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호감을 가지고 알아보던 작가였는데, 작가의 책을 읽어갈수록 존경하고 싶은 어른이라는 데 동의하게 된다. 때때로 별다른 계획없이 하고 싶은 일을 결정하는 불안한 나에게 위로가 되는 말들이 큰 힘이 된다.
아이들이 올바른 위치에서 올바른 순간에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하려면, 선택할 수 있는 행동과 동선이 가장 많을 때 진정으로 살아 있으며 생명력이 넘쳐난다는 것을 경험하게 해 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무도를 통해 습득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 여기 있으면 안 된다‘는 느낌을 알아채는 능력입니다. 여기 있으면 어떤 위험이 닥쳐오는지 구체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잘은 모르겠지만 여기 있으면 안 되겠구나‘라는 감각을 느끼는 거죠. 무도의 수련을 통해 습득해야 하는 것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나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아는 능력‘입니다. 이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여기에 있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 그걸 아는 능력입니다.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파악하기에 앞서, 있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부터 파악해야 합니다. 무도에서는 이것을 ‘좌를 본다.‘‘기를 본다‘라고 표현합니다. ‘좌를 본다‘는 것은 어디, 즉 지금 주어진 공간에서 어느 자리에 있을지를 파악한다는 뜻입니다. ‘기를 본다‘는 것은 언제, 즉 자신이 있어야 할 때를 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효율적이고 유용하며 돈이 되는 지식과 기술을 얻는 것보다 자신이 누기인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자신의 속은 자신도 모르지만, 지적 가능성이 잠들어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거죠. 비용 대비 효과를 따져 가며 학사 학위를 받는 것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기 탐구에 더 관심이 있는, 그런 사람이 배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쓸모 있고 돈이 되는 지식이나 기술을 손에 넣는 것보다도, ‘내가 누구인지, 나에게는(스스로도 몰랐던) 어떤 가능성이 잠들어 있는지‘를 탐구하고픈 마음이 배움에 가장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스물다섯 살에 이 무도를 시작했는데요. 당시 스물다섯의 제가 지닌 가치관으로는 이 무도가 어떤 것인지 가늠할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알았습니다. 제가 인식하는 ‘강하다‘든가 ‘이긴다‘같은 말의 의미 자체를 갱신하지 않으면 이 무도를 이해할 수 없겠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20년쯤 하다 보니 이 무도가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알게 됐고, 수련한 지 37년이 된 지금에서야 젊은 세대에게 ‘합기도란 무엇인가‘를 그럭저럭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뭔가를 배울 때는 배우기 전에 사전 지식을 너무 많이 갖추지 않는 편이 좋다. 이것이 제 경험에서 나온 확신입니다. 왜냐, ‘유용성이나 가치를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습득하려고 하면 인간은 비용 대비 효과가 좋은 방법을 찾거든요. 목적지를 알고 있으면 가장 가까운 길을 찾으려는 것과 똑같습니다.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성과를 거두고자 합니다.
일의 순서를 틀려선 안 된다. 상상한 것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상상하는 행위가 있었으므로 실현된 것이다. 진리란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축하는 것이다. 숙명도 그렇다. 숙명이란 자유롭게 공상하는 사람의 몸에만 찾아든다. ‘나는 지금 숙명이 이끈, 있어야 할 장소와 있어야 할 때에 있어야 할 사람과 함께 있다.‘는 확신에 차 있을 때 심신의 성능이 최대화된다.
나는 뭔가 기예를 시작할 때는 되도록 명확한 이유를 부여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본다. ‘어쩌다 보니‘라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게 좋다. 가능하면 주위에서 ‘그만두라‘는 일이나 스스로도 ‘이건 나랑 안 맞는데‘라는 생각이 드는 일을 하는 게 좋다.
실제로는 모든 아이가 저마나 훌륭하고 개성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너무나 개성적인 재능이라면 여태껏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없으므로 그 재능이 잠재된 동안은 그게 무슨 재능인지, 어떤 계기로 피어나는지 교사와 부모는 물론 아이 자신도 모른다. ‘이렇게 하면 어떤 아이라도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와 같은 일반적인 매뉴얼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르치는 쪽에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한 방법을 다 써 보는 것, 그리고 기다리는 것뿐이다. 따라서 교사에게 필요한 자질이란, 쓸데없는 것을 다 제거하고 말해 보자면, ‘이것저것 다 할 수 있는 교육상의 자유재량권‘과 ‘교육 성과가 어느 날 발현되기만을 기다리는 여유‘다. 한마디로 교육 방법의 자유와 시간적 여유다. 인내심을 갖고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볼 여유가 있고 다양한 교육 방법을 마음껏 시도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된다면 학교 교육은 크게 실패할 일이 없다.
가르친다는 것의 본질은 ‘오지랖‘이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교육이란 ‘배우고 싶은‘사람이 오기를 쭉 기다리는 일이다. 굵은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아무도 없는 어두운 체육관에서 ‘배우고 싶은‘사람이 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그때의 내가 교사로서의 내 기본 모습을 만든 것은 아닐까, 이제 와서 생각한다.
나이를 먹어 가장 기쁜 점은, 이 저장품이 해마다 늘면서 차츰‘기억 아카이브‘의 구색이 갖춰져 간다는 사실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내 안에 ‘여러 개의 나‘가 있다는 뜻이다. 지금도 격력한 분노에 사로잡히면 나는 소년 시절처럼 사나워질 때가 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그 모습이 나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철없는 분노에 사로잡힌 내가 있고, 그걸 어이없다는 듯이 보고 있는 내가 있고, 두 ‘나‘를 화해시키르년 내가 있다. 그들은 나이 차이를 동반한 각기 다른 ‘나‘다.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이다. 그들이 내 안에 혼재하고 공존한다. 일종의 다중인격이다. 나를 봐도 그렇다. 분명 한 사람인데 그 안에 ‘여러 명의 나‘가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들은 서로 배척하지 않고 왁자지껄하게 공생한다. 그러니 ‘58세의 나‘와 ‘16세의 나‘가 짝을 이루면 ‘열과 성을 다해 그것은 이것이라고 단정‘하기도 한다. 나는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이 ‘인격 아카이브‘의 컬렉션이 점점 늘어 가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조합할 수 있는 종류가 늘어나면 대응할 수 있는 상황도 다양해진다. 공감할 수 있는 대역도, 동조할 수 있는 주파수도 넓어진다. 나누어 쓸 수 있는 목소리의 색깔도, 처리할 수 있는 문제의 종류도 늘어난다. 나이를 먹는 것의 적극적인 의미는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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