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80년 생각 - ‘창조적 생각’의 탄생을 묻는 100시간의 인터뷰
김민희 지음, 이어령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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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어령 교수의 마지막 제자인 저자와 ‘80년 창조적 생각에 대한 생생한 대화의 기록이다. 인문, 예술, 철학, 역사는 모든 수업에서 한데 융합되었고, 어느 수업에든 그만의 시각과 해석이 녹아 있었다. ‘어떻게 저런 발상을 해낼까?’ 그를 볼 때마다 든 생각이라고 했다.

 

코로나 이후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데 모든 타자와의 거리를 발견한다. 그동안의 삶의 방식, 그동안의 삶의 속도와 다른 삶을 살면서 잊고 있던 가치를 일깨워주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혼자 있는 시간을 침잠하다 보면 진짜 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내면성이 강하고 시선이 안으로 향한 사람들은 방에 혼자 갇혀도 고독하지 않지만 평생 타인지향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은 방에 갇히면 못 견뎌한다.

 

눈물 한 방울이 말을 마지막므로 이 시대에 남기고 싶다고 하신다. 눈물로 치면 우리가 그리스보다 선진국이라고 했다. 코로나가 아니라도 벌써 그런 상황은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었고 이 눈물 없이는 황무지의 삶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는가. 무엇을 위해 아껴두었던 한 방울의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인가.

 

80여 년 평생 이 시대 최고의 지성’‘말의 천재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니는 것을 거부했다. 내 인생은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고 가는 삶이었어. 누가 나더러 유식하다, 박식하다고 할 때마다 거부감이 들지. 궁금한 게 많았을 뿐이라고 했다. 50년 만에 풀린 제비의 비밀은 과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인데, 벌레를 먹은 새끼는 입을 덜 벌리고 배고픈 새끼는 더 많이 벌리니까 어미는 입 크키만 보면 누가 배고픈 새끼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령식 독서론을 부연하면 어려운 독서를 통해 추리력이 길러지고 뇌세포도 활성화된다. 아이들한테 수준 높은 책을 읽힐 필요가 있다. 아이마다 성향과 기질이 다 다르겠지만, 너무 단순한 내용의 책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아이들의 두뇌개발을 오히려 제한할 수도 있어 적절한 자극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교수는 22세에 <우상의 파괴>로 문단에 파문을 던짐 같은 식이다. 젊은 세대 기수론을 담은 일종의 선언문으로, 인습의 벽에 갇혀 시대의식을 담지 못하고 권위주의에 매몰된 기성 문단을 싸잡아 비판한 글이었다.

 

80여 년에 걸쳐 이어령 교수가 쌓아온 창조물은 유무형을 망라하지만 그 최고봉은 역시 이다. 도시의 자투리땅에 세운 작은 공원을 쌈지공원이라 이름 붙인 것이 대표적인 예다. 정보사회의 키워드로 제시한 학술용어 디지로그새천년 밀레니엄 베이비를 즈믄둥이도 그가 낳은 표현이었다.

 

이어령하면 굴렁쇠 소년을 먼저 떠올린다. 88서울올림픽의 굴렁쇠 소년은 그가 의도했든 안 했든 대표적 창조물로 꼽히고, 전 세계 다양한 분야의 명사들로부터 칭찬과 감동의 피드백을 차고 넘치게 받았다.

 

노태우 정부는 보통 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를 연다라는 기치 아래 문화 정책을 폈고 이어령 교수는 초대 문화부 장관을 맡았다. 장관 취임 직후 문화행정에 딱딱한 관료주의의 벽을 허무는 일에 역점을 두었다. ‘33운동을 제안했는데 3불은 문턱 없이 말하기, 생색내지 않고 말하기, 사심 없이 말하기였고, 3가는 문화의 우물가에 두레박 놓기, 부뚜막의 부지깽이 되기, 바위의 이끼 되기였다. 계산 없이 솔직하게 터놓고 말해야 조직에 활기가 돌고 창조적 아이디어가 샘솟는다는 것이 3불 운동의 취지였다.

 

한국 사람은 무엇이든 잘 버린다. 내버려에서부터 먹어버려, 쓸어버려, 잡아버려, 잊어벼려. 그런데 한국인은 절대로 버리지 않는 민족이다. 김치가 쉬면 버려야지 하지만 두어묵은지로 만들어 삼겹살을 싸 먹으면 기막히게 어울리고 화려한 변신을 하는 것이다.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은 이어령 교수의 대표 타이틀 중 하나다. 새천년의 첫 순간은 전례 없는 대규모의 글로벌 방송으로 기획됐다. 영국은 우주장비를 이용해 불꽃놀이를, 미국 뉴욕은 타임스퀘어에서 4톤에 달하는 색종이 조각을 흩뿌렸고, 요르단 베들레헴에서는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 2000마리를 날려 보냈다. 한국은 새천년이 되자마자 태어난 새 생명의 우렁찬 울음소리. 이른바 즈믄둥이의 탄생장면을 실시간 중계로 세계를 향해 쏘자는 것이 이 교수의 계획이었다.

 

무슨 까닭인지 모르지만 나는 이어령 책 두 권을 대출했고 [읽고 싶은 이어령]을 읽고 리뷰를 올리고 난 다음 날 이어령 선생님은 돌아가셨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믿을 수 있는 건 우주에 살아 있다는 것, 생명력이라는 말에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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