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여러분이 보게 될 풍경이 그 인연 너머에 있는 ‘시작‘으로 가득한 세계로 이어지길 기도합니다. ㅡ미야노 마키코
그렇지만 요즘 고쿠보 씨는 승률 5할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연패 후 3연승을 거두었는데 바로 직전 시합은 TKO로 시원하게 승리했고, 6월에는 드디어 일본 랭커에 도전할 예정입니다. 고쿠보 씨를 아는 이들은 이런 과정에서 당연히 어떤 스토리를읽어냅니다. 은퇴를 2년 앞둔 (프로복서는 원칙상 37세에 의무적으로 은퇴해야 합니다.) 고쿠보 아키라, 승리에 버림받은 시기가 있었지만 시련을 뛰어넘고 강해져서 마침내 일본 랭커에도전하다. 이런 감동적인 스토리를 말이지요. 그런데요, 정작 고쿠보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4연패를 하는 동안에는 분명히 여러 번 그만둘까 고민했지만, 그 슬럼프를 극복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많이 노력했다는 말을 듣곤 하는데, 사실 그렇게 많이 노력했는지도 모르겠다. 감동적인 이야기라고 해주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정도로감동적인 것 같지는 않다. "왜 복싱을 시작했어?"라고 누가 물어보면 그럴듯하게 답하지만, 그게 진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이렇게 되리라고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것 같을 때도 있다. 잘 모르겠지만, 그때그때 나에게 온 만남과말, 기회 등에 몸을 싣다 보니 어느새 지금 이 자리에 있다.
어느 특정한 시점에 달라진 것이냐, 대화 중에 커다란 전환점이 있었느냐, 아니면 좀더 잘하려고 한 단계 뛰어넘은 것이냐, 하고 물어본다면 그런 대단한 일은 없었습니다. 느긋하게 수다를 떨다 보니 자연스레 ‘어중간한 환자‘로 자리를 잡았지요. 사소한 화제 전환과 변화가 거듭되는 과정에서 미처 알아채지 못한 사이에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저‘라는 존재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지 않았을까요. 저는 지금껏 이소노 씨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우연을 붙잡으며, 지금에몸을 맡기고, 의연하게 결단하려 한다고 말해왔습니다. 어떤 의미로는 착실한 미야노 마키코가 극적인 변화에 뛰어드는 이미지를 그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변화란 그렇게 극적으로 벌어지지 않고, 훨씬 뭉근하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는지도 모릅니다. 저라는 사람 역시 매사에 분명하지 않고 상대방과 관계 속에서시시때때로 변하며 그때마다 뒤늦게 깨닫는, 훨씬 애매한 존재가 아닐까요. 본래 일상생활이란 다양한 상태가 얼룩덜룩하게 섞인 것과비슷합니다. 우리가 그 얼룩무늬의 이쪽저쪽을 왔다 갔다 하는사이에 일상은 느릿느릿 나아가지요.
사람은 진짜로 시간을 뛰어넘을 수는 없기에 현재 시점에서 상대를 믿고 미래의 약속을 맺는다는 건 ‘모험‘이자 ‘도박‘입니다. 일상과 신뢰, 그리고 약속을 둘러싼 와쓰지 데쓰로의 분석은언제 봐도 감탄이 나옵니다. 다만 대체 어떤 사람이라야 ‘약속할 능력‘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떠오르기도 하지요. 언젠가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여 미완결인 채 끝날 수밖에 없는인간이 과연 미래에 대해 미리 결정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요? 죽음의 가능성을 일단 생각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미래에 대해 결정적인 태도를 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약속을 맺습니다. 약속으로 죽음의 가능성을 은폐하는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약속이란 죽음의 가능성과 무책임함을 모두 끌어안고 본래는 할 수 없는 ‘결정적 태도‘를 ‘그럼에도‘ 취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무모한 모험, 또는 도박을 눈앞의 상대에게 ‘지금‘ 표명하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당신이 있기에 비로소 약속이라
는 도박을 감행하고, 될지 안 될지 모를 일을 실현해내기 위해모험에 나선다. 당신이 있기에 마음먹는 ‘지금‘의 결단이야말로 ‘약속‘의 요점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신뢰란 미래를 향하는 것이라기보다 지금 눈앞에있는 당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와쓰지 데쓰로가 인간의 진실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했던 모양입니다.
저는 왜 그렇게까지 ‘우연‘에 의문을 품고 설명하려 했을까요?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우연에야말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살아가려 하는 힘‘의 시초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제가 20년 넘게 읽어왔던 『우연성의 문제를 펼쳤습니다. 서두에서 구키 슈조는 우연성이란 ‘없는 것을 있게 하는존재‘라고 간략하게 정의했습니다. 다시 말해 ‘있는 것‘도 ‘없는것‘도 가능한 것입니다. 제 유방암은 분명히 유전성이 아니기때문에 (유전성이라 해도 100퍼센트 암에 걸리지는 않습니다만) 저는 암에 걸리지 않고 오늘도 건강하게 술을 마셨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암에 걸렸을 가능성도 당연히 있었지요. 여기까지 살펴보면 제가 암에 걸린 우연은 주사위를 던졌더니 6이 나왔더라 하는 확률의 문제로 읽힐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구키 슈조는 한 발 나아가 우리의 현실에 있는 우연성을 "유有
와 무의 접촉면에 개재하는 극한적 존재"라든가 "유가 무에뿌리내리고 있는 상태"라고 고쳐 말했습니다. 중요한 점은 ‘암에 걸릴 수도‘ 혹은 ‘암에 걸리지 않을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제가 암에 걸려버렸다는 사실입니다. ‘불구하고’로 표현하는 반전, 이 역접이야말로 제가 유방암에 걸려버린 사실을 우연으로서 받아들인 사정의 실체입니다. 구키 슈조는 계속해서 인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지 질문했습니다. 저 역시 그 문제를고민해왔지요. 글이라면 다음처럼 답할 수 있습니다. 현실이란 없을 수 있던 것이 있게 되는‘ 반전의 힘이 나타난 결과여서, 구키 슈조는우연성을 ‘실재의 생산 원리‘ 또는 ‘생산점‘이라 불렀다고요. 저는 ‘있기 어려운 것이 있는 경우‘를 보고 놀라워하면서 우연을 아름답게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야구를 보다감동했을 때, 저는 선수들이 일어날지 모르는 가능성을 바라보고 현재에서 손을 떼어냄으로써 현실이 태어난다고 적었습니다. 그럴 때 현실의 발밑에 자리한 무는 간단히 뿌리칠 수 있는 것이며, 다가오는 미래는 손을 뻗으면 바로 잡을 수 있는 것같습니다. 가볍게 무를 뿌리치고 존재를 향해 나아가는 순간. 그런데 제가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생산점만 우연으로 이야
기하려 했을까요. 아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우연에 의문을 품고 ‘없을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것‘을 계속 설명하려 한 뿌리에는무에 사로잡혀도 필사적으로 벗어나려 애쓰는 삶에 대한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없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는 것‘을 설명함으로써 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 하는 집착이 있었지요. 지금 저는 제 병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불쾌하기까지 한 힘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삶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살기 위해서 글을 쓰려고 합니다.
앞서 소개한 기사를 다시 예로 들면 받아주기, 이해, 귀 기울이기 같은 표현들이 상징하듯 다양성 사회는 사람들이 악수하면서 연결되거나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받아주는, 정지 화면같은 모습으로 그려지곤 합니다. (받아주려면 정지해야 하니까요.) 연결, 유대 같은 말들도 마찬가지라 점과 점이 이어진 모습(연결선)으로 강조되곤 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점과 점이 연결되는 도식을 위에서 내려다본 사람들이 네가 연결하는법은 잘못됐어, 이렇게 해야 해, 하고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양성 사회와 그것을 지탱하는 관계란 정지 화면이나 평면도로는 전혀 포착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아닐까요? 멈춰 서서 악수하거나 상대를 받아준다고 관계성이 만들어지지는않습니다. 함께 운동하여 계속 선을 그리면서 세계를 통과하는 것, 그러는 와중에 서로를 기분 좋게 하는 언동을 발견하고 그 발견을 발자취로 남긴 다음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것, 관계성을 만드는 것이란바로 이렇게 앎과 깨달음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움직임(운동)이아닐까요.
저는 운동이 관계성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차례차례 뻗으며 세계를 통과하는 선들이 때로는 교차하고 한데 엮여 장소를만들기도 하지만 결코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 그런 모습이야말로 다양성이 아닐까요. 지금 제가 말한 대로 관계성을, 그리고 관계성들의 집합체인다양성을 이해하면 ‘바람직한 연결법‘도 다르게 보입니다. 당신 방법은 잘못됐어, 올바른 연결법이란 이런 거야, 하며 도보여행의 움직임에 제한을 두고 점과 점을 연결하듯이 ‘바람직한연결법‘을 말하기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도식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람들의 "이것이야말로 바람직한 방법이다."라는 자신만만한 주장이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그 주장들은 앞으로 뻗어나갈 예정이었던 선들도 점과 점 사이에서 적절한 말만 수송할 뿐인 경직된 연결선으로 바꿔버립니다. 그리고 스스로 연결점이 되길 바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지된 연결점이라면 고통도 생겨나지 않으니까요.
반대로 이런 생각도 듭니다. 미야노 씨보다 훨씬 건강하면서도 선을 그리지 않고 점에 머무르려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내부의 고통에 정신이 쏠려서 자신이 이제껏 선을 그렸다는 사실도, 자신에게 선을 계속 이어갈 여력이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중에는 스스로 점이 되는 걸로 모자라 괴로움 때문에 타인도 자신과 같은자리에 묶어두고 점으로 바꾸려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언젠가 어디에선가 반드시 마지막을 맞아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순간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알기에 저는 바람직하게 연결될 뿐인 점으로는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저에게 여력이 있는 한 세계를 지각하고 그 세계와 친밀한관계를 맺으며 계속 선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러다 만나는 다른 선과 새로운 선을 엮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미야노 씨가 그려온 선과 만나 지금껏 함께하면서 저는 그런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물론 일련의 일들에 관계된 사람들이 저의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저 지금까지 제가 ‘발자취‘를 남기기 위해 조금씩 모두에게 해왔던 것들이 서로 연결되기 시작해서 어쩌다 이 타이밍에 분출된 것입니다. 조금 자랑스럽게 말하면제가 이 세상에서 만난 사람들과 진실하게 마주하고 함께 발자취를 남기며 살아가는 행위‘를 해온 끝에 받은 사소한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저는 ‘시작‘ ‘움직임‘ ‘기획‘ ‘활동‘ 등을 적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계는 이처럼 언제나 새로운 시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흐르는 시간에서 점이 되어 위험성을 계산하고합리적으로 인생을 계획하여 타자와 일정한 형식대로 관계를맺으려 할 때, 혹은 자기만의 이야기에 틀어박히거나 타인에게모든 걸 내맡길 때,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눈치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란, 본래 시작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그런 세계에 나와서 타인과 만나 운동을 일으키는 와중에 ‘나‘라는 존재가 성립됩니다. 그 만남을 받아들이는 동안에 비로소 ‘나‘가 존재합니다.
사람은 어떤 때에 인생에서 의미를 찾고 운명을 발견해내는가.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말이 그저 멍하니 사는 걸 뜻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운명 속에서 어떻게 결단을 내리며 살아가는가. 언제 닥칠지 모르는 만남과 죽음, 상실의 우연이 운명 속에 존재하게 될 때 사람은어떻게 살아갈까. 이에 대해서 이소노 씨는 다음처럼 답하고 저에게 공을 던져주었습니다. 만약 운명이 정말로 있다면 무엇일까요. 인생에서 닥치는 영문 모를 현상을 받아들이고 (・・・) 함께 발자취를 남기며 살아가겠노라 각오하는 용기가 바로 운명인 것 같습니다. (…) (그것을) 머나먼 미래로 이어지는 선 위에 짜 넣으면, 비로소 그 의미는 ‘webs ofsignificance‘라고 부르기에 걸맞지 않을까요. 자, 구키 슈조는 두말할 필요 없이 『우연성의 문제』를 쓴 철학자이지만, 그가 최후에 다다른 것은 ‘운명‘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우연이 가득합니다. 아니, 애초에 우연밖에 없지요. 다만 우리는 사소한 우연 하나하나에서 의미를 찾
지 않고 가볍게 넘기며 살아갑니다. (오늘 먹은 빵이 단팥빵이든 크림빵이든, 어쩌다 보니 내 눈에 띄었을 뿐 전혀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무언가 중대한 문제를 정해야 할 때, 혹은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큰 사건(병, 자연재해, 연애, 임신등)과 직면했을 때, 우리는 인생에 등장한 우연의 터무니없음에 망연자실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우연을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결정‘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몇 가지 선택지 중에하나를 골라서 스스로 납득하는 것일까요? ‘당신이 결정한 일‘ 이고 당신 자신의 책임이니 혼자서 짊어지세요. 이 말은 책임소재가 ‘나‘에게 있다고 하는 것이겠지요. 일반적으로는 그렇게여길 것입니다. ‘당신이 결정한 일이니까‘라고 말할 때, 그 배경에는 ‘당신이 결정한 일‘은 당신 자신이 책임져야 하고 혼자 짊어져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꽤나 잘완성된 강한 존재일 것입니다. 처음부터 ‘나‘는 우연을 받아들이는 확고한 존재로 상정되어 있지요. 그런데 우리는 과연 처음부터 강한 존재가 되어 있을까요. 다시금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결정‘이란, 혹은 그와 가까운 ‘선택‘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매우 당연한 말이겠습니다만, 선택하기 위해서는 선택지가필요하고 그중 하나로 결정되지 않은 불확정한 상태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선택이란 불확정성, 우연성을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선택하고 결정하라는 것일까요. 필사적으로 위험성을 계산하려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공을 보장할 듯한 길을 계산으로 도출해 선택할까요? 아니면 실패가 무서우니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는 선택지는 피할까요? 하지만 무엇을 선택하든 잘될지 어떨지는 모릅니다. ‘선택‘에는 늘 불확정한 것이 따라붙는 법이니까요. 결국 우리는 때마침 나타났을 뿐인 우연을 마치 만들어진 ‘일‘인 양 선택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불확실한 인생이 어떻게 변해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어떤 나를 허용할 수 있겠는가, 이런 질문밖에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질문하며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택하는 순간 ‘나‘라는 존재는 확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선택함으로써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건 당신이 정했으니까‘ 같은 말로는 선택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선택이란 ‘고르고 결정한‘ 끝에 ‘나‘라는 존재가 태어나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쓴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선택이란 우
연을 허용하는 행위다. 그때 우리는 선택에 해당하는 일만 결단하는 것이 아니다. 불확실성과 우연성까지 포함한 일 전체에 대응하는 삶의 방식을 결단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니까 스스를 고르는 것이 아니다. 스스를 골랐기에 ㅇㅇ 한 사람이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우연을 받아들일 때야말로 ‘나‘라고 부를 만한 존재가 성립된다.
그래서 구키 슈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뚜렷이 나타난 상황의 우연성과 직면하여 정열적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무력한 초력이 운명의 자리"라고요. 풀어서 써보면 스스로는 어쩔 수 없는 우연에 휘말리면서(무력) 그 우연에 대응하는 와중에 자신이란 무엇인지 발견해내고 우연 속을 살아가는 것(초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무력‘이라는 단어에 현혹되지는 마세요. 단순히 두 손들고 항복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구키 슈조는 동시에 우연 속을 살아가는 강한 힘(초력)을 강조했고, 초력은 ‘정열적 자각‘이라고 할 만큼 강해야 한다고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정열, 강한 힘은 무엇일까요. 바로 이소노 씨가적었던 "연결점이 되지 않으려 저항하면서 사람들과 진실하게마주하고 함께 발자취를 남기며 살아가겠노라 각오하는 용기"
구키 슈조는 『우연성의 문제』의 결말에서 우연을 살아가는 것이란 ‘만나는 것‘이며, 그 만남이 "도처에 상호주체성intersubjectivity을 드러냄으로써 근원적 사회성을 구성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만남‘은 또 무엇일까요. 무엇과 만나는 것일까요. 당연하지만, 만남이 있으려면 나와 당신이라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만남을 하는 나도 당신도 우연한 만남에 의해 변해버린 사람일 것입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우연을받아들일 때 우리는 ‘나‘라는 존재를 발견하니까요. ‘나‘라는 존재는 그 순간 태어나니까요. 다시 말해 사람은 우연히 만난 타인을 통해서 ‘나‘를 낳는 셈입니다. 보통 자신이라 하면 이미 만들어진 존재를 떠올리지요. 하지만 지금 제가 얘기한 선택되고발견되고 태어난 ‘나‘는 홀로 성립된 것이 아닙니다. 만나는 시점에서 나와 당신은 모두 완성된 ‘나‘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타이밍이라고 적었습니다. 우연이 필연이 되고 운명으로 변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타이밍입니다. 이따금씩 지적하는 분들도 있는데, ‘타이밍timing‘이라는 단어는 사실 번역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단순한 ‘타임time‘이라면 물리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이라 해도 충분하지만, 거기에 ‘ing‘를 붙여 동명사가 되는 것이지요. 시간이 태어나는, 발생의 움직임이 ‘ing‘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발생하는 시간과 자신이 똑바로 만났을 때, 우리는 시기를 맞췄다거나 시기가 맞아떨어졌다거나 정확한 타이밍이었다고 합니다. 정신의학자 기무라빈은 우연성의 정신병리』라는 책에서 다음처럼 설명했습니다. 시간이라는 현상을 ‘타임‘이라는 객관화할 수 있는(현실적인) ‘대상‘ 으로서 이해하는 것 이외에 (...) 시간이란 대상적으로 고정될 수 있는 타임일 뿐 아니라 그때마다 항상 새로운 타임이 생겨나는 것, (...) ‘대상‘으로서의 시간, 사건으로서의 시간, 실재하고 활동하는actuality 시간을 표현하기 위해 ‘타이밍‘이라는 동명사를 애용하게 된것이 아닐까.
태어나는 시간, 즉 시간의 발생점을 느끼는 미세한 감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타이밍 속에서 시간의 발생을 감지합니다. 시기를 맞췄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시간의 발생을붙잡는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단 여기서 시간의 발생이란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발생하려는 시간을 감지한 우리가 시간을 잡아서 끌어낸 것이라고 하는 게적절하겠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이소노 마호와 미야노 마키코가 우연하게 만나 타이밍이라감지하고 서로가 그것을 붙잡은 순간, 터무니없는 일들이 차례차례 반전되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우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우연이 일어날 타이밍을 꿰뚫어 보고 그에 맞춰발생하는 시간을 움켜잡았기 때문에 우연이 일어난 것입니다. 시간의 발생점을 움켜잡는 것, 우여곡절 끝에 붙잡아 끌어내는것이야말로 얄팍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가까이에 있는 시간의두께의 정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제야 구키 슈조가 『우연성의 문제』의 결론에 적은 수수께끼 같은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구키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 자신의 깊은 곳으로 빠져들도록 우연이 때맞춰 해후
하게 해야만 한다." 우연은 알아서 자연스레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 발생만으로는 우연이 일어날 수 없으며, 우리가 그곳에 있기에 우연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각자 끌어낼 용기를 품고, 우연을 필연으로서 받아들일 각오를 지닌 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덕에 불가능했을지 모르는 우연이 일어났습니다. 우연과 ‘해후하게 한 것/마주치게 한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용기와각오가우연이 일어나는 상황은 우리 중 누군가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상황에서 우리는 새로운 ‘나‘를 발견합니다. 바로 그때문에 구키 슈조는 우연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무수한 부분과부분의 관계를 자각하는 것이며, 구체적인 형태를 갖춘 사회이전에, 그야말로 영혼을 나누어 가지는 것부터 시작하는 ‘근원적‘ 만남이 이뤄지는 상호적인 상황‘근원적 사회성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는 이와 같은 근원적 만남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그 만남을 위해서는 선을 그리겠다는 각오, "연결점이 되지 않으려 저항하면서 사람들과 진실하게 마주하고 함께 발자취를 남기며 살아가겠노라 각오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런 용기를 지니고 우연을 붙잡아 끌어낸다면, 근원적 만
남이 가득한 세계에 자신이 만들어낸 의미의 그물을 짜 넣을수 있습니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운명을 살아간다는 것은 세계를 향해뛰어드는 것입니다. 뛰어드는 순간 우리는 이 세계가 온갖 우연이라는 만남에서 ‘나‘를 발견해내어 새로운 ‘시작‘이 태어나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쩜 이 세계란 이토록 경이로울까, 저는 ‘시작‘을 앞에 두고사랑스러움을 느낍니다. 우연과 운명을 통해서 타자와 함께하는 시작으로 가득한 세계를 사랑합니다. 이것이 지금 제가 도달한 결론입니다. 이소노 마호 씨, 당신이 말하는 이야기는 결코 당신만의 것이 아닙니다. 발자취를 새길 각오가 있고 새로운 만남을 향해열려 있는, 사랑이 가득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저의 사색에 함께해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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