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20대에 쓴 글이라고?!?

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미안해하지도, 나를 가여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고마웠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정말로 물어오는 것은자신의 안부라는 것을. 어머니와 나는 구원도 이해도 아니나 입석표처럼 당당한 관계였다.

물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꺼졌다 켜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성실하게 했다. 그것이가끔은 어떤 기적을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가 꺼졌다 켜지는 순간이, 세계가 재빨리 눈을 감았다 뜨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지구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들이 아무도 모르게 일어난다고. 오래전 우리들의 짧은 입맞춤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이 믿지 않는 일들이 가까운 입술 위에서 일어나던, 그랬던 나날들처럼 말이다.

스카이 콩콩을 타지 않는 날이면, 옥상 위에서 침을 뱉거나,
창가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놀았다. 창문에는 가을 석류처럼 활짝 터진, 구멍난 방충망이 있었다. 바람이 불면, 오랫동안 빨지 않은 녹색 커튼이 펄럭거렸다. 나는 커튼 안에 고개를파묻으며 깊은 숨을 쉬었다. 먼지냄새가 주는 그 오래되고 아늑한 느낌이 좋아서였다. 먼지냄새는 뭐랄까, 내가 살아본 적없는 세상을 살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한번은살았던 것도 같은, 그러나 여전히 모르겠는 세상 말이다. 그땐지금보다 내 키가 작았기 때문에 나와 밤하늘 사이도 더 멀었다. 그러나 더 멀어질 수만 있다면 나는 더 작아져도 좋을 만큼 그것은 깊고 푸른 하늘이었다.

순간 창밖 가로등이 잠시 깜빡하고 꺼졌다 켜졌다. 오래전에도 그랬지만 그것은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가로등이 깜빡이는 순간이 세계가 재빨리 눈을 감았다 뜨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지구에는아무도 모르는 일들이 아무도 모르게 일어난다고, 전신마비환자가 눈꺼풀로 쳐주는 박수처럼 가로등은 형에게 윙크했다.
그때 나는 가로등이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눈감아주기 위해 저기 서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기적이란, 바로 그 눈감아주는 시간에 일어나는 일들일지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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