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이런 꼰대가 되었다. 식은땀이 난다. 그래서 주머니 속에 공깃돌 같은 말 하나를 넣어두었다. 그리고 ‘너는 틀렸고, 내가 맞다‘고 말하고 싶어질 때마다 주문처럼 굴려본다.
진실도 작게 말한다.
무려 2500년 된 말이다. 목소리가 절로 작아진다.

궁금하면 해본다. 새로운 것이라면 해본다. 망할 것 같아도일단 해본다. 하다못해 재미라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재미난것들이 모여 재미난 인생도 될 것이다.

경험은 한 번도 열어보지 못한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때마다 세계가 한 칸씩 넓어진다. 새로 문이 열리면 세계의 모양도 크기도 달라진다.

책을 읽는다는 건 작가의 세계 위에 내 세계를 겹쳐보는 일이다. 어떤 이야기도 읽는 이의 세계를 넘어서지는 못 한다. 내가 읽는 모든 이야기는 언제나 그때의 나만큼만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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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나 잘났다고 뻗대며 살아온 지난 세월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다.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자부했는데 나이 들수록 잘 산 것 같지가 않다. 나는 오만했고 이기적이었으며 그래서 당연히 실수투성이였다. 신이 나를 젊은 날로 돌려보내준다 해도 나는 거부하겠다.
오만했던 청춘의 부끄러움을 감당할 자신이 없으므로,
부끄러움을 견디며 오늘을 살 수 있는 것은 그나마 내가 반성할 줄 아는 인간인 덕분이다. 친구들은 나를 반성주의자(反省主義者) 또는 성장애주의자(成長愛主義者)라고 부른다. 반성하고 성장하는 것이 내 특기라나 뭐라나.
잘하는 것이라곤 그 둘뿐이다. 그나마라도 그럭저럭 해내고 있으니 천만다행 아닌가. 그렇게 자위하며 살았다. 돌이켜보니 거기서부터 문제였다.

유년기의 나는 매일같이 동네 초입 팽나무 아래 앉아읍내로 뻗어 있는 신작로를 보았다. 그 너머의 세상을 상상하며 성장기의 나는 먼 데서 기적이 울릴 때마다 그 기차가 가닿을 서울을 꿈꾸었다. 지금보다 더 멀리 더 높이.
그렇게 동동거리며 조바심치며 살다가 알게 되었다. 빨치산의 딸이므로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나의 비극은 내 부모가 빨치산이라서 시작된 게 아니었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내비극의 출발이었다.
쉰 넘어서야 깨닫고 있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지 않는아도 된다는 것을. 행복도 아름다움도 거기 있지 않다는것을 성장하고자 하는 욕망이 오히려 성장을 막았다는것을.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

각자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는 걸.
환갑 목전에 두고 하는 작가의 말이 마음에 큰 물결이 일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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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드디어 마흔이 됐습니다.
제가 열여덟 살 때, 서른 살 여자는 무슨 재미로 사는지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을 반성하고 있습니다.
미스터 최가 마흔일 때 저는 미스터 최를 어른으로존경하고 있었지만 제가 마흔이 되어 보니까 그때 미스터최도 그다지 어른이 아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람 본성은 과히 성장하지도 변하지도 않고 끝없이 자기자신에게 다가가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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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달리기를 주위의 누군가에게 권한 적은 한 번도없다. "달리는 것은 근사한 것이니까 모두 함께 달립시다" 같은말은 되도록 입에 담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만약 긴 거리를 달리는 것에 흥미가 있다면, 그냥 놔둬도 그 사람은 언젠가 스스로 달리기 시작할 것이고, 흥미가 없다면 아무리 열심히 권한다고 해

도 허사일 것이다. 마라톤은 만인을 위한 스포츠는 아니다. 소설가가 만인을 위한 직업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누군가에게 권유를 받거나, 요구를 받아 소설가가 된 것은 아니다(만류를당한 적은 있지만). 느낀 바가 있어 내 멋대로 소설가가 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누군가 권한다고 해서 러너가 되지는 않는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그렇게 될 만해서 러너가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타인과 얼마간이나마 차이가 있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자아란 것을 형성하게 되고, 자립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유지해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내 경우를 말한다면, 소설을 계속 써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풍경 속에 타인과 다른 모습을 파악하고, 타인과 다른 것을 느끼며, 타인과 다른 말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님으로써, 나만의 이야기를써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코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내가 쓴 것을 손에 들고 읽어준다는 드문 상황도 생겨난다. 내가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 하나의 소중한 자산인 것이다. 마음이 받게 되는 아픈 상처는 그와 같은 인간의자립성이 세계에 대해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당연한 대가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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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VS 철학 -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 철학 대 철학
강신주 지음 / 그린비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들뢰즈의 초월론적 경험론은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을 해명하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칸트가 경험을 원초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사유한 반면, 들뢰즈는 경험을 다양하고 복잡한 조건들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주어진 경험을 정당화하려고 했다는 점에서칸트는 기본적으로 경험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주어진 경험 자체를 해명함으로써 들뢰즈는 새로운 경험이 가능할 수 있는 조건, 다시 말해 새로운 경험의 생성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었던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험은 과연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들뢰즈의 초월론적 경험론에 따르면 우리 경험에는 타자라는 요소가 항상 ‘초월론적‘ 계기로 개입되어 있다. 물론 여기서 타자란 절대적인 타자가 아니라 상대적인타자를 의미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대상에서 내가 보지 못하는 부분, 그 부분을 동시에 나는 타자가 볼 수 있는 부분으로 정립한다. 내가 대상의 숨겨진 쪽을 보기 위해 돌아가면, 나는대상 뒤에서 타자를 만나게 되고 타자의 봄과 나의 봄이 합쳐질 때 대상의총체적 봄이 달성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볼 수 없는 내 등 뒤의 대상들은타자가 그것들을 볼수 있음으로 해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며, 나는 그것들을 감지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타자는 세계 안에서의 여백들과 전이를 확보해 준다. 의미의 논리(Logique du sens)내 앞에 아름다운 조각상이 놓여 있는 테이블이 있다고 해보자. 이 순간 나는 조각상의 뒷부분을 볼 수 없다. 만약 이때 어떤 타자가 테이블 건

너편에 있다면, 그는 내가 볼수 없는 부분까지 보고 있을 것이다. 들뢰즈에따르면 반드시 타자가 테이블 건너편에 있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타자가 건너편에 있는 것으로, 그래서 마치 내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보고 있는 것처럼 간주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로부터 조각상의 입체적인 면모에 대한 경험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언제든지 타자의 자리 혹은 타자의 시선으로 직접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 들뢰즈가 "대상 뒤에서 타자를 만나게 되고 타자의 봄과 나의 봄이 합쳐질 수 있다고 이야기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타자는 나의 의식이 필연적으로 "나는 ~였다" 속에서, 즉 더 이상 대상과일치하지 않는 하나의 과거 속에서 흔들리게 만든다. 타자가 나타나기 전에 예컨대 어떤 안정된 세계가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의식과 구분하지 못했다. 타자는 하나의 위협적인 세계의 가능성을 표현하면서 등장하며, 이세계는 타자 없이는펼쳐지지 못한다. 나? 나는 나의 과거 대상들이며, 나의 자아는 바로 타자가 나타나게 만든 한 과거의 세계에 의해 형성되었을뿐이다. 타자가 가능세계라면 나는 과거의 한 세계이다. 『의미의 논리』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의 표현을 빌리자면 타자는 나와 삶의 규칙이 다른 존재라고 할수 있다. 이런 타자와 마주쳤을때 나는 낯섦을 느낄수밖에 없다. 그는 내가 보기에 심하게 느끼한 이탈리안 파스타를 좋아한다. 이 순간 나는 내 자신이 얼큰한 음식을 좋아했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된다. 단지 음식만 그렇게 낯설겠는가? 정치적인 입장, 미적인 취향, 성적인자극 등, 나는 타자와의 사이에서 너무도 큰 차이를 직감하게 된다. 그런데문제는 내가 그 타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계속 만나려고 할 때 발생한다. 이경우 나는 과거 자신이 살았던 안정된 세계를 자각하며, 동시에 타자를 하나의 위협적인 세계의 가능성"으로 직감하게 될 것이다. 만약 내가 변한다면, 그것은 내가 타자와의 마주침과 그로부터 야기되는 새로운 배치, 즉 아장스망agencement 을 실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경우 지금까지 내가 영위해온 삶의 규칙은 완전히 새롭게 재편된다. 타자가 없다면 나는 과거의 한 시점에 매몰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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