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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ㅣ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평점 :

[일기]는 코로나19 거리두기 생활 속에도 피어나는 정원의 꽃들, 어린 조카가 그리고 간 낙서의 비밀, 아동학대 사망사건, 목포항에서 본 세월호와 걷기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은 ‘에세이&’ 시리즈의 첫 책으로 일상과 세계 사이에서 빛나는 이야기를 발굴해 사회와 조응하는 책으로 묶어 창비 고유의 색깔을 드러내는 시리즈로 꾸려질 예정이다.
파주로 이사하여 호수공원의 일부인 소리천을 산책한다. 소설을 쓰는 작가이고 하루 작업의 질은 대체로 원고 앞에서 버티는 시간의 양에 달렸다. 2010년과 2011년에 앉지도 눕지도 못할 정도의 허리 디스크 질환을 겪은 뒤로 운동을 시작했다. 의식해서 호흡하고, 먼 것을 보고, 몸을 데우고 땀을 흘려 피를 잘 흐르게 하는 운동으로 가장 유효한 것은 걷기/산책이다.
에세이를 읽다 보면 동거인이 자주 나오는데 이름, 성별이 안나와서 조금 궁금해진다. 저자는 쿠키를 먹는 것처럼 읽을 수 있는 일기를 목적하고 썼다. 해가 지면 경의중앙선 시간표를 확인해 동거인을 마중하러 갔다가 돌아왔다. 왕복 2킬로미터, 하루 25분 산책, 그밖엔 거의 나가지 않았다. 부족한 활동은 트레이닝앱이 추천하는 플랜을 따르며 채웠다. 요즘 거의 매일 일기를 쓰면서, 문장을 쓰는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푼다. 어느 날엔 문득 용기가 사라지고 그런날엔 소설도 일기도 쓸 수 없다.
파주로 이사한 지도 일년 되었다. 코로나 상황을 일년째 겪고 있다는 이야기이자 일년째, 외출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파주에 눈이 많이 많이 왔는데 눈이 내릴 때마다 눈사람을 만들고 사진을 찍어두니 그해에 눈이 몇 번 내렸는지를 셀 수 있다며 동거인은 좋아했다.
사람들이 전염을 두려워하는 마음에는 내가 병에 걸리는 경우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겠지만 내가 매개가 되어 남을 병에 걸리게 할 수 있다는 걱정도 있다고 믿는다. 잘못을 저지르면 매우 엄하게 혼났기 때문에 어릴 적 저자는 부모를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잘못’의 영역에 제한이나 기준이 딱히 없었으며 체벌의 강도나 형태가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는 점은 어른이 되고서야 알았다.
타인의 삶과 죽음을 자기 삶의 지표로 삼는 일에 반대하고 있지만, 어떤 삶과 죽음은 분명 신호이자 메시지이고 그것을 신호이며 메시지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삶은 늘 있다. 사람들은 온갖 것을 기억하고 기록한다. 기억은 망각과 연결되어 있지만 누군가가 잊은 기억은 차마 그것을 잊지 못한 누군가의 기억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래서 우리 모두 잠재적 화석이다.
저자는 책을 빌리거나 빌려주지 않는다. 누군가가 어떤 책을 빌려달라고 말하면 아예 주거나 새로 사서 건넨다. 책을 빌려간 사람이 책을 접고 구겨 내게 돌려준 적이 있는데 책 가운데가 눌러져 있어 책 빌려주고 안 좋았던 경험 완전 공감이 된다. 조카들이 미래에 어떤 책을 읽는다면 종이책보다는 아무래도 전자책일 것 같다고 한다. 종이책을 읽는 사람도 부쩍 줄어든 시기에 책을 읽고 쓰는 사람으로 살고 있으니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종이책을 즐기고 싶다고 한다.
목포에 와있다. 7년 동안 저자와 동거인의 시위 집회나 광장의 경험은 모두 세월호와 관련되었다. 광장에서 무엇을 느꼈는지를 묻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많이 추웠고, 많이 더웠다 라는 말밖에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 길게든 짧게든 외출할 때마다 감염을 늘 걱정하기 때문인지 산보 욕심이 늘어 산보를 다루는 책을 모아 읽고 있다. 건축, 미술, 음악, 문학, 사회학, 식물학,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산보에 대해 썼으므로 읽을 것이 아직 많이 남았다.
남자아이들이 주도하는 모험에서 여자아이들은 만져지고 꿰뚫린다. 남자아이들은 ‘어린아이다운’호기심을 충족하고 ‘모험’을 완성하지만 여자아이들은 남에게 말하지 못할 수치로 그 일을 기억에 남긴다. 미투가 시작되고 여성들의 이야기가 이어질 때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은 에세이지만 가볍게 읽히지는 않았다. 어떤 날들의 기록이고 어떤 사람의 사사로운 기록이기도 해서, 그것이 궁금하지 않은 독자들이 잘 피해갈 수 있도록 ‘일기’라는 제목을 붙였다. 건강하시기를, 불완전하고 모호하고 순진한 데다 공평하지 않은 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늘 마음을 담아 썼다고 하는 저자의 마음이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