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만찬 - 제9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서철원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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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의 신주를 불태운 사실만으로 별장은 윤지충과 권상연을 죄인으로 몰아갔다. 그것만으로 논리가 부족했는지 제사를 갈아엎은 죄를 덧씌워 울먹였다.

p. 12

"나라의 근본이 무어란 말이오? 죽은 사람을 섬기고 죽은 사람과 더불어 사는 것이 나라의 근본이라 말이오? 사람은 살아 있기 때문에 사람이오. 사람답게 살도록 돕는 게 나라의 근본이지 않소?"

p. 14

대개는 서학을 남녀와 지위와 신분의 고하가 뒤엉킨 무질無秩의 기운으로 보았으므로 불온했다.

p. 94

조선 시대의 천주교 박해 사건은 이미 역사 속에서 증거로 남아있고 잘 알려져있다.

한 나라, 혹은 한 지도자의 사상과 다른 신념과 관점을 지닌 종교를 받아들이긴 쉽지 않은 게 당연하다.

이는 조선시대가 가혹하다거나 임금이 너무하다고 할 수 없고, 그들은 당시의 체계와 가치관에 따라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천주교, 혹은 서학이 그 당시에 조선 사회에 파고들면서 퍼지게 된 것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소설 속에서 나온 예를 들자면, 우선 죽은 자보다 산 자를 우선시하는 의외로 '실용적인'(?) 종교이다.

신주나 제사가 중요한 게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는 나와 우리가 중요하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종교도 변했는지, 개신교와 천주교는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요즘에도 장례식장에 가보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절을 하지 않는 걸 흔히 볼 수 있다.

반면, 천주교에서는 성당 내에서 명절에 단체로 제사를 치를 수 있도록 신자들을 돕는다.

나의 할머니께서 이로 인한 혜택을 본 셈이다.

늘 집에서 힘들게 음식 만들고 제삿상 차리다가, 성당에서 단체로 제사를 지낸다는 걸 안 이후로는 집에서의 제사 중단을 선언하셨다.

그리고 설날이나 추석 당일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성당에 가서 간단한 제사를 지내고 오신다.

몸도 마음도 편하다고 말씀하신다.

매우 합리적이면서 실용적인 서학의 장점은 인간의 평등이라는 면에서도 보인다.

신분이나 남녀의 위아래가 없는 종교.

사람이면 누구나 똑같다는 믿음.

이것이 당시 여성들로 하여금 서학을 믿게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현재도 성당에 가면 유난히 할머니들이 많이 보인다.




기도문 속에 약용의 신념이 물결처럼 출렁거릴 때가 있었다. 빈약한 기도 속에 신앙이 가물거릴 때도 있었다. 믿음이 가벼울 때면 약용은 구원을 생각했다.

p. 45

어린 시절 무반에서 중인으로 전락한 가계를 등지고 김홍도는 스승이 있는 안산으로 내려갔다.

p. 108

"다빈치가 고안한 특별한 물건이 있는데, 하늘을 날 수 있는 기계라고 하옵니다. 이 기계의 시작은 세종대왕 아래 정오품 상의원 별좌를 지낸 장영실의 머리에서 나왔다 하옵니다."

p. 120-121

이 소설은 역사와 허구가 적당히 범벅된 요리와 같다.

초중고를 졸업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정약용, 김홍도와 장영실이 등장한다.

그것도 주요 인물로 말이다.

수원 화성을 설계한 정약용은 후에 서학을 믿은 죄로 유배당한다.

실제 사실이 이야기 속에 녹아 있다.

단원 김홍도는 안산의 역사적 인물이라서 특히 관심이 가고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부터 들었다.

장영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국경을 넘어 대체되는 인물로서 묘사된다.

다빈치가 만든 기계는 사실 장영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 하고, 어디론가 떠나 버린 장영실의 목적지가 이탈리아라는 소문이 들려온다.





"내가 봐도 소박한 식사를 즐기는 그림이 아니다. 만찬이 의미하는 풍성한 먹거리의 나눔이 오히려 누군가의 생사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 누군가의 생은 ......"

p. 111

청나라를 거쳐 윤지충에게 전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약용의 머릿속에 뚜렷이 그려졌다. 임금을 경계로 좌우로 갈라선 여섯 신하와 여섯 외인들의 엇갈린 모습은 다빈치의 그림과 다르지 않았다.

p. 407

시간에 따라 자연스레 마모되거나 생활 속에 스며드는 이야기의 여백과 달리 전달자의 의도에 따라 왜곡되고 변형되는 이야기의 인멸은 석연치 않게 들렸다.

p. 309

임금은 내내 <최후의 만찬> 그림을 보면서 고뇌한다.

처음 보는 그림이었고 낯선 인종이었지만 얼핏 보기에도 예삿 그림은 아닌 게 느껴진다.

예수와 열두 제자는 마치 그와 그 주변의 인물들을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는 역사 속에서 왜곡되기 마련이다.

그게 진짜 이야기이든, 노래든, 예술 작품이든 간에.

원작자의 의도가 적힌 노트가 발견되었다 한들, 당시 농담삼아 적은 것인 줄 그 누가 알겠는가.

소설 <최후의 만찬> 은 이미 널리 알려져서 식상하기까지 한 명작을 소재로 시공간을 아우르고 있다.

작가는 그 속에서 자신만의 이야기 하나를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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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표 영어에 입시를 더하다 - EBS 스타강사 혼공샘의 우리 아이 영어 공부법
허준석 지음 / 북폴리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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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타이밍 1 : 취학 전 영어 소리에 충분히 노출시켰다면, 이제 독서로 서서히 넘어가야 할 시기다.

p. 31

일관성을 가지다 보면 부모가 시키지 않아도, 아이가 특별히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영어로 된 책을 읽고 즐길 수 있다. 이것을 '자동화'라고 부른다.

p. 42

혼공샘 허준석은 영어 조기교육과 입시영어에 관한 이 책에서 아이의 나이에 따른 영어교육법을 일러주고 있다.

물론 가정마다 특정한 상황이나 아이의 학습 상태, 발달 정도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지지만,

그럼에도 취학 전, 초등 저학년, 초등 고학년, 중학교, 고등학교로 나누어 수능영어 및 생활영어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알다시피 언어인 영어 습득에 있어서 제 1단계는 역시 듣기이다.

취학 전 영어를 처음 접하는 아동은 흘려듣기와 집중듣기를 통하여 영어를 경험하게 된다.

아이가 흥미를 보이는 주제를 중심으로 영상이나 음상을 보여주고 들려줌으로써 저절로 듣고 따라 말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특히나 집중듣기를 할 때에는 하루 일정한 시간, 아이가 지치지 않고 관심을 가질 만큼만 해야 하며, 이를 지속적으로 이어가야 한다.

듣기와 말하기만큼 중요한 게 읽기인데, 렉사일 지수가 수십년 전 강남 학부모들 사이에 붐이 일었고 그 밖에 지역에선 몇 년 전부터 대두되고 있다.

렉사일 지수를 알아도 좋지만, 아니면 픽처북이나 얇은 책으로 아이가 그림과 함께 알파벳을 접하도록 한다.

이 때 유튜브에서 원어민이 책을 읽어주는 영상을 활용하는 방법도 좋다.

혼공 허준석의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내가 특히 추천하는 건 'We're going on a bear hunt'이다.

원서 읽기에서 중요한 건, 이 독서 습관이 취학 후 고등학교까지 지속되어야 한다는 거다.

물론 그 때 가서는 1순위가 내신, 2순위가 수능 모의고사가 되겠고, 마지막 3순위에 생활영어로서의 원서 읽기를 넣는 것이다.


철저하게 아이가 좋아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기차를 좋아하면 <토마스와 친구들> 영어판을 보여준다. 영상뿐 아니라 영어책도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한다.

p. 51

이 시기의 아이들에게는 영어로 픽처북을 읽어주는 것도 중요하다. 유튜브에서 책 제목에 'read along' 또는 'read aloud'를 붙여서 검색하면 좋은 영상을 접하 수 있다.

p. 74-75

영어는 억지로 시키면 안 된다.

사실 무엇이든 싫어하는 걸 억지로 시키면 되는 일이 없다.

만약 부모가 어릴 적 영어라는 과목을 매우 싫어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똑같은 성향을 가진 자녀가 태어난 거다.

자기도 꺼려하는 걸 자식이라고 강요하면 안 된다.

부모가 학창 시절에 영어를 잘 하지 못했고, 지금도 그러하지만 자녀만은 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만약 그렇다면 본인이 솔선수범하면 된다.

혼공쌤이 직접 했듯이 집에서 영어로 된 책을 읽고 있다거나 영어 영상을 시청하는 거다.

그러면 한 집에 사는 자녀가 자연스럽게 부모의 행동을 보고 모방하게 된다.

이렇게 하지도 않고 자신은 TV로 드라마 보고 코미디 프로만 보거나 독서를 전혀 하지 않으면서,

아이에게 영어책을 읽으라고 하거나 영어 영상을 보라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1만 시간의 법칙으로 따졌을 때도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초등학교 3~4학년 과정에는 영어를 일주일 2시간, 즉 40분씩 두 번밖에 배우지 않는다. 교사가 아무리 잘 가르친다해도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p. 101

핀란드는 TV 프로그램의 상당수가 영어로 진행된다. 특히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영어로 진행되다 보니 아이들은 영어를 듣고 이해하는 능력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언어를 습득하는 데는 듣기가 최우선이라는 이론과 일치한다. 반대로 한국 아이들은 하루 종일 한국어만 듣는다.

p. 56

핀란드나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그리고 싱가포르와 같은 국가는 영어를 ESL이나 EAL로 사용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영어를 EFL로 쓰고 있다.

그렇기때문에 더 영어 습득이 어려운 것이다.

만약 영어를 좀 더 쉽게 배우고 싶다면 예전 터키 대통령이 했던 것과 같이 국가에서 TV의 모든 프로그램을 영어로 바꾸도록 한다.

이는 독재국가가 아닌 이상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다분하기에, 조금씩 서서히 영어 프로그램을 공중파 중심으로 시작한다.

공공기관의 회의는 오직 영어를 사용해서 한다든가 하는 국가, 사회 전체적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그렇게 ESL 국가로 나아간다면 영어 습득히 훨씬 쉬울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기에 학교에서의 영어 수업 시수를 늘리는 게 필수적이다.

영어를 조금 배우고 쓰지 않는데 느는 게 말이 되겠는가.

결국 사교육을 통해 영어 아웃풋의 기회를 더 많이 가진 아이들의 실력만 느는 것이다.

초등학교 1, 2학년 때부터 조금씩 영어를 배워서 3, 4학년에는 일주일에 5시간 이상, 5, 6학년에는 10시간 정도 배우도록 한다.

이는 수학 과목을 제외한 전 과목을 영어로 수업하는 나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한국어를 배운 과정을 생각하면 하루 종일 영어를 듣고 말해야 겨우 습득할 수 있다는 걸 인지할 수 있다.



국가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엄마, 혹은 아빠표 영어가 필요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를 위해선 인터넷, 유튜브, 영어 원서, 사교육 등 많은 보조 도구들이 필요하다.

EFL 국가인 한국에서 영어를 잘 하려면 끊임없는 노력을 요한다는 걸 아주 잘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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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 나는 나일 때 가장 편해 카카오프렌즈 시리즈
투에고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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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누군가에는 제법 괜찮은 사람,

누군가에는 고민이 많은 진지한 사람,

누군가에는 슬픔에 젖어 우울한 사람,

누군가에는 상처를 줬던 매정한 사람,

누군가에는 실없이 웃기만 하는 사람,

p. 60

사람의 성격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 없는 이상.

그래서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단순한 동물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다면적인 존재라는 말이다.

나는 MBTI 검사만으로 규정지어질 수 없다.

사실 처음 MBTI를 했을 때 매우 혼란스러웠던 것이, 각 분야에 다 걸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하나 낮지 않고 대부분 다 높은 지수를 보여줬다.

나는 조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말을 하고 싶어하며, 클럽과 같은 곳을 좋아하지만 시끄러운 공간을 꺼려하기도 한다.

축제의 북적임은 좋아하지만, 쇼핑센터의 북적임은 싫어한다.

누군가와 있을 땐 한없이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좋은 말이 나오지만,

다른 누군가와 있을 땐 같은 공간에서 숨조차 쉬기 힘들어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런 모습, 저런 모습을 모두 합친 게 나다.


우리는 무지해. 나도, 너도 무지해.

모든 걸 완벽히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때로는 내가 모르는 걸 수도 있다고,

때로는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고

p. 122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 그리고 군중심리과 언론플레이까지.

지금의 나를, 지금의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이끌 수 있는 것들을 주의해야 한다.

내가 아는 아주 작고 편협한 지식이 상식이 아님을, 진리가 아님을 인정하고 살아갈 때 그제서야 비로소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와 의견 차이가 너무 심하다고 그 사람을 질타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정 맞지 않으면 그냥 안 만나면 되는 것을.

완벽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학자도, 대통령도, 왕도 그 누구도 절대자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살아간다면 결국엔 '꼰대' 가 되는 것이다.

꼰대가 되지 않는 삶을 살자.



그러니 시작도 하기 전에 너무 늦었다고 단정지을 필요는 없어. KFC 할아버지로 유명한 커넬 샌더스는 환갑이 훌쩍 넘은 나이에 창업했다고 하잖아.

p. 170

남이 무슨 말을 하든 신경쓸 필요가 없다.

이 나이에 사무직이 아니라고, 이 나이에 결혼하지 않았다고, 너무 늦은 나이인 거 같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성공하는 사람들이 누구 말 듣고 따라하는 삶을 살지는 않는다.

자신만의 뚜렷한 철학과 가치관을 가진다.

진짜 삶을 살고 싶다면 서로 의견은 교환하되, 그의 의견을 내 것처럼 생각하지는 말아야 한다.

여러가지 상황에 대한 판단 후 나의 의견이 생성되는 것이다.

작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표창을 받고 미국 구글 본사에서 초청 받은 유튜버 박막례 할머니.

다슈, 뉴발란스 등 다양한 브랜드의 시니어 모델로 활동 중인 김칠두 할아버지.

물론, 이 둘에게는 좌중을 사로잡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말발, 외모를 비롯하여 특별한 게 있다.

하고자 하는 말은 제발 나이와 직업에 대한 제한된 생각을 버리자는 거다.





누구나 그렇다.

남들 앞에서 보이는 나보다는 나일때의 내가 가장 편하다.

자존감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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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만난 물고기
이찬혁 지음 / 수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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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풍경은 광활한 바다를 마주 보고 있는 녹색 창가에서 시작된다. 굴뚝이 초라하게 솟은 작은 벽돌집 2층에 달려 있는 창. 난 그 창과 꼭 붙어 자리 잡고 있는 침대에 누워 마저 남은 해의 끄트머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굳이 짚어 말하자면 특정한 것을 구경했다기보다 나의 동공이 그곳을 향해 있었다는 표현이 가깝겠다.

P. 14

뮤지션 악뮤 이찬혁이 새 앨범 [항해] 를 독자에게 더욱 쉽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낸 첫번째 소설.

그의 머릿 속에는 어떤 생각들이 꿈틀대고 있는지, 가사를 통해서 무얼 전달하고 싶은지,

그도 아니면 미처 못다한 말이 무엇인지 책 한 권에 담아냈다.

혹자는 책을 읽고서 허세를 경험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중2병을 떠올릴 수도 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책을 읽고도 이해가 안 된다거나 깊은 공감이 안 될 수도 있다.

아니면 그저 사랑 이야기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나로 치자면, 위의 모든 것을 느꼈다.

왠지 번역서를 읽는 기분도 들게 된 풍경 묘사는 어느 정도 가슴에 와 닿는 부분이 있다.

내가 바닷가 카페 안에서 직접 바다 풍경을 보는 것 같달까?

지중해, 프로방스, 유럽 모든 걸 떠올리게 하는 풍경 묘사이다.

아무튼 지금 운동하고 놀고 일하고 살고 있는 나의 도시와는 지극히도 다른 배경이라서 더욱 끌리는 게 있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보는 장면이라면 별다른 감흥이 없겠지만, 가지지 못해서 더 갖고 싶다.





다시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 버터 향이 진득하게 퍼졌다. 클래식과 잘 어울리는 냄새였다.

"토스트 하고 있어요. 아침 먹을 시간이잖아요."

작은 오픈 주방에서 그녀가 말했다.

P. 24

달콤한 냄새가 풍기는 소설이 좋다.

비록 직접 먹진 못해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텍스트를 사랑한다.

그래서 한참 '조앤 플루크' 의 요리와 살인사건이 뒤섞인 시리즈를 읽은 적이 있다.

사실, 지금도 여전히 읽고 싶다.

이 소설에서는 먹는 냄새가 그다지 많이 나진 않는다.

그보다는 주인공의 심경이나 타자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나타난다.

그래도 이따금씩 등장하는 음식 냄새는 나의 감각을 불러 일으킨다.

그 중에서도 소설 초반에 아주 짧게 등장한 토스트가 자꾸만 기억난다.

커피와는 인연이 없는 나로서는, 토스트가 상쾌한 아침의 상징인 셈이다.

비록 소설 속에서는 '진짜' 아침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선아, 나 얼룩말을 타보는 게 소원이야!"

"얼룩말이 소원이야, 타보는 게 소원이야?"

그녀는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비밀 하나를 말해주는 것처럼 조심스레 대답했다.

"사실 거기에 하나 더 추가야. 얼룩말을 타고 횡단보도를 건너보는 게 소원이야."

P. 34

세상은 넓고 그만큼 여러 부류의 인간이 존재하고 있다.

각종 특이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누군가에겐 따가운 시선을, 누군가에겐 질타를, 누군가에겐 질투를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참으로 단순한 존재이기도 해서 그 사람의 분위기나 외모가 사람의 평가에 있어서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독특한 행동' 을 자주 하는 두 사람이 있다고 치자.

한 사람은 옷을 후줄근하게 입고 사람들이 보통 선호하지 않는 외모를 가진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누가 봐도 잘 생겼다.

이 경우, 대개 전자에겐 비난이, 그리고 후자에겐 옹호섞인 발언과 때로는 칭찬이 가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하는 행동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을 둘러싼 외모가 더 중요하다는 거다.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주인공 선이가 사랑한 해야가 적어도 선이에게는 완벽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해야의 이상한 행위들은 선이에게는 독특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것, 그녀이기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거다.

어느 정도의 행위나 소원은 용납될 수 있지만, 만약 이게 범법 행위라는 범주에 들어선다면?

선이는 그마저도 용인하고 있다.

이게 말하는 게 과연 무엇일까?

사랑이라는 콩깍지?

그렇다면 애초에 사랑에 빠지게 된 원인은?




"아니면, 내 얼굴을 보기만 해도 돈을 내게 할 거야."

"음, 그건 그만한 가치가 있지."

그녀는 내 대답이 나쁘지 않았는지 입꼬리를 씰룩였다.

"공짜일 때 많이 봐두어야겠다."

나는 그녀의 정면으로 가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P. 43

연애할 때 콩닥거림과 설레임이 공존하는 시기가 있다.

자신이 연인을 얼마나 아끼고 좋아하는 지 표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뒤로 숨겨봤자 나만 알아봤자 무엇하겠는가.

"넌 나를 올려다 볼 때 너무 사랑스러워. 완전 100점 만점에 200점이야."

"난 키 작은 여자가 키 큰 남자에게 말하려고 까치발 드는 게 그렇게 귀엽더라. 안 그래?"

"내가 널 왜 좋아하냐고? 이뻐서."

이런 말을 들으면 행복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렇게 고뇌하고 사유의 시간이 많은 소설 속 주인공조차 여자에게 빠지는 건 한순간이고, 사랑하는 건 남들과 같다.

아무리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남과 조금은 다르다 한들, 남자는 남자이고, 연애는 연애인가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로맨스이기도 하다.



나는 악동뮤지션의 새 앨범을 제대로 들어보지 못했다.

음악 프로그램에서 타이틀곡을 스쳐가듯 들어본 적은 있지만, 전곡의 가사를 음미하면서 들어본 적은 없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살짝 의문이 든다.

과연 앨범을 듣고 소설을 읽어야 할 지, 아니면 소설을 먼저 읽고나서 앨범을 들어야 할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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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초
T. M. 로건 지음, 천화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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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조건은 세 가지였다.

72시간 안에 이름 하나를 말해야 한다.

거절하면, 제안은 사라질 것이다. 영원히.

p. 11

누군가 윤리와 제도, 그리고 법의 틀 밖에서 무언가를 해결해주겠다는 제안을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관련되었다는 흔적은 없을 것이라 한다.

한마디로 소리소문없이 해결해준다는 것이다.

법의 틀 안에서 살아온 사람으로서 당연히 망설여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끌리는 제안이 아닐 수 없다.

눈엣가시처럼 여겨지는 사람이 있는데, 백날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데쓰노트를 써봤자 달라질 건 없다.

나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고 큰 골칫거리 하나를 없애버리기위하여 기꺼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다.

단,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연루되었다는 건 밝혀지면 안 된다.

실제로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고 제안을 받았을 뿐이고 OK 했을 뿐이다.

어떠한 행위도 취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내가 작전모의에 가담했다는 식으로 나오면 아주 곤란해진다.

애초에 작전을 짠 적도 없으니.

규칙은 간단했다. 가능하면 그와 단둘이 있지 말 것. 그를 부추길 수 있는 어떤 말도 행동도 하지 말 것. 택시나 엘리베이터에 함께 타지 말 것.

p. 14

내가 일하는 공간에도 여성 직원들에게 무조건 집적거린다고 소문난 - 게다가 불륜은 기정사실이었다. - 사람이 온 적 있다.

그 때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무조건 그의 옆에 가거나 둘만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 거였다.

나보다 지위상으로 위에 위치한 사람이었던 데다가 어이없게도 직장내 성고충 위원회의 위원이기도 했다.

그저 직렬로 위원을 세워놓다보니 그런 블랙코미디가 일어난 거였다.

다행히 그가 있던 동안 큰 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사소하게 넘겨보내기엔 엥?하고 의문을 가질 만한 몇몇 일들은 있었다.

그런데도 성고충 위원회에 말 할 수가 없다.

그가 바로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세상은 이토록 엉터리다.

진정한 선행이란 조금의 사심도 없는 행위지요. 보상을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는 겁니다.

p. 133

이런 종류의 선행을 내가 한 적이 있던가.

아.. 있네~ ㅎ.ㅎ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수년간 불우한 아이들을 조금이나마 도와주려 하고 있다.

요새는 아이티에 사는 남자아이를 돕고 있고, 긴 머리를 싹둑 잘라 소아암 환우를 위한 가발용으로 기부한 적도 있다.

사후 장기 기증 서약은 예전에 했고, 길거리에서 주운 신용카드나 지갑을 찾아준 적은 제법 많다.

이게 선행 맞겠지?!

나 살기도 힘든 게 맞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크지 않아도 서로 돕고 살고자 한다.

난 성격이 유하지도 않고 결코 착하지도 않지만 사심 없는 선행은 하면서 살고 있다.


세라는 맞서 싸우는 쪽을 택했다. 설령 그것이 상대와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비열하게 싸우는 것을 의미할지라도.

p. 477

극한으로 몰려진 경우가 아니라면 이런 선택을 하는 게 결코 쉽진 않다.

내가 낮은 직급에 속하고, 상대가 직급의 상위에 속하는 데다가 사회적 명성이 있는 자라면 더욱 더.

그런데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 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러나 저러나 살기 힘들다면 적어도 복수라도 하고 힘들어야 할 것 아닌가.

전임강사가 되고 결과적으로 교수가 되고자 하는 세라에게는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아니, 모든 걸 버리고 감내하는 셈이다.

자신과 자녀의 생계, 직업적 성과를 다 포기할 정도로 몰린 상황이기에 이제 남은 건 무는 것이다.

물어뜯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내더라도 개의치 않게 된다.


대학에서 행해지는 TV스타이자 대학 간판 교수의 갑질과 노골적인 성적 요구, 이를 감내하면서 힘들어하는 계약직 강사.

현실이라면 대개의 경우 강사의 패이다.

물론, 최근 몇 년간 미투 현상으로 사회적 지지나 여론 형성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소설 속 세라에게는 뜻밖의 제안이 오게 되고, 이제는 선택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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