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만찬 - 제9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서철원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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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의 신주를 불태운 사실만으로 별장은 윤지충과 권상연을 죄인으로 몰아갔다. 그것만으로 논리가 부족했는지 제사를 갈아엎은 죄를 덧씌워 울먹였다.

p. 12

"나라의 근본이 무어란 말이오? 죽은 사람을 섬기고 죽은 사람과 더불어 사는 것이 나라의 근본이라 말이오? 사람은 살아 있기 때문에 사람이오. 사람답게 살도록 돕는 게 나라의 근본이지 않소?"

p. 14

대개는 서학을 남녀와 지위와 신분의 고하가 뒤엉킨 무질無秩의 기운으로 보았으므로 불온했다.

p. 94

조선 시대의 천주교 박해 사건은 이미 역사 속에서 증거로 남아있고 잘 알려져있다.

한 나라, 혹은 한 지도자의 사상과 다른 신념과 관점을 지닌 종교를 받아들이긴 쉽지 않은 게 당연하다.

이는 조선시대가 가혹하다거나 임금이 너무하다고 할 수 없고, 그들은 당시의 체계와 가치관에 따라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천주교, 혹은 서학이 그 당시에 조선 사회에 파고들면서 퍼지게 된 것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소설 속에서 나온 예를 들자면, 우선 죽은 자보다 산 자를 우선시하는 의외로 '실용적인'(?) 종교이다.

신주나 제사가 중요한 게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는 나와 우리가 중요하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종교도 변했는지, 개신교와 천주교는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요즘에도 장례식장에 가보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절을 하지 않는 걸 흔히 볼 수 있다.

반면, 천주교에서는 성당 내에서 명절에 단체로 제사를 치를 수 있도록 신자들을 돕는다.

나의 할머니께서 이로 인한 혜택을 본 셈이다.

늘 집에서 힘들게 음식 만들고 제삿상 차리다가, 성당에서 단체로 제사를 지낸다는 걸 안 이후로는 집에서의 제사 중단을 선언하셨다.

그리고 설날이나 추석 당일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성당에 가서 간단한 제사를 지내고 오신다.

몸도 마음도 편하다고 말씀하신다.

매우 합리적이면서 실용적인 서학의 장점은 인간의 평등이라는 면에서도 보인다.

신분이나 남녀의 위아래가 없는 종교.

사람이면 누구나 똑같다는 믿음.

이것이 당시 여성들로 하여금 서학을 믿게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현재도 성당에 가면 유난히 할머니들이 많이 보인다.




기도문 속에 약용의 신념이 물결처럼 출렁거릴 때가 있었다. 빈약한 기도 속에 신앙이 가물거릴 때도 있었다. 믿음이 가벼울 때면 약용은 구원을 생각했다.

p. 45

어린 시절 무반에서 중인으로 전락한 가계를 등지고 김홍도는 스승이 있는 안산으로 내려갔다.

p. 108

"다빈치가 고안한 특별한 물건이 있는데, 하늘을 날 수 있는 기계라고 하옵니다. 이 기계의 시작은 세종대왕 아래 정오품 상의원 별좌를 지낸 장영실의 머리에서 나왔다 하옵니다."

p. 120-121

이 소설은 역사와 허구가 적당히 범벅된 요리와 같다.

초중고를 졸업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정약용, 김홍도와 장영실이 등장한다.

그것도 주요 인물로 말이다.

수원 화성을 설계한 정약용은 후에 서학을 믿은 죄로 유배당한다.

실제 사실이 이야기 속에 녹아 있다.

단원 김홍도는 안산의 역사적 인물이라서 특히 관심이 가고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부터 들었다.

장영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국경을 넘어 대체되는 인물로서 묘사된다.

다빈치가 만든 기계는 사실 장영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 하고, 어디론가 떠나 버린 장영실의 목적지가 이탈리아라는 소문이 들려온다.





"내가 봐도 소박한 식사를 즐기는 그림이 아니다. 만찬이 의미하는 풍성한 먹거리의 나눔이 오히려 누군가의 생사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 누군가의 생은 ......"

p. 111

청나라를 거쳐 윤지충에게 전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약용의 머릿속에 뚜렷이 그려졌다. 임금을 경계로 좌우로 갈라선 여섯 신하와 여섯 외인들의 엇갈린 모습은 다빈치의 그림과 다르지 않았다.

p. 407

시간에 따라 자연스레 마모되거나 생활 속에 스며드는 이야기의 여백과 달리 전달자의 의도에 따라 왜곡되고 변형되는 이야기의 인멸은 석연치 않게 들렸다.

p. 309

임금은 내내 <최후의 만찬> 그림을 보면서 고뇌한다.

처음 보는 그림이었고 낯선 인종이었지만 얼핏 보기에도 예삿 그림은 아닌 게 느껴진다.

예수와 열두 제자는 마치 그와 그 주변의 인물들을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는 역사 속에서 왜곡되기 마련이다.

그게 진짜 이야기이든, 노래든, 예술 작품이든 간에.

원작자의 의도가 적힌 노트가 발견되었다 한들, 당시 농담삼아 적은 것인 줄 그 누가 알겠는가.

소설 <최후의 만찬> 은 이미 널리 알려져서 식상하기까지 한 명작을 소재로 시공간을 아우르고 있다.

작가는 그 속에서 자신만의 이야기 하나를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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