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이어령 - 이 땅의 모든 지성에게
이어령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읽고 싶은 이어령] 제목이 의아했는데 머리말을 읽어 보고 알았다. 한 작가의 소망이 된 책이라는 것을. 최인호 작가가 세상을 떠나기 서너 달 전 병중의 몸으로 인쇄물을 하나 건넸다. 바로 [읽고 싶은 이어령]이라는 저자의 글모음이었다. 그동안 많은 책을 냈지만 그것은 모두 내 의지로 낸 것인데 이 책만은 그렇지 않다. 그가 먼저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이 책은 아마도 이 세상에 영영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순환하는 것들은 직선운동과는 다르다. 역사는 직선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계처럼 움직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셀리의 시구처럼 겨울의 추위가 거꾸로 봄의 다스함을 불러들이는 역할을 한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 것은 요행을 바라는 비합리적인 속담이 아니라, 역사의 순환성을 정확히 짚어낸 슬기다.

 

엄살은 측은의 정을 전제로 한 전략이니만큼 상대방이 짐승이나 목석 같은 사람일 때는 아무 소용도 없는 전술이다. 엄살을 부리고 엄살을 받아주는 것은 서로가 상대를 정이 있는 인간으로 믿고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부끄러운 이야기를 좀 쓸까 한다. 오십 년 가까이 매일같이, 그것도 하루에 세 번씩 식사를 해왔는데 젓가락질이 서툴다고 했다. 요즘 초등학교 아이들 가운데에는 젓가락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수가 8할이 넘는다고 한다. 별로 흉이 안 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저자가 그랬던 것처럼 모두가 막내둥이로 자라나고 있는 까닭이다. 부모들은 그 응석을 그대로 받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의 전통은 부모에 의해서 아이들에게 전수되는 법이다. 태어나 어머니의 젖을 빠는 것은 본능이지만 젓가락질은 배우는 문화요, 교육이다.

 

모든 길의 끝에는 바다가 있듯이, 모든 시간의 끝에는 죽음의 종말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시작을 원인으로 생각하고 끝을 그 결과로 생각하고 있지만, 실은 그것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은 언제나 시작하는 그 순간 속에 있다는 주장이다.

 

무슨 고본이건 가만히 들여다보면 10페이지 이상 손때가 묻어 있는 책이 드물다. 즉 서문과 제1장 제1절만 붉은 연필로 언더라인을 쳐놓은 것이 많은데 제2장째만 접어들어도 소식이 없다. ‘앞장은 고본, 뒷장은 신간인 셈이다. 독서법도 이렇게 눈깔사탕 먹는 식이다. 진득하게 앉아 책 한 권을 독파해낼 만한 지구력이 모자란 탓이다. 어쩌다 끝까지 다 읽은 흔적이 있는 고본을 보면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한 등산가가 정상에 말뚝을 세워 놓은 것처럼 ‘0000일에 이 책을 완독하노라는 기념 사인이 적혀져 있다. 한국인에게 필요한 것은 지구력 기르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짐을 들어주는 학생을 날치기로 생각해서 마음이 편치 않아 고맙다는 인사도 못한 이야기는 참 씁쓸하다. 대가 없는 친절이란 의심과 경계를 살 뿐이다. 도리어 불안과 공포를 준다. 무상(無償)의 시대는 지나가고 만 것이다.

 

서양 사람은 나들이를 다닐 때면 활동하기 쉬운 간편한 옷을 입고 나간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피크닉이나 꽃구경을 가는데에도 으레 성장을 한다. 옷 중에서 최고의 것을 골라 걸친다. 패션쇼를 하는 기분이다. 어째서 꽃구경이나 야유회를 하는 데까지 남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것일까?

 

한국어는 아픔의 말이다. 단테도, 셰익스피어도 아픈 것에 관한 한 한국인만큼 속시원하게 표현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기껏해야 골치가 아프다, 배가 아프다 등이다. 삭신 쑤신다는 말은 외국어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병이 나기 전에 노곤하고, 녹작지근한 것이 다르고 사지가 나른한 것과 뻐근한 것이 모두 다르다. 다른 민족보다도 고통을 많이 겪어왔기 때문인가? 한국처럼 약방이 많고 약 광고가 많은 나라도 흔치 않은 걸 보면 그런 데 이유가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글을 쓸 때면 글의 근원적인 뜻대로만 쓰면 훌륭한 작품이 나올 수가 있다. 미끈미끈한 볼펜으로 글을 쓸망정 그것이 긁는 행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부인들이 바가지를 긁듯이 문사(文士)도 문자로써 긁는다. 가려운 데를 긁어주어야 한다. 부정이나 불의를 박박 긁어야 글은 시원한 것이 된다.p194

 

우리가 남을 욕하는 것, 헐뜯는 것은 정말 미워서가 아니다. 욕으로써 감정을 푸는 게다. 욕은 더러워도 욕으로 풀고 나면 마음은 천사처럼 깨끗해진다. 한국의 욕은 비뚤어진 한국적 풀이 문화의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의 욕만큼 다양하고 푸짐하고 걸쭉한 것도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욕을 분석해보면 분야별로 고루고루 발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밥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식구 수만큼 손수 지어 먹는 것이며, 끼니때마다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정을 측정하는 구실을 한다. 빵은 식은 것도 먹을 수 있지만, 밥만은 온기를 지니도록 해야 한다. 식은 밥은 곧 식은 정을 의미한다. 한솥밥을 먹는다는 것, 뜨거운 밥을 먹는다는 것, 아버지와 아들을, 아내와 남편을, 형과 아우를 묶어두는 핏줄의 확인이다.

 

빵의 문화는 개인주의 문화이며, 정복의 문화이며, 활동의 문화이며, 상업의 문화이다. 빵이 있는 곳에 전쟁과 개척이 있었다. 밥의 문화는 한솥의 문화다. 지붕 안에 고정되어 있고, 정적이며, 집을 떠나서는 살기 어려운 귀향자의 문화다. 정말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읽고 싶은 이어령]은 저자의 수많은 글들 가운데 가장 빛나는 글만을 가려 뽑은 에세이의 결정본이라고 하였다. 이 땅의 모든 지성에게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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