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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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으며, 제인 오스틴이 언급되는 대목이 인상 깊게 남았어요. 울프는 오스틴이 살았던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여성들이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이 얼마나 열악했는지를 강조했어요. 여성은 자기만의 공간도, 경제적 자유도 없이 창작을 이어가야 했고,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여러 제약 속에 놓여 있었다고요. 하지만 오스틴은 거실 한쪽에서, 가족들의 시선과 방해를 감수하며 소설을 써 내려갔습니다. 울프는 이러한 조건 속에서도 오스틴이 자신의 감정을 과장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문학적으로 균형 잡힌 작품을 완성해 낸 드문 작가라고 평가해요. 이 대목을 읽으며 『오만과 편견』이 궁금해졌습니다. 제목은 익숙했고 영화로도 상영되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었으니까요. 무엇보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꾸준히 읽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 힘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어요.


『오만과 편견』은 겉으로 보면 단순한 연애 소설처럼 읽히기 쉽지만, 그 이면에는 당대 사회의 구조와 인간 심리가 정교하게 담겨 있는 작품이에요. 제인 오스틴은 사랑과 결혼이라는 익숙한 이야기를 통해, 한 개인이 타인을 어떻게 오해하고 또 이해해 가는지, 그리고 그 과정이 사회적 조건과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를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오만'과 '편견'이라는 두 개의 시선이 있어요. 다아시는 자신의 신분과 재산에서 비롯된 자부심으로 타인을 쉽게 판단하고, 엘리자베스는 그런 그의 태도를 근거로 그를 성급하게 단정해요. 흥미로운 점은, 두 사람 모두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니라는 데 있어요. 다아시는 실제로 오만했고, 엘리자베스의 판단 역시 그 경험에 기반한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오스틴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우리는 '얼마나 쉽게 타인을 단정 짓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요. 두 사람이 각자의 오만과 편견을 자각하고, 서로를 다시 바라보며 자신의 판단을 수정해 가는 과정은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 '인식의 성장'이라는 의미로 확장돼요.


제인과 빙리의 관계를 보면, 이들의 사랑은 갈등이 거의 없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듯 보여요. 그러나 그 관계조차 개인의 감정만으로 완성되지는 않아요. 주변의 시선과 개입, 특히 계급과 체면이 결혼의 성립 여부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죠. 이를 통해 작품은 사랑이 개인적인 감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사회적 조건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드러내요.


이 소설에서 결혼은 낭만적 선택이라기보다 경제적·사회적 생존 전략에 가까워요. 베넷 가문의 딸들이 처한 상황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줘요.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가문의 재산이 먼 친척인 콜린스 씨에게 상속되는 구조 속에서, 딸들은 자신의 삶을 안정적으로 보장할 방법이 거의 없어요. 이들에게 결혼은 선택이 아니라 사실상 유일한 출구에 가까워요. 이러한 맥락에서 엘리자베스의 어머니가 딸들의 결혼에 집착하는 모습은 단순한 희화화의 대상이 아니에요. 그것은 오히려 당시 여성들이 마주해야 했던 불안과 현실을 반영하는, 절박한 태도로 읽혀요.


또한 한 가족 안에서도 각기 다른 태도와 욕망이 드러나요. 제인은 온화하고 신중하며, 엘리자베스는 비판적이고 자의식이 뚜렷해요. 반면 메리는 어설픈 지성주의자의 모습을 보이고, 리디아는 충동적이고 경솔하며, 키티는 쉽게 휩쓸리죠. 같은 환경 속에서도 서로 다른 선택과 결과가 만들어지는 모습을 통해, 오스틴은 인간을 단순한 유형으로 환원하지 않아요. 이는 곧 ‘가족’이라는 울타리조차 개인의 삶을 규정할 수 없음을 보여줘요.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존재들이 모여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균형을 이루며 함께 살아가는 공간. 그런 의미에서 가족은, 다양한 차이를 안은 채 공존을 배워가는 가장 처음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어요. 


한편, 작품 곳곳에는 신분에 따른 위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요. 높은 지위를 가진 인물들은 그것을 당연한 권리처럼 행사하며 타인을 억압해요. 특히 신분을 앞세워 관계를 통제하려는 태도는, 사랑과 결혼마저 계급 질서 안에 묶어 두려는 사회의 단면을 보여줘요. 그러나 오스틴은 이러한 구조를 정면으로 비판하기보다, 인물들의 행동과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내며 독자가 스스로 인식하도록 만들어요.


이 소설이 단지 시대의 한계를 고발하는 데 머물지 않는 이유는, 엘리자베스라는 인물에 있어요. 그녀는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감정과 이성을 조율하며 자신을 변화시켜요. 그리고 결국 사랑 역시 상대에 대한 이해와 존중 위에서 다시 선택해요. 이는 단순한 해피엔딩이 아니라, '올바르게 보는 법'을 배운 결과에 가까워요.


제인 오스틴은 이 작품에 대해 "너무 가볍고 밝고 반짝거려서 그늘이 필요하다"라고 말했을 만큼, 『오만과 편견』은 그녀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밝은 분위기를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실제로 읽다 보면 생각보다 술술 넘어가고,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 자연스럽게 페이지를 넘기게 됐어요. 아마 어린 시절 이 책을 읽었다면, 흥미로운 연애 이야기 정도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일정 부분 '신데렐라' 서사를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다시 읽어보면, 그 밝고 경쾌한 표면 아래에 훨씬 더 복합적인 의미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느끼게 돼요. 지금은 저 시대와는 많이 다르지만, 첫인상의 중요성, 소통의 부재가 낳는 오해, 현실적인 조건이 관계에 영향을 준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자존감과 성찰을 겸비한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와 결혼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상상해 봤는데, 시대적 배경으로 보면 경제적 불안과 사회적 고립을 감수하는 삶을 선택하기보다는 신중히 상대를 선택해 결혼했을 가능성이 크지 않았을까 싶더라고요.


작품은 우리 역시 타인을 쉽게 판단하고 편견을 가질 수 있음을 돌아보게 만들어요. 그리고 질문해요. 우리는 타인을 얼마나 공정하게 바라보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내리는 판단은, 과연 우리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것인가. 사람의 다양한 면을 이해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진정한 성장이 아닐까 하고요. 사랑 이야기처럼 시작된 이 소설은, 그렇게 인간과 사회를 함께 비추는 거울로 남아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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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쏜살 문고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이민경 추천 / 민음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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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이 있나요? 저는 혼자 살던 시기를 제외하면, 저만의 방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독립하기 전에는 여동생과 방을 나눠 썼고, 지금은 아이들과 함께 사용하고 있어요. 예전에는 '자기만의 방'이 꼭 필요할까 싶었어요. 그러나 결혼하고,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시간을 보내며 그 필요를 점점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어요. 혼자만의 시간을, 조용히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하더라고요. 그것은 사치가 아니라 숨 쉴 틈에 가까웠으니까요. 다행히 거실에 가족 수만큼의 책상을 두었어요. 완전히 분리된 방은 아니지만, 그 작은 책상 앞에서만큼은 혼자가 돼요. 지금은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언젠가 문을 닫을 수 있는, 진짜 '자기만의 방'을 갖게 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어요. 그래서 이 책이 궁금해졌어요.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자기만의 방'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요.


책을 읽을 때 저자가 처한 삶의 조건을 함께 떠올리면, 문장이 훨씬 또렷하게 다가올 때가 있어요. 그래서 글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찾아보게 되었어요.


<자기만의 방>의 출발점이 된 강연, 「여성과 픽션」을 요청받았을 때 버지니아 울프가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단 두 가지였어요. 자기만의 방과 일 년에 500파운드. 이 단순한 조건이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버지니아 울프는 1882년 런던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저명한 문학평론가이자 사전 편찬자였고, 집에는 늘 작가와 지식인들이 드나들었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지적 자산이 풍부한 환경이었죠. 그러나 그 공간은 철저히 남성의 방이었어요. 남자 형제들은 정규 교육을 받았지만, 버지니아는 학교에 다니지 못했어요.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집 안에 가득한 책들을, 마치 허락 없이 훔쳐 읽듯 탐독하는 것이었죠. 같은 집에 있었지만, 교육의 기회와 사유의 권리는 분명히 구분되어 있었어요. 이 경험은 훗날 그녀가 왜 그토록 집요하게 '방'과 '돈'을 이야기했는지를 이해하게 만드는 중요한 단서가 돼요.


그랬던 그녀는 상속과 결혼, 그리고 남편 레너드 울프와 함께 운영한 호가스 프레스를 통해 비로소 글을 쓰기 위한 물리적·정신적 공간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게 돼요. 그 과정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요. 여성들은 늘 누군가와 공간을 나눠 써야 했고, 그 공간은 언제나 분주하고 시끄러웠다는 것이죠. 나이팅게일이 "여성에게는 자기만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간이 채 삼십 분도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듯, 여성의 시간과 공간은 늘 타인의 필요에 잘게 쪼개져 왔어요. 그래서 문을 닫을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은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사유가 중단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돼요. 울프가 말한 '자기만의 방'은 타인의 시선에서 잠시 벗어나 성별 이전의 존재로, 그저 한 인간으로서의 '나'가 될 수 있는 장소예요. 그녀가 "나는 그저 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그런데 자기만의 방을 갖기 위해서는 결국 경제력이 전제되어야 해요. 버지니아 울프가 연간 500파운드를 반복해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비교적 중산층 이상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버지니아 개인의 명의로 된 소득은 없었어요. 그 말은 곧, 자기 인생을 스스로 설계할 수 없었다는 뜻이기도 해요. 그녀는 생계를 위해 글을 써야 했고, 글은 자연스럽게 시장의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어요.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에도 마감과 원고료는 늘 그녀를 붙잡고 있었어요. 생각의 속도는 자신의 리듬이 아니라, 타인의 일정과 요구에 맞춰 조정되어야 했죠. 사유보다 생존이 앞서는 상태였어요.


그러나 상속받은 이후, 삶의 조건은 분명히 달라져요. 시장이 아니라 사유를 기준으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고, 당장의 수입을 위해 원치 않는 일을 선택하지 않아도 되었어요. 돈은 그녀에게 풍요를 안겨주었다기보다, 생각을 지킬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돌려주었어요. 그래서 <자기만의 방>에서 말하는 연 500파운드는 단순한 금액이 아니에요. 그것은 여성이 자기 생각을 타인의 리듬에서 분리해 낼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한 현실적인 조건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강연을 준비하며 도서관에서 책을 뒤적이던 울프는 한 가지 의문에 부딪혔죠. 18세기 이전의 여성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는 사실. 역사서는 여성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여성의 이름으로 남겨진 희곡이나 시 한 편 찾기조차 어려웠죠. 이는 여성이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회가 여성을 독립된 개인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차별이 질문조차 되지 않던 시대, 그것이 '상식'이던 시대였으니까요.


울프는 이 지점에서 유명한 질문을 던져요.

"셰익스피어에게 재능이 똑같은 여동생이 있었다면?"

재능은 있었지만, 교육받을 권리도, 경제적 기반도, 문을 닫을 수 있는 방도 허락되지 않았던 여성. 그녀는 결국 글을 쓰지 못했을 것이고, 설령 썼다 해도 기록되지 못한 채 사라졌을 거예요. 울프가 말하고자 한 것은 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지워진 수많은 목소리였어요. <자기만의 방>은 바로 그 침묵의 이유를 추적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울프는 그래서 남기고 싶었던 것인지도 몰라요. 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식적인 편향을 품은 채 쓰인 글은 오래 살아남을 수 없으며, 창조적 예술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마음속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이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에요. 여성이 역사가 시작된 이래 줄곧 가난했고, 지적 자유를 허락받지 못했기에 버지니아 울프는 돈과 자기만의 방을 그토록 강조했다고 말해요. 그것은 특권의 요구가 아니라, 창작이 가능해지는 최소 조건에 대한 진술이어요.


울프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면, 이 주장이 얼마나 절실한 체험에서 비롯되었는지 알게 돼요.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연속적인 상실을 겪었어요. 열세 살에 어머니를 잃었고, 이후 이복언니와 아버지까지 차례로 세상을 떠났어요. 더불어 어린 시절 이복오빠들에게 성적 학대를 당한 경험 역시 뒤늦게 드러났어요. 이러한 사건들은 그녀에게 심각한 우울증과 조울증 증세를 남겼고, 울프는 평생 여러 차례 정신 붕괴를 겪어요. 그러나 울프는 이 고통을 개인적인 불행으로만 해석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여성의 정신적 고통이 개인의 약함이 아니라, 침묵을 강요하는 사회 구조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보았어요. 평생 지속된 정신 질환에 전쟁이라는 외부의 압력이 겹치면서, 결국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중 울프는 코트 주머니에 돌을 넣고 우즈 강으로 걸어 들어가요. 이 선택을 단순한 비극으로만 읽을 수는 없을 거예요. 그것은 어쩌면 자기 삶의 통제권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르니까요. 자기만의 방을 확보했기에 말할 수 있었고, 더 이상 그 방을 지켜낼 수 없다고 느꼈기에 스스로 문을 닫았던 것은 아니었겠느냐는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 책은 처음부터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었어요. 문단의 구분이 적고, 문장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어 집중이 쉽게 흐트러지기도 했어요. 아마도 요즘 책들의 친절한 구성에 익숙해진 탓일 테죠. 저자 역시 책에서 말하듯, 이 글은 치밀하게 정리된 논증이라기보다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이어지는 이야기처럼 느껴져요. 그런데도,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게 전달돼요. 중요한 것은 성별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에요. 그리고 그러기 위해 여성에게도 경제적 기반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울프는 단호하게 짚어내요. 어쩌면 이런 글은 버지니아 울프였기에 가능했을지도 몰라요. 다른 사람들처럼 눈에 띄지 않게, 불만 없이 살아갈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러나 저자는 자신의 삶을, 그리고 여성의 삶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사유했어요. <자기만의 방>은 그 진지한 고민의 흔적이며, 그래서 이 책은 한 시대의 문제의식을 넘어 지금까지 읽히고 읽는 거겠죠.


세상은 분명 예전보다 나아졌지만, 차별은 여전히 곳곳에 남아 있어요. 그것은 성별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더 나은 방향을 고민하고 바꾸려는 사람들이 계속 존재해 왔다는 사실일 거예요. 그 작은 움직임들이 모여 세상을 조금씩 앞으로 밀어왔어요. 이 책을 덮으며, 저 역시 그 변화의 가장자리에라도 발을 담그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마음을 갖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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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나의 마음 그릇 (스프링) - 매일 나를 채우는 연습
김윤나 지음, 차상미 그림 / 김영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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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들여다본 적 있나요? 내 마음이라는 그릇에는 무엇이 담겨 있나요? 그릇의 크기는 어떤가요? 빈틈없이 가득 찼을까요, 아니면 아직 비어 있는 공간이 많을까요? 그 안에서 '나'와 관련된 것의 비중은 얼마나 될까요? 타인의 기대와 시선이 차지하는 자리는 또 얼마나 될까요? 어쩌면 우리는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어, 이 질문들에 선뜻 답하지 못하는지도 몰라요.


저자는 말해요.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고 나다운 삶을 원하지만, 현실에서는 타인의 시선과 의무, 비교에 묶인 채 하루를 보낸다고요. 그렇다면 어떻게 삶의 중심에 다시 나를 세울 수 있을까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해요. 나와 더 깊이, 더 깊이 대화를 나누는 거예요.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일이에요. 그리고 그 질문에 성실하게 답해 나가는 거죠. 답을 얻으려면 먼저 질문을 해야 합니다.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의 방향이 드러나니까요. 이럴 때 나의 내면을 천천히 살펴보게 해주는 '성찰적 질문'이 좋은 길잡이가 되어줘요.


이 책은 1년 52주 동안,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나와의 대화'를 위한 질문에 답하도록 구성되어 있어요. 이를 위해 필요한 건 하루에 한 번, 잠깐의 시간입니다. 하루 중 언제라도 괜찮아요. 혼자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짧은 순간이면 충분하니까요. 주중에는 질문에 답하며 생각을 기록하고, 주말에는 한 주를 마무리하며 내가 남긴 답들을 천천히 돌아보면 돼요.

그럼, 이제 이 책에는 어떤 질문들이 담겨 있는지 몇 가지만 살펴볼게요.


만족스러운 삶이란? (week 12 수)

항상 분명한 꿈과 목표를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에요. 매일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삶의 형태도 있으니까요. 만약 나 역시 그렇다면 내게 만족스러운 삶이란 무엇일지 생각해보세요.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 때 마음에 든다고 느껴지나요?


그때그때 다르지 않을까요. 그래도 지금 떠오르는 것들을 적어 보자면, 우선은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해요. 내 책상 앞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할 때(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이것저것 끄적일 때),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 아무 생각 없이 자연을 바라보며 멍하니 쉬는 순간들 등이 떠오르네요.



내 인생의 전환점은?(week 36 수)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이 생기고, 원하지 않았던 일들이 찾아오지만, 우리는 그것에 '전환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과는 다른 방향을 만들어 주었던 전환점이 있다면 언제였나요? 그것은 내게 어떤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남아 있나요?

제 삶에서 가장 큰 전환점은 결혼과 출산, 그리고 육아예요. 그 시간을 지나오며 ‘나라는 사람’의 민낯을 마주하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외롭고 헛헛했던 마음이 서서히 채워졌어요. 제 성향을 비교적 분명하게 알게 되었고, 남들의 시선이 아니라 나다움을 찾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깨달았어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그 질문에 답하는 시간을 거치며 삶의 방향에도 자연스러운 변화가 생겼고요. 시야는 넓어졌고, 경험의 결도 한층 깊어졌어요. 이제는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어요.


인생을 살다 보면 '나다움'을 찾아야만 하는 시기가 찾아오는 것 같아요. 그 순간에 시간을 들여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하는 시간을 갖느냐, 아니면 귀찮다는 이유로 그냥 지나치느냐에 따라 이후 삶의 방향이 달라지기도 하고요.


저는 약 3년 전, 극심한 혼란기를 겪었어요. 내가 나를 제대로 모르고 살아왔다는 강한 감각이 들었거든요. 그때 하던 일들을 잠시 멈추고, 내면으로 깊이 파고들기 시작했어요. 책과 강의에서 던지는 질문에 하나씩 답하며,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나를 발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책은 그때 어렴풋이 알게 되었던 '나라는 사람'을 조금 더 또렷하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게 도와주었어요. 다만 이 과정은 너무 서두르면 오히려 체할 수 있어요. 하루에 하나의 질문에 차분히 답하고, 주말에는 한 주의 기록을 점검하는 방식으로 천천히 따라가길 권하고 싶어요. 질문에 답하다 보면, 나라는 사람이 조금씩 선명해지지 않을까요. 그렇게 마음의 그릇을 '나'로 하나씩 채워가는 연습을 해보는 거예요. 그 시간이 1년 쌓이고 나면, 적어도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말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나를 알고 싶은 분, 나다움을 찾고 싶은 분, 나로 채워진 삶을 살아가고 싶은 분께 추천해 드려요. 감사합니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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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후쿠
김숨 지음 / 민음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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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후쿠'가 뭘까 궁금해서 사전에서 찾아본 정의는 (원피스 따위의) 간단한 여름용 여자 양장. '아, 그렇구나'하고 책의 첫 장을 넘겼는데, 그곳에 적힌 '간단후쿠'는 일본군 위안소에서 '위안부'들이 주로 입은 간단한 원피스식의 옷. 더 찾아보니 작업복처럼 단순하고 싸게 만든 옷, 쉽게 벗기거나 세탁하기 쉬운 옷으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여성들을 군의 관리 대상처럼 취급하기 위한 복장이었고, 그들의 인권과 존엄을 짓밟는 상징이었다고 해요. 아… 마음이 순식간에 무거워졌어요. 책 표지를 다시 봤어요. 파란 하늘, 하얀 구름, 커다란 노란 꽃의 조화가 이쁘게만 보였는데, 잘 보니 꽃에 간단후쿠가 숨어 있어요. 하얀색이 구름이 아니라 간단후쿠를 입고 있는 영혼처럼 느껴져요.


간단후쿠를 입고 간단후쿠가 된 10대 어린 소녀들. 여자라서, 가난해서 돈을 벌기 위해 머나먼 만주 땅에 왔지만, 실제 그녀들이 간 곳은 일본군이 전쟁터 곳곳에 설치한 위안소. 일본 제국주의 시기(특히 1930년대 후반~1945년 일본의 패전까지) 많은 여성이 속임수(공장 취업, 간호일 등으로 유인), 인신매매, 강제 연행 등의 방식으로 일본군 위안소에 끌려갔어요. 사람인데, 사람 취급받지 못해 차라리 자신을 간단후쿠라고 여기는 어린 소녀들의 고달픈 삶이 책 전반적으로 펼쳐져 있어요.


군인들을 데리고 자는 공장에서 10대 소녀들은 군인들과 돌림노래를 불러요. 하루에 수십 명의 군인을 상대했고, 폭력이 일상적이었으며, 임신과 질병,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려요. 어디인지 알 수 없고 철조망에 둘러싸여 있는 곳. 그녀들을 지켜주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강에서 간단후쿠를 빨고 철조망에 널면서 어쩌면 바랐는지도 모르겠어요. 간단후쿠라도 저 멀리 날아가기를. 하지만 철조망에 걸린 채 나풀거리기만 하는 간단후쿠. 꼭 본인 같아요. 쉽게 입고 쉽게 벗길 수 있는 옷. 인격을 상실한 채 소모품처럼 여겨지는 삶을 사는 그녀들. 도망가고 싶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고, 설령 도망가더라도 죽을 확률이 높고, 남은 이들에게 빚이 더해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삶.


작중 화자인 요코는 이름이 네 개 있어요. 아버지가 지어 준 이름 개나리, 이곳에서 지어 준 이름 요코, 교코, 아이코. 그래서 그녀의 몸에는 영혼 네 개가 모여 살아요. 하나의 영혼도 감당하기에 벅찬데 네 개의 영혼을 어떻게 조율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일까요? 가끔 '나를 잊어버리는 병'에 걸려요.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였는지, 누구인지, 이름도 나이도 잊어버리는. 어쩌면 진짜 자기를 놓아버리고 싶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제정신으로 살기 힘드니 나를 놓아야 그나마 버틸 수 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끝내 놓지 않아요. 나를 지키고자 해요. 일본이 전쟁에서 이기면 보내주겠다는 말을 순진하게 믿지 않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이 속박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하면서요.


요코는 부칠 수 없는 편지를 강물에 써요. 구구절절한 사연은 생략하고 '답장은 마세요.'라고만. 어차피 고향에 돌아가도 환영받지 못함을 알아서였을까요. 실제 전쟁이 끝난 뒤에도 피해자들은 사회적 낙인, 가난, 정부와 사회의 무관심 때문에 오랫동안 침묵해야 했어요. 요코의 편지에 저자는 답장해요. 이 책으로써요. 말할 수 없는 고통, 기록되지 못했던 기억을 남김으로써요.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였던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최초 공개적으로 증언하면서 이 문제가 국제적으로 알려졌어요. 그녀의 용기가 계기가 되어, 다른 피해자들이 잇따라 증언하기 시작했어요. 일본 정부는 국가 간 공식 협정과 기금 지원으로 일정 조치를 해왔지만, 피해자 측이 요구하는 완전한 사죄·법적 책임·배상 측면에서는 아직 피해자·한국 사회의 기대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예요. 한국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 중 현재 생존자는 6명이라고 해요.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그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기억을 이어가는 일이 우리 세대의 책임이 되었어요. 이 문제는 단순히 한·일 간의 외교 현안이 아니라, 전시 성폭력, 여성 인권, 정의, 평화의 문제니까요.


읽기 어려운 책이 있어요.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같은. 단어의 의미를 몰라서, 문장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한줄 한줄 읽어 내려가기 힘든 책. 무거운 돌멩이 하나가 가슴을 계속 짓누르는 느낌. 그 무게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해 같은 작가의 다른 책도 읽고 싶지만, 아직 손도 대지 못하고 있는 그런 책이요. 이 책 또한 그랬어요. 빨리 읽을 수도, 낭독할 수도 없었어요. 몇 번을 덮었다 다시 폈다 했어요. 이 먹먹함과 무거움을 이겨내고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걱정되기도 했어요. 하지만 읽어야 했어요.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요. 그래야 똑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테니까요.


작가는 이 책을 쓰는 데 십 년이 걸렸다고 해요.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로 살아오신 분들은 긴 세월을 고통 속에서 보내셨어요. 그 세월의 무게를 단 며칠 만에 소화하려니 힘든 거겠죠. 부끄럽기도 했어요. 제대로 알지 못하고 언론에 나올 때나 반짝 관심을 가졌으니까요. 읽으면서 그분들은 어떻게 그런 삶을 견디셨을까 싶었어요. 저는 아마 제정신으로 살지 못했을 것 같아요. 용기 있게 그때의 상황을 알렸기에 숨겨져 있던 게 드러났는데, 그런 용기도 어디서 나왔을까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삶, 자신의 의지라곤 전혀 없는 삶,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했던 삶, 자신을 잊어야 그나마 살아갈 수 있었던 삶. 고유한 자아가 있는 한 사람을 어떻게 자기들 멋대로 사고팔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지, 그 폭력성에 치가 떨려요. 간단후쿠가 지금은 없을까요?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지금도 끊이지 않는 전쟁, 폭력, 학살…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래도 잊지 않는 분들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이렇게 글로 남아서 더 다행이에요.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알면 보이는 게, 행동하는 게 달라질 테니까요.


누구든 한 번은 읽어봤으면 하는 책입니다. 감사합니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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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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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읽은 기억은 없지만 익숙해요. 아마 줄거리를 대충 들어봐서 그런가 봐요. 그런데 내용이 잘 이해되지 않았어요. 노인이 고생해서 잡은 큰 생선이 결국엔 가시만 남은 상황. 이렇게 허무한 이야기를 한다고? 싶었거든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멕시코 만류의 늙은 어부 산티아고. 벌써 84일째 물고기를 잡지 못했어요. 그를 따르는 소년 마놀린도 부모의 만류에 다른 배를 타게 되지만, 산티아고를 살뜰히 챙겨요. 어느 날 산티아고는 홀로 먼바다로 나가요. 기필코 큰 고기를 잡겠다는 일념으로요. 하지만 그의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아요. 망망대해에 이야기 나눌 사람이 없어서 혼잣말하고, 새, 물고기 등에 말을 걸죠. 마놀린이 옆에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끊임없이 하고요.


산티아고는 경험이 많기에 빈틈없이 준비하고 있으면 운이 찾아올 때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마침내 청새치 한 마리가 걸렸어요. 조각배보다 크고 힘도 센 녀석이기에 쉽게 잡히지 않아요. 이틀이 넘는 사투 끝에 드디어 청새치를 잡은 산티아고.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됐고, 정신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렀지만, 혼자 힘으로 잡았다는 기쁨이 그를 감싸요. 하지만 운명은 그를 그냥 놔두지 않아요. 끊임없는 상어 떼의 습격을 받으면서 결국 아주 큰 물고기를 잡았다는 흔적만 남긴 채 돌아와요.


〈노인과 바다〉는 1951년에 쓰였고, 1952년에 발표되었어요. 이때 헤밍웨이는 세계적인 대문호였지만, 동시에 슬럼프의 한가운데에 있었어요. 제2차 세계대전 종군 기자로 활동하며 얻은 외상 후유증과 음주, 건강 악화, 이전 작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이후 이어진 창작의 침체기, “헤밍웨이 문학은 끝났다”라는 비평가들의 냉소. 이런 절망 속에서 그는 쿠바 근처의 바다로 가요. 그곳에서 그는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증명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바다와 인간, 고독 등의 주제를 붙잡고 글을 써요. 그게 바로 <노인과 바다>죠.


그는 산티아고를 통해 자신을 증명해 내고 싶었는지 몰라요. 다들 자신의 시대는 끝났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독한 창작의 고통을 그는 온몸으로 받아들여요. 그게 숙명인 것처럼요.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으니까요. 산티아고의 말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는 그가 계속 써나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것 아닐까요. 하지만 아무리 뼈를 깎는 고통으로 완벽을 추구하려 노력하지만, 세상은 그걸 알아주지 않을지도 몰라요. 산티아고가 애써 잡은 청새치가 창작물이라면, 상어는 그 작품을 헐뜯는 사람들이겠죠. 하지만 그 패배한 흔적이라도 갖고 있는 것, 그게 중요한 것 아닐까요.


헤밍웨이에게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노인과 바다>를 마지막으로 그는 작품 활동을 하지 않고 1961년 자살했어요. 왜 그런 선택을 해야만 했을까요? 보여줄 건 다 보여줬다고 생각해서였을까요? 더 이상 이 정도 쓸 수 없다는 허탈감에서였을까요? 아니면 고독하게 싸워서 이뤄내는 창작의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었을까요?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작품을 자기들 마음대로 물고 뜯는 사람들에 지쳐서였을까요? 1959년 건강이 악화되면서 우울증, 알코올중독증에 시달려서 충동적으로 선택한 일일까요?


헤밍웨이는 글쓰기를 ‘빙산’에 비유했어요. 수면 위에 드러나는 건 단지 빙산의 1/8, 나머지 7/8은 바다 아래 감춰져 있죠. 헤밍웨이는 말해요. “작가는 무엇을 말하지 않는가가 작품을 결정한다.” 즉, 글에 드러난 부분보다 생략된 부분이 더 큰 무게를 지녀야 한다는 원칙으로, 이게 빙산 이론이에요. 헤밍웨이의 문장은 짧고 명료하며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아요. 독자가 스스로 그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방식이죠. 이건 젊은 시절 종군기자로 활동하며 배운 태도와도 관련이 있어요. <노인과 바다> 표면에는 단순히 노인이 바다에 나가 물고기와 싸우는 이야기만 있어요. 하지만 그 아래엔 인간의 고독, 두려움, 숭고함이 겹겹이 있어요.


고전은 여러 방향에서 해석된다고들 하죠. 자기가 지금 겪고 있는 현상에 빗대어 볼 수 있으니까요. 저는 헤밍웨이처럼 뭔가를 제대로 이뤄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이제 시작 단계라서 가야 할 길이 멀어요. 끝이 보이지 않는 목표 지점을 향해 꾸준하고 성실하게 해야 겨우 도착하겠죠. 그 과정이 쉽지는 않을 거예요. 고통스럽고 외롭고 고독하고 처절하고, 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을 거고요. 하지만 그 시기를 산티아고처럼 묵묵히 견디면 뭐든 되지 않을까요. 청새치까지 아니어도 아주 작은 물고기라도 낚을 수 있게 노력해 봐야겠어요. 비록 그 결과가 상어들에게 뜯길지언정 그런 걸 해봤다는 경험은 제게 남을 테니까요.


잘 생각해 보면 지금보다 발전할 가능성이 있기에 희망을 품는 것 같아요. 목표한 걸 이미 다 이뤘다면, 아니면 모든 게 다 갖춰져 있어서 내 힘으로 노력해도 되지 않는 환경에 있다면, 좀 허무할 것 같아요. 삶의 의욕과 방향을 잃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동사형으로 생각하라고 하나 봐요. 그러면 그런 삶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할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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