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신기한 일인데, 어떤 책은 그냥 나에게 온다. 특별한 이유도 계기도 없이 그저 저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막연하지만 너무 강렬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혹시 나도 모르게 시공간연속체를 경험한 것일까.) 그리고 그런 책은 어김없이 나를 흔들어 놓는다. 아름답고 가슴이 아프다. 담백하지만 여운이 길게 남았다. 멋진 소설이다. 소설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역시 어마어마한 작가다. 완전 빠져서 읽었다. 덕분에 밤에 자기 전에는 웃긴 영상을 몇 개 찾아보고 마음 상태를 좀 바꾼 후에야 잘 수 있었다. 그대로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우면 당장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만약 내가 영화 제작자였다면 당장 만나러 갔을 것 같다. 소설을 읽었는데 머리 속에 모든 장면이 그려진다. 결국 많은 소설이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물음,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정유정은 같은 맥락에서 `악`에 천착한다. 전작 `7년의 밤`도 `28`에서도. 대체 인간이라는 존재는 뭘까.
마음이 복잡한 상태에서 기계적으로 읽어버려서 다시 읽었다. 다시 읽은 건 다행이었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고 반했었던 것만큼이나 파트릭 모디아노의 이 소설 역시 아름답다. 살아간다는 것은 조각나 흩어진 기억을 맞추어 가는 것, 추억을 완성하기 위해 애쓰는 것. 하지만 퍼즐 조각을 맞춰 하나의 완성된 그림을 만들 듯 조각난 기억을 완벽하게 맞출 수는 없을 것이다.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애쓰는 과정 그 자체가 인간의 삶인 것이 아닐까. 쓸쓸하고 아련하지만 우아하다. 아름다운 글.
긴 소설이지만 정말 단숨에 읽었다. 미미여사의 어마어마한 흡인력. 그저 재미있는 미스터리물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녀의 에도 시대물에서 느꼈던 것처럼, 그녀의 글에는 사람이 있다. 내가 미미여사의 소설에 끌리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이야.(3권 p.481)
그림을 그려야만 해요. 이 한 마디로 충분하다. 모든 것을 걸고 달려갈 수 있는 그런 삶을 꿈꾼다. 나는 꿈만 꾸기 때문에 이 모양인 건가. 스트릭랜드의 열정도 용기도 부러웠다. 스트릭랜드의 집의 벽과 천장에 가득한 벽화가 등장하는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벅차올랐다. 오랫만에 정말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다. 서머셋 몸의 글이 이런 느낌일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