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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평점 :
‘맡겨진 소녀’에 이어 11년 뒤 출간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독자들에게 흥분을 일으켰다. 이 책은 2022년 부커상 최종후보 중에서 가장 짧은 작품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긴 대화나 설명을 피하고 무수한 의미를 압축했다. 번역가님의 말대로 두 번, 세 번 그 이상 읽어야 눈에 들어오는 것도 있다.
소설은 1985년, 실업과 빈곤에 허덕이며 혹독한 겨울을 지나고 있는 아일랜드 한 소도시 뉴로스에서 아내와 다섯 딸을 두고 안정된 생활을 하는 석탄 상인 ‘빌 펄롱’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펄롱은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태어났지만 엄마가 일하는 집 주인 ‘미시즈 윌슨’ 덕분에 부족함 없이 자랄 수 있었다.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실업수당을 받으려는 사람들 줄이 길어지고 있었고 전기 요금을 내지 못해 창고보다도 추운 집에서 외투를 입고 자는 사람도 있었다. 펄롱은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과거에 머물지 않기로 했다.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직업이 있고,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딸들이 잘 커서 좋은 학교를 무사히 마치도록 뒷바라지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딸들이 사소하지만 필요한 일을 하는 걸 보며 이 애들이 자식이라는 사실에 진한 기쁨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종일 무거운 짐을 나르며 일을 하고 잠자리에 누워 있다 보면 생각이 많아 마음을 어지럽힌다. 수녀원에 배달을 갔을 때 마루를 닦는 여자 아이가 도움을 요청했는데 들어주지 못하고 돌아왔었다. 두 번째 배달을 갔을 때 석탄 창고에 맨발의 한 아이가 갇혀 있었다. 이름은 세라였고 얼마 전 아기를 출산했는데 아기를 뺏겼다며 배고플텐데 누가 젖을 주냐고 했다.
수녀원장에게 갇힌 아이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지만 펄롱의 딸들이 수녀원에서 음악 수업을 듣거나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자주 다니는 식당 주인은 수녀원에서 트러블이 있었느냐고 물었고 수녀들이 안 끼는 데가 없으니 조심하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그 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고 수녀원에서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도 내버려두고 나와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 펄롱의 마음을 괴롭힌다.
크리스마스 선물과 카드를 건네주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좋은 사람들과 주고받는 것을 적절하게 맞추어 균형 잡을 줄 알아야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단 생각을 했다. 이발소에서 머리를 깍으면서 네드와 닮았다는 이웃 여자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둘이 친척이라고 여겨 닮았다고 착각한 것일 수도 있었다.
펄롱은 미시즈 윌슨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과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생각했다. 윌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결국 그곳에 가고 말았을 것이다. 더 옛날이었다면, 펄롱이 구하고 있는 이가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었다.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세탁소'라 불리던 이 수도회의 시설은 1922년에 가톨릭 교회에 의해서 지어졌다. 1996년에야 세탁소가 문을 닫았다. 이 시설에서 ‘타락한 여성’들을 수용한다는 명분으로 설립했으나, 은폐, 감금, 강제 노역을 당한 여성과 아이가 얼마나 많은지 알려지지 않았다. 가톨릭교회가 아일랜드 국가와 함께 운영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곳이었다. 정부에서는 막달레나 세탁소에 대해 아무런 사죄의 뜻도 표명하지 않다가, 2013년이 되어서야 엔다 케니 총리가 사과문을 발표했다.
펄롱은 여자 아이를 데리고 나온다.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을 평생 지고 살아야하는 것보다 낫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소설 몇 번이고 읽어보고 싶어진다. 이처럼 사소하다고 하지만 사소하지 않고 소중한 것들이다. 펄롱의 가슴속에는 두려움이 있겠지만 용기가 대단하고 결말 뒤의 일이 궁금해지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