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 죽음을 앞둔 철학자가 의료인류학자와 나눈 말들
미야노 마키코.이소노 마호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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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쓴 철학서를 믿고 보는 편이다.
관점들이 새롭고 난해한 이론을 쉽게 서술해놓아 “아..” 하고 짧은 탄성을 속으로 내지를 때가 많다.
우연히 읽게된 이 책은 여태까지의 관점과는 다르게 좋다.
죽음과 삶에 실재하는 내밀한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중간 중간 삶을 통찰하는 철학자의 문장들은 나에게 수많은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이 보게 될 풍경이 그 인연 너머에 있는
‘시작‘으로 가득한 세계로 이어지길 기도합니다.
ㅡ미야노 마키코

그렇지만 요즘 고쿠보 씨는 승률 5할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연패 후 3연승을 거두었는데 바로 직전 시합은 TKO로 시원하게 승리했고, 6월에는 드디어 일본 랭커에 도전할 예정입니다.
고쿠보 씨를 아는 이들은 이런 과정에서 당연히 어떤 스토리를읽어냅니다. 은퇴를 2년 앞둔 (프로복서는 원칙상 37세에 의무적으로 은퇴해야 합니다.) 고쿠보 아키라, 승리에 버림받은 시기가 있었지만 시련을 뛰어넘고 강해져서 마침내 일본 랭커에도전하다. 이런 감동적인 스토리를 말이지요.
그런데요, 정작 고쿠보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4연패를 하는 동안에는 분명히 여러 번 그만둘까 고민했지만, 그 슬럼프를 극복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많이 노력했다는 말을 듣곤 하는데, 사실 그렇게 많이 노력했는지도 모르겠다. 감동적인 이야기라고 해주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정도로감동적인 것 같지는 않다. "왜 복싱을 시작했어?"라고 누가 물어보면 그럴듯하게 답하지만, 그게 진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이렇게 되리라고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것 같을 때도 있다. 잘 모르겠지만, 그때그때 나에게 온 만남과말, 기회 등에 몸을 싣다 보니 어느새 지금 이 자리에 있다.

어느 특정한 시점에 달라진 것이냐, 대화 중에 커다란 전환점이 있었느냐, 아니면 좀더 잘하려고 한 단계 뛰어넘은 것이냐,
하고 물어본다면 그런 대단한 일은 없었습니다. 느긋하게 수다를 떨다 보니 자연스레 ‘어중간한 환자‘로 자리를 잡았지요. 사소한 화제 전환과 변화가 거듭되는 과정에서 미처 알아채지 못한 사이에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저‘라는 존재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지 않았을까요. 저는 지금껏 이소노 씨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우연을 붙잡으며, 지금에몸을 맡기고, 의연하게 결단하려 한다고 말해왔습니다. 어떤 의미로는 착실한 미야노 마키코가 극적인 변화에 뛰어드는 이미지를 그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변화란 그렇게 극적으로 벌어지지 않고, 훨씬 뭉근하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는지도 모릅니다.
저라는 사람 역시 매사에 분명하지 않고 상대방과 관계 속에서시시때때로 변하며 그때마다 뒤늦게 깨닫는, 훨씬 애매한 존재가 아닐까요.
본래 일상생활이란 다양한 상태가 얼룩덜룩하게 섞인 것과비슷합니다. 우리가 그 얼룩무늬의 이쪽저쪽을 왔다 갔다 하는사이에 일상은 느릿느릿 나아가지요.

사람은 진짜로 시간을 뛰어넘을 수는 없기에 현재 시점에서 상대를 믿고 미래의 약속을 맺는다는 건 ‘모험‘이자 ‘도박‘입니다.
일상과 신뢰, 그리고 약속을 둘러싼 와쓰지 데쓰로의 분석은언제 봐도 감탄이 나옵니다. 다만 대체 어떤 사람이라야 ‘약속할 능력‘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떠오르기도 하지요. 언젠가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여 미완결인 채 끝날 수밖에 없는인간이 과연 미래에 대해 미리 결정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요? 죽음의 가능성을 일단 생각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미래에 대해 결정적인 태도를 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약속을 맺습니다.
약속으로 죽음의 가능성을 은폐하는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약속이란 죽음의 가능성과 무책임함을 모두 끌어안고 본래는 할 수 없는 ‘결정적 태도‘를 ‘그럼에도‘ 취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무모한 모험, 또는 도박을 눈앞의 상대에게 ‘지금‘
표명하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당신이 있기에 비로소 약속이라

는 도박을 감행하고, 될지 안 될지 모를 일을 실현해내기 위해모험에 나선다. 당신이 있기에 마음먹는 ‘지금‘의 결단이야말로
‘약속‘의 요점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신뢰란 미래를 향하는 것이라기보다 지금 눈앞에있는 당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와쓰지 데쓰로가 인간의 진실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했던 모양입니다.

저는 왜 그렇게까지 ‘우연‘에 의문을 품고 설명하려 했을까요?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우연에야말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살아가려 하는 힘‘의 시초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제가 20년 넘게 읽어왔던 『우연성의 문제를 펼쳤습니다. 서두에서 구키 슈조는 우연성이란 ‘없는 것을 있게 하는존재‘라고 간략하게 정의했습니다. 다시 말해 ‘있는 것‘도 ‘없는것‘도 가능한 것입니다. 제 유방암은 분명히 유전성이 아니기때문에 (유전성이라 해도 100퍼센트 암에 걸리지는 않습니다만) 저는 암에 걸리지 않고 오늘도 건강하게 술을 마셨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암에 걸렸을 가능성도 당연히 있었지요.
여기까지 살펴보면 제가 암에 걸린 우연은 주사위를 던졌더니 6이 나왔더라 하는 확률의 문제로 읽힐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구키 슈조는 한 발 나아가 우리의 현실에 있는 우연성을 "유有

와 무의 접촉면에 개재하는 극한적 존재"라든가 "유가 무에뿌리내리고 있는 상태"라고 고쳐 말했습니다. 중요한 점은 ‘암에 걸릴 수도‘ 혹은 ‘암에 걸리지 않을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제가 암에 걸려버렸다는 사실입니다. ‘불구하고’로 표현하는 반전, 이 역접이야말로 제가 유방암에 걸려버린 사실을 우연으로서 받아들인 사정의 실체입니다. 구키 슈조는 계속해서 인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지 질문했습니다. 저 역시 그 문제를고민해왔지요.
글이라면 다음처럼 답할 수 있습니다. 현실이란 없을 수 있던 것이 있게 되는‘ 반전의 힘이 나타난 결과여서, 구키 슈조는우연성을 ‘실재의 생산 원리‘ 또는 ‘생산점‘이라 불렀다고요.
저는 ‘있기 어려운 것이 있는 경우‘를 보고 놀라워하면서 우연을 아름답게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야구를 보다감동했을 때, 저는 선수들이 일어날지 모르는 가능성을 바라보고 현재에서 손을 떼어냄으로써 현실이 태어난다고 적었습니다. 그럴 때 현실의 발밑에 자리한 무는 간단히 뿌리칠 수 있는 것이며, 다가오는 미래는 손을 뻗으면 바로 잡을 수 있는 것같습니다. 가볍게 무를 뿌리치고 존재를 향해 나아가는 순간.
그런데 제가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생산점만 우연으로 이야

기하려 했을까요.
아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우연에 의문을 품고 ‘없을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것‘을 계속 설명하려 한 뿌리에는무에 사로잡혀도 필사적으로 벗어나려 애쓰는 삶에 대한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없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는 것‘을 설명함으로써 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 하는 집착이 있었지요. 지금 저는 제 병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불쾌하기까지 한 힘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삶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살기 위해서 글을 쓰려고 합니다.

앞서 소개한 기사를 다시 예로 들면 받아주기, 이해, 귀 기울이기 같은 표현들이 상징하듯 다양성 사회는 사람들이 악수하면서 연결되거나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받아주는, 정지 화면같은 모습으로 그려지곤 합니다. (받아주려면 정지해야 하니까요.) 연결, 유대 같은 말들도 마찬가지라 점과 점이 이어진 모습(연결선)으로 강조되곤 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점과 점이 연결되는 도식을 위에서 내려다본 사람들이 네가 연결하는법은 잘못됐어, 이렇게 해야 해, 하고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양성 사회와 그것을 지탱하는 관계란 정지 화면이나 평면도로는 전혀 포착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아닐까요?
멈춰 서서 악수하거나 상대를 받아준다고 관계성이 만들어지지는않습니다. 함께 운동하여 계속 선을 그리면서 세계를 통과하는 것, 그러는 와중에 서로를 기분 좋게 하는 언동을 발견하고 그 발견을 발자취로 남긴 다음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것, 관계성을 만드는 것이란바로 이렇게 앎과 깨달음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움직임(운동)이아닐까요.

저는 운동이 관계성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차례차례 뻗으며 세계를 통과하는 선들이 때로는 교차하고 한데 엮여 장소를만들기도 하지만 결코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 그런 모습이야말로 다양성이 아닐까요.
지금 제가 말한 대로 관계성을, 그리고 관계성들의 집합체인다양성을 이해하면 ‘바람직한 연결법‘도 다르게 보입니다. 당신 방법은 잘못됐어, 올바른 연결법이란 이런 거야, 하며 도보여행의 움직임에 제한을 두고 점과 점을 연결하듯이 ‘바람직한연결법‘을 말하기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도식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람들의 "이것이야말로 바람직한 방법이다."라는 자신만만한 주장이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그 주장들은 앞으로 뻗어나갈 예정이었던 선들도 점과 점 사이에서 적절한 말만 수송할 뿐인 경직된 연결선으로 바꿔버립니다. 그리고 스스로 연결점이 되길 바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지된 연결점이라면 고통도 생겨나지 않으니까요.

반대로 이런 생각도 듭니다. 미야노 씨보다 훨씬 건강하면서도 선을 그리지 않고 점에 머무르려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내부의 고통에 정신이 쏠려서 자신이 이제껏 선을 그렸다는 사실도, 자신에게 선을 계속 이어갈 여력이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중에는 스스로 점이 되는 걸로 모자라 괴로움 때문에 타인도 자신과 같은자리에 묶어두고 점으로 바꾸려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언젠가 어디에선가 반드시 마지막을 맞아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순간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알기에 저는 바람직하게 연결될 뿐인 점으로는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저에게 여력이 있는 한 세계를 지각하고 그 세계와 친밀한관계를 맺으며 계속 선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러다 만나는 다른 선과 새로운 선을 엮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미야노 씨가 그려온 선과 만나 지금껏 함께하면서 저는 그런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물론 일련의 일들에 관계된 사람들이 저의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저 지금까지 제가 ‘발자취‘를 남기기 위해 조금씩 모두에게 해왔던 것들이 서로 연결되기 시작해서 어쩌다 이 타이밍에 분출된 것입니다. 조금 자랑스럽게 말하면제가 이 세상에서 만난 사람들과 진실하게 마주하고 함께 발자취를 남기며 살아가는 행위‘를 해온 끝에 받은 사소한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저는 ‘시작‘ ‘움직임‘ ‘기획‘ ‘활동‘ 등을 적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계는 이처럼 언제나 새로운 시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흐르는 시간에서 점이 되어 위험성을 계산하고합리적으로 인생을 계획하여 타자와 일정한 형식대로 관계를맺으려 할 때, 혹은 자기만의 이야기에 틀어박히거나 타인에게모든 걸 내맡길 때,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눈치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란, 본래 시작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그런 세계에 나와서 타인과 만나 운동을 일으키는 와중에
‘나‘라는 존재가 성립됩니다. 그 만남을 받아들이는 동안에 비로소 ‘나‘가 존재합니다.

사람은 어떤 때에 인생에서 의미를 찾고 운명을 발견해내는가.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말이 그저 멍하니 사는 걸 뜻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운명 속에서 어떻게 결단을 내리며 살아가는가. 언제 닥칠지 모르는 만남과 죽음, 상실의 우연이 운명 속에 존재하게 될 때 사람은어떻게 살아갈까.
이에 대해서 이소노 씨는 다음처럼 답하고 저에게 공을 던져주었습니다.
만약 운명이 정말로 있다면 무엇일까요. 인생에서 닥치는 영문 모를 현상을 받아들이고 (・・・) 함께 발자취를 남기며 살아가겠노라 각오하는 용기가 바로 운명인 것 같습니다. (…) (그것을) 머나먼 미래로 이어지는 선 위에 짜 넣으면, 비로소 그 의미는 ‘webs ofsignificance‘라고 부르기에 걸맞지 않을까요.
자, 구키 슈조는 두말할 필요 없이 『우연성의 문제』를 쓴 철학자이지만, 그가 최후에 다다른 것은 ‘운명‘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우연이 가득합니다. 아니, 애초에 우연밖에 없지요. 다만 우리는 사소한 우연 하나하나에서 의미를 찾

지 않고 가볍게 넘기며 살아갑니다. (오늘 먹은 빵이 단팥빵이든 크림빵이든, 어쩌다 보니 내 눈에 띄었을 뿐 전혀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무언가 중대한 문제를 정해야 할 때, 혹은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큰 사건(병, 자연재해, 연애, 임신등)과 직면했을 때, 우리는 인생에 등장한 우연의 터무니없음에 망연자실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우연을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결정‘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몇 가지 선택지 중에하나를 골라서 스스로 납득하는 것일까요? ‘당신이 결정한 일‘
이고 당신 자신의 책임이니 혼자서 짊어지세요. 이 말은 책임소재가 ‘나‘에게 있다고 하는 것이겠지요. 일반적으로는 그렇게여길 것입니다. ‘당신이 결정한 일이니까‘라고 말할 때, 그 배경에는 ‘당신이 결정한 일‘은 당신 자신이 책임져야 하고 혼자 짊어져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꽤나 잘완성된 강한 존재일 것입니다. 처음부터 ‘나‘는 우연을 받아들이는 확고한 존재로 상정되어 있지요. 그런데 우리는 과연 처음부터 강한 존재가 되어 있을까요.
다시금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결정‘이란, 혹은 그와 가까운
‘선택‘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매우 당연한 말이겠습니다만, 선택하기 위해서는 선택지가필요하고 그중 하나로 결정되지 않은 불확정한 상태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선택이란 불확정성, 우연성을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선택하고 결정하라는 것일까요. 필사적으로 위험성을 계산하려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공을 보장할 듯한 길을 계산으로 도출해 선택할까요? 아니면 실패가 무서우니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는 선택지는 피할까요? 하지만 무엇을 선택하든 잘될지 어떨지는 모릅니다. ‘선택‘에는 늘 불확정한 것이 따라붙는 법이니까요.
결국 우리는 때마침 나타났을 뿐인 우연을 마치 만들어진
‘일‘인 양 선택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불확실한 인생이 어떻게 변해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어떤 나를 허용할 수 있겠는가, 이런 질문밖에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질문하며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택하는 순간 ‘나‘라는 존재는 확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선택함으로써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건 당신이 정했으니까‘ 같은 말로는 선택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선택이란 ‘고르고 결정한‘ 끝에 ‘나‘라는 존재가 태어나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쓴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선택이란 우

연을 허용하는 행위다. 그때 우리는 선택에 해당하는 일만 결단하는 것이 아니다. 불확실성과 우연성까지 포함한 일 전체에 대응하는 삶의 방식을 결단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니까 스스를 고르는 것이 아니다. 스스를 골랐기에 ㅇㅇ 한 사람이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우연을 받아들일 때야말로 ‘나‘라고 부를 만한 존재가 성립된다.

그래서 구키 슈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뚜렷이 나타난 상황의 우연성과 직면하여 정열적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무력한 초력이 운명의 자리"라고요. 풀어서 써보면 스스로는 어쩔 수 없는 우연에 휘말리면서(무력) 그 우연에 대응하는 와중에 자신이란 무엇인지 발견해내고 우연 속을 살아가는 것(초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무력‘이라는 단어에 현혹되지는 마세요. 단순히 두 손들고 항복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구키 슈조는 동시에 우연 속을 살아가는 강한 힘(초력)을 강조했고, 초력은
‘정열적 자각‘이라고 할 만큼 강해야 한다고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정열, 강한 힘은 무엇일까요. 바로 이소노 씨가적었던 "연결점이 되지 않으려 저항하면서 사람들과 진실하게마주하고 함께 발자취를 남기며 살아가겠노라 각오하는 용기"

구키 슈조는 『우연성의 문제』의 결말에서 우연을 살아가는 것이란 ‘만나는 것‘이며, 그 만남이 "도처에 상호주체성intersubjectivity을 드러냄으로써 근원적 사회성을 구성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만남‘은 또 무엇일까요. 무엇과 만나는 것일까요. 당연하지만, 만남이 있으려면 나와 당신이라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만남을 하는 나도 당신도 우연한 만남에 의해 변해버린 사람일 것입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우연을받아들일 때 우리는 ‘나‘라는 존재를 발견하니까요. ‘나‘라는 존재는 그 순간 태어나니까요. 다시 말해 사람은 우연히 만난 타인을 통해서 ‘나‘를 낳는 셈입니다. 보통 자신이라 하면 이미 만들어진 존재를 떠올리지요. 하지만 지금 제가 얘기한 선택되고발견되고 태어난 ‘나‘는 홀로 성립된 것이 아닙니다. 만나는 시점에서 나와 당신은 모두 완성된 ‘나‘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타이밍이라고 적었습니다. 우연이 필연이 되고 운명으로 변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타이밍입니다. 이따금씩 지적하는 분들도 있는데, ‘타이밍timing‘이라는 단어는 사실 번역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단순한 ‘타임time‘이라면 물리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이라 해도 충분하지만, 거기에
‘ing‘를 붙여 동명사가 되는 것이지요. 시간이 태어나는, 발생의 움직임이 ‘ing‘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발생하는 시간과 자신이 똑바로 만났을 때, 우리는 시기를 맞췄다거나 시기가 맞아떨어졌다거나 정확한 타이밍이었다고 합니다. 정신의학자 기무라빈은 우연성의 정신병리』라는 책에서 다음처럼 설명했습니다.
시간이라는 현상을 ‘타임‘이라는 객관화할 수 있는(현실적인) ‘대상‘
으로서 이해하는 것 이외에 (...) 시간이란 대상적으로 고정될 수 있는 타임일 뿐 아니라 그때마다 항상 새로운 타임이 생겨나는 것,
(...) ‘대상‘으로서의 시간, 사건으로서의 시간, 실재하고 활동하는actuality 시간을 표현하기 위해 ‘타이밍‘이라는 동명사를 애용하게 된것이 아닐까.

태어나는 시간, 즉 시간의 발생점을 느끼는 미세한 감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타이밍 속에서 시간의 발생을 감지합니다. 시기를 맞췄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시간의 발생을붙잡는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단 여기서 시간의 발생이란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발생하려는 시간을 감지한 우리가 시간을 잡아서 끌어낸 것이라고 하는 게적절하겠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이소노 마호와 미야노 마키코가 우연하게 만나 타이밍이라감지하고 서로가 그것을 붙잡은 순간, 터무니없는 일들이 차례차례 반전되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우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우연이 일어날 타이밍을 꿰뚫어 보고 그에 맞춰발생하는 시간을 움켜잡았기 때문에 우연이 일어난 것입니다.
시간의 발생점을 움켜잡는 것, 우여곡절 끝에 붙잡아 끌어내는것이야말로 얄팍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가까이에 있는 시간의두께의 정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제야 구키 슈조가 『우연성의 문제』의 결론에 적은 수수께끼 같은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구키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 자신의 깊은 곳으로 빠져들도록 우연이 때맞춰 해후

하게 해야만 한다." 우연은 알아서 자연스레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 발생만으로는 우연이 일어날 수 없으며, 우리가 그곳에 있기에 우연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각자 끌어낼 용기를 품고,
우연을 필연으로서 받아들일 각오를 지닌 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덕에 불가능했을지 모르는 우연이 일어났습니다. 우연과
‘해후하게 한 것/마주치게 한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용기와각오가우연이 일어나는 상황은 우리 중 누군가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상황에서 우리는 새로운 ‘나‘를 발견합니다. 바로 그때문에 구키 슈조는 우연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무수한 부분과부분의 관계를 자각하는 것이며, 구체적인 형태를 갖춘 사회이전에, 그야말로 영혼을 나누어 가지는 것부터 시작하는 ‘근원적‘ 만남이 이뤄지는 상호적인 상황‘근원적 사회성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는 이와 같은 근원적 만남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그 만남을 위해서는 선을 그리겠다는 각오, "연결점이 되지 않으려 저항하면서 사람들과 진실하게 마주하고 함께 발자취를 남기며 살아가겠노라 각오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런 용기를 지니고 우연을 붙잡아 끌어낸다면, 근원적 만

남이 가득한 세계에 자신이 만들어낸 의미의 그물을 짜 넣을수 있습니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운명을 살아간다는 것은 세계를 향해뛰어드는 것입니다. 뛰어드는 순간 우리는 이 세계가 온갖 우연이라는 만남에서 ‘나‘를 발견해내어 새로운 ‘시작‘이 태어나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쩜 이 세계란 이토록 경이로울까, 저는 ‘시작‘을 앞에 두고사랑스러움을 느낍니다. 우연과 운명을 통해서 타자와 함께하는 시작으로 가득한 세계를 사랑합니다. 이것이 지금 제가 도달한 결론입니다.
이소노 마호 씨, 당신이 말하는 이야기는 결코 당신만의 것이 아닙니다. 발자취를 새길 각오가 있고 새로운 만남을 향해열려 있는, 사랑이 가득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저의 사색에 함께해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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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존재하는 희망은, 세계와 다른 사람은 못 바꿔도최소한 자기 자신만은 어느 정도 변화시키고 개선시킬 수 있다는 것인 듯하다. 그리고 자신을 개선하는 사람 덕분에 세상은 은밀히 구원된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사는 게 맞는 것일까?‘라고 묻지 말아야 한다. 그런 질문에는 답이 없다. 모든 방식은 나름 맞는 방식이다. 오히려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나는 나다. 나는 이렇게 생겨먹었다. 내 안에는 이런 필요와 이런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삶을견디고, 가능한 한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난 무엇을 해야 할까?‘ 정말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소리를 듣는다면그 대답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넌 그런 사람이야. 그러니 다른사람들이 너와 다르다고 그들을 시기하거나 경멸해서는 안 된단다. 네가 ‘옳은지‘를 묻지 말고, 네 영혼과 그 영혼의 필요를 네몸처럼, 이름처럼, 태어난 집안처럼 받아들이렴. 주어진 것, 피할수 없는 그것을 긍정하고, 그 편이 되어주어야 해. 온 세상이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나는 이 이상의 것은 알지 못한다. 삶을 더 수월하게 만들어줄 지혜를 더는 알지 못한다. 삶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삶이쉬운지, 쉽지 않은지를 물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삶에 절망할지도 모른다. 그건 모두의 자유다ㅡ 아니면 건강하고 유능-
해 보이는 사람들처럼, 문제없고 무심해 보이는 사람들처럼, 우리의 본성을 우리에게 오롯이 맞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의영혼에 모든 정당성을 부여해야 한다.
나는 이렇게 조언을 하지만, 사실 조언의 가치를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사람은 더도 덜도 아니고, 자신의 본성이 허락하는만큼만 조언을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바꾸어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주어진 삶을 더 많이 인정하고 받아들일수록,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내적으로화해할수록 더 강한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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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베스트셀러에 있어 읽고 싶었던 책을 오늘 우연히 도서관에서 만났다. 반가웠던 책들 7권 중에 제일 반가웠던 책.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자기 자신과 많이 싸워온, 싸우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겉모습을 보고 판단할 때가 많은 나같은 사람에게 이 사람은 참 가늠하기 어려운 사람일 것 같다.

커가면서 알게 된다는 세상 물정과 현실, 한계를 되도록 모르고 싶다. 내 능력으로 안 되는 것과 되는 것을 분간하지 못해서 바보같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다. 나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말이 겸손의 너스레가 아니라실제로도 그렇게 믿어서 실패할 때의 데미지가 작았으면 좋겠다. 성공이 어색하고 실패가 익숙하면 좋겠다. 시도해온 일들보다 도전해볼 다음 기회가 훨씬 더 많았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살다가 내가 나이가 들어 더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때가 왔을 때 그 이유를 싱겁게 나이나 세월에서 찾지 않았으면좋겠다. 더 이상 설레지 않는다는 것을 인생의 패배로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고 도전할 힘도 용기도 없는 것을 굴복으로는 더더욱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한테 실망했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기절할 것 같았다. 듣고 싶지 않은 말 중에서도 가장 듣기 힘든 말이었다. 실망했다는 건 나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기대를 먹고사는 내게 그 사람의 기대가 꺾였다는 건 매달려 있는 사다리 다리를 걷어차는 것인 걸.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보다 실망했다는 말을 듣는 꿈을꾼 날의 베개가 더 축축했다. 그런 아침은 온몸이 저릿해서 하루 종일 조심하곤 했다.
어른들에게 혼이 날 때나 친구와 말다툼으로 투덕거리는 동안에도 실망했다는 말을 들으면 그 순간 뇌가 흔

들리고 앞뒤 상황이나 문맥 없이 미안하단 말이 먼저 나온다. 오해가 있다고, 잘잘못을 따지자면 내가 먼저 잘못한 것은 아니라고 하고 싶은 마음은 미뤄두고 실망이란단어를 듣기 힘들어서 냅다 사과부터 하게 된다. 사이가좋지 않았던 사람이어도 내게 실망했다고 말하면 이 사람이 사실 나를 좋게 보고 있었는데 내가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자책을 시작하는 것이다. 실망이란 두글자는 불안해서 내가 먼저 스스로 채워버리는 수갑 같았다.
모나고 모난 나는 경계심이 심해서 그런지 잘 모르는사람은 대개 안 좋아한다. 다만 그 사람이 내게 조금이라도 호감을 표현하면 경쟁이라도 하듯이 먼저 더 많이 그에게 정을 퍼주곤 한다. 속으로 안 좋아했던 그 잠깐이 미안해서 그만큼 더 많이 좋아하게 된다. 내가 어떤 사람을좋아할 때 대부분의 이유는 나를 좋아해 준다는 것이다.
컹컹대고 경계하다가 가까이 가면 꼬리가 부러질 듯 흔들어대는 시골 진돗개를 볼 때마다 꼭 나 같다고 생각한다.

내가 사람을 대하는 첫 번째 기준이 그 사람이 가진 나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다 보니 스텝이 자꾸 꼬였다. 그때는 실망했을 때가 서로를 알아가기 가장 좋은순간이라는 것을 몰랐다. 실망은 그 사람에 대한 업 앤 다운 게임에 불과하다. 나라는 숫자를 맞추기 위해 업 다운으로 영점을 향해가는 것뿐인데, 나는 상대가 외치는 다운이 무서워 내 숫자를 바꿔갔다. 나를 너무 좋게만 보는것은 나를 나쁘게만 보는 것만큼 안 좋다는 것을 몰랐다.
나를 한없이 좋게만 봐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원래의 나보다 좋게 보는 것은 내버려 두고 나쁘게 보는것을 바로 잡기에만 급급했다. 서로에게 현명하게 실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나는 학창시절의 반 이상을 부모님께 잘못한 나는 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 허비했다. 그만큼 발전도 더뎠고 부모님께 더 큰 실망을 안겨드렸다. 첫 중간고사를 잘 못 봤을 때, 거짓말한 것이 들켰을 때, 입시에서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 진로를 다른 방향으로 잡

기로 했을 때 모두가 내 모습인데 나는 부정하느라 바빴다. 그런 결과들을 인정하기에 당시의 나는 너무 작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누군가에게 실망감을 안겨 주었을 때 내가 먼저 해야하는 것은 기대에 못 미친 나도 나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잘 나온 사진만 내 얼굴이 아니듯이 기대에 부응한나만 내가 아니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실수했을 때의나를 부정하면 앞으로 실망할 일만 있다.
어떤 분야에서 실력 있는 사람의 조건 중 하나는 내실력이 부족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믿는다. 상대방을 실망시켰을 때 더 자신을 객관적으로 내보일 수 있겠다고 생각해야만 그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할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실망할 때가 더 나은내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나에 대한 기댓값과 다른결과가 나왔을 때의 좌절감은 익숙해지지 않지만, 오히려 더 정확한 값을 위한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고 혼잣말을 삼키기로 한다. 업다운 게임은 적은 시도로 정답을

맞히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확한 숫자를 알아내어 필요할 때에 외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매일 스스로와 상대방에게 실망하고 실망시키며 답을찾아갈 것이다.

서점에서 유난히 얇은 시집을 보면 시인이 얼마나 하고싶은 말이 많았는지 생각하게 된다. 하고 싶은 말일수록하지 않는 성격의 사람들이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고 시간을 달이고 달여 한 방울로 만들어 내면 그것이 한 행이다. 그동안 사랑도 인생도 건강도 그 한 방울에 같이 녹아지는지 모르고 허리가 다 굽도록 손목이 삭도록 부채질하고 살려낸 부뚜막 불씨를 보며 드는 생각을 또 종이에적어 또 주머니에 넣어둔다. 그래서 시집은 너무 뜨거워맨손으로 냉큼 잡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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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카의 말과 저서를 편집한 책
아이들이 공연을 보는 사이 카페에 앉아 죽 훑어보다
마음에 몇 개 남기고 싶은 글들을 발견했다

공부한다고 완벽한 지혜를 더얻은 것은 아닙니다우리는 지혜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명예롭고, 용감하고,
당당한 말을 왜곡해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지혜를 공부하는 사람이 이미 완벽한 지혜를 얻었다고 생각해도 곤란합니다. 아직 지혜를 배우고 있는 사람이라면이렇게 말할 겁니다.
"나는 다른 사람이 존경할 만한 말만을 입 밖에 내려고노력하지만, 여전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덕 속에 살고있습니다. 그러니 나는 내가 한 말대로 완벽하게 살 수는없습니다. 아직까지 스스로를 다듬어 인격을 수양하고 훌륭한 본보기가 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운 목표를 전부 이뤘을 때 비로소 언행일치를 할 수있을 겁니다."
한편 선을 완벽에 가깝게 추구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겁니다.
"우리에게는 애초에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나아가 현자라면 이렇게 대꾸하겠죠.됩니다.
"나는 말과 행동을 다르게 하며 산 적이 없소. 나의 말을 잘못 알아들은 사람이 있을 뿐이오. 그가 내 목소리에귀를 기울이기는 했지만 그 속에 숨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탓이오."

부유함은 선이 아닙니다. 부가 선이라면 부를 지닌 사람은 모두 선할 겁니다. 하지만 사악한 사람 또한 부를 소유할 수 있으니, 선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는 없습니다. 부가 있으면 삶이 안락해지니 유용하고 좋은 것이라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다만 이렇게 구분한 미덕 중 한쪽을 고를 수 있다면 저는 피땀을 흘려야만 얻을 수 있는 미덕보다는 비교적 수월하게 손에 넣을 수 있는 미덕을 선택할 겁니다.

폭풍이 막 지나간 바다에는 거센 파도가 일렁입니다.
잔잔한 바다에도 잔물결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지난 일에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지 마십시오. 자기를 질책하며 화를 내거나 다른 사람에게 충고를 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에게 확신을 가지세요. 그래야 올바른 길을 걷고있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사방으로 뻗어 있는 수많은 갈림길에서도 이를 의심하지 마십시오. 확신을 잃는 순간 바로옆에 올바른 길을 두고 헤매게 될 테니까요.

누군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흔들림 없이 잔잔한 마음을 그리스어로 ‘에우티미아euthyimia‘라고 합니다. 데모크리토스는 에우티미아, 즉 ‘영혼의 안녕‘이라는 주제로 훌륭한 논문을 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잔잔한 마음의 상태를 평온함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꼭 그리스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표현을 사용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것은 항상 안정적이고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유지하고, 내면에 집중하며, 스스로를 기껍게 바라보는 일입니다.
‘평온함‘이란 어떤 일에도 들뜨거나 낙심하지 않고 늘평화를 유지하는 마음의 상태를 일컫습니다.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변덕스러운 사람은 산을 넘고바다를 건너 온 세상을 떠돌면서 스스로를 증명하려고 합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 떠나겠다."
모험가는 좋은 경치를 찾아서 충분히 감상한 다음, 이제거친 곳으로 눈을 돌립니다.
"험한 땅으로 향하는 길을 개척하겠다."
기껏 험지를 찾아서는 이제는 눈을 즐겁게 해줄 풍경이없어서인지 무언가 부족함을 느낍니다.
"겨울에도 날씨가 온화한데다가 항구가 발달해서 고대부터 수많은 사람이 터를 잡고 살던 곳으로 가자."
그러고는 군중이 떠드는 소리를 들은 지 오래됐으니 사람 구경을 하러 떠납니다.
"이제 도시로 방향을 틀겠다."
이들은 한 여행이 끝나기 무섭게 다른 여행지를 찾아떠납니다. 루크레티우스 Lucretiu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에게서 달아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자신에게서 달아나지 않으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모든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신에게서벗어날 수 없으며, 그 부담은 어떤 짐보다 무겁게 어깨를짓누르고 있습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고난은 환경이나 장소가 아닌 자신의 결점에서 비롯됩니다. 나약한 사람은 인내가 부족하기에 노력을 계속 이어가거나 쾌락을 절제하지 못할 뿐 아니라 어떤 행위를 오랜 기간 지속할 수 없습니다. 툭하면 목적을 바꾸니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같은 자리에 되돌아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새로운 시도를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이런 자기 결점을 견디지 못해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에게서 달아나는 사람은 제멋대로 살면서 시간을낭비하다가 세상만사가 귀찮아지면 이렇게 불평합니다.
"언제까지 똑같은 나날을 견디며 살아야하지?"

무엇보다 평온한 마음을 원한다면 외부의 관심사에서벗어나 자신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자기를 믿고, 좋아하고,
존중하며, 타인의 사정에 개입하는 습관을 멀리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에게 헌신하십시오. 또한 손실을 가볍게 넘기고 고난을 온화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다스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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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추천해준 영화를 보려고 했지만, 여의치않아 책으로 보게된 이야기.
2개의 도서관에서 첫 시작은 내가 처음 넘기는 책으로 읽고, 대부분의 내용은 빛바랜 책으로 읽게 된 책.
오베씨의 따뜻함에 잃었던 인류애를 채우고,
겉과 속이 한결같은 어른 김장하가 한국에 있다면
겉과 속이 다르지만 매력있는 오베가 스웨덴에 있다.
내가 이해해야 하고 알아야 하는 이 넓은 스펙트럼을 한 뼘정도는 더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오베와 소냐의 이야기에서 나와 남편을 엿보게 되어
처음으로 남편에게 내가 읽은 책을 권하게 되었다.
처음엔 재밌어서 권했지만, 좀더 내 마음을 들여다보니 나는 남편에게 나에게 오베같은 사람이 되어달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과연…?

그해 최악의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밤, 철로를 오르내릴 때쓰곤 했던 낡은 트럭이 마을 20킬로미터 밖에서 고장이 났을 때,
오베는 드라이버 하나와 거즈 테이프 반 통만 가지고 트럭을 수리해냈다. 그 뒤로 철로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베는 ‘괜찮은 녀석‘으로 인정받았다.
저녁이면 그는 소시지와 감자를 데쳤고, 식사를 하는 동안 부엌 창을 통해 바깥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는 일을 하러 나갔다. 그는 이런 일과가 좋았다. 늘 벌어질 일을예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아버지가 죽고 난 뒤로, 그는 해야 할일을 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점점 더 차별을두었다. 실천하는 사람과 말만 하는 사람들을 구별했다. 오베는점점 더 말을 줄이고 점점 더 실천을 했다.
오베는 친구가 없었다. 반면 적도 거의 없었다. 톰을 제외하고는 톰은 현장 주임으로 승진하고 나서부터 오베의 인생을 가능한 한 피곤하게 만들고자 갖은 애를 썼다. 그는 오베에게 가장더럽고 힘든 일을 맡겼고, 소리를 질러댔으며, 아침 식사 때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객차를 점검하라며 보내놓고는 오베가 선로 위에 무방비하게 누워 있을 때 객차를 작동시켰다. 오베가 놀

라 몸을 던져 간신히 빠져나오자 톰은 경멸하듯 웃으며 소리를질렀다. "조심하라고, 안 그러면 네 아비처럼 될 테니까!"
하지만 오베는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었다. 자기보다 두 배나 큰 사내에게 도전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매일 출근하여 떳떳이 지냈다. 아버지도 그렇게 해서 잘 살았으니 오베도 그렇게 해야 했다. 오베의 동료들은 그의 진가를 알게 되었다. "말을 많이안 하는 사람은 헛소리도 안 퍼뜨리지." 어느 날 오후 철로를 따라 내려가던 중 작업장 선배 중 하나가 그에게 말했다. 오베는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어떤 건 이해하고, 어떤 건 이해하지못했다.
마찬가지로 오베가 어느 날 이사의 사무실에서 한 행동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렇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오베 아버지의 장례식이 있고 나서 거의 2년이 다 되던 날이었다. 오베는 막 열여덟이 되었다. 톰이 객차에 떨어져 있던 돈을 훔치다 발각되었다. 오베를 제외하면 공식적으로 톰이 돈을훔치는 걸 본 사람은 없었다. 돈이 사라졌을 때 객차에 있던 사람은 톰과 오베 둘뿐이었다. 이사 사무실에서 나온 진지한 남자가 톰과 오베에게 언제 사무실에 출석해야 하는지 설명하는 동안, 누구도 오베가 범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범인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오베와 오베의 아내가 밤과 낮 같다고 늘 말했다. 오베는 당연하게도 자기가 밤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게 그에게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반면 누군가 그런 말을 할 때 오베의아내는 항상 재미있어 했는데, 왜냐하면 그럴 때마다 낄낄 웃으면서 사람들이 오베를 밤이라고 생각하는 건 그가 태양 쪽으로가기에는 너무 못돼먹어서라고 지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가 왜 자기를 택했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음악이나 책이나 이상한 단어 같은 추상적인 것들을 사랑했다. 오베는 손에 쥘 수 있는 것들로만 채워진 남자였다. 그는 드라이버와 기름 여과기를 좋아했다. 그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인생을 살아갔다. 그녀는 춤을 췄다.

"모든 어둠을 쫓아버리는 데는 빛줄기 하나면 돼요." 언젠가그가 어째서 늘 그렇게 명랑하게 살아가려 하느냐고 그녀에게물었을 때,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읽는 책 중 하나에 프란체스코인가 하는 수도사가 그렇게 써놓은 게 분명했다.
"날 속이면 안 돼요, 여보." 그녀가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커다란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무도 안 볼 때 당신의 내면은 춤을 추고 있어요, 오베. 그리고 저는 그 점 때문에 언제까지고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당신이 그걸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간에."
오베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결코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그는 춤을 춰본 역사가 없었다. 춤이란 너무 무계획적이고 어지러워 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직선과 명료한 결정을 좋아했다.
그게 그가 늘 수학을 좋아하는 이유였다. 수학에는 정답 아니면오답만 있었다. 수업 중에 ‘네 입장을 토론해보자‘며 사기를 치려 드는 히피 같은 과목들과는 달랐다. 마치 누가 긴 단어를 더많이 아는지 점검하는 게 결론을 내리는 방법이기라도 한 것인양. 오베는 옳은 건 옳은 것이고 틀린 건 틀린 것이길 원했다.
그는 몇몇 사람들이 자기를 인간에 대한 믿음이 없는 심술궂은 영감탱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하지만솔직히 말해 그건 그들이 오베에게 사람을 다른 식으로 볼 이유를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살다보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이 될지 결정을 내릴 때가 오게 마련이다.

때로 어떤 남자들이 갑자기 어떤 일을 했을 때 그 이유를 설명하기란 어렵다. 물론 그들 자신이 언젠가 그 일을 하게 되리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냥 지금 하는 게 나아서일 수도 있다. 때로는 정반대의 이유이기도 했다. 즉 자기들이 진작 그 일을 했어야했다는 걸 깨닫는 것이다. 아마 오베도 자기가 뭘 해야 하는지내내 알고 있었겠지만, 사람이란 근본적으로 시간에 대해 낙관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무언가 할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말할 시간이 넘쳐난다고생각한다. 그러다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나면, 우리는 그 자리에 서서 ‘만약‘과 같은 말들을 곱씹는다.

자기가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란 어렵다. 특히나 무척 오랫동안 틀린 채로 살아왔을 때는소냐는 그들이 결혼한 뒤로 오베가 딱 한 번 자신이 틀렸다고인정한 적이 있다고 말하곤 했다. 때는 1980년대 초반, 나중에알고 보니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진 일에 대해 그녀의 의견에동의하고 나서였다. 오베는 그건 거짓말이라고, 망할 거짓말이라고 주장했다. 정확히 따지자면 오베는 그녀가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었다. 자기가 틀렸다는 걸 인정한 게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집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요." 소냐는그렇게 말하곤 했다. "처음에는 새 물건들 전부와 사랑에 빠져

요 매일 아침마다 이 모든 게 자기 거라는 사실에 경탄하지요.
마치 누가 갑자기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와서 끔찍한 실수가 벌어졌다고, 사실 당신은 이런 훌륭한 곳에 살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말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러다 세월이 지나면서 벽은 빛바래고 나무는 여기저기 쪼개져요. 그러면 집이 완벽해서 사랑하는게 아니라 불완전해서 사랑하기 시작해요. 온갖 구석진 곳과 갈라진 틈에 통달하게 되는 거죠. 바깥이 추울 때 열쇠가 자물쇠에 꽉 끼어버리는 상황을 피하는 법을 알아요. 발을 디딜 때어느 바닥 널이 살짝 휘는지 알고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옷장 문을 여는 법도 정확히 알죠. 집을 자기 집처럼 만드는건 이런 작은 비밀들이에요."
물론 오베는 예시로 든 옷장 문이 혹시 자기를 가리키는 건아닌지 의심했다. 그는 소냐가 "나는 가끔요, 기초가 처음부터몽땅 흔들리면 고칠 수 있는 게 있기는 한지 궁금할 때가 있어요"라고 중얼거리는 걸 이따금 들었다. 그녀가 그에게 화가 났을때 하는 소리였다. 그는 그녀가 이야기를 어디로 몰고 가려는 건지 무척 잘 알았다.

죽음이란 이상한 것이다. 사람들은 마치 죽음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양 인생을 살아가지만, 죽음은 종종 삶을 유지하는 가장커다란 동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 중 어떤 이들은 때로 죽음을 무척이나 의식함으로써 더 열심히, 더 완고하게, 더 분노하며 산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죽음의 반대 항을 의식하기 위해서라도 죽음의 존재를 끊임없이 필요로 했다. 또 다른 이들은 죽음에 너무나 사로잡힌 나머지 죽음이 자기의 도착을 알리기 훨씬전부터 대기실로 들어가기도 한다. 우리는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만, 대부분은 죽음이 우리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데려갈지모른다는 사실을 더 두려워한다. 죽음에 대해 갖는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이 언제나 자신을 비껴가리라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우리를 홀로 남겨놓으리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늘 오베가 ‘까칠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빌어먹을 까칠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내내 웃으며 돌아다니지않았을 뿐이었다. 그게 누군가가 거친 사람으로 취급당해 싸다는 얘긴가? 오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 남자를 이해했던 유일한 사람을 땅에 묻어야 할 때, 그의 내면에 있던 무언가는 산산조각이 난다. 그런 부상은 치료할 수 없었다.
시간은 묘한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바로 눈앞에 닥친 시간을살아갈 뿐이다. 며칠, 몇 주, 몇 년.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중 하나는, 아마도 바라볼 시간보단 돌아볼 시간이 더 많다는 나이에 도달했다는 깨달음과 함께 찾아올 것이다.
더 이상 앞에 남아 있는 시간이 없을 때는 다른 것을 위해 살게될 수밖에 없다. 아마도 그건 추억일 것이다. 누군가의 손을 꼭쥐고 있던 화창한 오후. 이제 막 꽃들이 만개한 정원의 향기. 카페에서 보내는 일요일. 어쩌면 손자들. 사람은 다른 이의 미래를위해 사는 법을 발견하게 된다. 그건 소냐가 곁을 떠났을 때 오베 또한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그는그저 살아가는 걸 멈췄을 뿐이었다.
슬픔이란 이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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