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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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대에 쓴 글이라고?!?

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미안해하지도, 나를 가여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고마웠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정말로 물어오는 것은자신의 안부라는 것을. 어머니와 나는 구원도 이해도 아니나 입석표처럼 당당한 관계였다.

물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꺼졌다 켜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성실하게 했다. 그것이가끔은 어떤 기적을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가 꺼졌다 켜지는 순간이, 세계가 재빨리 눈을 감았다 뜨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지구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들이 아무도 모르게 일어난다고. 오래전 우리들의 짧은 입맞춤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이 믿지 않는 일들이 가까운 입술 위에서 일어나던, 그랬던 나날들처럼 말이다.

스카이 콩콩을 타지 않는 날이면, 옥상 위에서 침을 뱉거나,
창가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놀았다. 창문에는 가을 석류처럼 활짝 터진, 구멍난 방충망이 있었다. 바람이 불면, 오랫동안 빨지 않은 녹색 커튼이 펄럭거렸다. 나는 커튼 안에 고개를파묻으며 깊은 숨을 쉬었다. 먼지냄새가 주는 그 오래되고 아늑한 느낌이 좋아서였다. 먼지냄새는 뭐랄까, 내가 살아본 적없는 세상을 살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한번은살았던 것도 같은, 그러나 여전히 모르겠는 세상 말이다. 그땐지금보다 내 키가 작았기 때문에 나와 밤하늘 사이도 더 멀었다. 그러나 더 멀어질 수만 있다면 나는 더 작아져도 좋을 만큼 그것은 깊고 푸른 하늘이었다.

순간 창밖 가로등이 잠시 깜빡하고 꺼졌다 켜졌다. 오래전에도 그랬지만 그것은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가로등이 깜빡이는 순간이 세계가 재빨리 눈을 감았다 뜨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지구에는아무도 모르는 일들이 아무도 모르게 일어난다고, 전신마비환자가 눈꺼풀로 쳐주는 박수처럼 가로등은 형에게 윙크했다.
그때 나는 가로등이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눈감아주기 위해 저기 서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기적이란, 바로 그 눈감아주는 시간에 일어나는 일들일지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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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엄청난 햇살이 우리에게 쏟아졌다.

현실은 언제나 길 모퉁이에서 기다리는 법이지

그 진흙탕에 가곤 했다. 진흙의 일렁임. 그 향기를 들이마실 때 새로운 단어들이 떠오를 거라는 것, 이것이 내가한 생각이었다. 내 앞에 도달해야 할 무언가가 아직 있고,
나는 마음 깊이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여전히 아침에 눈을뜨는 순간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나는 열렬히 기뻐하며 그사실을 감지한다. 그것은 나를 저편으로, 좀 더 먼 곳으로,
가까운 끄트머리로 끌어당긴다. 그렇다, 그것. 다른 것은 없다. 마음 내키는 대로 새로운 모험에 나선다. 나의 몸과 함께. 내 몸에 남은 것과 함께. 숲에 남은 것과 함께. 내 몸과숲. 닳아 버리고 구멍 난 우리의 몸들. 누더기가 된 것들. 찢기고 없어진 것들 사이에 작은 우주가 남아 있다.

그렇게 평범항 날들이 하루, 또 하루 더해졌다

그리그는 새벽 3시쯤 우리가 있는 침대로 왔다. 그의 방문이 조용히, 최대한 부드럽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밤에 나는 문소리는 매번 겁먹은 말 울음소리처럼 들릴 수밖에 없긴 하다. 이윽고 그리그가 나무 계단을 한 단씩 조심스럽게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는 한동안 들썩거리다가 암흑 속을 더듬거리며 내게로 와서 지쳐 쓰러졌다. 나는 그 순간을 가장 사랑했다. 그런 순간이면 우리 셋이 같은 배낭 안에 담긴 기분을 느꼈다. 배낭 또는 운명이라고 해도 좋다, 어차피 마찬가지다. 둘 다 지구상에서 우리를 기다리눈 건 모든 혼합된 종이라는 점에서

기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위로 떨어지는 섬광이다. 아무런 대가 없이 오는 것이다. 전적으로 과분한 것.
그 섬광은 최악의 순간일지라도 예외가 없다. 예를 들어, 진흙탕 같은 전투 중에도 불현듯 살아 있음을 느끼지 않는가.

현재 나는 책 읽는 걸 그만두었다. 대신 쉬지 않고 외부세계를 살고 있다. 바깥세상을 책처럼 읽어 나간다. 끊임없이 바깥을 탐구하고 경험하는 가운데, 나 자신을 인식하는방식도 변화했다. 다시 말해 어느 때보다도 나 자신을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존재라고 덜 느낀다. 내게 연필 한 자루만남을 임종 직전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게 나는 이해하게되었다. 인간이 우리 종(種) 안에 격리된 존재, 즉 다른 종들과 분리된 존재가 아님을. 우리는 그들과 다르긴 하지만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우리가 인간에 속한다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지극히 제한된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그보다 훨씬 광대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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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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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깊고 끈끈한 사랑도 좋았지만, 그들 곁에서 그들을 돌보아주고 지지해준 따뜻한 이웃들의 정이 더 인상깊었다. 읽고 나서 예전에 읽은 <순례 주택>이 불현듯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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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의 즐거움 - 지적 흥분을 부르는 천진한 어른의 공부 이야기
우치다 타츠루 지음, 박동섭 옮김 / 유유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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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결과물을 내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렇습니다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매일 ‘판에 박은 듯한 일과‘를 반복합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머릿속에서 일어는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려면 그 이외의 일은 가능한 한 매일 똑같이 반복하는 편이 좋으니까요. 계절 변화를 감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길을는 것입니다. 길거리에 싹튼 꽃, 바람에 날리는 마른 잎,
퉁이를 돌았을 때 뺨에 느껴지는 바람의 온도 차 같은 것로 사계의 변화를 느끼는 겁니다. 다른 조건을 모두 똑같이해 두지 않으면 변화를 감지할 수 없습니다. 과학 실험똑같습니다.

멘토라는 존재를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전 생애에 걸쳐 계속 존경할 수 있는 스승이 아니면 멘토라 할 수 없다‘는 식으로 허들을 너무 높게 설정하면 ‘이 사람도 아니야. 저 사람도 안 돼‘ 하며 계속 배제만하다가 누구 밑에서도 배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될 테니까요. 저는 멘토의 범위를 좀 더 넓게 봐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평생의 스승‘도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도 포함하는 거죠.
배우려는 사람은 ‘오픈 마인드‘여야 합니다. ‘자신이 설정한 엄격한 조건을 채우는 사람이 아니면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과 ‘만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각각의 식견을 배우겠다는 사람‘중 어느 쪽이 지적으로 성숙할 기회가 많을지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겠죠.

 이는 공자가 ‘조술자‘라는 위치에 몸과 마음을 두는 것이 창조적으로 사고하는 데 굉장히 유효하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독창적인 사상가였지만 그가 그만큼 자유자재로 독창적일 수있었던 것은 한걸음 뒤로 물러나 ‘나는 조술자에 불과하다는 위치를 택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부터 말하는 것에는 ‘나의 독창적인 것이 이야닌 것‘이 여럿 붙어 있습니다.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온젠한나의 것‘이고 어느 것이 ‘빌려온 것‘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내 말의 꽤 많은 부분이 ‘누군가가 지금까지 생각하거나 말한 것‘을 빌려 와서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주세요."
저는 아예 처음부터 이렇게 생각하며 글을 씁니다. 이렇게 해야 자유롭게 이것저것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저는 철저하게 실리적인 사람이라서 ‘독창적인 것‘에구애받기보다 ‘조술자‘로 밀고 나갈 때 독창적일 기회가 더있다고 하면 (실제로 그렇습니다) 조술자로 밀고 나가는 편을 택할 겁니다.
스승을 따르고 배운다는 것은 이 조술자의 위치에 서는 것입니다. 조술자라는 위치의 최대 이점은 앞에서 말한대로 자신이 잘 모르는 것에 관해서도 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말이 나에게 ‘이해하라‘고 바라는 느낌이 들지만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 불능이 곧 제 학지의 한계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이 적어도
"나는 이것도 알고 있고 저것도 알고 있다"라고 아는 것을열거하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의 지적 성장에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아마도 제가 속한 집단 전체의 지적 성장에도도움이 될 겁니다. 지적 성장이라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모르는가에 관한 앎‘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작가로서 최고 영예는 자기가 쓴 문장이 누군가의 몸에 스며들어서 거기서 오랜 시간을 보낸 뒤에 어느 날 그사람의 말로 재생되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그런 문장을 쓰고 싶습니다.

이해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는상태도 똑같은 정도로 좋은 일입니다. 어쩌면 이해할 수없는 것의 목록을 길게 만드는 것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의 목록을 길게만드는 것 이상으로 인간의 지적 성장에 좋은 일일지 모릅니다.
아마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저는 확신을 가지고 말할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의 목록을 길게 만들 여유가 있으면이해할 수 없는 것의 목록도 아이 때부터 길게 만들어 두라고요.
그것이 나중까지 오래오래 즐거운 법입니다.

진정한 나를 찾아서 평생 그것을 연기하는 것은 저에게는 좀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진정한 나 같은 것에 아무런 흥미가 없거든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똑같은 인간이라면 외려 살아갈 보람이 없지 않을까요?
어제는 가능했는데 오늘은 할 수 없는 애달픈 경험을 매일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노화함에 따라 세계가 다르게 보입니다. 생각도, 느끼는 방식도 바뀝니다. 저는 이것이 무척 즐겁습니다. 유아 때의 저 자신, 소년기의 자신, 중년의 자신, 지금 노인으로 있는 저 자신이 모두 제 안에서 생생하게 병존합니다. 유아의 순수함, 소년의 고양감, 중년의 안정감, 노인의 은근한 멋이 모두 제 ‘서랍‘안에 들어 있어서 필요하거나 적절한 때 끄집어내거나 섞거나 정리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늙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심신의 상태를 경험하는 일이라는 의미에서 ‘자신을 풍부하게 하는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교사의 일은 아이가 점점 복잡화해 가는 것, 표정과 어휘와 발성이 바뀌어 ‘어제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가는 모습을 기쁘게 관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결코 ‘틀‘에 가두지 않는 것이지요. 종종 아이들은 스스로 기존의 ‘틀‘과 ‘캐릭터‘에 들어가서 그 역할을 계속 연기함으로써 집단 내에서 살아남는 전략을 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태도는 살아남기 위한 방어기제로 적절하지요. 그런데 그 틀에 매달리기만 하면 연속적인 자기 쇄신이라는 성숙의 과정을 스스로 멈추어 버릴 위험성이 생깁니다. 이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복잡화라는 영역에서 교육의 역할의 핵심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사의 역할은 바로 이때, 성장하고자 오래된 껍질을 벗어 던지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는 ‘상처받기 쉽고 부서지기 쉬운 상태‘의 아이들에게 "네가 결코 상처받지 않도록 지켜주겠다"고 다짐하고 "나는 네 성장을 축복한다라고 말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론에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기회를 무의식중에 꺼리게•됩니다. 무의식중이므로 어떻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학술적 지성은 자신의 오류를 가능한 한 빨리자각하고 그것을 보완할 때가 아니면 진보할 기회가 딱히없습니다. 논파하는 사람은 그런 기회를 스스로 짓밟는 것이지요. 무도 수행은 학술에서 가설의 고쳐쓰기와 구조적으로 똑같습니다. 연속적인 자기 쇄신입니다. 어제까지와는 다른 자신이 되는 것, 어제까지와는 다른 몸과 마음을쓰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런데 시합에 이기거나 다른 사람보다 강해지는 것을신경 쓰면 정작 자기 쇄신은 곤란해집니다. 그래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지도 않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지도 않는다. 적은 나를 보지 않고 나도 적을 보지 않는다"는 경지에이를 필요가 있는 겁니다. 상대적인 우열을 전혀 신경 쓰지않는 경지 말입니다. 그러면 ‘천지미분음양불도‘놋地未分陰陽주에 섭니다. 말은 어렵지만 ‘아직 기호적으로 분절되지않은 세계, 아직 어떤 가치의 시스템에 의해 질서가 확립되지 않은, 성운 상태의 경위‘에 서는 것입니다. 거기서 해야할 일을 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지,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지와 같은 간사함을 버리고 ‘무심‘으로 대처하는 것입니다. 무도는 이심의 경지‘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무도적 상황에서는 보상대가 자신을 향해 공격을 가해 오는 상태가 설정됩니다멍청하게 있으면 살상당할 위험이 있으므로 뭔가를 해합니다. 그런데 그때 적을 보고 그다음에 그의 공격을 예하고 그에 대한 최적의 해법을 찾아 대응하면 늦습니다.
래서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곧바로 대처하려면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움직여야 합니다. 공격에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그 일이 하고 싶어져야 하는것이지요. 맥락이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위에서 ‘무심‘이란 ‘목적이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는데, 그런 의미입니다. 오로지 ‘길‘은 걷는 것만이 중요하고이 길의 최종 목표는 어디인지, 지금 나는 전 여정의 어느지점까지 왔는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은 길을 얼마나많이 답파했는지와 같은 물음은 그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그 긴 수행의 여정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이겨도 누군가보다 강하게 되어도 누군가보다 잘하게 되어도 혹은누군가에게 져도 누군가보다 약해도 누군가보다 못해도그런 상대적 우열을 논하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 승패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면 거기에 얽매이기 때문입니다. 절대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무도의 가장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배움은 이 책에서도 반복해서 이야기한 것처럼 무비, 즉 모종의 순수함 innocence 없이는 달성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선생님을 경애하는 것은 선생님이 나의 ‘유일무이성‘의 보증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자들이 그 선생님으로부터 ‘똑같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면 그것이 아무리훌륭한 기법이라 하더라도 또 아무리 훌륭한 견해라고 하더라도 배운 것의 유일무이성은 손상을 입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없어도 다른 누군가가 선생님의 가르침을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 제자들은 선생님으로부터 결코 똑같은 것을 배울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그릇에 맞추어서 각각 다른 것을 배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배움의 창조성, 배움의 주체성입니다.

우치다 타츠루의 스승은 있다 중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혼자서 ‘트랙‘을 돌고자 한다. 오해가 있을 것 같아 급히 말을 덧붙이자면 지금은 이전과는달리 ‘복수‘의 코스를 계속해서 갈아타는 트랙을 달리고 있다. 처음에는 같은 도량형과 잣대를 공유한 경쟁자들과 같은 트랙을 돌았는데, 어느 순간 그들로부터 이탈해서 한참달리다 보니 어느샌가 ‘나 자신만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트랙‘이 눈 앞에 펼쳐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새로운 트랙으로 코스를 갈아타서 또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어느 지점에 도달하다 보니 또 다른 트랙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또 코스를 갈아타고 달리기 시작한다.
그때마다 트랙은 규모도 길이도 그리고 땅의 감촉도저마다 다르고 나아가 각각의 트랙을 돌면서 펼쳐지는 풍경도 다르다. 애당초 ‘어디를 향하는지‘가 전부 다르다. 문득 자각해 보니 아무도 없는 장소를 혼자서 달리고 있다.
거기에는 이미 같은 트랙을 질주하던 경주자들은 어디에도 없다. 나의 경험이 가르쳐 주는 바에 의하면 ‘미래의 미지성‘은 이처럼 예상치도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그 때그때 다른 풍경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인간은 어떤 방향으로 진행해 나간다. 그런데 그것은어딘가에 당도하기 위함이 아니라 원래대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대문호인 T. S. 엘리엇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모든 우리 탐구의 끝은 출발한 땅에 당도하는 것. 그리고 그 땅을 비로소 아는 것이다."
그때 출발한 지점과 돌아온 지점은 언뜻 보기에 똑같아 보이지만 실은 다르다.
요컨대 ‘지식‘은 목표를 향해서 전진 운동하는 것에서발생하는 반면 ‘지혜‘는 앎과 삶을 왔다 갔다 하는 왕복운동에서 싹튼다.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식에는 ‘앞으로 몸과 마음을 기우는 것‘이 필요하고 지혜에는 역방향의 ‘공중제비‘가 필요하다.

정토신종의 창시자인 신란은 ‘왕상‘과 ‘환상‘이라는말로 이런 사태를 훌륭하게 설명해 내고 있다. 먼저 ‘왕상‘
은 여래 자신의 공덕을 모든 사람에게 돌려서 맹세를 하고함께 석가여래불의 안락정토에 태어나는 것이다. 반면 ‘환상‘은 자신이 태어난 땅에서 다양한 경험과 수련 등으로 덕을 쌓아 석가여래불의 안락정토에서 환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혼란과 고통으로 점철된 속세에 남아사람들을 가르침으로 이끌고 함께 깨달음으로 향하는 삶을의미한다.
이것은 굉장한 이야기다. 세상의 모든 게임은 ‘위로 올라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당연한데 이 불교판의 게임에서는 "이겼다!"고 생각한 사람은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서 ‘위로 올라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도 이번에는 번뇌에 빠진 사람들과 함께한다.
즉 이 이른바 ‘슈퍼 주사위 놀이‘는 어리석은 자가 똑똑한 자로 출세하면서 끝나는 현대판 게임이 아니라 똑똑한이가 ‘위로 올라서서 자각하고 나서야 비로소 어리석음을알고 자신도 어리석은 이로 일단 추락하는 것을 통해 ‘깨달음‘에의 길을 새로운 플레이어와 함께 고쳐 걷기 시작하는 여정이 된다.
따라서 ‘지식‘의 획득을 산에 오름으로써 ‘남들이 우러러보는 사람‘이 되는 것의 비유라고 하면 ‘지혜‘를 갈고 닦는 것은 혼자서 산에 오르고 나서 다시 산 밑으로 내려와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산에 오르는 것의 비유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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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호감을 가지고 알아보던 작가였는데, 작가의 책을 읽어갈수록 존경하고 싶은 어른이라는 데 동의하게 된다. 때때로 별다른 계획없이 하고 싶은 일을 결정하는 불안한 나에게 위로가 되는 말들이 큰 힘이 된다.

아이들이 올바른 위치에서 올바른 순간에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하려면, 선택할 수 있는 행동과 동선이 가장 많을 때 진정으로 살아 있으며 생명력이 넘쳐난다는 것을 경험하게 해 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무도를 통해 습득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 여기 있으면 안 된다‘는 느낌을 알아채는 능력입니다. 여기 있으면 어떤 위험이 닥쳐오는지 구체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잘은 모르겠지만 여기 있으면 안 되겠구나‘라는 감각을 느끼는 거죠. 무도의 수련을 통해 습득해야 하는 것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나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아는 능력‘입니다. 이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여기에 있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 그걸 아는 능력입니다.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파악하기에 앞서, 있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부터 파악해야 합니다. 무도에서는 이것을 ‘좌를 본다.‘‘기를 본다‘라고 표현합니다. ‘좌를 본다‘는 것은 어디, 즉 지금 주어진 공간에서 어느 자리에 있을지를 파악한다는 뜻입니다. ‘기를 본다‘는 것은 언제, 즉 자신이 있어야 할 때를 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효율적이고 유용하며 돈이 되는 지식과 기술을 얻는 것보다 자신이 누기인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자신의 속은 자신도 모르지만, 지적 가능성이 잠들어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거죠. 비용 대비 효과를 따져 가며 학사 학위를 받는 것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기 탐구에 더 관심이 있는, 그런 사람이 배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쓸모 있고 돈이 되는 지식이나 기술을 손에 넣는 것보다도, ‘내가 누구인지, 나에게는(스스로도 몰랐던) 어떤 가능성이 잠들어 있는지‘를 탐구하고픈 마음이 배움에 가장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스물다섯 살에 이 무도를 시작했는데요. 당시 스물다섯의 제가 지닌 가치관으로는 이 무도가 어떤 것인지 가늠할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알았습니다. 제가 인식하는 ‘강하다‘든가 ‘이긴다‘같은 말의 의미 자체를 갱신하지 않으면 이 무도를 이해할 수 없겠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20년쯤 하다 보니 이 무도가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알게 됐고, 수련한 지 37년이 된 지금에서야 젊은 세대에게 ‘합기도란 무엇인가‘를 그럭저럭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뭔가를 배울 때는 배우기 전에 사전 지식을 너무 많이 갖추지 않는 편이 좋다. 이것이 제 경험에서 나온 확신입니다. 왜냐, ‘유용성이나 가치를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습득하려고 하면 인간은 비용 대비 효과가 좋은 방법을 찾거든요. 목적지를 알고 있으면 가장 가까운 길을 찾으려는 것과 똑같습니다.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성과를 거두고자 합니다.

일의 순서를 틀려선 안 된다. 상상한 것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상상하는 행위가 있었으므로 실현된 것이다. 진리란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축하는 것이다. 숙명도 그렇다. 숙명이란 자유롭게 공상하는 사람의 몸에만 찾아든다.
‘나는 지금 숙명이 이끈, 있어야 할 장소와 있어야 할 때에 있어야 할 사람과 함께 있다.‘는 확신에 차 있을 때 심신의 성능이 최대화된다.

나는 뭔가 기예를 시작할 때는 되도록 명확한 이유를 부여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본다. ‘어쩌다 보니‘라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게 좋다. 가능하면 주위에서 ‘그만두라‘는 일이나 스스로도 ‘이건 나랑 안 맞는데‘라는 생각이 드는 일을 하는 게 좋다.

실제로는 모든 아이가 저마나 훌륭하고 개성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너무나 개성적인 재능이라면 여태껏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없으므로 그 재능이 잠재된 동안은 그게 무슨 재능인지, 어떤 계기로 피어나는지 교사와 부모는 물론 아이 자신도 모른다. ‘이렇게 하면 어떤 아이라도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와 같은 일반적인 매뉴얼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르치는 쪽에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한 방법을 다 써 보는 것, 그리고 기다리는 것뿐이다.
따라서 교사에게 필요한 자질이란, 쓸데없는 것을 다 제거하고 말해 보자면, ‘이것저것 다 할 수 있는 교육상의 자유재량권‘과 ‘교육 성과가 어느 날 발현되기만을 기다리는 여유‘다. 한마디로 교육 방법의 자유와 시간적 여유다. 인내심을 갖고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볼 여유가 있고 다양한 교육 방법을 마음껏 시도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된다면 학교 교육은 크게 실패할 일이 없다.

가르친다는 것의 본질은 ‘오지랖‘이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교육이란 ‘배우고 싶은‘사람이 오기를 쭉 기다리는 일이다.
굵은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아무도 없는 어두운 체육관에서 ‘배우고 싶은‘사람이 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그때의 내가 교사로서의 내 기본 모습을 만든 것은 아닐까, 이제 와서 생각한다.

나이를 먹어 가장 기쁜 점은, 이 저장품이 해마다 늘면서 차츰‘기억 아카이브‘의 구색이 갖춰져 간다는 사실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내 안에 ‘여러 개의 나‘가 있다는 뜻이다.
지금도 격력한 분노에 사로잡히면 나는 소년 시절처럼 사나워질 때가 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그 모습이 나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철없는 분노에 사로잡힌 내가 있고, 그걸 어이없다는 듯이 보고 있는 내가 있고, 두 ‘나‘를 화해시키르년 내가 있다. 그들은 나이 차이를 동반한 각기 다른 ‘나‘다.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이다. 그들이 내 안에 혼재하고 공존한다. 일종의 다중인격이다.
나를 봐도 그렇다. 분명 한 사람인데 그 안에 ‘여러 명의 나‘가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들은 서로 배척하지 않고 왁자지껄하게 공생한다. 그러니 ‘58세의 나‘와 ‘16세의 나‘가 짝을 이루면 ‘열과 성을 다해 그것은 이것이라고 단정‘하기도 한다. 나는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이 ‘인격 아카이브‘의 컬렉션이 점점 늘어 가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조합할 수 있는 종류가 늘어나면 대응할 수 있는 상황도 다양해진다. 공감할 수 있는 대역도, 동조할 수 있는 주파수도 넓어진다. 나누어 쓸 수 있는 목소리의 색깔도, 처리할 수 있는 문제의 종류도 늘어난다. 나이를 먹는 것의 적극적인 의미는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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