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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어른의 시간이 시작된다
백영옥 지음 / 나무의철학 / 2021년 6월
평점 :
[그냥 흘러 넘쳐도 좋아요]의 백영옥 작가의 산문집을 대출하였다.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이후 출간하여 10년 만의 재출간 되었다. 작가의 이십 대와 삼십 대 시절 삶을 다양하게 쓴 따뜻하고 다정한 문장들이다.
저자는 10년 전쯤의 책이니 원고를 고치며 10년의 세월을 통과한 몸과 마음, 특히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은 많은 걸 바꾼다. 한결같은 사람이 있는 반면, 세월을 그대로 관통해 몸과 마음에 진한 삶의 무늬가 새겨진 사람도 있다. 살아보니 변해서 좋은 때도 있고, 변하지 않아서 좋은 경우도 있다. 청춘은 돌이키고 싶은 과거가 아니다. 노안 때문에 책 읽기가 다소 불편해지고, 오래 앉아 있으면 좌골 신경통에 다리가 저릿하다고 한다. 작가의 이런 말들이 참 좋다.
서른아홉, 저자는 책을 읽을 때 작가의 프로필을 가장 먼저 본다. 책 한 권을 읽는 일상적인 방법의 시작이다. 남들은 성공이라고 부르는 어떤 실패에 대해서, 간간이 흐르는 침묵을 참지 못해 주워 담지 못할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혼자 살거나 결혼한 여자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무조건 남이 해준 집밥, 남편이 아니라 아내와 결혼하고 싶다는 내 친구들의 마음은 그런 거 아닐까. 요즘은 간편식도 많이 생겼지만 집밥은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이 대부분이니까
소설가가 된 후 가장 많이 먹은 건 주먹밥이다. 마감이 많고 시간이 없는 날 주먹밥을 만들어 먹었는데 길을 걷다가 삼각김밥을 먹으며 걷는 사람을 마주치면 저 사람은 아주 바쁘고 참 열심히 사는 사람이구나 친근한 마음마저 든다고 했다. ‘리브로’는 기묘하게 엉뚱하고 사랑스런 직장이었다. 책 읽고 리뷰만 쓰면 월급을 주는 회사가 존재하다니. 그곳에 작가들이 많았다. 창피할 것도 없이 신춘문예를 비롯한 문학 공모전에 참 많이 떨어졌다.
삼풍백화점 붕괴 된 사건은 정말 가슴이 아팠다. 저자는 동생과 여행 중이었다. 백화점이 사라진 자리에 큰 주상복합이 들어서는 것을 보면서 ‘살아있다’는 것의 의미가 죽음과 결코 무관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끔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없을 때 윤대녕의 소설을 읽었다. 그의 어떤 소설을 꺼내 들고 문장들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여행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작가가 된 후에 겪은 작은 기적 중 하나는 좋아하는 책을 쓴 사람과 친구가 되거나 선후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엄마와 함께 고속터미널 근처 극장에서 <인어공주>를 봤다. 엄마가 영화를 보고 싶다고 전화했을 때 나는 분명 야근 핑계를 댔던 것 같지만, 오랜만에 모녀는 극장 주변의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씩 마셨다. 작가님도 내 딸처럼 자상한 딸인거 같다. 친구랑 볼때도 많지만 이런 영화는 엄마가 좋아하겠지 먼저 물어보는 딸이어서 좋다.
서른여덟에 읽은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사는게 나쁘다!’라는 답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가?’라는 선뜻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던져주었다. 13년간 신춘문예에 낙방했던 저자가 거짓말처럼 등단한 건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난 후였다.
제주도는 오랫동안 저자에게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는 관광특구였다. 시간을 더 낸다면 렌트카를 타고 바닷길을 따라 민속촌, 여미지 식물원, 테디베어 박물관이나 용머리 해안, 성산포 같은 정해진 코스를 한 바퀴 돌고 왔다. 제주는 올레 전과 올레 후로 나뉜다. 제주 올레가 열린 후, 섬의 구석구석을 걷기 시작했다. 제주의 속살은 분명 ‘걸어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여행자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을 본다. 그리고 그곳 사람들이 먹는 음식들을 먹는다. 돼지국수나 갈칫국, 보말 비빔밥과 돔베고기 같은 음식들. 올레를 걸으며 많은 여자들을 만났다. 걷는 여행이 울퉁불퉁해진 삶을 위로한다는 걸 아는 나이의 여자들이었다.
죽음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언제나 백발이 성성해진 허리 굽은 노인의 모습과 함께 시작된다. 곱게 늙은 노인의 얼굴이 담긴 사진 프레임을 상상하면서, 나는 스스로의 죽음을 준비하는 어른의 삶이란 이런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었다.
[곧, 어른의 시간이 시작된다]를 통해 나의 젊은 날을 회상하게 되고, 곧 닥칠 나의 노년의 시간들이 떠오른다. 천천히 정리하고 싶어진다.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채로 기억한다. 떠나간 것은 떠나간 대로 추억한다. 먼 길을 떠나기 전 새로 산 운동화의 끈을 단단히 묶는다는 저자의 말처럼 사람은 지나간 청춘을 보내며 조금씩 배워가는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