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안녕, 크림소다
누카가 미오 지음, 한수진 옮김 / ㈜소미미디어 / 2023년 3월
평점 :
절판
"'가족 따윈 이제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게, 그렇게 큰 죄야?" 미대생들의 상처와 재생을 그려낸 청춘소설, 이라고 소개되어 있던 일본 소설 [안녕, 크림소다]
크림소다의 의미가 무엇일까 굉장히 궁금했다. "그것은 흔한 연애소설의 우울한 결말이었다."로 시작하는 소설. 다 읽고 나니 그 흔한 연애소설만은 아니었다. 다 읽고 나니 책 표지에 있는 장면이 이해되었다.
⠀
⠀
'하나비'라 불리는 미술대학 유화과 1학년 신입생 도모치카, 특별히 그림에 천부적 재능을 타고 난 것도 아니고 그림을 안 그리면 난 죽는다 같은 불타는 열정에 휩싸여 들어온 것도 아니다. 어릴 때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어머니가 기뻐하며 "우리 도모치카는 그림을 정말 잘 그리네!"하고 칭찬하셨기 때문에 그냥 미대에 진학하면 좋아하실 것 같았다.
⠀
⠀
집에서 통학하려면 못할 것도 없는 거리이지만 굳이 도모치카는 기숙사를 구하고 학비와 생활비를 보내주겠다는 어머니의 제안도 거절한다. 하지만 혼자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까지 충당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밥을 굶은 도모치카에게 밥을 먹여 주고 돈까지 빌려주는 고마운 유화과 4학년 와카나 선배. 다 쓰러져 가는 아사히 기숙사에 함께 살고 있다.
⠀
⠀
이런 그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으니 부모님이 재혼하셨다는 것이다. 도모치카의 어머니가 재혼하여 새 아버지와 누나가 생겼다. 와카나의 아버지가 재혼하여 새 어머니와 여동생이 생겼다. 또 한 가지 공통점은 그들은 부모님의 재혼으로 인한 새 가족의 범주 안에 녹아들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님의 경제적 도움을 거절하고 만나는 것조차 부담스럽고 힘든 일이 되었다. 그런 그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모님도 공통점이다.
⠀
⠀
책 앞표지의 그림은 와카나 선배의 아픔이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남학생과 여학생. 그들 앞에는 수영장이 있다. 수영장의 물이 일렁이고 크림소다의 버블이 뭉게뭉게 피어 오른다. 마치 흰 색 물감이 방울방울 캔버스에 튄 것처럼!
⠀
⠀
와카나의 아픔을 이해해 준 단 한 사람, 그녀. 왜 와카나와 그녀는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없었을까? 그녀가 없는 세상에서 와카나는 혼자가 되었다. 외톨이가 아닌 혼자. 가족이라는 혈연관계에 흡수될 수 없어 용수철처럼 튕겨져 나와 길거리를 헤매는 와카나. "향을 피워줘. 유키가 기뻐할 거야."
⠀
⠀
사랑의 터널의 조각은 씹을 때마다 혀를 찌르는 듯한 쓴맛이 났다. 차갑고, 아프고, 깊게. 와카나를 찌르면서 녹아들었다.
⠀
⠀
미술을 전공하는 사람이 그림을 못 그리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광활한 캔버스 앞에 붓을 들고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그릴 수 없다. 아무것도 그려지지가 않는다. 미야케 선생님은 말했다. "가족 따윈 상관없었을 텐데, 막상 가족이 사라지니까 그림을 전혀 못 그리게 되었던 거야." 그림을 그릴 때는 가족이 거추장스러웠던가? 그럴 수 있는 존재란 말인가, 가족이?
⠀
⠀
예술가는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내가 직접 아는 화가가 없어서 모르겠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창작해 내야 하는 그들에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무엇일까? 그들이 가장 가지고 싶고 부러운 것은 '재능'일 것이다. 미술대학에 들어온 그들이 재능도 각각 깊이가 다를 테고 말이다. 스스로 재능을 잃었다고 느낄 때 그들은 이 세상에서 빛이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것 같다.
⠀
⠀
⠀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탄산수를 부으면 부글부글 거품이 올라온다. 이걸 '크림소다'라고 부른다. 와카나 선배가 좋아하는 음료, 그래서 도모치카에게 권하고 만들어 주었던 특별 음료. '레몬의 집'에서 그들은 함께 크림소다를 마셨다. 그녀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섞인 추억이다.
⠀
⠀
'가족'의 범주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 일본에서도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 같다. 자식들은 부모의 재혼을 받아들이기 굉장히 어려운 것이다. 새 아버지, 새 어머니, 의붓 형제와 자매를 내 진짜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들이 정말 진짜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자식들이 이렇게 반대하고 집을 뛰쳐나갈 정도로 싫어하는데도 재혼을 해야 하는 것인가. 오랜 기간 홀로 자식을 키우며 헌신했는데, 너희들 다 키우고 이제 나도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려고 한다. 그게 그렇게 잘못된 것이냐고 부모님은 말씀하실 수 있을 것이다.
⠀
⠀
"스스로 탈출하고 싶어질 정도로 지독한 올바름보다는, 훨씬 더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그릇됨을 소중히 여기며 살고 싶다"는 도모치카의 말을 다시 한 번 읽어본다. 망가졌지만 그냥 망가진 상태로 살 수 있다. 이 세상은 망가지지 않은 인간만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말이다. 망가진 체 살아도 된다. 망가진 것의 존재가 허락되지 않는 세상에서는 아무도 숨이 막혀 살아갈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
⠀
와카나는 길고 어두운 '사랑의 터널'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까? 달콤하고 칼칼하고 조금 쌉쌀한, 그래서 조금 아픈 크림소다의 추억을 간직하고 도모치카는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망가졌지만 그래도 괜찮다.
⠀
⠀
해당 도서는 소미미디어의 소미랑 2기로 도서협찬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