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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김지수 지음, 이어령 / 열림원 / 2021년 10월
평점 :
죽음을 옆에 둔 스승 이어령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로 이 책은 죽음 혹은 삶을 묻는 애잔한 질문에 대한 아름다운 답이다.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가 인터뷰의 핵심이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선생님은 매일 밤 죽음과 팔씨름을 한다. 어둠의 손목을 쥐고서 말이야. 죽음과 죽기 살기로 팔씨름을 하며 깨달은 것들은 어둠의 팔뚝을 넘어뜨리고 받은 전리품 같은 것이지. 가장 중요한 것은 비어 있다. 생명의 중심은 비어 있다. 다른 기관들은 바쁘게 일하지만 오직 배꼽만이 태연하게 비어 있어. 비어서 웃고 있지.
의무감으로 책을 읽지 않았고 재미없는 데는 뛰어넘고, 눈에 띄고 재미있는 곳만 찾아 읽지. 목장에서 소가 풀 뜯는 걸 봐도 여기저기 드문드문 뜯어. 재미없으면 던져버리고 반대로 재미있는 책은 닳도록 읽고 또 읽어. 그 기나긴 [카라마조프이 형제들]도 세 번을 읽었다. 일상에서 생각하는 자로 깨어 있으려면, 뜬소문에 속지 않는 연습을 하게나. 있지도 않은 것으로 만들어진 풍문의 세계에 속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 진실에 가까운 것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네. 그게 싱킹맨이야. 어린아이처럼 세상을 보고 어린아이처럼 사고해야 하네.
작가나 예술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야. 도덕자나 지식자가 아니라네. 감추고 싶은 인간의 욕망, 속마음을 광장으로 끌어내 노출시키는 사림들이지. 왜 주사 맞을 때 고개 안 돌리고 똑바로 쳐다보는 사람 있지? 독한 사람이잖아. 바늘 들어가는 거 보는 사람, 심지어 그 장면과 느낌을 묘사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예술가가 됀다. 지독한 인간들이지.
저자는 기자로서 선생님을 만나는 일과 묘하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돌아갔다. 의문을 가지고 쓴 칼럼에 스승의 의견을 듣는 일은 즐겁기도 동시에 두렵기도 했다. 선생은 ‘내가 죽거든 책을 내게’라고 말해서 놀라게 하곤 했다. 라스트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이 땅에 남은자들의 가슴을 적셔줄 잠언에 가까운 카운슬링의 언어를 들려주리라 기대했었다. 그러나 인터뷰어의 통제를 벗어났고, 그 예측불허의 확장성으로 덮여 있던 이불을 들추고, 그 안의 낯선 세계를, 세계의 민낯을 현미경처럼 비췄다.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았기에 모든 것을 들을 수 있는 인터뷰라니. 과히 표를 내지는 않았지만, 스승에게 강렬하게 끌리는 이유라고 했다.
글을 쓸 때 관심, 관찰, 관계 평생 이 세 가지 순서를 반복하며 스토리를 만들어왔다. 관심을 가지면 관찰하게 되고 관찰을 하면 관계가 생긴다. 행복은 완벽한 글 하나를 쓰는 거야. 그런데 그게 안 되는 거지. 그러니까 계속 쓰는 것이고. 그런데 알고 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글은 실패한 글이라네. 그저 끝없이 쓰는 것이 행복인 동시에 갈증이고 쾌락이고 고통이라고 했다.
이 시대는 핏방울도 땀방울도 아니고 눈물 한 방울이 필요하다. 눈물 한 방울은 디지로그나 생명자본과 궁극적으로 같은 말이다. 눈물은 소리가 없는데도 우리말은 재밌게도 뚝뚝 흘린다고 해. 유명한 농담이 있는데 ‘홍도야 울지 마라’를 한 글자로 줄이면 뭐지? ‘뚝!’이다.
인간이 발견한 것 가운데 가장 기가 막힌 것이 돈이다. 인간은 절대 혼자 살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교환을 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숨 쉬는 것도 식물과의 교환이다. 우리는 탄소를 내뱉고 식물은 산소를 내뱉는다. 핵심 교환은 세 가지인데 피의 교환과 언어교환, 돈의 교환이다. 돈의 교환을 통해 생산과 소비와 시장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터뷰는 봄에서 초여름으로 이어졌고 코로나 시국이 길어질수록 세상 사람들은 디지로그와 생명자본을 일상의 언어로 감각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온라인 교실과 줌 화면으로 모여 회의도 하고 회식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공연도 보며 조금씩 디지로그 생활에 정착해 갔다. 뱀 한 마리가 있다고 치면 어디서부터가 꼬리인가? 한 10센티 정도 끝부분이 꼬리인가요? 뱀은 전체가 꼬리야. 연속체지. 그게 아날로그일세. 뱀이 아날로그면 디지털은 도마뱀이다. 도마뱀은 꼬리를 끊고 도망가니까 정확히 꼬리의 경계가 있다.
가족들과 서로 오해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면서 딸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고 나니 가장 아쉬운 게 뭔가 하면 ‘살아 있을 때 그 말을 해줄걸’ 그때 미안하다고 할걸, 그때 고맙다고 할걸.. 지금도 보면 눈물이 핑 도는 것은 죽음이나 슬픔이 아니라. 그때 그 말을 못 한 거다. 저자는 마지막을 써내려가는 이 책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마지막 꽃 한 송이로 기억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어령이라는 스승을 만나기 위해 평생 기자로 살고 작가가 되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령 선생님이 들려주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 읽기를 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