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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윤슬이 빛날 때
박소현 지음 / 특별한서재 / 2022년 5월
평점 :
구들장을 데우는 군불처럼 따스한 글을 쓰고 싶었다는 저자의 [내 안의 윤슬이 빛날 때]을 읽으며 수필은 이렇게 쓰는구나 감탄하였다. 이야기를 구성하여 글로 내놓는 사람, 작가는 누구의 이야기이든 글로 표현할 땐 글쓴이 자신의 의도를 글에 담는다고 한 박상률 작가의 추천글도 기억에 남는다.
내성행상불망비에서 보부상 십이령길 답사하던 날, 초입에서 오래된 비석 두 개를 만났다.정한조와 권재만의 공덕을 기린 것이다. 보부상들은 미역, 생선, 해산물들을 쪽지게에 지고 험준한 길을 걸어 봉화 춘양장과 내성장 등으로 팔러 다녔다. 3, 4일을 꼬박 걸어야 겨우 봉화장에 도착했다. 식솔들의 입에 들어갈 따뜻한 밥 한술을 위해 보잘것없는 삯전을 받으면서도 쉼 없이 걷고 또 걸었을 것이다. 저자는 십이령길에서 오래전 어머니가 생선이 가득 담긴 고무 함지박을 이고 다녔던 기억을 떠올린다. 마음속에는 어머니를 위한 공덕비 하나 세우고 있다고 했다. 고등학교 입학한 작은오빠가 공납금 전액 면제에 학기당 2만 5천 원의 장학금을 받아 ‘삐까번쩍한’책상을 들이던 날 서랍도 세 개나 달려 있었고 무슨 비밀이라도 숨겨둔 양 꼭꼭 잠가놓고 아무도 손을 못 대게 했다. 오빠가 타지로 나간 후에야 책상은 작가의 차지가 되었다. 94세의 어머니는 순간순간 지난 일을 잊어버리고 엄마보다 훨씬 더 나이를 먹어버린 자식들만 옛날 그 책상 이야기를 하며 숙연해졌다.
친정 집이 하루아침에 경매로 넘어가 내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살림살이를 언니 집으로 옮겨놓고 집주인을 찾아가니 건설업을 하다 은행 빚을 못 갚아 부도가 났다고 했다. 주인은 사정이 좋아지면 전세금부터 갚겠다고 약속을 하고 난 후 허름한 집을 얻어 살게 되었다. 몇 년 후, 거짓말처럼 집주인이 돈을 들고 찾아왔다. 그런 성품의 사람이니 지금은 탄탄한 건설 회사 경영주가 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본다. 50이 넘어 대학원에 진학을 하는 딸의 학비가 걱정되어 몰래 봉투를 넣어 준 어머니, 저자는 그 돈을 어머니의 심장 같은 돈이여서 못 쓰고 있다고 했다. 40대 중반에 아버지가 위암 말기 진단을 받고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녀도 마지막엔 모르핀 주사에 의존해야 했다. 오빠들에겐 남자다움을 강요했지만 딸들에게는 한없이 자상했다.
계절이 바뀔 때면 어머니는 손수 만든 잠옷을 식구 수대로 보내주신다. 50년도 더 지난 낡은 재봉틀을 부여안고 몇 날 며칠 힘겹게 바느질을 했을 터이다. 아흔 살 어머니는 몇 년 전만 해도 다 쓸 수 있는 것들이라며 한사코 만류하더니 이제 철 따라 입을 옷 세 벌씩만 남기고 다 버려달라고 한다. 옷장에는 20년도 더 지난 코트부터 며느리가 혼수로 해온 이불까지 저마다 사연을 안고 모습을 드러냈다. 10여 년 전에 이미 당신이 손수 짠 삼베로 수의를 만들어놓으셨다. 햇볕에 쏘일양으로 보자기를 풀었는데 수의와 함께 남자용 파자마 두 벌이 들어 있었다. 낡은 재봉틀로 자식들이 입을 파자마를 만든다.
오빠는 동생들 학비 때문에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외항선을 탔다. 대신 자신의 꿈을 버렸고 쉰세 살에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큰 아들 몫으로 파자마 두 벌을 만들어 수의와 함께 싸두었다고 했다. 그 파자마를 만들면서 어머니는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어머니 휴대폰 바탕화면에는 큰오빠 사진이 저장되어 있다. 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남해를 아름답게 소개해주어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대도시 삶에 지친 사람이라면 남해 ‘바래길’을 느리게 걸으며 자신을 되돌아볼 일이다. ‘바래’란 소쿠리와 호미를 들고 갯벌로 나가 해산물을 채취하러 다니는 것을 말하는 남해 사투리인데 삶의 터전이었던 이곳을 트레킹 코스로 만든 것이다.
수필의 끝에 묻고, 쓰다-시인과의 대담 두 편으로 마무리했다. 첫 번째 시인은 강은교 시인으로 이 세상에 와서 억울하게 죽어간 넋들을 위한 헌화가를 부르는 ‘시대의 무당’이 되길 자청한다. 두 번째 시인 허영선 시인은 제주 토박이인 시인이자 언론인으로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인 제주 4.3을 알리기 위한 작품 활동을 해왔다. [당신은 설워할 봄이라도 있었겠지만]에 4.3이 남긴 상흔과 여성들의 비참했던 삶이 그려져 있다. 마침 읽었던 책이라 무척 반가웠다. 이 책은 작가의 유년의 기억들, 지인, 가족들의 소중한 이야기다. 때로는 잔잔한 울림을 주는 우리의 삶이기도 한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