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마틴 래디 지음, 박수철 옮김 / 까치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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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세운 유럽의 합스부르크 왕가, 중앙유럽과 이탈리아, 이베리아 반도, 북아프리카에서 멕시코까지. 10세기부터 무려 1000년을 군림하며 유럽을 지배했던 합스부르크 왕조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중앙 유럽 분야의 최고 전문가인 마틴 래디 교수의 설명으로 펼쳐진다.

18세기 초반에 호프부르크 궁전이 개축되면서 구왕궁이 자취를 감추고 제국 도서관이 들어섰다. 1720년대에 만들어진 이 도서관은 약 20만권의 책과 필사본이 길이 75미터짜리 서고 단 한 곳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당시 소장 도서로는 신학, 교회사, 법학, 철학, 과학, 수학에 관한 저작들과 그리스어, 라틴어, 시리아어, 아르메니아어, 콥트어 등으로 작성된 제책본 등이 있었다. 카를 6세는 도서관을 학자들에게 개방했다. (17-18쪽)

합스부르크 왕가, 그 이름만으로도 웅장하고 근엄한 제국의 위엄이 느껴진다. 학창 시절 열심히 공부했던 세계사 시간을 떠올려 보자. "언제나 합스부르크 가문의 딸임을 잊지 마라!"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루이 16세와 혼인하러 프랑스로 떠날 때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건넨 편지에 이렇게 써 있었다고 한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전 세계로 힘을 뻗친 최초의 통치자들이었다. 그들은 운과 힘으로 위대한 업적을 쌓았다. 이 가문의 영광은 위에서 인용한 17-18쪽의 황제의 도서관에 잘 나타나 있다. 도서관에 있는 쌍둥이 기둥은 헤라클레스의 기둥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좌우명인 "더 멀리"를 의미한다. 즉 물리적 지리에 얽매이지 않는 지배력을 뜻한다. 천장의 프레스코화에는 AEIOU라고 적힌 깃발을 들고 있는 3명의 여신들이 있다. 학자들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오스트리아가 전 세계를 지배한다"라는 뜻이다(라틴어로).

이 대단한 가문의 뿌리를 찾아 올라가 보니 10세기 칸첼린이라는 영주에 닿았다. 그들은 카톨릭과 수도원을 토대로 부를 쌓고 이후 정치적 동맹을 착실히 맺으며 성장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은 생존자들이었다. 그들은 가능한 많이 상속자를 낳았고 그렇게 끈질기게 대를 잇다 보니 혼인관계를 맺은 가문, 즉 사돈집의 대가 끊어질 때 그 자리를 재빠르게 꿰어찰 수가 있었다는 말이다. "생존", 공교롭게도 바로 이것이 초기 합스부르크 가문의 승리 비결이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근친혼을 장려한 덕택에 한 세대가 멀다하고 광남과 광녀들이 태어났다. 당대 최고의 가문이니 당연히 위생적이고 영양가 많은 음식을 먹였을 텐데도 유아 사망률이 국민 평균보다 훨씬 높았던 까닭이 바로 근친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합스부르크립'이라고 불리는 유전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1000년 제국의 혈통을 잇기 위해서 치러야 했던 대가였던가.

10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세월을 아우르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광과 저주를 보여주고 있는데 전혀 지루할 틈이 없었다. 천년 동안 이 대단한 가문이 배출한 인물들에 대한 자세한 스토리텔링이 아주 재미나다. 스페인 황금 시대를 이끈 펠리페 2세(블러디 메리, 메리 튜더의 남편),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녀의 어머니였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그리고 1차 세계대전 발발의 원인이 된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의 죽음 (사라예보 사건). 세계사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 당시 국제 정세와 관련된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보자.

합스부르크 제국은 1918년에 무너졌지만, 합스부르크라는 개념은 언제나 영토와 정치를 뛰어넘는 사안과 연관이 있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개념은 복잡했다. 그리고 그 개념에는 보편성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단일한 민족 집단을 바탕으로 본인들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없었다. 그들은 마치 본인들이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진 완전체의 주인이나 단일한 민족 공동체의 주인이 아니라 개별 영토와 개별 민족의 통치자인 것처럼 군림했다. 중앙 유럽의 영토들에서는 특정 민족 집단이 단일한 지배적 정체성을 확립할 만한 과반수를 이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512-513쪽)

저자가 말한 민족을 뛰어넘는 보편성이란 무엇일까? 천년을 지속해 온 합스부르크 가문의 제1 비결은 생물학적 강점에 있었다. 결국 생존과 보편성이 천년 제국의 핵심이었다는 것이다. 천년의 역사를 서술하다 보니 쉽게 읽히지 않는 부분도 물론 있었지만 합스부르크 가의 인물 중심으로 읽는다면 더욱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정치, 종교, 예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영향력을 끼친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를 서술한 이 책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를 통해 세계사를 거시적으로 조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해당 도서는 까치글방 출판사의 서평단으로 도서협찬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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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생님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 수업과 생활지도, 쏟아지는 업무에 지친 선생님들을 위한 처방전
노지현 지음 / 한국경제신문i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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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쳤구나!' 싶을 정도의 불가능한 꿈, "우리 교육의 희망과 행복을 노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 남과 다른 생각을 하면 미쳤다는 소리를 듣기 쉬운 세상, 교감이나 교장 같은 관리자의 길을 갈 것이냐, 평교사로 남을 것이냐?

이런 수업을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주어진 것을 남과 다르게 볼 수 있는 시선을 주고 싶어서다. <개미와 베짱이>를 통해 개미도, 베짱이도 모두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토끼와 거북이>를 통해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에서 포기하지 않으면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을, <꽃들에게 희망을>을 통해 고치를 틀어야 하는 이유는 '나다움'이라는 개인의 고유성을 찾기 위한 과정임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와 같은 새로운 관점을 주고 싶었다. (223쪽)

결론부터 말하고 싶다. 이 땅에 노지현 선생님 같은 선생님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노지현 선생님과 같이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나다움'과 '정체성'을 찾도록 돕고 헌신하는 선생님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물론 그런 선생님들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 선생님들이 많이 있겠지만 '남과 다름'을 쉽게 용인하지 않는 공교육의 분위기 때문에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면,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선생님들이 마음껏 자신의 소신대로 가르치면서 행복함을 느끼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교직 생활 몇 년이 지나면 남들 다 가는 관리자의 길로 갈 것인지 아니면 '그냥' 평교사로 남을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고 말이다.

관리자의 길이 나쁘다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 어느 조직에나 관리자는 필요하다. 교사도 마찬가지다. 모든 교사가 교감이나 교장이 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교감, 교장이 아인 '일개 평교사'로 퇴직을 하면 교사로서 성공하지 못한 것인가? '일개 평교사'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이번에 노지현 선생님의 [나는 선생님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를 읽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왜 제목을 이렇게 지었을까? 생각보다 행복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선생님들이 정말 많기 때문이다. 교사도 자존감이 낮은 직업 중의 하나일 것이다. 굳이 정확한 어디의 통계 자료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교사가 우아하게 '가르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교사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수업 외에도 온갖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을 잡무라고 부른다. 좋게 말하면 행정 업무. 행정 업무를 하나도 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행정이 든든하게 받쳐준다면, 교사가 가르치는 일에 더욱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교사도 절대로 완벽하지 않고 완벽할 수도 없다. 학교와 학부모, 학생들 사이에서 때로는 위태롭게 중심을 잃고 길을 잃기도 한다. 선생님들도 힘들 때가 많고 그럴 때는 울어도 괜찮다. 모든 선생님들은 특별하고 귀한 존재다. 모든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더 잘 가르치고 싶어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생님들도 자신을 돌보아야 한다. 자존감을 키우고 자신과 자기 수업의 핵심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

이 땅의 모든 선생님들에게 보내는 노지현 선생님의 치유와 격려의 메시지인 [나는 선생님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선생님들이 자존감을 든든히 세우고 더욱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노지현 선생님도 그런 바람으로 이 책을 썼을 것이다. 많은 선생님들이 이 책을 읽고 교사로서의 자부심과 행복을 찾았으면 한다.

해당 도서는 노지현 선생님으로부터 도서협찬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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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는 사람
베른트 하인리히 지음, 조은영 옮김 / 윌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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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터씨는 덫을 만들어 설치하고 미끼는 놓는 법과 족제비 가죽을 처리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덫을 놓는 건 숲에 갈 수 있는 일이기에 낭만적이고 재미있었다. 숲에 가면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덫을 관리하기 위해 숲과 들판을 다니며 가볍게 움직인 덕분인지, 놀랍고 행복하게도 다리 통증이 줄어들었다. -84쪽-

'이 시대의 소로우'라고 불리는 세계적인 생물학자이자 마라토너인 베른트 하인리히, 이 책 [뛰는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숲 속을 뛰놀며 동식물을 관찰하고 달리기를 하고 과학을 연구한 저자의 자서전 같은 책이다.

제목 [뛰는 사람]에서 알 수 있듯이 베른트 하인리히 교수는 달리는 사람이다. 과학자로서의 그의 정체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또 하나의 정체성이 바로 [뛰는 사람]인 것이다. 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1940년 폴란드에서 출생한 독일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고향을 떠나 독일 한하이데 숲으로 이주해서 유년기를 보낸다. 그리고 1951년 부모님과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다.

미국 메인 주의 시골에서의 어린 시절은 천국과 같았다고 한다. 여름이면 반바지만 입은 채로 온 숲을 누비며 덩굴을 뒤집고 새총으로 사냥을 했다. 돈을 벌기 위해 가축도 돌보고 봄에는 메이플 시럽을 만들고 여름에는 건초 작업을 나가고 이웃 아저씨와 함께 벌도 쳤다. 숲은 그에게 무한한 영감과 생명을 불어 넣는 그런 존재였다. 양봉은 그에게 곤충에 대한 무한한 관심을 열어 주었다. 숲에서 놀다가 집에 갈 때 꿀을 가져갔는데 벌의 소통 방식을 나름 연구해서 벌집을 찾았다. 자연에 대한 그의 애정과 유대감은 메인 주의 숲에서 무럭무럭 자랐고 그의 꿈은 자연 속의 행복한 농부가 되는 것이었다.

뛰는 사람이라니! 세계적인 생물학자이면서 마라톤을 뛴다고? 모든 운동에 별 취미가 없는 나는 특히 달리기를 제일 못한다. 예전에도 못 했지만 지금은 뛰면 무릎이 아파서 못 뛴다. 80세가 될 때까지 계속 뛰었다고? 그래서 이 책 [뛰는 사람]이 처음에 별로 내 흥미를 끌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최재천 교수와 [마녀체력]의 저자 이영미가 추천사를 썼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읽어갈수록 대자연의 품 속에서 동식물을 관찰하고 사냥도 하고 강에서 낚시도 하고 보낸 그 유년기가 너무 아름답고 자유롭게 느껴졌다. 심지어 그의 부모님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멕시코 등 다른 여러 나라로 원정을 떠나셨다. 그래서 그와 여동생은 십 대의 6년을 숲에 있는 기숙학교에서 보내졌다. 그 원정이란 동물학이나 생물학 교수들의 의뢰를 받아 흙파는쥐와 같은 희귀한 동물들을 채집 및 박제하는 것이었다. 그는 부모님과 떨어져 있는 동안 계속 편지로 소통했고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하며 메인주립대학교의 산림학 전공으로 대학을 가게 된다. 메인대학교에서 크로스컨트리 클럽에 들어가 달리기를 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러너의 인생 또한 펼쳐진다.

고등학교 마지막 여름 방학, 그가 학비를 벌기 위해 숲에서 했던 아르바이트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한 곤충학자의 의뢰로 그는 박각시나방을 수집해 주었다. 그 곤충학자는 나방광이었는데 하인리히의 자질을 높이 평가하여 미 농무부에서 일을 하도록 주선해 준 것이다. 그 일은 메인 주의 먼 북쪽 숲까지 픽업트럭을 몰고 다니며 숲에 1마일(1.6킬로미터) 간격으로 나방 트랩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오직 매미나방이라는 한 종만 잡기 위한 트랩이었는데 그것도 수컷만을 잡아야 했다. 이런 트랩을 설치하는 목적은 이 매미나방이 나무를 고사시키기로 악명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당 지역에서 이 생물이 발견된다면 농무부에서는 항공기로 대량의 DDT를 살포할 계획이었다.

하인리히는 여름 방학 내내 거의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숲에서 혼자 일했다. 계속 트럭을 몰고 달리는 것이 아니라 고작 1.6 킬로미터 달리고 트랩을 설치하고 또 1.6 킬로미터 달리고 트랩을 설치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매미나방이 한 마리도 발견되지 않아서 DDT 살포를 하지 않게 되었다. 매미나방이 나무를 고사시킨다고 DDT를 살포한다면 다른 생물에 치명적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이 뻔하지 않은가! 그는 고 3때 매미나방이 없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DDT 살포를 막을 수 있었다. 정말 보람있고 멋진 일이 아닌가?

저자의 말과 같이 현대 사람들은 각종 중독과 자살, 만성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 근본 원인이 복잡하고 기계에 둘러싸여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숲에서 온갖 종류의 나무와 동물에 둘러싸여 지내면 절대로 중독과 자살 같은 충동을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의 부모님은 대학 학비조차 줄 수가 없었고 그는 스스로 일해 번 돈으로 대학을 갔다. 여름 방학마다 학비를 벌기 위해 일을 했다. 그가 했던 아르바이트는 그를 동물학과 생물학을 공부하도록 이끌었다.

베른트 하인리히, 그는 진정한 생물학자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뛰는 사람이다. 달리지 않는 그를 상상할 수 없다. 달리기는 그에게 그가 청소년기를 보낸 드넓고 아름다운 메인 주의 숲과 같은 것이 아닐까? 우리는 무엇을 하도록 설계된 존재일까? 동물이든 사람이든 원래 창조된 목적을 잃게 되면 결핍을 느끼게 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된다. 그에게 그것은 바로 뛰는 것이다. 그를 뛰게 하는 것은 숲이었다. 나를 뛰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해당 도서는 윌북 출판사의 서평단으로 도서협찬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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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이와 차이 - 장애를 지닌 언어학자의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
얀 그루에 지음, 손화수 옮김, 김원영 추천 / arte(아르테)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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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삶을 산다는 것은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온전히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여유롭게 세상을 산다는 것을 말한다. 타인의 시선을 받는다는 것은 가시적 대상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며, 외부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의 시선은 훈육과 통제를 의미한다.(57쪽)

우리에게 익숙한 저자는 아니다. 얀 그루에는 노르웨이 오슬로대학의 언어학 교수이다. 그는 고뇌하는 인간의 내면을 언어학자의 시각에서 독창적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고 한다. 언어학자라는 것을 알고 바로 서평단에 지원했다. 철학자나 역사학자가 아닌 언어학자의 시각을 알고 싶었으므로.

얀 그루에(1981년생)는 세 살 때 척수근육위축증이라는 난치성 유전질환을 진단받는다.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의학적 진단을 뒤로 하고 그는 스무 살을 넘기고 서른 살을 넘겨서 교수도 되고 결혼하여 아들도 낳았다. 이 책 [우리의 사이와 차이]는 얀 그루에의 11번째 저서로 "자전적 삶의 기록을 문학작품으로 승화시켰다"는 평을 받는 에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읽기 쉬운 책은 아니었다. 한 인간의 자전적 에세이라고 하지만 '정상에서 벗어나는' 신체를 가진, 그래서 남보다 더 노력하고 생각해야 했던 삶, 그래서 자신에 대한 의료 기록부터 모든 기록을 모으고 읽고 분석했던 삶이 아니었나 싶다. 이건 내 생각이다.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휠체어에 의존하면서, 그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데에 놀라는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며 열심히 공부하여 언어학 교수 자리에 올랐다는 식의 자전적 에세이가 아니란 말이다.

그래서 그에게 '시선은 권력'이었다. 무슨 말일까? 그는 어려서부터 혼자 있을 수 없는 아이였다. 옆에 꼭 누군가가 있어야 했다. 그는 '부모와 지원 기관의 상당한 추가 지원과 후속 조치가 필요한' 존재였다. 그는 언제나 타인의 시선을 받아야 했다. 그런 존재였다. 그들의 의도는 그에게 선하게 다가오지 않았고 오히려 '권위와 통제'로 느껴졌다. 그는 말한다. 자신은 분노하는 아이였고, 지금도 여전히 분노한다고.

시선을 통해 응시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은, 응시의 대상이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의 의미를 예리하게 인식한다는 것이다. 응시의 대상자가 준비와 기대로 무장하고 있을 경우에는 응시의 관계적 측면을 더욱 쉽게 감당해 낼 수 있다. -로즈마리 갈런드 톰슨 (59쪽)

휠체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아마 본 적은 있어도 실제로 타서 움직여본 적은 없을 것이다. 얀 그루에, 그에게 휠체어란 어떤 존재일 것 같은가?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에서 휠체어를 탄 부잣집 소녀 클라라를 떠올려 보자. 한번도 그녀의 휠체어가 어떤 휠체어였을까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만화 [엑스맨]에서 프로페서 X는 크롬으로 제작한 반원형의 휠체어를 탔다. 스탠리 큐브릭 감동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도 휠체어를 탔다. 얀 그루에는 말한다. 그들의 휠체어는 개성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하고 매우 비실용적이라고.

이것이 얀 그루에 교수의 휠체어에 대한 문화사적 사고이다. 휠체어를 타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단순한 휠체어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형태와 표현 기능을 갖춘 하나의 상징체다. 하지만 휠체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단지 하나의 휠체어일 뿐이다. -103쪽-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장애'는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또 '휠체어'는? 이런 생각도 할 수 있다, 충분히. 얀 그루에가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면 대학 교수가 될 수 있었을까? 우리는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얀 그루에는 생각을 하고 기록을 모으고 읽고 기록을 한다. 그리고 숭고함을 믿고 세상의 힘을 있는 그대로 믿는다고 한다. 세상이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강조한다고! 그는 일기를 쓰는 데에는 소질이 없다고 했지만, 뛰어난 관찰력과 깊은 사색을 통해 그는 절제하는 법을 배웠던 것 같다. 그의 문장은 심해와 같이 깊다. 출렁거리지 않고 잔잔하다. 마치 주변의 물건과 상황을 자신의 사고의 통제력 아래 두려는 것처럼. 우리의 사이와 차이 처럼 말이다.

해당 도서는 이십일세기출판사의 서평단으로 도서협찬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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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플레이스의 비밀 - 그녀가 사라진 밤
리사 주얼 지음, 이경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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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의 시선은 사랑스러운 젊은이들에게 향한다. 그들은 불가해하면서도 살짝 무시무시한 존재이기도 하다. 힘 있으면서도 가여운 존재, 모든 것을 알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 그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이유는 젊음 때문이 아니라고 소피는 생각했다. 그 반짝임은 그들의 배경과 타고난 특권 때문이다. 그들이 머리카락을 만지는 방식과 음료를 잡는 방식, 무심히 휴대전화를 보며 스크롤을 내리는 방식에서 은연중에 드러나는 어떤 암시말이다. 아무리 꾀죄죄해 보이더라도 그들은 그 외양을 뚫고 빛을 발하는 돈이라는 광택제를 소유하고 있다. -127쪽-

2017년 6월과 2018년 8월, 그리고 2016년 9월의 이야기가 챕터별로 번갈아가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1부 1장에서는 킴이 칭얼거리는 아기를 돌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2017년 6월의 어느 후텁지근한 금요일 밤 11시, 평소라면 외출했다가 돌아와 시원하게 한 잔 마실 시간이지만, 킴은 머리를 틀어묶고 아기가 대박 울기 전에 달래는 중이다. 킴은 젊은 나이에 두 아이를 낳았는데 몹시 힘든 육아를 했다. 밤에 잠 못 자는 건 기본이고혼자만의 시간도 없었다. 여기까지 읽으면 킴이 아기 엄마인 것 같지만, 킴은 아기의 할머니다. 1년 전 십 대인 딸 탈룰라가 아기를 낳아서 이제 킴은 39세의 젊은 할머니가 된 것이다. 손자의 이름은 노아, 돌이 된 남자아기이다.






딸 탈룰라는 초등생 시절부터 소꿉친구였던 잭과 연인으로 발전해 임신까지 하게 된다. 임신 직후 잭과 헤어졌으나 얼마전 잭이 잘못했다고 싹싹 빌면서 다시 합치고 싶고 노아를 함께 키우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 킴의 집에 킴과 아들 라이언(고등학생), 딸 탈룰라, 사위 잭, 그리고 손자 노아까지 함께 살고 있다. 여기는 영국의 한 작은 마을, 시골이라면 시골이고 아니라면 아닌 그런 마을이다. 탈룰라는 일주일에 세 번 맨튼에 있는 맨튼칼리지에 입학해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있는 신입생이다. 남자친구 잭은 대학에 가지 않고 집을 마련하기 위해 일하는 중이다. 킴은 딸을 위해서 손자를 양육하고 있다. 자신의 두 아이를 키우느라 다시 하고 싶지 않았던 육아를 다시 시작하고 밤잠을 설치고 있다. 그렇다고 그녀가 아이들을 싫어하거나 잘못 키운 것은 아니다. 그녀는 누구보다 자신의 아이들을 사랑하고 손자도 사랑한다.

2017년 6월의 그 후텁지근한 금요일 밤, 탈룰라와 잭은 모처럼 데이트를 하러 나갔다. 탈룰라는 학교 친구들을 만났고 더 놀다 와도 되겠냐고 엄마에게 문자를 보낸다. 손자를 빨리 재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킴은 놀고 싶은 만큼 놀다 오라고 답장을 보낸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잭과 탈룰라는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를 해도 음성 메시지로 넘어갈 뿐이다. 그렇다. 그날 밤 이후 잭과 탈룰라는 그냥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이 책 [다크 플레이스의 비밀]의 원제가 The Night She Disappeared이다.




2018년 8월 메이폴 하우스, 그림 같은 마을 업필드 커먼에 있는 저택. 지금은 A 레벨 시험(영국 대입 준비생들이 치르는 시험)에 떨어진 16~19세 학생들은 위한 사립 기숙학교로 운영된다. 한마디로 패배자들을 위한 고급 사립 학교. 여기에 숀이 교장으로 부임한다. 40대 이혼남, 7세 쌍둥이들이 있다. 숀의 여자친구인 소피, 런던에서 활동하는 추리소설 작가이다. 숀과 사귄 지 오래되진 않았지만 새로운 소설을 쓰는 데 좋을 것 같아 남자친구를 따라오게 된다.

어느 날 소피는 사택의 뒷마당에서 '이곳을 파보시오'라는 말과 화살표가 그려진 표지판을 발견하고 무엇에 끌린 듯 땅을 판다. 그리고 발견된 1년 전 실종자들의 물건. 소피의 발견으로 인해 경찰은 거의 중단되다시피한 사건을 재수사하게 되는데 ......

이 책의 제목인 다크 플레이스, 1643년에 지어졌지만 조지 양식과 빅토리아 양식으로 지어진 사연 많은 고저택. 여기는 스칼렛 자크네 가족의 소유이다. 스칼렛 자크, 문제 많은 부잣집 십 대 소녀, (더 문제 많아 보이는 엄마까지) 아주 미인은 아니지만 대단히 아름답다는 느낌을 주는 자유분방한 소녀. 카리스마 넘치는 매력의 소유자 스칼렛은 다른 사람들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조종하는 능력을 지녔다. 자신이 스칼렛이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착각을 갖게 만드는 재능. 다들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스칼렛의 간택이 필요하다. 탈룰라는 맨튼 칼리지에서 사회복지학을 스칼렛은 미대를 다닌다. 결코 스칼렛의 간택을 받을 수 없을 것같던 탈룰라는 예상을 깨고 그녀와 친구가 되는데 ......




500페이지의 분량임에도 너무 재미있어서 멈출 수가 없었다. 도대체 탈룰라와 잭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죽은 걸까 아니면 실종인가? 다크 플레이스는 뭔가 알고 있는 것 같다. 그 으스스하고 기괴한 그러나 아름다운 저택에는 뭔가 감추고 있는 비밀이 있는 것 같다. 탈룰라와 잭, 스칼렛을 둘러싼 이야기가 하나씩 하나씩 펼쳐진다. 이 책 [다크 플레이스의 비밀]은 출간 즉시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고 한다. 저자 리사 주얼은 비틀린 내면을 가진 주인공과 그가 가족과 주변인들에게 미치는 어두운 영향을 긴장감 있게 서술한다는 평을 받는다.

어젯밤 다 읽었다. 궁금해서 도저히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소설 속의 무덥고 습한 영국의 여름과 [다크 플레이스의 비밀]을 읽고 있는 지금 여기의 무더위가 겹쳐지면서 내가 마치 메이폴 하우스에, 또 다크 플레이스 주변을 서성대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추리소설 작가 소피가 되어 '이곳을 파보시오' 표지판이 있는 땅을 파고 인터넷에서 다크 플레이스의 역사를 검색한다. 여러분도 무더운 여름 밤 시원한 맥주와 함께 소피가 되어 [다크 플레이스의 비밀]을 파헤쳐 보시기를 권한다.

해당 도서는 한스미디어 출판사의 서평단으로 도서협찬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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