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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사람
박연준 지음 / 난다 / 2024년 1월
평점 :
고전을 왜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며 박연준 시인은 자신이 겪은 일화를 소개한다. 길을 잘못 들어 뒤늦게 방향지시등으로 사과의 뜻을 전했음에도 뒤차는 클랙슨을 울리며 창문을 내려 “이봐요! 길을 잘못 들었으면 그냥 잘못 가세요! 위험하니까 계속 잘못 가시라고요!”이 말이 화두처럼 다가왔다. 어차피 잘못 드는 것이 길이라면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는구나. 고전을 읽어야 한다면 잘못된 길을 열심히 걸을 때 우리가 얻는 가치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저자가 외울 정도로 반복해 읽었던 책이다. 주인공 콜필드는 부사와 형용사를 남발한다. 정말, 굉장히, 엄청난 무시로 튀어나온다. 여동생이 좋아하는 것을 단 한가지만 말해보라는 물음에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말로 이어진다.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게 많아 늘 투덜대는 인물이지만 그건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많아서다.
태어나 먹고 자고 사랑하고 다투고 화해하며 늙는 일. 변하지 않는 인간사, 일상은 고전이 됩니다. 오래 살아남는 게 고전이라면 말이지요.p12
이상 소설 전집 [봉별기]는 봄마다 끄집어내 읽는 짧은 소설이다. 인간사야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피할 수 없으니 인연의 기록은 결국 다 ‘봉별기’다. 좋은 소설은 겪지 못한 인생을 ‘살아보게’한다. 다 읽은 후 고치처럼 몸을 말고 웅크리게 만든다.
여행을 당장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장소가 내 방이라고 한다. 저자가 가택연금 기간 중 자기 방에서 써내려간 [내 방 여행하는 법] 제목이 끌린다. 갇힌 신세라고 상심하지 않고 특유의 모험심으로 발상의 전환을 꾀한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이야기는 인간을 이루는 일부이자 전부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장자]를 소개한다. 장자는 일상에서 꺼내 보기에도 좋은 ‘생활 경전’이다. 주의사항으로 장자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할 때 가르치려 하면 안 된다. 이야기만 들려주고 깨달음은 듣는 이의 몫으로 남겨둘 것. 깨달음까지 가르치려들면 당신은 꼰대가 될 것이다.
독서는 남의 말을 듣는 행위고 듣기는 침묵이란 의자에 앉아 있는 일이다. 타인의 생각 속에서 기다리고 머무는 일이다. 혼자 책 읽는 사람을 보라. 침묵에 둘러 싸여 얼마나 아름다운지!p112
[슬픔이여 안녕]의 사강은 어느 산문에서 사강은 책이 잘 팔려 ‘미친듯이 돈이 들어오던 시절’을 회상하며 수표가 벚꽃처럼 흩날리던 시절이라고 썼다. 글쓰기로 이른 나이에 성공해 삶이 주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고루 누렸다. 도박과 스피드, 약물, 쾌락과 정념, 자기 파괴에 열중했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7쪽) 변신은 강렬한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가족의 생활비를 벌던 일벌레가 진짜 벌레로 변하자 가족들은 싸늘한 태도를 보이고 현실적으로 변한다. 작가는 인간이 어떻게 고립되는지, 몰락하는지 집요하게 보여준다. 소설은 가족은 사랑해서 필요한 것인가, 필요해서 사랑하는 것인가? 우리는 결국 무엇으로 ‘변신’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헤매고 싶어서 읽는 책이 있다. 명료한 답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혼란 속에서 거닐고 싶어서 읽는 책.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집 [모자]가 그렇다. ‘가볍고 즐겁고 재밌고 신나는’ 콘텐츠가 각광 받는 이 시대에 베른하르트의 소설을 읽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요즘 ‘스토너’를 조금씩 읽고 있다. 소설에는 대단한 사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라고 말한다. 스토너는 스토너 자기 자신을 살다 간 사람이었다.
[듣는 사람]은 언제 읽어도 심장을 뛰게 하고, 옆 사람의 팔을 잡아끌며 일독을 권하게 만드는 서른아홉 권의 고전을 소개한다. 글쓰기는 공들여 말하기, 읽기는 공들여 듣기라고 했다. 공들여 듣는 사람이 되어 고전을 천천히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