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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어른을 위한 동화를 찾던 중 『자기 앞의 생』을 읽게 되었어요. 처음엔 낯설었던 로맹 가리는 이미 유명한 작가였어요. 그는 ‘끝난 작가’라는 평가와 고정된 이미지에 갇혀 있었죠. 이를 벗어나기 위해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새로운 글쓰기를 시작했어요.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자 한 선택이었어요. 그렇게 두 번째 삶을 얻은 그는 『자기 앞의 생』으로 다시 한번 공쿠르상을 수상해요. 같은 사람이 두 번이나 그 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비밀로 남아 있었지요. 그 비밀은 1980년, 그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뒤 남긴 유서를 통해서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어요.
자기 앞의 生. 정작 내 앞에 놓인 삶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있었나, 문득 생각하게 돼요. 그저 주어진 것이기에 살아가고, 그때그때 의미를 덧붙이며 견뎌온 것은 아니었을까요. 같은 '生'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사람마다 그 안에 남는 결은 전혀 달라요. 어떤 삶은 선택과 무관하게 주어지고, 또 어떤 삶은 의지와 다르게 흘러가기도 하지요. 이 책 속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삶이 바로 그래요. 그들의 생은 스스로 고른 결과라기보다, 어쩌면 감당해야만 했던 시간에 더 가까워 보여요.
아무것도, 아무도 없었기에 서로를 붙잡을 수밖에 없었던 모모와 로자 아줌마. 모모가 기억하는 삶은 로자 아줌마와 함께한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어쩌면 이들은 사회의 가장 어두운 가장자리에 놓인 사람들일지도 몰라요. 엘리베이터조차 없는 낡은 7층 아파트에서, 제대로 된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끌려갔던 과거를 지닌 전직 창녀, 창녀가 낳은 아이들, 그리고 세상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까지. 그들의 삶은 흔히 말하는 '정상'의 기준에서 벗어나 있어요. 그래서 실패한 인생처럼 보이기도 해요. 하지만 그들은 각자의 생을 받아들이며 살아가요. 선택할 수 없었던 조건 속에서도, 주어진 시간을 끝까지 살아내요. 사회 밖에 놓인 삶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은 분명 자기 앞에 놓인 生을 묵묵히 감당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로자 아줌마는 모모를 잃지 않기 위해 모모의 나이를 속일 만큼 절박했어요. 모모 역시 유일한 보호자인 아줌마를 잃을까 두려워 늘 불안 속에 살았어요. 이들에게 삶은 늘 불안 위에 놓여 있었어요. 다른 삶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에,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조차 분명히 알지 못한 채 저지르는 일들. 설령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지도 몰라요. 모모가 도둑질하는 건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시선과 관심을 붙잡기 위한 방식이었어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기에, 그렇게라도 손을 뻗어야 했던 모모.
어른의 보호를 받아야 할 나이에, 혼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아이, 모모. 아마 그래서였을 거예요. 로자 아줌마가 나이 들어 병에 걸리고, 끝내 의식을 잃은 채 세상을 떠났을 때도 모모는 그 곁을 떠나지 못해요. 무려 3주 동안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해가면서까지요. 자신을 유일하게 돌봐주었고, 조건 없이 사랑해 주었던 존재였으니까요. 부패가 시작되고, 아무도 없는 지하 공간에서 홀로 시간을 견디는 일은 분명 두려웠을 거예요. 그래도 모모가 그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죽음' 그 자체보다 '부재'가 더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열네 살의 나이에 완전히 혼자가 된다는 것. 그 감각은, 쉽게 상상조차 닿지 않는 종류의 외로움일 것 같아요.
"거꾸로 된 세상, 이건 정말 나의 빌어먹은 인생 중에서 내가 본 가장 멋진 일이었다." (P. 137)
모모는 성우가 영화 더빙을 하다 녹음을 망쳐 다시 해야 하는 순간, 화면이 거꾸로 되돌아가는 장면을 보며 그것을 '멋지다'라고 느껴요. 어쩌면 그에게는 되돌리고 싶은 시간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자기의 삶도, 로자 아줌마의 한때 찬란했을 청춘도. 그렇게 시간을 되감을 수 있다면, 모모는 무엇이 되고 싶었을까요. 경찰, 테러리스트, 늙어서 더 이상 선택받지 못하는 여자들만 맡는 포주, 혹은 하밀 할아버지가 소중히 간직하던 빅토르 위고처럼 글을 쓰는 사람. 모모의 꿈은 결국, 자신이 보고 들은 세계 안에서만 자라날 수밖에 없었어요.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 같지만, 그 생이 모두에게 다정하게 펼쳐지는 것은 아니에요. 모모에게도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결국 로자 아줌마의 곁으로 돌아와요. 그 선택의 이유는 어쩌면 단순해요. 적어도 그곳에서는 서로가 같은 결의 사람, 같은 세계에 속한 존재였기 때문이죠. 완전히 다른 세계로 나가기보다는, 비록 초라하고 고단하더라도 익숙한 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설령 그것이 '똥 같은 세계'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 느끼는 동질감이 모모를 붙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하밀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기 전에 한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 사랑해야 한다." (P. 311)
'사랑'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슬프고 무겁게 다가올 수 있다는 걸, 이 책을 통해 깨달았어요. 모모에게 사랑은 조금 다르게 남아 있을지도 몰라요. 그의 삶 속 어딘가에 자리한 로자 아줌마와의 기억이, 여전히 조용히 그를 감싸고 있을 테니까요. 따뜻하되, 마냥 밝지만은 않은 온기로요. 어쩌면 저는 그동안 사랑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해 왔는지도 모르겠어요. 반짝이고, 부드럽고, 따뜻한 색을 띠는 것만을 사랑이라 여겨왔던 건 아닐까요. 하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 알게 돼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빛나는 사랑도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요. 그래서 마지막 문장,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이 더 오래 남아요. 지금의 저는,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사랑은 어떤 빛을 띠고 있는지, 조용히 돌아보게 되네요.
어린 모모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에 관한 이야기. 열네 살의 아이가 어떻게 이런 삶을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것이 그의 전부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져요.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아이라면, 좋든 싫든 결국 알아버리게 되는 것들. 자기 앞에 놓인 생이 그러했다면,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지 않았을까요. 아직 미성년자인 그에게는 삶을 바꿀 힘조차 없었을 테니까요. 이 책을 읽으며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어요. 혹시 저는 편견 속에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고요. 그들의 사정에는 귀 기울이지 않은 채,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고 쉽게 판단해 버리지는 않았는지. 왜 저렇게밖에 살지 못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순간들 역시, 결국 그들의 자리에 서보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관계를 과연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수도 있어요. 하지만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하나의 기준선을 그어두고, 그 안에 있는 것만 '정상'이라 믿어왔던 건 아닐까요. 하지만 그 선 밖에 있는 삶 역시 분명한 삶이에요. 그렇다면 그 선은 누가 그은 것일까요. 그리고 왜 우리는 그 기준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은 채 받아들여 왔던 걸까요. 어쩌면 필요한 것은 선을 유지하는 일이 아니라, 그 선 자체를 다시 생각해 보는 일일지도 몰라요. 물론 세상에는 분명 나쁜 사람도 존재해요. 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어요. 다만, 그들이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쯤 질문해 볼 필요가 있어요. 그들을 그렇게 만든 환경과 조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보호받아야 할 존재들을 방치한 채, 결과만을 두고 비판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되네요. 사람들이 조금 더 안전하게, 조금 덜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 어쩌면 우리가 고민해야 할 방향은 그쪽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