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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올리비아 개트우드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25년 11월
평점 :
여자들의 우정 또는 성장과 깨달음의 소설이라고 명명하기엔, 이 작품이 가지는 거대함의 일부만 보여주는 것같아 부족하게 느껴진다.
아버지가 일찍 집을 떠나고 엄마와 단둘이 애리조나에서 살던 미티. 라디오 경품을 타는데 기가 막힌 솜씨를 발휘하는 엄마는 그렇게 모은 경품을 여기저기 판매하면서 미티와 근근히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열여덟 살인 미티는 인근 발레 학원에서 청소 일을 하다가 에스미라는 발레리나 친구를 만난다. 에스미의 집에도 초대받고 깊은 관계를 가졌다고 생각했을 때, 에스미가 미티를 멀리하기 시작한다. 미티는 배신감을 느끼고 자기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작은 장난을 치는데, 에스미는 다시는 발레를 할 수 없게 다치고 만다.
그 사건 이후로 미티는 친구들에게도, 이웃들에게도 외면받는 소녀가 되어 운둔형 외톨이로 지낸다. 보다못한 엄마 파트리샤는 예전에 알게 된 베델이라는 여자의 집에 미티를 잠깐 맡기게 되고, 인적이 드문 산타크루즈 해변의 낡고 오래된 집에서, 미티는 베델 이모와 함께 적막한 삶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미티의 이웃집에 새로 이사온 서베스찬과 레나 커플. 사건 이후 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람을 두려워하고 마음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미티에게 레나는 다시한번 가슴을 뛰게 하는 신비한 존재다. 미티는 조심스럽게 이웃의 레나를 관찰한다. 미티의 눈에 이웃집 커플은 서핑과 자유와 사적 생활을 즐기기 위해 이 조용한 마을로 들어온 부유한 상류층이다. 하지만 뭔가 레나는 이상하고 특별하다. 테크 산업에 종사하는 서베스찬과 달리 레나는 미티와 베델의 낡은 집, 오래된 물건들을 좋아한다. 어느 날 레나가 미티와 베델을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미티는 레나의 집 화장실과 침실에서 비밀스러운 수수께끼를 발견한다. 과연 레나는 누구일까. 어떤 삶을 추구하는 여인일까. 레나는 왜 음식을 먹지 않을까. 서베스찬과 레나의 관계는 어떻게 맺어지게 된 걸까. 의문이 짙어지는 가운데, 레나와 미티의 우정과 연대는 새싹이 움트듯 아주 서서히 자라난다.
미티와 베델을 초대한 날, 서베스천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 AI는 물론 매력적이죠. 획기적이고요. 하지만 인간이 지름길을 찾을 때마다, 윤리는 내동댕이쳐져요. 무슨 일을 이루고 싶다면, 윤리와 거리를 두어야 하는 거죠."
윤리적 문제에 대해 미티는 민감하다. 과거에 에스미에게 한 행동으로 평생의 굴레처럼 죄의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미티는 자신이 비윤리적인 인간이라는 트라우마가 있다. 하지만 그 굴레를 벗게 도와주며 미티의 삶을 새로운 희망으로 나아가게 한 존재가 바로 레나이다. 레나도 미티와 베델을 통해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자신이 '진짜'가 아니라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 책은 레나와 미티가 자신의 진짜 삶,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떠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그것은 아주 깊고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둘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며 그 여정에 발걸음을 내딛는 마중물이 되어준다.
미티와 베델, 그리고 레나, 세 여자가 들려주는 감동적인 이야기는 산타크루즈 해안의 파도 소리와 더불어 가슴 속에 오래도록 잔상이 남을 것이다. 마지막에 레나가 미티의 도움으로 고향집을 향해 숲을 헤쳐 나가는 장면은 퍽 인상적이다.(표지 그림이 바로 그 장면을 형상화한 게 아닐까.) 자신이 누구인지, 삶이란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늘 흔들리고 답답하고 흐릿한 이 현재를 고민하는 이라면, 이 책에서 힌트를 얻어가라고 전하고 싶다.
[출판사에서 도서제공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