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지음 / 이야기장수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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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가부장이 있었다. 지금은 가녀장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슬아 작가의 책은 처음 읽어보는데 제목과 내용이 신선하고 매력이 있다. 이 소설은 가부장도 가모장도 아닌 가녀장이 주인공이다.

 

할아버지가 집안의 가장으로 열한 식구를 다스렸다. 슬아의 엄마는 식구들 밥을 챙겨야 하는 맏며느리였다. 할아버지는 손녀인 슬아에게만 붓글씨를 가르쳤고 손녀와 외식을 즐겼다. 너는 커서 뭐가 될 거니? 물었을 때 사장님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슬아는 글쓰기로 가세를 일으킨다. 출판사를 열게 되면서 작가이자 사장님이 되었다. 쉰다섯 살 웅이와 복희는 슬아의 모부인데 직원이 되었다. 웅이가 하는 일은 청소와 운전, 배달, 택배 발송, 세금 처리 등의 업무를 수행한다. 복희는 기사식당에 취업할지 말지 고민중이었는데 딸이 같이 일을 하자고 했다.

 

 대표님, 수고하셨습니다.”

 역시 성공한 애는 달라.”

 이 대사는 그들 사이의 유행어다.

 

그들이 일하는 회사 이름은 낮잠출판사다. 아무리 바빠도 낮잠은 꼭 챙긴다. 부모를 모부라고 칭한다. 해가 뜨면 모부는 도서 주문을 확인하고 발주를 넣고 재고 파악하고 파본도 회수하고 독자 문의 메일에 답장도 쓰고 회계 장부도 적는다. 모부가 일을 맡아주는 덕분에 슬아는 창작에 집중할 수 있다.

 

복희는 시부모로부터 독립했다. 열한 명이 먹을 밥을 삼시 세끼 차리는 수고에서 벗어나 자식 둘을 먹이기 위한 수고 정도는 누워서 떡 먹기였다. 가부장제 속에서 며느리의 살림 노동은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슬아는 복희의 살림 노동에 월급을 산정한 최초의 가장이다.

 

웅이가 주로 청소와 빨래를 하고 복희가 부엌일을 책임진다. 복희의 월급은 웅이 월급의 두 배다. 잊을 만하면 시아버지에게 안부 전화를 건다. 매일 아침 운동하는 건 여전하시다고 한다. 복희는 자신에게도 남편에게도 없는 기질을 딸이 가졌다고 느낀다. 슬아는 요가도 하고 야식은 절대 먹지 않는다.

 

가녀장을 차로 모시는 일을 하는 웅이는 타투를 했다. 슬아의 사촌들과 슬아 친구 미란이는 곤란한 일이 생기면 웅이한테 전화를 건다. 글로 읽어도 웅이는 자상한 아빠이면서 척척박사인 것 같다. 슬아는 아빠가 다사다난한 노동의 역사를 물어보면서 어떻게 그런 걸 잘하냐고 물으면 살다보니까 알게 됐다고 말한다. 이런 대답이 뒤에도 몇 번 나와서 웃음 지으며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슬아는 학부생 시절에 학생들을 가르치는 과외 선생님이었다. 다니는 대학과 별것 없는 경력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가 아이들 필력은 매주 성장하였고, 모부들은 자녀가 작문 천재임을 자신들의 무심함에 통탄했다. 그 이후 이슬아 글방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낮잠 출판사에도 상여금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설날, 추석, 여름휴가, 성탄절, 생일을 맞이한 직원에게 보너스를 지급한다. 된장을 좋아해서 복희네 모부로부터 된장을 배우러 가기 위해 일박 휴가를 신청하면 슬아는 출장으로 인정했다. 일년에 세 번 정도 가는데 된장 보너스와 겨울이 되면 김장 보너스도 지급된다.

 

웅이는 주말마다 투잡을 뛴다. 이벤트 렌털 업자로서 일한다. 철이를 고용했는데 사장님에게 골똘히 일을 배웠다. 일을 마치고 철이에게 저녁을 먹고 가라고 한다. 철이는 이 시간을 좋아한다. 출판사에 왔을 때 어른들이 슬아에게 존댓말을 써서 놀랐다. 웅이가 자신의 사장님은 슬아라고 소개했다. 사장님의 사장님인 셈이다.

 

가장이자 대표로서 직원들 월급을 결정하고 책 제목을 결정한다. 또한 책값을 결정한다. 슬아가 가격을 표기할 때 0을 하나 빼먹어서 모든 배송 취소하고 전권 회수하는 일이 생긴다. 3쇄가 유통되던 날 책의 페이지가 뒤바뀌었다는 제보를 받고 전부를 회수하고 새 책으로 교환해줘야 한다. 글쓰기와 출판이라는 작업이 갈수록 어렵게 다가온다.

 

딸에 의해 강제로 요가원에 다닌 일년 동안 복희의 몸이 유연해졌다. 막상 오면 열심히 할거면서 왜 안오려고 하는 건지 슬아는 생각한다. 엄마에게 어울리는 책도 권한다. 슬아의 초대 손님들이 들어오면 복희는 추가 수당을 받는다.

 

저자는 아직 본 적 없는 모양의 가족드라마. 늠름한 아가씨, 아름다운 아저씨와 경이로운 아줌마가 서로에게 무엇을 배울지 궁금했다. 실수와 만회 속에서 좋은 팀으로 거듭나기를 희망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TV에서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썼단다.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맺는 가족 이야기는 신선하게 다가왔고 즐겁게 읽게 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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