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계에서도
이현석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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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20 젊은작가상 수상 작가인 이현석의 첫 소설집이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배경으로 한 소설집의 표제작이자 젊은작가상 수상작인 [다른 세계에서도]에서 엿볼 수 있듯이, 동시대적인 윤리와 사회문제를 소설로 풀어내서인지 가볍지만은 않다. 이 소설은 다분히 이지적인 방식으로 활달하고 생명력 있는 이 세계의 순간들을 그려내며 우리를 매혹 속으로 이끈다. 또한 다채로운 소재와 방식과 구성으로 풍성하고도 능란하게 이야기를 꾸려나간다.

 

소설의 처음인 [그들을 정원에 남겨두었다]에서 나는 의사이고 소설가이다. 내가 담당하고 있는 환자는 식물인간 상태다. 그는 과거에 커밍아웃하면서 부인과 딸을 떠났었다. 세월이 지나 함께한 동성 연인은 어떤 관계도 인정받지 못한 채, 가족들에게 쫓겨난다. 그 보호자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를 포기하였다. 표제작 [다른 세계에서도]는 산부인과 의사인 지수와 엄마는 동생 해수의 임신을 반대한다. 임신중지를 두 차례 했다는 어머니도 요즘엔 기술도 발달했을 거 아이가? 라고 묻고, ‘더 좋은 엄마가 된 다음에라는 표현이 부른 불쾌감과 별개로, 어머니의 그 말이 줄곧 내게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게 했다.

 

[라이파이]1959년부터 10년간 연재된 동명의 SF만화를 소설 속으로 끌어온다. ‘라이파이는 한국 최초의 토종 히어로. 검은 안대를 쓰고 흰 두건을 이마에 두른 라이파이는 연두색 쫄쫄이 유니폼을 입은 채 돌려차기 한 방으로 적들을 제압한다. 영우의 아버지 조한흠이 청소년시절에 열광했는데, 이제는 노년에 다다른 조한흠의 환상 속에 라이파이가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눈빛이 없어]는 우재 집에 들어가 살았던 희곤에게 부동산 중개인 준모는 발전소 기술자로 일했던, 천부적인 손재주를 지닌 우재가 겪었던 산업재해의 현장에 대해, 구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담담하게 이야기 한다. “그날 이후로, 저 친구는 눈빛이 없었어. 제정신이 아니었지. 어디 저 친구뿐이었겠나.”(p212)

 

신종 바이러스를 알아차린 탈북민 출신의 의사와 관성으로 그의 말을 무시한 한국의 의사인 의 이야기다. 남북 정상이 만났을 무렵에 독서 모임을 같이 하며 알고 지낸 북한탈주민들과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거기에 착안하여 [부태복]을 쓰게 됐다. [너를 따라가면]805월 광주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정혜와 항상 프랑크프루트로 가고 싶다던 어린 시절 잠시 함께였던 간호보조원 언니를 떠올린다. 그날 광주의 시공간을 강렬하게 환기한다. “내 피가 더러워, 더럽냐고!”(p251) 수혈이 시급한 상황에서도 작부의 피에 대해 차별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본다. 정혜는 투명한 팩 안에 조금씩 차오르는 피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이 소설집은 다양한 인물들만큼이나 넓은 세계를 다루고 있다. 젠더,계급,가족의 층위를 넘나들며 그 미세한 결을 섬세하고 사려 깊게 살핀다. 특기할 만한 점은 병원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 많고 그 실감이 두드러진다. 소설들의 끝에 참고한 내용과 약간의 덧붙임을 마련해 작품을 쓰게 된 배경 및 출처 등을 상세하게 적어두었다. 저자는 자신의 글쓰기를 의식하며, 현실을 가감 없이 직시하고 기억해야만 하는 순간들을 어떤 식으로 기억할지 신중히 고민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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