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히 결과물을 내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렇습니다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매일 ‘판에 박은 듯한 일과‘를 반복합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머릿속에서 일어는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려면 그 이외의 일은 가능한 한 매일 똑같이 반복하는 편이 좋으니까요. 계절 변화를 감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길을는 것입니다. 길거리에 싹튼 꽃, 바람에 날리는 마른 잎, 퉁이를 돌았을 때 뺨에 느껴지는 바람의 온도 차 같은 것로 사계의 변화를 느끼는 겁니다. 다른 조건을 모두 똑같이해 두지 않으면 변화를 감지할 수 없습니다. 과학 실험똑같습니다.
멘토라는 존재를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전 생애에 걸쳐 계속 존경할 수 있는 스승이 아니면 멘토라 할 수 없다‘는 식으로 허들을 너무 높게 설정하면 ‘이 사람도 아니야. 저 사람도 안 돼‘ 하며 계속 배제만하다가 누구 밑에서도 배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될 테니까요. 저는 멘토의 범위를 좀 더 넓게 봐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평생의 스승‘도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도 포함하는 거죠. 배우려는 사람은 ‘오픈 마인드‘여야 합니다. ‘자신이 설정한 엄격한 조건을 채우는 사람이 아니면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과 ‘만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각각의 식견을 배우겠다는 사람‘중 어느 쪽이 지적으로 성숙할 기회가 많을지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겠죠.
이는 공자가 ‘조술자‘라는 위치에 몸과 마음을 두는 것이 창조적으로 사고하는 데 굉장히 유효하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독창적인 사상가였지만 그가 그만큼 자유자재로 독창적일 수있었던 것은 한걸음 뒤로 물러나 ‘나는 조술자에 불과하다는 위치를 택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부터 말하는 것에는 ‘나의 독창적인 것이 이야닌 것‘이 여럿 붙어 있습니다.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온젠한나의 것‘이고 어느 것이 ‘빌려온 것‘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내 말의 꽤 많은 부분이 ‘누군가가 지금까지 생각하거나 말한 것‘을 빌려 와서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주세요." 저는 아예 처음부터 이렇게 생각하며 글을 씁니다. 이렇게 해야 자유롭게 이것저것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저는 철저하게 실리적인 사람이라서 ‘독창적인 것‘에구애받기보다 ‘조술자‘로 밀고 나갈 때 독창적일 기회가 더있다고 하면 (실제로 그렇습니다) 조술자로 밀고 나가는 편을 택할 겁니다. 스승을 따르고 배운다는 것은 이 조술자의 위치에 서는 것입니다. 조술자라는 위치의 최대 이점은 앞에서 말한대로 자신이 잘 모르는 것에 관해서도 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말이 나에게 ‘이해하라‘고 바라는 느낌이 들지만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 불능이 곧 제 학지의 한계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이 적어도 "나는 이것도 알고 있고 저것도 알고 있다"라고 아는 것을열거하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의 지적 성장에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아마도 제가 속한 집단 전체의 지적 성장에도도움이 될 겁니다. 지적 성장이라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모르는가에 관한 앎‘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작가로서 최고 영예는 자기가 쓴 문장이 누군가의 몸에 스며들어서 거기서 오랜 시간을 보낸 뒤에 어느 날 그사람의 말로 재생되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그런 문장을 쓰고 싶습니다.
이해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는상태도 똑같은 정도로 좋은 일입니다. 어쩌면 이해할 수없는 것의 목록을 길게 만드는 것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의 목록을 길게만드는 것 이상으로 인간의 지적 성장에 좋은 일일지 모릅니다. 아마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저는 확신을 가지고 말할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의 목록을 길게 만들 여유가 있으면이해할 수 없는 것의 목록도 아이 때부터 길게 만들어 두라고요. 그것이 나중까지 오래오래 즐거운 법입니다.
진정한 나를 찾아서 평생 그것을 연기하는 것은 저에게는 좀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진정한 나 같은 것에 아무런 흥미가 없거든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똑같은 인간이라면 외려 살아갈 보람이 없지 않을까요? 어제는 가능했는데 오늘은 할 수 없는 애달픈 경험을 매일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노화함에 따라 세계가 다르게 보입니다. 생각도, 느끼는 방식도 바뀝니다. 저는 이것이 무척 즐겁습니다. 유아 때의 저 자신, 소년기의 자신, 중년의 자신, 지금 노인으로 있는 저 자신이 모두 제 안에서 생생하게 병존합니다. 유아의 순수함, 소년의 고양감, 중년의 안정감, 노인의 은근한 멋이 모두 제 ‘서랍‘안에 들어 있어서 필요하거나 적절한 때 끄집어내거나 섞거나 정리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늙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심신의 상태를 경험하는 일이라는 의미에서 ‘자신을 풍부하게 하는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교사의 일은 아이가 점점 복잡화해 가는 것, 표정과 어휘와 발성이 바뀌어 ‘어제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가는 모습을 기쁘게 관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결코 ‘틀‘에 가두지 않는 것이지요. 종종 아이들은 스스로 기존의 ‘틀‘과 ‘캐릭터‘에 들어가서 그 역할을 계속 연기함으로써 집단 내에서 살아남는 전략을 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태도는 살아남기 위한 방어기제로 적절하지요. 그런데 그 틀에 매달리기만 하면 연속적인 자기 쇄신이라는 성숙의 과정을 스스로 멈추어 버릴 위험성이 생깁니다. 이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복잡화라는 영역에서 교육의 역할의 핵심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사의 역할은 바로 이때, 성장하고자 오래된 껍질을 벗어 던지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는 ‘상처받기 쉽고 부서지기 쉬운 상태‘의 아이들에게 "네가 결코 상처받지 않도록 지켜주겠다"고 다짐하고 "나는 네 성장을 축복한다라고 말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론에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기회를 무의식중에 꺼리게•됩니다. 무의식중이므로 어떻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학술적 지성은 자신의 오류를 가능한 한 빨리자각하고 그것을 보완할 때가 아니면 진보할 기회가 딱히없습니다. 논파하는 사람은 그런 기회를 스스로 짓밟는 것이지요. 무도 수행은 학술에서 가설의 고쳐쓰기와 구조적으로 똑같습니다. 연속적인 자기 쇄신입니다. 어제까지와는 다른 자신이 되는 것, 어제까지와는 다른 몸과 마음을쓰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런데 시합에 이기거나 다른 사람보다 강해지는 것을신경 쓰면 정작 자기 쇄신은 곤란해집니다. 그래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지도 않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지도 않는다. 적은 나를 보지 않고 나도 적을 보지 않는다"는 경지에이를 필요가 있는 겁니다. 상대적인 우열을 전혀 신경 쓰지않는 경지 말입니다. 그러면 ‘천지미분음양불도‘놋地未分陰陽주에 섭니다. 말은 어렵지만 ‘아직 기호적으로 분절되지않은 세계, 아직 어떤 가치의 시스템에 의해 질서가 확립되지 않은, 성운 상태의 경위‘에 서는 것입니다. 거기서 해야할 일을 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지,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지와 같은 간사함을 버리고 ‘무심‘으로 대처하는 것입니다. 무도는 이심의 경지‘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무도적 상황에서는 보상대가 자신을 향해 공격을 가해 오는 상태가 설정됩니다멍청하게 있으면 살상당할 위험이 있으므로 뭔가를 해합니다. 그런데 그때 적을 보고 그다음에 그의 공격을 예하고 그에 대한 최적의 해법을 찾아 대응하면 늦습니다. 래서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곧바로 대처하려면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움직여야 합니다. 공격에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그 일이 하고 싶어져야 하는것이지요. 맥락이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위에서 ‘무심‘이란 ‘목적이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는데, 그런 의미입니다. 오로지 ‘길‘은 걷는 것만이 중요하고이 길의 최종 목표는 어디인지, 지금 나는 전 여정의 어느지점까지 왔는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은 길을 얼마나많이 답파했는지와 같은 물음은 그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그 긴 수행의 여정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이겨도 누군가보다 강하게 되어도 누군가보다 잘하게 되어도 혹은누군가에게 져도 누군가보다 약해도 누군가보다 못해도그런 상대적 우열을 논하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 승패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면 거기에 얽매이기 때문입니다. 절대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무도의 가장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배움은 이 책에서도 반복해서 이야기한 것처럼 무비, 즉 모종의 순수함 innocence 없이는 달성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선생님을 경애하는 것은 선생님이 나의 ‘유일무이성‘의 보증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자들이 그 선생님으로부터 ‘똑같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면 그것이 아무리훌륭한 기법이라 하더라도 또 아무리 훌륭한 견해라고 하더라도 배운 것의 유일무이성은 손상을 입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없어도 다른 누군가가 선생님의 가르침을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 제자들은 선생님으로부터 결코 똑같은 것을 배울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그릇에 맞추어서 각각 다른 것을 배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배움의 창조성, 배움의 주체성입니다.
우치다 타츠루의 스승은 있다 중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혼자서 ‘트랙‘을 돌고자 한다. 오해가 있을 것 같아 급히 말을 덧붙이자면 지금은 이전과는달리 ‘복수‘의 코스를 계속해서 갈아타는 트랙을 달리고 있다. 처음에는 같은 도량형과 잣대를 공유한 경쟁자들과 같은 트랙을 돌았는데, 어느 순간 그들로부터 이탈해서 한참달리다 보니 어느샌가 ‘나 자신만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트랙‘이 눈 앞에 펼쳐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새로운 트랙으로 코스를 갈아타서 또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어느 지점에 도달하다 보니 또 다른 트랙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또 코스를 갈아타고 달리기 시작한다. 그때마다 트랙은 규모도 길이도 그리고 땅의 감촉도저마다 다르고 나아가 각각의 트랙을 돌면서 펼쳐지는 풍경도 다르다. 애당초 ‘어디를 향하는지‘가 전부 다르다. 문득 자각해 보니 아무도 없는 장소를 혼자서 달리고 있다. 거기에는 이미 같은 트랙을 질주하던 경주자들은 어디에도 없다. 나의 경험이 가르쳐 주는 바에 의하면 ‘미래의 미지성‘은 이처럼 예상치도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그 때그때 다른 풍경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인간은 어떤 방향으로 진행해 나간다. 그런데 그것은어딘가에 당도하기 위함이 아니라 원래대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대문호인 T. S. 엘리엇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모든 우리 탐구의 끝은 출발한 땅에 당도하는 것. 그리고 그 땅을 비로소 아는 것이다." 그때 출발한 지점과 돌아온 지점은 언뜻 보기에 똑같아 보이지만 실은 다르다. 요컨대 ‘지식‘은 목표를 향해서 전진 운동하는 것에서발생하는 반면 ‘지혜‘는 앎과 삶을 왔다 갔다 하는 왕복운동에서 싹튼다.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식에는 ‘앞으로 몸과 마음을 기우는 것‘이 필요하고 지혜에는 역방향의 ‘공중제비‘가 필요하다.
정토신종의 창시자인 신란은 ‘왕상‘과 ‘환상‘이라는말로 이런 사태를 훌륭하게 설명해 내고 있다. 먼저 ‘왕상‘ 은 여래 자신의 공덕을 모든 사람에게 돌려서 맹세를 하고함께 석가여래불의 안락정토에 태어나는 것이다. 반면 ‘환상‘은 자신이 태어난 땅에서 다양한 경험과 수련 등으로 덕을 쌓아 석가여래불의 안락정토에서 환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혼란과 고통으로 점철된 속세에 남아사람들을 가르침으로 이끌고 함께 깨달음으로 향하는 삶을의미한다. 이것은 굉장한 이야기다. 세상의 모든 게임은 ‘위로 올라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당연한데 이 불교판의 게임에서는 "이겼다!"고 생각한 사람은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서 ‘위로 올라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도 이번에는 번뇌에 빠진 사람들과 함께한다. 즉 이 이른바 ‘슈퍼 주사위 놀이‘는 어리석은 자가 똑똑한 자로 출세하면서 끝나는 현대판 게임이 아니라 똑똑한이가 ‘위로 올라서서 자각하고 나서야 비로소 어리석음을알고 자신도 어리석은 이로 일단 추락하는 것을 통해 ‘깨달음‘에의 길을 새로운 플레이어와 함께 고쳐 걷기 시작하는 여정이 된다. 따라서 ‘지식‘의 획득을 산에 오름으로써 ‘남들이 우러러보는 사람‘이 되는 것의 비유라고 하면 ‘지혜‘를 갈고 닦는 것은 혼자서 산에 오르고 나서 다시 산 밑으로 내려와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산에 오르는 것의 비유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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