본적으로 같이 사는 가족과의 관계에서부터 , 선배, 이모, 교환학생으로 알게 된 일본 여자아이, 나이로비 출신의 남자, 엄마, 할머니, 손녀 등..

다양한 이야기와 다양한 슬픔이 담겨있지만 공통적인 점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빚어내는 아픈 순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시니컬하거나, 객관적이라기 보다, 좀 더 따뜻하고 조금은 처연한 ,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파는 아닌 , 현대적이면서도 과거의 한국소설을 조금씩 담아놓은 느낌이었다.

요즘들어 허무주의이거나 시니컬하거나, 결국엔 답이 없다는 점을 열린 결말로 내놓은 현대소설이 많은데, 그 중 이 소설은 그런 열린결말을 허무함이 아니라 좀 더 애틋함을 담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모든 관계에 있어서 중요함을 알게되는 시점은 왜 그 관계가 끝나고 나서일까.

그 과정을 잘 담아내고 있는 이 소설은 두고두고, 다시 보게 될 것 같다.
아직도 그 주인공들의 마음의 잔물결이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아서 파동으로 일렁이는 듯하다.
오랜만에 마음의 매듭을 맺은것 같다.







ps-작가의 말도 감동이었다.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쪽에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작가가 되고 싶다. 그 길에서 나 또한 두려움없이, 온전한 나 자신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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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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